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상(金右相)에게 화폐가치에 대해 말하다 - 박지원/연암집2권
백성들의 신망을 받고 있는 분이라 임금께서도 실로 그에 부응하시니 정승에 제수되던 날 저녁에 온 조정이 모두 감동하였거니와, 유독 이 백열(柏悅.친구의 좋은 일에 대해 함께 기뻐하는것)의 소회로서는 더욱더 이마에 두손을 얹고 축하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합하(閤下.정승에 대한 존칭)의 집안에 4대(代)에 걸쳐 정승이 다섯 분 나오셨습니다. 정승의 지위와 중임은 일찍이 예전이라서 더 높고 오늘이라서 손색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굳이 멀리 역사책에서 찾을것 없이 가까이 가정의 모범을 본받는다면 이야말로 백성들의 복이 될 것입니다. 화폐의 가치에 대해서 제 나름의 견해가 있기에 별지(別紙)에 기록하오니, 직위를 벗어난 참람되고 망녕된 말이라 책하지 말아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泉幣議” - 별지(別紙)
오늘날 백성의 근심과 국가의 계책은 오로지 재부(財賦.재화와 부세)에 달려 있다. 우리나라는 배가 외국과 통하지 않고 수레가 국내에 다니지 않기 때문에 생산된 재부는 항상 일정한 수량이 있어, 관에 있지 않으면 민간에 있게 된다. 그런데 공사간(公私間)에 다 고갈이 되고 상하가 모두 곤란을 겪고 있는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재(理財)하는 방법이 제 길을 얻지 못한 까닭이다.
대저 화폐의 가치가 높아지면 물건의 가치는 떨어지고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면 물건의 가치는 높아진다. 물가가 오르면 백성과 나라가 함께 병들고 물가가 떨어지면 농민과 상인이 함께 해를 입는 것이다.
역대 조정에서 화폐의 가치가 떨어질 것을 염려하여 이전에 엽전을 주조했으나 그나마 잠시 시행하다 이내 중지되었다. 진실로 포화(布貨.베)와 저화(楮貨.지폐)는 비록 싸지만 다시 비싼 은화(銀貨)가 있어서 비싸고 싼 것 사이에 절충할 수 있었다.
무릇 위의 세 가지 화폐는 모두 백성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빨리만 만들어 내면 넉넉히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엽전은 사사로이 만드는 화폐가 아니고 관의 공급에 의존하고 있다. 당시 만든 양이 많지 않았을 뿐 아니라 민간에 보급된 것도 미처 두루 퍼지지 못했으므로, 백성들이 엽전의 사용을 불편하게 여긴 것은 실로 이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재부를 잘 다스리는 데에는 다른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화폐의 가치를 헤아려 물가를 조절하며, 막힌 것은 소통시키고 넘치는 것은 막아서, 화폐의 가치가 너무 오르거나 떨어지지 않도록 함으로써 물건이 지나치게 비싸지거나 지나치게 싸지는 경우를 막는 것이다.
엽전이 세상에 통행된지(상평통보를 주조한 일) 113년이 지났다. 중앙에서는 호조(戶曹), 진휼청(賑恤廳), 오군영(五軍營)과 지방에서는 팔도(八道), 양도(兩都.강화부와 개성부), 통영(統營)에서 대체로 각기 재차 혹은 3, 4차 주전(鑄錢)하였다. 그 만든 연도 및 수효는 해당 관청에 비치되어 있으므로 한번 조사하면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엽전이 관에 비축된 것이 얼마인지 파악하면 민간에 있는 것을 그에 따라 추정해 낼 수 있다. 백 년 사이에 마멸되거나 파손된 것, 물과 불에 손실된 것등이 없지 않을 것이므로 대강 따져서 이를 제해도 관과 민간에 있는 현재 엽전의 총계는 적어도 수백만 냥이 될것이다. 이를 엽전이 처음 사용되었을 때와 비교하면 아마 10배도 더 되는 양이다. 그럼에도 대소간에 황급해 하면서 모두 돈걱정을 않는자 없으며,심지어는 나라안에 돈이 없다고도 한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아! 엽전의 이름을 ‘상평통보(常平通寶)’라 부른 것은 항상 물건과 균형을 유지하고자 함이다. 백성이 엽전을 사용한 지 오래되매 늘 보고 늘 써 왔기 때문에 다른 화폐는 무시하고 아울러 은화까지도 쓰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엽전만 날마다 늘어나 물가는 날마다 오르게 되었고 모든 거래에 있어 엽전이 아니면 안 되게 되었다. 화폐의 흐름이란 기울어진 데로 쏟아지게 마련이다. 그러니 물가가 오르면 돈이 어찌 거기에 쏠리지 않겠는가! 예전에 한푼 두푼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이 혹은 서푼 너푼으로도 부족한 실정이다. 지금 엽전으로 물건과 균형을 유지하려면 몇 배가 들게 되었으니 이 어찌 엽전이 천해지고 화폐가 값싸진 명백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국내의 재부에 대해 논하는 자들은 모두 ‘돈이 귀하기 때문에 물가도 따라서 오른다’ 하니 어찌 생각을 못 함이 이다지도 심한가!
또한 은은 재부로서 으뜸가는 화폐이며 세상에서 모두 보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전에 민간 습속이 엽전에만 익숙하고 은화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은이 드디어 한낱 물건으로만 취급되고 화폐에는 들지 않게 되었다. 북경(北京)의 시장에서 팔지 않으면 곧 무용지물과 같은 것이다. 하정(賀正), 동지(冬至), 재력(䝴曆), 재자(䝴咨)등의 사신 행차에 휴대하는 포은(包銀.여비조달용 은)이 매년 적어도 10만 냥은 될 것이니, 10년을 합계하면 100만 냥이나 되는 것이다.
이로써 조달하여 실어서 돌아오는 것이란 한갓 털모자일 뿐이다. 털모자는 한 해 겨울만 지나도 해져 못 쓰는 것이다. 천 년이 가도 부서지지 않는 보물을 들고 가서 한 해 겨울에 해져 못 쓰는 것을 바꿔 오고, 산천에서 캐내는 한정이 있는 재화를 실어서 한번 가면 다시 못 올 땅으로 보내 버리니 천하의 졸렬한 계책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하겠다.
간접적으로 듣건대 국내에 당전(唐錢.청나라 동전)을 통용시켜 전황(錢荒.화폐부족 현상)을 구제하기로 하고 이번 동지사 편에 들여오도록 허락하였다 하는데, 이는 결코 옳은 계책이 아니다. 엽전은 바람, 서리, 홍수, 가뭄 등의 재해를 받는 것도 아닌데, 어찌 곡식이 큰 흉년을 만난 것처럼 ‘황(荒)’이라 일컫는가. ‘황’이라 일컫는 까닭은 돈길이 너무도 혼잡해져서 마치 벼논에 우거진 잡초를 제거하지 않은 것과 같다는 뜻이다.
중국의 산해관(山海關) 바깥 지역에서 문은(紋銀.청나라에서 화폐로 쓰이던 은) 1냥으로 동전 7초(鈔)를 교환해 준다고 한다. 1초는 163푼으로 한 꿰미가 되니, 우리나라 엽전으로 기준을 삼아 보면 1냥의 은이면 대개 엽전 11냥 4돈 1푼을 얻을 수 있으니 거의 10배의 이익을 보는 것이다. 모든 운반비를 제하더라도 5, 6배의 이익은 된다. 저 역관들은 한갓 자기들의 목전의 이익만 탐하고 국가의 장구한 계책은 알지 못하여, 수십 년 이래 밤낮 오직 당전의 통용을 소원하고 있다. 이는 그야말로 ‘화살 가는 데 따라 과녁 세우기’나 ‘언 발에 오줌 누기’와 다를 바 없다.
우리나라의 화폐가치가 하락함에 따라 온갖 물가가 뛰어오르고 있는데, 어찌 외국의 조악한 화폐를 들여다가 통화의 유통을 스스로 흐리게 한단 말인가. 털모자는 오히려 서민들의 방한의 용구인데도 은으로 바꾸어 오는 것이 불가하거늘, 하물며 역관배들의 일시적인 조그만 이익을 위해서 팔도에서 산출되는 귀중한 은을 쓸어다가 북경의 시장에다 밑 빠진 독을 만들어 쏟아 붓는단 말인가. 그 이해득실은 환히 알기 쉬워 굳이 지혜 있는 자에게 물어볼 것도 없이 명백한 것이다.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먼저 돈길을 맑게 하고 우선 은화가 북쪽으로 들어가는 문을 막는 것밖에 없다. 어떻게 돈길을 맑힐 것인가?
우리나라에서 엽전을 사용한 이래로 구전(舊錢)보다 좋은 것이 없다. 구전은 모두 견고하고 중후하며 글자체도 분명하였는데, 임신 · 계유 연간에 금위영(禁衛營), 어영청(御營廳), 훈련도감(訓鍊都監)에서 동시에 엽전을 주조하면서 느닷없이 옛 방식을 바꾸어 납과 철을 많이 섞은 데다 두께가 너무 얄팍해서 손만 대면 쉬이 부서질 정도였다. 그리하여 엽전 중에서도 가장 나쁜 것으로 간주되어 맨 먼저 돈의 재앙을 만들었으니, 물가가 치솟은 것은 실로 그때부터였던 것이다. 그 후 계속 만들 때마다 그 크기가 갈수록 줄어들어, 지금의 신전(新錢)과 함께 섞어서 꿰미를 만들면 신전은 구전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서 돈을 세기가 어렵게 되었으니, 돈의 난잡함이 이 때문에 더욱 심해졌다.
지금 옛날의 오수전(五銖錢)과 삼수전(三銖錢)의 제도를 모방해서 어디서든 현재 있는 구전 한 닢을 신전 두 닢에 해당하도록 하고, 일제히 돈꿰미를 바꾸면 대소가 즉시 구분될 것이니 새로 돈을 주조하는 번거로움을 겪지 않고도 앉아서 백만 냥을 얻을 수 있다. 비록 크고 작은 돈을 함께 통행시키더라도 가치의 경중에 따라 달리 쓰면 민심을 거스르지 않고 화폐가 잘 유통될 것이다. 임신 · 계유 연간에 세 영문(營門)에서 주조한 엽전은 큰 것도 구전만 못하고 작은 것은 신전과 맞지 않아 이미 격식에 어긋나고 형체마저 너무 얇고 졸렬하니 모두 통용을 정지시켜 저자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 돈길이 맑아질 것이다.
은화가 빠져나가는 것은 어떻게 막을 것인가?
관과 민간에 소장되어 있는 토산의 은괴를 그냥 부숴서 화폐로 삼지 말고, 모두 호조로 바치게 해서 일률로 닷냥, 열냥으로 크고 작은 덩어리를 만들어 천마(天馬)나 주안(朱雁.붉은색의 기러기)의 모양을 박아서 원 소유주에게 돌려주는 동시에 10분의 1의 세를 받는다. 그리고 교역한 당전은 국내에 들이지 못하게 하고 의주(義州)에 유치시켜 두었다가, 뒤에 나가는 사행의 노자에 충당시킬 것이다.
무릇 사행의 수행원도 마땅히 긴요치 않은 인원은 감해야 할 것이다. 서장관(書狀官)의 경우에 그 소임이 외교의 임무를 맡은 것도 아니요 직분이 종사(從事.사행의 실무를 맡은 관원)와도 다른데, 그 식량이며 마부와 말 등 일체 번다한 비용은 따로 사신 한 사람의 몫이 들며 잡심부름하는 하인들을 많이 대동하고 양방(兩房.정사와 부사)에 의존하여 취사를 해결한다. 그가 가고 오는 것은 본래 중국 측에서 알 바 아닌데도 무릇 잔치를 베풀고 상을 하사하는 자리에서 전례에 따라 염치없이 대접을 받고 있으니, 매우 부당한 일이요 이리 보나 저리 보나 구차스럽기 짝이 없다. 세 명의 대통관(大通官. 벼슬높은 역관) 이외에 무릇 압물종사(押物從事)는 모두 감원함이 옳고, 사자(寫字), 도화(圖畵), 의관(醫官)의 직임은 정사(正使)와 부사(副使)의 수행 비장(裨將)들에 분배시키며, 기타 무상종인(無賞從人.청 황제로부터 상을 하사받는 명단에 들지 못하는 비공식 수행원)과 의주 상인은 일체 엄금하고, 무역하는 데 있어서는 약재 이외에는 일체 함부로 내가지 못하게 한다면 변경의 관문이 엄중해지고 국내에 은화가 저절로 풍족하게 될 것이다.
시국에 절실한 말로서 한(漢)나라 가산(賈山)과 당(唐)나라 육지(陸贄)와 같은데, 문장을 지은 것은 도리어 더욱 고아(古雅)하고 간결하다. (끝)
註: 위 글에서 칭한 김우상(金右相)은 김이소(金履素 1735~1798)로서 자는 백안(伯安),호는 용암(庸庵),본관은 안동(安東)이며,김창집(金昌集)의 증손이다. 연암과는 약관 시절부터 친구였다. 영조 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이조 판서를 거쳐 정조 대에 우의정과 좌의정에 올랐다. 이 글은 그가 1792년 우의정에 제수되었을 때 연암(박지원)이 보낸 편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