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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고사(古文故事)

금학동(琴鶴洞) 별장에 모이다 - 박지원/연암집3권

작성자허현|작성시간14.09.16|조회수131 목록 댓글 0

 

연암협(燕巖峽)에 있는 나의 거처는 개성(開城)에서 겨우 30리 거리에 있었으므로 나는 항상 개성으로 나가서 노닐곤 하였다. 금년 겨울에 규장각 직제학 유사경(兪士京)이 막 개성유수(開城留守)로 부임하여 이미 여저(旅邸.객지에 임시로 머물러 사는 집)에서 서로 만난 적이 있는데, 즐겁게 옛일을 이야기하기를 빈천했던 선비시절과 똑같이 하였으니, 세속에서 말하는 출세와 몰락 따위는 서로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었다.

하루는 사경(士京)이 추도(趨導.고관 행차시 앞장 서서 길을 인도하는 기졸)를 단출히 하고 그의 아들을 데리고서 금학동(琴鶴洞.개성에 있던 고을)을 찾아주었는데, 그때 나는 양씨(梁氏)의 별장에 머물고 있었다. 빨리 술을 데우게 하고, 각기 지은 글들을 꺼내어 둘이 서로 평가해 보고는, 마주 보며 웃으면서 말하기를,

“마하연(摩訶衍.내금강에 있는 절)에서 하룻밤을 묵었던 때에 비하면 어떠한가? 단지 백화암(白華菴.내금강에 있던 암자)에서 참선하던 비구승 준(俊)만이 없을 뿐이고, 조촐하게 모인 것은 관천(灌泉)의 모임과 비슷한데, 우리들은 어느새 다 같이 머리가 허옇게 되었네그려!” 하였다. 관천은 한양 서소문 밖 나의 옛집이 있던 곳인데, 금강산에서 돌아와 이곳에서 조촐한 모임을 가졌다.

나는 이때 나이 스물아홉 살로 사경보다 일곱 살이 적었는데도, 양쪽 귀밑머리에는 하마 대여섯 가닥의 흰머리가 생겼으므로, 시(詩)의 재료를 얻었다고 스스로 기뻐했었다. 그런데 지금 하마 13년이 흐르고 보니 이른바 시의 재료는 주체할 수 없이 어지럽게 늘어났고, 사경은 문권(文權)을 겸대(兼帶)하면서 병권(兵權)을 쥐고 큰 부성(府城)을 진무(鎭撫)하고 있느라고 지금 그의 수염이 이처럼 다 희어지고 말았다. 사경은 스스로 귀밑머리 뒤 금관자(망건을 쓸 때 당줄을 꿰어 졸라매는 작은 금색고리)를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스스로 보기에도 겸연쩍은데, 하물며 귀밑머리 뒤편은 스스로 보지도 못함에랴!” 라고 했다.

지난날 나는 연암협으로부터 마침 성내(城內)로 들어가다가, 군사훈련을 하고 부중(府中)으로 돌아가던 유수(유사경)와 노상에서 마주쳤다. 날이 어둑어둑 저물어갈 무렵이었는데, 말에서 내려 남녀들 틈에 끼어 길 왼쪽에 엎드렸다. 횃불이 휘황하고 깃발들이 펄럭였다. 내가 지난날 길 왼쪽에서 군대의 위용을 구경했던 일을 말하니, 사경은 크게 웃으며,

“왜 내 자(字)를 부르지 않았던가?(자는 절친한 평교간에만 부를 수 있었으므로)” 하기에, “도성 사람들이 놀랄까 두려웠네.”

라고 답하고는, 서로 더불어 크게 웃었다. 사경이, “군대의 위용은 어떻던가?” 하기에,

“원앙대(鴛鴦隊)를 지어 10보 간격으로 세 줄로 선 것이 훈련도감의 군대보다는 조금 못해도 평양의 군대보다는 훨씬 낫더군. 게다가 난후병(攔後兵.부대의 후방을 방어하는 부대)은 벙거지를 번듯하게 쓰고 더그레는 앞뒤로 두 치가 짧으니, 한창 의기양양하여 더욱 씩씩하더군.” 하였다. 사경이 묻기를, “나는 어떻던가?” 하기에, “나는 장군(將軍)의 초상화만 보았지 장군은 보지 못했네.” 하니, 사경이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왼쪽에는 온원수(溫元帥), 바른쪽에는 마원수(馬元帥), 앞에는 조현단(趙玄壇)의 깃발이요, 초헌(軺軒) 뒤에만 유독 말 위에서 깃발을 들었는데 검은 바탕에 그려진 별은 구진(句陳.별의 종류)과 흡사하더군. 내 일찍이 화공을 불러 초상 그리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반드시 잠자코 정색을 하고 있어 대체로 평상시의 태도와는 달랐으니, 장군도 접때 틀림없이 기침과 재채기를 참았을 테고, 가려워도 감히 긁지도 못했을 걸세.” 했더니, 사경은 크게 웃으며, “과연 또 하나의 내가 길가에서 나를 관찰했구먼!” 하였다. 나도 웃으며,

“옛날에 조공(曹公.조조를 말함)이 스스로 일어나 칼을 쥐고 용상(龍床) 앞에 서 있었으니, 이것이야말로 나를 관찰하는 법일세. 그러나 장군은 몸소 말을 타지는 않는 점이 두원개(杜元凱)와 흡사한데 좌전(左傳)에 주(註)를 붙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고, 느슨한 띠에 선비의 기풍이 있는 것은 양숙자(羊叔子)와 흡사한데 뒷날에 누가 비석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릴지 모르겠구려.”

하였다. 그러고는 크게 웃고 나서 일어나 문밖으로 가니, 달이 한창 둥글어 달빛이 가득했다. 나는 문에서 전송하면서 말하기를,

“내일 밤에는 달이 더욱 밝을 터이니 나는 장차 남루(南樓.개성 남대문의 문루)에서 달을 구경할 생각이네. 장군은 다시 걸어와 주겠는가?” 했더니, “그러세.” 하였다.

예전에 관천에서 조촐히 모였을 때에 기(記)를 지은 바 있다. 사경이 먼저 <중경소집기(中京小集記)>를 지어 보여 주었기에, 이 기를 지어서 화답(和答)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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