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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고사(古文故事)

王順妃許氏墓誌銘[충선왕의 순비 허씨묘지명] - 이제현/익재난고7권

작성자허현|작성시간14.09.06|조회수162 목록 댓글 0

 

황원(皇元) 후지원(後至元) 원년(1335) 을해 모월 모일에 고려국왕 순비(고려26대 충선왕의 비)가 훙(薨)하니 향년(享年)은 65세이고 성은 허씨(許氏)이며 공암군(孔巖郡) 사람이다. 증조의 휘는 경황(京皇)인데 검교 상서우복야 행예빈소경 지제고(檢校尙書右僕射行禮賓少卿知制誥) 벼슬을 하였고, 조부의 휘는 수황(遂皇)인데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예부상서 한림직학사 승지(銀靑光祿大夫樞密院副使禮部尙書翰林直學士承旨) 벼슬을 하였고, 아버지의 휘는 공황(珙皇)인데 광정대부 첨의중찬 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 판전리사사 세자사(匡靖大夫僉議中贊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判典理司事世子師) 벼슬을 했으며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고 충렬왕(忠烈王) 사당에 배향되었다.

모두 시초(視草.천자가 초안한 문장의 초고를 보는 것)하는 재주가 뛰어나 이문원(摛文院)에서 글 솜씨를 날리고 정사의 중책을 맡아 여러대째 금띠를 띠었는데, 문경공은 부지런하고도 검박하며 비린(鄙吝)하지도 교만하지도 않아, 온화하여 덕이 쌓이고 몸을 바쳐 충성을 다하였으니, 적선(積善)한 나머지 경사를 누림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순비는 영특한 정기를 탄 여성이요 수려(秀麗)한 자질을 가진 선녀(仙女)로서, 달 아래 옥퉁소가 진루(秦樓)에서 우는 봉(鳳)을 감동시키고, 파도에 어른거리는 비단 버선이 낙포(洛浦)에 노니는 용을 걸리듯 하였다. 지대(至大) 기유년(1309, 충선왕 1)에 순비로 책봉(冊封)되었으니, 말이 없어도 도리(桃李)밑에는 길이 나고, 신망이 있어 종묘(宗廟)의 제사를 받들 만했던 것이다. 녹의(綠衣)의 풍자가 세상에 일지 않았으니(왕과 왕비의 금슬이 좋다는 뜻) 동관(彤管.자루가 빨간 붓)의 글이 세상 신임을 받고도 남으리라.

아들 셋 딸 넷을 두셨다. 큰아들은 순정군 숙(順正君璹)인데, 본조(本朝.고려)에서는 부원대군(府院大君) 작위를 내리고, 천자도 은총을 내려 한림학사를 제수했다. 둘째는 쌍봉장로 자각(雙峰長老慈覺)인데, 환기(紈綺)를 벗어나 연하(烟霞.산수 자연을 말함) 속에 들어가 뜻을 지키며, 법장(法匠.덕망이 높은 중)들의 존숭을 받아 선사(禪師)로 불리우며 이름이 크게 났다. 세째는 회인군 정(懷仁君楨)인데, 적제(狄鞮.서방의 오랑캐)의 말을 잘하여 신호위(神虎衛)의 반열에 참여했다. 준례대로 분모(分茅.봉군이 되는 것)를 받았으니 어찌 삼한(三韓)의 왕족뿐이겠는가. 이름이 역사[竹帛]에 날릴 것이며 양절(兩浙.중국의 지역이름)의 주관(州官)을 지낸 지 이미 오래이다.

큰딸은 영복옹주(永福翁主)인데 양양군(襄陽君) 김기언(金基彦)에게 시집가고, 둘째는 연희옹주(延禧翁主)인데 중서 좌승(中書左丞) 길길반(吉吉反)에게 시집갔다. 의(懿)의 아내가 경중(敬仲)의 어짊을 알아보고(사위를 잘 골라서 얻었다는 뜻), 묘씨(苗氏)가 위랑(韋郞)의 효도를 알아보듯 하였으니, 이 일과 옛일을 비교하매 또한 부끄러울 것이 없다.

셋째는 백안홀독(伯顔忽篤) 황후(皇后)인데, 태진(太眞)처럼 예상곡(霓裳曲)을 타 금슬의 화합이 흡족하고, 아교(阿嬌)처럼 금옥(金屋)에서 살며 적유(翟褕.황후)의 총애가 별안간 융숭했다. 이래서 순비가 화관(華冠)을 내리는 천자의 윤음(綸音)을 받게 되어, 수레 타고 궁궐로 가 친히 조회하고, 내탕(內帑)의 보화를 누차 하사받았으며, 천자의 명을 받들고 영광스럽게 돌아와, 절에다 단연(檀筵.시주하는 자리)을 개설(開設)하고 낭함(琅函.서책상자)의 패전(貝典.불경)을 펴내서 복을 빌어 천자에게 보답하였으니, 지극한 일이라 하겠다.

넷째는 경령옹주(慶寧翁主)인데 경양군(慶陽君) 노책(盧)에게 시집갔다. 사랑은 막내에게 모이는 법이니, 어찌 알맞은 배필을 고르는 범절이 없을 수 있겠는가. 현명한 사람과 짝지으니 심덕이 변함 없었다.

지금 회인군은 수륙(水陸) 만리 밖에 있으니 부고도 받지 못하였을 것이고, 황후는 구중 궁궐에 있으므로 의리가 곡할 자리에 올 수 없는 처지이며 순정군,쌍봉장로,영복옹주,연희옹주는 모두 먼저 세상을 떠나 한스럽게도 영영 상주 노릇을 저버렸다. 이러므로 순비의 상사에 염(斂)에서 장사에 이르기까지 오직 경령옹주와 경양군만이 마음을 쓰게 되었는데, 운명하자 성이 무너지듯 애통하였고, 관(棺)을 덮자 눈물이 마치 강물이 쏟아지듯 하였다.

이듬해인 병자년(1336) 2월 25일에 덕수현(德水縣)의 증산(甑山) 언덕에 장사지내니, 예법에 따라 한 것이다. 또한 부족한 나의 글을 받아 묘지명(墓誌銘)을 새기게 되었으니, 어찌 촉왕(蜀王)이 쓸데없이 가인경(佳人鏡)을 만든 것과 비교할 일이겠는가. 오직 한객(漢客)이 일찍이 지은 유부비(幼婦碑)에 부끄럽다. 아래와 같이 명(銘)한다.

아! 혁혁한 허씨 가문 나라 초기부터 흥왕했는데, 대대로 그런 미덕 성취하여 사책에 끊임없이 기록되도다. 문경공 겸양하여 검소를 숭상하고 덕을 삼가니, 하늘에서 음공(陰功) 내려 곡식 심어 수확이 있듯 하였도다. 상서로운 용꿈 꾸어 영특한 딸 낳으니, 연꽃보다 화려하고 난초 향기도 무색했도다. 은하수에 목욕했고 옥엽(玉葉.자손)도 많이 두어, 은총이 가문에 넘치고 영광이 족보에 펼치도다. 어찌 한 가문뿐이랴, 온 나라 사람이 사모하네. 어찌 한 나라 뿐이랴, 천자가 상 주었네. 향년(享年) 60이 되자 종시의 영화에도 슬픔 생겨, 청오(靑烏)가 산소 잡고 방상(方相)이 길을 인도했도다. 울창한 저 가성(佳城.무덤) 임평(臨平) 언덕에, 나라님의 비(妃)요 황후의 어머니 가시도다.

 

 

註: 문경공의 묘지(墓誌)에 의하면 (문경공의 두째배위 최씨와의 사이의 첫째 따님으로서) 수태위 상주국 평양후(원나라가  책봉한 벼슬) 현(眩)에게 출가하였는데 곧 충선왕의 순비(順妃)이다.  <동문선> 124권에도 실려 있는 이 묘지명은 우리의 중시조(中始祖)이신 문경공(珙)의 선계(先系)에 대한 객관적 사료의 하나로서 의미가 있다. 역문에 설명된 휘자에 皇(황)을 붙인것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황고(皇考)라고 하듯이 존칭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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