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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고사(古文故事)

회우록 서문 [會友錄序] - 박지원/연암집1권

작성자허현|작성시간14.09.17|조회수203 목록 댓글 0

 

「회우록서(會友錄序)」는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이 편찬한 ‘간정동회우록(乾淨衕會友錄)’에 연암 박지원이 부친 서문이다. 홍대용은 1765년 동지사 서장관(冬至使書狀官)이였던 숙부를 따라 북경(北京)에 가서 항주(杭州) 출신의 선비들과 교분을 맺고 정양문(正陽門) 밖 간정동(乾淨衕)에 있던 그들의 여사(旅舍)에서 수만 언(言)의 필담(筆談)을 나누었다. 귀국한 뒤 1766년 그때 나눈 필담과 그들을 만나게 된 시말및 왕복 편지들을 3권의 책으로 편찬한 것이 ‘간정동회우록’이다. 

 

우리나라 36도(都)의 땅을 돌아보면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임하여 바다가 하늘과 더불어 끝이 없고 이름난 산과 큰 멧부리들이 그 중앙에 있어, 들판은 백 리가 트이어 있는 곳이 드물고 고을은 천호가 모여 있는 곳이 없으니 그 지역 자체가 편협하다 하겠다.

그런데 옛날의 이른바 양(楊),묵(墨),노(老),불(佛)이 아닌데도 의론의 유파가 넷(노론,소론,남인,북인)이며, 옛날의 이른바 사(士),농(農),공(工),상(商)이 아닌데도 명분의 유파가 넷((四黨人,非四黨人,中人,庶族)이다. 이것은 단지 숭상하는 바가 동일하지 않을 뿐인데도 의론이 서로 부딪치다 보니 진(秦)과 월(越)의 거리보다 멀어진 것(서로 거리가 지극히 멀므로 소원한 사이)이요, 단지 처한 바에 차이가 있을 뿐인데도 명분이 비교하고 따지는 사이에 화(華)와 이(夷)의 구분보다 엄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형적이 드러남을 꺼려서 서로 소문은 들으면서도 알고 지내지 못하며, 신분상의 위엄에 구애되어 서로 교류를 하면서도 감히 벗으로 사귀지는 못한다. 마을도 같고 종족도 같고 언어와 의관(衣冠)도 나와 다른 것이 극히 적은데도, 서로 알고 지내지 않으니 혼인이 이루어지겠으며, 감히 벗도 못 하는데 함께 도를 도모하겠는가? 이러한 몇몇 유파가 아득한 수백 년 동안 진(秦)과 월(越), 화(華)와 이(夷)처럼 서로 대하면서 집을 나란히 하고 담을 잇대어 살고 있으니, 그 습속이 또 어찌 그리도 편협한가.

홍군 덕보(洪君德保.홍대용)가 어느 날 갑자기 한 필 말을 타고 사신을 따라 중국에 가서, 시가를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너절한 골목을 기웃거리다가 마침내 항주(杭州)에서 온 선비 세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틈을 엿보아 여사(旅舍)에 걸음하여 마치 옛 친구나 만난 것처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천인(天人)과 성명(性命)의 근원이며, 주자학(朱子學)과 육왕학(陸王學)의 차이며, 진퇴(進退.군자와 소인의 교체)와 소장(消長.음양의 변화)의 시기며, 출처(出處.벼슬길에 나서는 것과 물러나 은거하는 것)와 영욕(榮辱)의 분별 등을 한껏 토론하였는데, 고증하고 증명함에 있어 의견이 일치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서로 충고하고 이끌어 주는 말들이 모두 지극한 정성과 염려하고 걱정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왔다. 그래서 처음에는 서로 지기(知己)로 허여하였다가 마침내 결의하여 형제가 되었다. 서로 그리워하고 좋아하기를 여색을 탐하듯이 하고, 서로 저버리지 말자 하기를 마치 동맹을 맺기로 서약하듯 하니 그 의기가 사람을 눈물겹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아, 우리나라와 오(吳)의 거리가 몇 만 리라 홍군이 세 선비와는 또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전에 제 나라에 있을 때는 한마을에서 살면서도 서로 알고 지내지 않더니 지금은 만 리나 먼 나라 사람과 사귀며, 전에 제 나라에 있을 때는 같은 종족이면서도 서로 사귀려 하지 않더니 지금은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과 벗을 하였으며, 전에 제 나라에 있을 때는 언어와 의관이 똑같아도 서로 벗하려 하지 않더니 이제 와서 느닷없이 언어가 다르고 복색이 다른 속인들과 서로 마음을 허락함은 웬일인가?

홍군이 우수(憂愁)어린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이렇게 말했다.

“내 감히 우리나라에 벗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 벗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오. 실로 처지에 제한되고 습속에 구속되어 그런 것이니 마음속이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소. 내 어찌 중국이 옛날 중국이 아니며 그 사람들이 선왕의 법복(法服)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겠소.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그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은 요(堯), 순(舜), 우(禹), 탕(湯),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 공자(孔子)가 밟던 땅이 왜 아니겠으며, 그 사람들이 사귀는 선비들이 어찌 제(齊), 노(魯), 연(燕), 조(趙), 오(吳), 초(楚), 민(閩), 촉(蜀)의 널리 보고 멀리 노닌 선비들이 아니겠으며, 그 사람들이 읽는 글들이 어찌 삼대(三代) 이래 사해만국(四海萬國)의 극히 많은 전적(典籍)이 아니겠소. 제도는 비록 바뀌었으나 도의(道義)는 달라지지 않았으니, 이른바 옛 중국이 아닌 지금 중국에도 그 나라의 백성으로는 살고 있을망정 그 나라의 신하가 되지 않은 사람이 어찌 없겠소.

그렇다면 저들 세 사람이 나를 볼 때에도 화(華)가 아닌 이(夷)라고 차별하며 형적이 드러나고 신분의 위엄이 손상될까 꺼리는 마음이 어찌 없을 수 있겠소. 그러나 번거롭고 까다로운 예절 따위는 타파해 버리고서 진정을 토로하고 간담을 피력하니, 그 통이 매우 큰 점으로 볼 때 어찌 명성과 세리(勢利)를 좇느라 쩨쩨하고 악착스러워진 자들이겠소.”

그러고는 드디어 세 선비와 필담한 것을 모아 세 권으로 만든 책을 꺼내어 내게 보여 주면서, “그대가 서문을 써 주시오.” 하였다.

나는 다 읽고 나서 이렇게 감탄하였다. “통달했구나, 홍군의 벗함이여! 내 지금에야 벗 사귀는 도리를 알았도다. 그가 누구를 벗하는지 살펴보고, 누구의 벗이 되는지 살펴보며, 또한 누구와 벗하지 않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바로 내가 벗을 사귀는 방법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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