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산 허균(許筠)은 우리나라의 시를 모아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으로부터 석주(石洲) 권필(權韠)에 이르기까지 각 형식을 선발(選拔)하여 직접 비평하고는 『국조시산(國朝詩刪)』이라 이름하였다. 우리나라의 시를 선발한 사람이 여럿 있지만, 논자들은 모두 이 책이 가장 뛰어나다고 한다. 허균은 평소 글솜씨를 자부하였으며, 그의 부친(초당)과 형들(악록,하곡)도 모두 한 시대에 명성을 떨쳤다. 또 그가 교유한 사람들은 모두 문단의 거장과 재주 있는 선비였으니, 우리나라 이래 여러 시인의 장단점은 자신의 감식안으로 판별할 것도 없이 평소 강론한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소매가 길면 춤을 잘 추고 돈이 많으면 장사를 잘한다.’더니, 참으로 그렇다.
許筠取國朝詩, 斷自鄭三峯道傳, 下至權石洲韠, 選各體, 自加批評, 名之曰國朝詩刪. 選東詩有數家, 而論者咸稱是集爲最優. 盖筠素以詞翰自任, 其父若諸兄, 皆有名一世. 又其所與交遊, 無非鉅公才士, 則國朝以來諸家詩長短精粗, 不待其藻鑑之自識, 得之於平素講論者, 亦已多矣. 長袖善舞, 多錢善賈信夫. - 박태순(朴泰淳 1653-1704) 국조시산서(國朝詩刪序)/동계집(東溪集)6권 -
『국조시산(國朝詩刪)』은 1607년 허균이 정도전(1342-1398)부터 권필(1569-1612)까지의 시를 선발하여 만든 시선집이다. ‘국조’는 조선을 가리키며, ‘시산’은 명나라 문인 이반룡(李攀龍)이 편찬한 동명의 시선집을 전범(典範)으로 삼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허균은 1618년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하고 말았지만, 역적이라는 기휘(忌諱)도 국조시산의 유통을 막지 못했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에 편찬된 수많은 시선집 가운데 국조시산이 단연 으뜸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제가(諸家)의 견해가 일치한다. 홍만종(洪萬宗), 김만중(金萬重), 남용익(南龍翼) 등 쟁쟁한 문인들이 이 책을 조선시대 최고의 시선집으로 손꼽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허균의 행적에 대해 비판적인 이들도 그의 문학적 재능에 대해서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1695년 박태순은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부임하여 『국조시산』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허균이 이 책을 편찬한지 88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박태순이 『국조시산』을 간행한 것도 조선시대 최고의 시선집을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작 박태순은 이 책의 서문에서 허균의 천재성을 부정하였다. 『국조시산』은 허균의 가문적 배경과 교유 관계의 산물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역적의 저술을 간행한다는 비난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박태순으로서는 허균의 성취를 의도적으로 폄하할 필요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의도야 어쨌든 박태순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시대의 반항아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졌지만, 허균은 뭐니뭐니해도 시대의 특권을 한껏 누린 명문가의 귀공자였다. 그의 부친 허엽(許曄), 형 허성(許筬)과 허봉(許篈)은 모두 고위 관료를 역임하였으며, 누이 난설헌(蘭雪軒) 역시 시로 이름을 떨쳤다. 허균에게 시를 가르친 가정교사는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한 사람으로서 16세기 시단을 주름잡은 손곡(蓀谷) 이달(李達)이었다. 허균과 교유한 인물들 역시 목릉성세(穆陵盛世.한문학이 발달했던 조선의 선조시대)의 저명한 문인들이었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주지번(朱之蕃)과의 교유를 통해 얻은 명대(明代) 문단에 대한 정보, 그리고 두 차례의 연행(燕行)을 통해 중국에서 직수입한 4천권의 서적은 그의 문학적 지평을 넓히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허균의 문학적 재능은 이러한 외적 조건에 힘입어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궁이후공(詩窮而後工)'이라는 말이 있다. 시는 가난해야 잘 지을 수 있다는 뜻이다. 밑바닥의 삶을 경험해 보아야 인간의 내면을 직시할 수 있을 터이니, 시인이 되려면 가난은 필수 조건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가난한 시인은 있어도 가난한 비평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비평가를 만드는 것은 문학적 감수성이 아니라 방대한 독서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얻은 폭넓은 지식과 수준 높은 안목이다. 책 한 권의 가격이 현재 가치로 수십에서 수백만 원에 달하는 당시의 상황에서 가난한 사람은 결코 비평가가 될수 없었다. 하지만 허균은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허균이 『국조시산』이라는 비평사적 명저를 남길 수 있었던 배경이다.
“소매가 길면 춤을 잘 추고, 돈이 많으면 장사를 잘한다[長袖善舞 多錢善賈].”라는 말은 한비자(韓非子)의 「오두(五蠹)」에 보인다. 소매가 긴 옷을 입고 춤을 추면 동작이 더욱 우아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밑천이 넉넉하면 이익도 훨씬 많이 볼 수 있고 손해를 보더라도 쉽게 만회할 수 있다. 능력이나 노력보다는 조건이 좋아야 한다는 말이다.
소매가 길면 춤을 잘 추고 돈이 많으면 장사를 잘하는 것처럼, 집안이 좋으면 공부를 잘한다. 우리는 이 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점을 인정하는 것이 사회 불평등을 해소하는 첫걸음이다. -이하생략-
글쓴이 : 장유승/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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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허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4.09.21 1700년(숙종26년) 왕조실록에 의하면 전라도 유생(儒生)등 3백여명은 이이(李珥)를 위하여 상소하기를,“박태순(朴泰淳)이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있을 때 허균(許筠)이 수집한 바의 ‘국조시산(國朝詩刪)’을 간행(刊行)하였는데, 허균은 곧 광해조의 적신(賊臣)이고 이이(李珥)를 헐뜯던 허봉(許篈)의 아우입니다. 허균이 일찍이 동방시집(東方詩什)을 정밀히 뽑을 적에 그 속에 장률 1편을 거짓으로 지어 넣었다” 하였다. 이 일로 박태순은 파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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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허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4.09.21 왜노들의 침략으로 온 강토가 폐허가 되도록한 책임 상당부분이 선조(宣祖)에게 있다고 보는데 당시와 후세 사대부들은 선조시대 (1567-1608)를 목릉성세(穆陵盛世)라고 하였다. 16-17세기 이 땅에 위대한 유현(儒賢)들이 많이 나오고 성리학이 꽃핀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선조(목릉)의 치적으로 봐야할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