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년에 왜구가 흔단의 계기를 만든 시말에 관한 기록[壬辰倭寇構釁始末志] - 신흠/상촌집56권
왜노(倭奴)가 신라(新羅) 말엽부터 변방의 걱정거리가 되더니 고려(高麗) 말엽에 이르러서는 더욱 세력이 커져 제멋대로 하면서 어느 해이고 쳐들어오지 않는 때가 없었다. 그러다가 아조(我朝)가 나라를 세움에 미쳐서는 교화되기를 원하여 와서 정성을 바쳤으나 실제로는 시장 무역을 통해 이익을 얻고자 함이었다.
그 동안 사신을 보내온 자로는 국왕전(國王殿),전산전(畠山殿),대내전(大內殿),소이전(小二殿),좌무위전(左武衛殿),우무위전(右武衛殿),경극전(京極殿),세천전(細川殿),산명전(山名殿)등이 있었고, 또 우리 나라에서 도서를 받은 사람[受圖書人]과 직함을 받은 사람[受職人]이 있었으며, 대마도주(對馬島主)와 도주의 아들은 특별히 배를 보내었고 도주의 조카 및 직함을 받은 사람들은 해마다 배를 보냈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국가에서 모두 차서에 따라 접응하는 예를 제정하여 그대로 행하였다.
국왕전의 성(姓)은 원씨(源氏)이다. 당 희종(唐僖宗) 건부(乾符) 3년에 청화천황(淸和天皇)이 황자(皇子) 정순(貞純)에게 원씨 성을 내려 주었는데 이것이 원씨 성의 기원이다. 한 번 조정에 올 때마다 25인씩 왔었는데 상이 한 번 접견해 주었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예조에 명하여 잔치를 열어주게 하면서 정일품 관원으로 연회를 주도하게 하였다.
전산전의 성도 원씨이다. 경태6년(1455)에 원의충(源義忠)이란 자가 처음 사신을 보내 왔는데, 한 번 조정에 올 때마다 15인씩 왔다가 뒤에는 15인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10인만 상경하도록 허락하였다. 전산전 이하는 거추(巨酋)라고 말한다. 대내전은 백제(百濟)왕 온조(溫祚)의 먼 후예인데, 일본에 들어 간 그 선조가 처음에 다다량포(多多良浦)에 정박하였기 때문에 이를 인연으로 다다량이라는 성을 갖게 되었다. 소이전,좌무위전,우무위전,경극전,세천전,산명전 등은 모두 원씨이다. 전산전 이하 제전(諸殿)에 대해서는 혹 접견해 주기도 하고 혹 예조가 접대하기도 하였는데 소이전에 대해서만은 접견하는 예가 없었다. 경극전,세천전,산명전은 근래 수십 년 동안 소식을 보내오지 않았고, 도서를 받은 자 15인과 직함을 받은 자 26인은 1년에 한 번씩 조정에 왔다.
대마도는 거리가 가장 가까워 친하게 지냈다. 그 도주(島主) 종성장(宗盛長)이 해마다 배 25척을 보내고 또 특별히 배를 보내기도 하였는데, 본국이 해마다 미두(米豆) 1백석을 내주었다.
정덕 경오년(1510)에 영남(嶺南) 삼포(三浦. 웅천,부산포,염포)의 왜노가 폭동을 일으켰는데, 방어사(防禦使) 유담년(柳聃年),황형(黃衡) 등이 쳐서 평정하였다. 가정 을묘년(1555)에 왜구가 호남에 쳐들어 와 잇따라 변방 고을을 함락시켰는데, 방어사 남치근(南致勤),김경석(金景錫)등이 격파하였다. 만력 정해년(1587)에 왜구가 호남에 쳐들어오자 녹도 만호(鹿島萬戶) 이대원(李大元)이 마침내 손죽도(損竹島)에서 싸우다가 패하여 죽었는데 왜구도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우호 관계를 유지해온 2백 년 동안에 모두 세 차례 쳐들어 왔다가 번번이 불리해지자 퇴각하곤 하였다.
만력 무자년(1588)에 귤강광(橘康光),평조신(平調信) 등이 관백(關伯) 평수길(平秀吉)의 서계(書契)를 가져와 바치면서 우호 관계를 맺자고 요구하고, 또 말하기를 “국왕 원의등(源義藤)은 어리석고 미혹되어 나라 사람들이 그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그런데 새 관백 수길은 위엄이 있으면서 사납지 않았으므로 제도(諸道)가 그에게 귀의하면서 관백으로 추대하였는데, 관백은 한(漢)나라 때 대장군(大將軍)의 호(號) 가운데 하나로서 민부(民部)의 경(卿)인 승려 법인(法印)이 관백의 옆에 있으면서 지금 일을 보고 있다.” 하였다.
우리나라가 귤강광의 말을 듣고 비로소 일본의 세상이 바뀐 일을 알게 되었는데, 수길이 어떤 인물인지는 여전히 모르는 상태였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본래 중국 복건(福建)사람인데 어려서 고아가 된 뒤 막노동꾼으로 먹고 살다가 일본에 표류된 뒤 군사로 편입되어 누차 공을 세운 끝에 관백이 되었다.” 하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본래 일본의 서민으로서 일찍이 길가에서 땔나무를 하다가 관백을 만나게 되었는데 좌우에서 죽이려 하자 관백이 풀어주면서 전부(前部) 도수(刀手)로 삼았다. 그 뒤 이웃 나라에 정벌을 나가 참획(斬獲)한 공이 있었으므로 마침내 그에게 성(姓)을 내려 주었는데, 아첨을 잘해 총애를 받고 십길차랑(十吉次郞)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여러 차례 전공(戰功)을 세워 대장군이 되고 승상의 일을 겸하였는데, 다시 우시(羽柴)라는 성과 집전(執前)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다음 해에 관백을 시해하고 그 아들을 쫓아낸 뒤 스스로 관백의 지위에 올랐으며, 여러나라를 병탄(倂呑)하면서 무기를 쓰지 않고 황금으로 속임수를 쓰는 등 꾀로 얻었다. 경인년 11월에 아우가 죽고 신묘년 7월에는 아들이 죽었는데 내외로 친척 하나 없이 단지 독신일 뿐이다.” 하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원씨(源氏)의 정사가 문란해지자 그의 신하 신장(信長)이 시해하고 대신하였으며, 그 뒤 원씨의 구신(舊臣) 명지(明智)가 신장을 죽이고 스스로 섰으며, 다시 수길이 명지를 죽이고 스스로 섰는데 수길은 바로 신장의 친신(親臣)이었다. 수길이 조카 평수차(平秀次)에게 전위(傳位)하고는 자칭 태합(太閤)이라고 하였다. 수차라는 자는 수정(秀定)의 아들이다.” 하는데, 이 몇 가지 설은 모두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얻어 들은 것으로서 도대체 진실 여부를 알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강광이 수길의 말을 가지고 통신사(通信使)를 요구해 왔으나 조정이 이를 거절하고 또 말하기를 “정해년 손죽도 싸움에서 우리 나라 변방 백성들을 사로잡아가고는 감히 와서 화친을 청하다니 이는 허락해 줄 수 없다.” 하였다.
기축년(1589) 5월에 수길이 또 평의지(平義智),현소(玄蘇),세준(世俊)등으로 하여금 우리 나라에 와서 공작(孔雀) 한쌍과 말 한필을 바치게 하고, 포로가 된 우리 나라의 변방 백성 김대기(金大璣),공대원(孔大元)등 116인을 쇄환(刷還)하는 동시에 본국의 반민(叛民) 사화동(沙火同)과 정해년의 적왜(賊倭) 긴시요라(緊時要羅),삼보라(三甫羅),망고시라(望古時羅)등 3인을 묶어 보내면서 말하기를 “입구(入寇)했던 일은 우리와는 관계가 없다. 그것은 바로 귀국의 반민 사화동이 오도(吾島)의 왜인을 유혹하여 변방의 요새를 약탈한 것인데 지금 묶어 보낸다.” 하며 간절하게 사자(使者)를 보내 주기를 청하였다.
조정이 이를 기회로 다시 한 번 염탐할 목적으로 경인년 3월에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서장관(書狀官) 허성(許筬)을 차출한 뒤 의지 등과 함께 4월에 바다를 건너가게 하였다. 신묘년 3월에 윤길 등이 일본에서 돌아왔는데, 수길이 답서를 보내기를 “일본국 관백은 조선 국왕 전하에게 글을 올립니다. 보내 오신 글을 읽다가 감화되어 몇 번이나 편지를 접었다 폈다 했는데 나의 요청을 들어주어 3인의 사신을 보내 주셨으니 그만한 다행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60여 주(州)가 근래 분리되어 국가 기강이 문란해지고 선대의 예법이 없어진 채 조정의 명령도 듣지 않으므로 내가 격분을 금치 못해 3, 4년 동안 반신(叛臣)을 치고 역도를 토벌한 결과 이제는 이역(異域)의 먼 섬들까지 내 손아귀에 모두 들어왔습니다. 대저 사람이 한 세상 살면서 누군들 오래 사는 것을 장담하겠습니까. 예로부터 1백 년도 다 채우지 못했는데, 어떻게 답답하게 이곳에만 오래도록 머물러 있을수 있겠습니까. 나라가 멀리 떨어져 있건 산과 바다로 막혀 있건 개의치 않고 한 번 대명국(大明國)에 뛰어 들어가 보고 싶은데, 바로 그 때 귀국이 이웃의 의리를 중히 여겨서 우리나라와 한 패가 되어 준다면 선린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앞서 수길이 산동도(山東道)로 나갔다가 우리나라 사신이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는 섭진(攝津)을 지키던 평행장(平行長)에게 빈접(儐接)하는 일을 담당케 하고 민부(民部)의 경(卿)인 현이(玄以)에게 지공(支供)하는 일을 맡긴 뒤 8일 만에야 수길이 비로소 국도(國都)로 돌아왔는데, 이에 답서를 쓰기를 “일본국 관백 수길은 조선 국왕 합하(閤下)에게 글을 올립니다. 보내주신 글을 읽다가 감화되어 몇 번이나 접었다 폈다 하였습니다. 본주(本州)가 비록 60여 주가 된다고는 하나 근년에 여러 나라로 분리되어 나라의 기강이 문란해지고 선대의 예법이 없어진 탓으로 조정의 명령을 듣지 않기에 내가 격분을 이기지 못하여 3, 4년 동안 반신(叛臣)을 치고 역도를 토벌한 결과 이제는 이역(異域)의 먼 나라까지 모두 손아귀에 들어왔습니다. 나의 지나온 일을 그윽이 헤아려 보건대 비루한 소신(小臣)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내가 배태될 당시에 자모(慈母)의 꿈에 해가 품 속으로 들어왔는데, 상사(相士)가 말하기를 ‘햇빛은 비취지 않는 곳이 없으니, 장년(壯年)에 반드시 팔방(八方)에 인풍(仁風)이 드날리고 사해(四海)에 위명(威名)이 뒤덮이게 될 것을 어찌 의심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이런 기이한 일이 있음으로 인하여 나에게 대적할 마음을 가진 자가 자연히 거꾸러지게 되어 싸우면 이기지 않는 일이 없고 공격하면 취하지 못하는 때가 없었습니다. 그 결과 천하가 크게 다스려졌는데 백성을 어루만지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을 어여삐 여겨주었으므로 백성이 부유해지고 재화가 풍족해져 공물로 바치는 것이 옛날의 1만 배나 되었습니다. 본조(本朝)가 개벽한 이래로 오늘날만큼 조정의 정사가 훌륭하게 행해지고 수도가 장려(壯麗)하게 된 때는 없었습니다. 대저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아무리 오래 산다 하더라도 예로부터 1백 년을 채 넘지 못했는데, 어떻게 답답하게 이곳에만 오래 머물러 있겠습니까. 나라가 멀리 떨어져 있든 산과 강이 가로막고 있든 개의치 않고 한 번 뛰어 곧장 대명국(大明國)으로 들어가 내 조정의 풍속으로 4백여 주를 바꾸어 놓은 뒤 제왕의 조정을 억만 년토록 펼쳐보고 싶은 생각이 가슴 속에 있는데, 귀국은 먼저 우리 조정에 귀의해 들어와서 멀리 내다보고 가까운 근심이 없게 되는 길을 따르도록 하십시오. 원방(遠方)의 작은 섬들로서 바다 가운데 있는 자들 중에 진격을 늦게 하는 자가 있으면 용서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내가 대명에 들어가는 날 국왕께서 사졸을 이끌고 군영(軍營)을 서로 바라보게 된다면 더욱 우호관계를 다질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소원은 다른 것은 없고 그저 세 나라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는 것뿐입니다.” 하였다.
김성일이 이 답서를 보고 말하기를 “이것을 가지고 국왕에게 보고할 수는 없다.” 하고 행장,의지,현소에게 두 차례나 글을 보내 마침내 본고(本稿)를 고쳤다. 답서가 도착하자 조정에서 성절사(聖節使) 김응남(金應南)이 가는 편에 사유를 갖추어 주문(奏文)하였다. 그런데 이 해에 중국 조정에서도 이미 먼저 수길의 흉모를 들었으므로 우리나라로 하여금 섬라(暹羅.태국),유구(琉球.오끼나와)등의 나라와 동맹을 맺고 군대를 합쳐 일본을 치게 하였다.
이 해 가을에 동지사(冬至使) 이유인(李裕仁)으로 하여금 주문(奏文)을 싸들고 가서 재차 적정(賊情)을 진달하게 하였는데, 그 대략에 “소방(小邦)이 일본과 같은 쪽에 있다고는 하나 동해가 해자처럼 둘러 있어 끝도 한도 없고 도서(島嶼)가 얽히고 설킨 가운데 굴혈(窟穴)은 험난하여 멀기만 하니 이는 바로 추악한 종족과 지리적으로 구별되어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 적이 우리에게 배척을 받고 관계가 끊어진 지 이제 반 년이 지나는 동안 소식이 막연하여 그들의 정상을 알아볼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섬라와 유구에 대해서는 소방에서 그저 그 나라들이 모두 남해 가운데 있다는 말만 들었을 뿐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뱃길도 통하지 않아 거리가 얼마나 되며 방향은 어느 쪽인지조차 자세히 알지를 못하니 지금 어떻게 소식을 전할 길이 없습니다. 또 일본 하주(下州)에 있는 섬들의 경우는 모두 적추(賊酋)에 예속되어 있는 관계로 우리에게 한 번도 귀순해 오지 않았고 우리나라의 관시(關市)를 운영하는 자들도 배척하여 끊어버렸는데 흉설이 나온 까닭에 모두 의심하여 막고 있는 상태입니다. 대마도(對馬島)가 음흉하고 간사하게 구는 형편없는 정상에 대해서는 전에 이미 사유를 갖추어 주달하였습니다. 소방이 뒤미처 유시하며 모집하는 일을 행하고 있긴 합니다만 위임하신 일은 능력 밖의 일이기에 단지 단속하여 방비하면서 쳐들어 오는 날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또 이 해 10월에 배신(陪臣) 한응인(韓應寅)을 전차(專差)하여 적정(賊情)을 진주(陳奏)하는 한편 우리 나라가 무함당한 일을 해명하였다. 그런데 다음 해 임진년(1592) 4월14일에 적이 과연 크게 군사를 일으켜 바다를 건너와서는 잇따라 삼경(三京)을 함락시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