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산(허균)의 나이 33세이던 신축년(1601,선조34) 사복시(司僕寺)의 낭관(郞官)으로 있다가 전운판관(轉運判官)에 제수되어 삼창(三倉)에 가서 조운(漕運. 현물로 거두어 들인 각 지방의 조세를 운반)을 감독케 되었다.
7월 8일(정유) 조정을 하직하고 동작포(銅雀浦)를 건넜다. 장마로 강물이 한창 불어 배를 저으며 넘실거리는 물결에 주(洲)를 따라 겨우 강 남쪽 언덕에 도착하였다. 정오께 과천(果川)에 도착하니 원 인초(軔初)는 자리에 없고 그의 첩 설아(雪兒)가 소헌(小軒)에서 맞아 술을 대접하였다. 폭양이 뜨거워 그의 청산(靑傘)을 빌려 쓰고 갔다. 저물녘에 수원(水原)에 도착하니, 부사(府使) 박이장(朴而章)은 딸 아이가 천연두(天然痘)라고 나오지 않고 변경지(邊敬之)가 와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함께 묵었다. 나는 지난 을유년(1585) 이곳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당시의 지대(池臺.연못가의 정자)는 이미 자취도 없고 그 집이 있던 자리엔 잡초만 우거져서 옛사람의 안부(安否)를 물으려 하나 이제 아무도 없었다. 옛날을 생각하니 서글펐다.
9일(무술) 시골집에 있는 제로(濟老)를 방문하였다. 잉어를 잡고 눈같이 흰 연뿌리에 멥쌀밥을 포식하고 조금 머물렀다가 저물녘에 나루에 이르니 창리(倉吏.삼창의 아전)가 거룻배를 가지고 맞으러 왔다. 어두워서야 사(舍)에 드니 비좁고 축축하며 파리와 벼룩이 들끌었다. 상 위의 안주는 상하여 썩은 냄새가 지독해서 가까이 갈수 없을 지경이라 밤에 잠을 잘 수 없었다.
10일(기해) 각 읍의 강리(綱吏)를 모아 세과(稅課)를 검사하였다.
배가 모두 모이지 않아 백호(百戶) 세 사람에게 40대씩 곤장쳤다. 정오에 원(員) 유선원(柳善元)과 창(倉)을 감독하기 위해 파견된 신창(新昌)의 원 정사억(鄭思億)이 와서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처(妻)의 사촌(四寸) 동생 용궁(龍宮) 김지회(金之誨)와 육촌(六寸) 이성형(異姓兄) 윤지복(尹之復)이 함께 왔다가 어두워서야 헤어졌다.
11일(경자) 배가 비로소 모두 모이니, 재운세미(再運稅米.두번째 운반하는 세미) 4200석을 내어 배 12척에 나누어 실었다. 저녁에 당진(唐津) 원 윤성지(尹誠之)가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12일(신축) 배를 출발시키고 보고서를 올렸다.
13일(임인) 동지(同知) 홍가신(洪可臣)을 장사(莊舍.농막)로 찾아뵈었다. 서로 만나 즐거움이 지극하여 종일토록 모시고 이야기를 하니 가슴이 상쾌해지며 비루한 생각이 싹 가시는 듯하였다. 저녁에는 용궁의 집에서 묵었다. 유선원이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14일(계묘) 온양(溫陽)에 가서 방백(方伯) 이용순(李用淳)을 만나 조졸(漕卒.조운선의 수부)을 수군으로 배치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논하였다. 공은 해변 16군(郡)의 세미(稅米)를 경창(京倉)에 바로 납입하면 일이 매우 편하다고 하였다. 나는 그의 말에 따라 곧 예전대로 직납(直納)케 하고 파발을 보내어 모이게 하였다.
15일(갑진) 온양에서 돌아와 용궁의 집에서 묵었는데, 득초(得初) 형이 와서 한방에서 잤다.
16일(을사) 아산(牙山)을 떠나 정오에 신창(新昌)에서 쉬고 예산(禮山)에서 묵었다. 동헌 뒤에 석가정(夕佳亭)이 있는데 대나무가 푸르러 유연(悠然)한 맑은 운치가 있었다. 그 속을 산보하니 원 이지화(李志和)가 간단한 술자리를 마련하겠다고 하였으나 술을 잘 못한다고 사양하였다.
17일(병오) 홍주(洪州)에 이르러 동상(東廂.관아 동쪽에 있는 방)에서 잠깐 쉬는데 벌목관(伐木官) 박경현(朴景賢)이 아헌(衙軒)에 와서 아전을 보내어 어느 방에 묵을 것인지를 물었다. 나는 그가 동상에 들어오려는 것을 알고는 따지지 않고 지름길로 바로 아헌에 이르니 박경현과 목사 우복룡(禹伏龍)이 벌써 연회를 시작하고 소리하는 기녀들이 앞에 가득하였다. 나는 취중에, "목사는 내 형님과 같으시니 아헌에서 며칠 머물렀으면 하는데 이곳으로 옮겨와도 되겠습니까?”
하고 청하니, 목사가 쾌히 승락하였다. 저녁에 박(朴)은 동상으로 옮겨 갔다. 밤에 박의 방에 들어가야 할 기녀가 내가 있는 곳으로 잘못 들어왔으므로 쫓아보내고 수기(首妓)에게 곤장 수십 대를 때렸다.
18일(정미) 박경현이 떠나갔다. 저녁에 목사가 조촐한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19일(무신) 보령(保寧)에서 점심을 하고 남포(藍浦)에서 묵었다.
20일(기유) 비를 맞으며 서천(舒川)으로 갔다. 진흙탕이 미끄럽고 옷에 튀어 종들은 온몸이 진흙투성이가 되어 원망이 대단하였다. 오정 때쯤 군(郡)에 이르니 태수(太守) 김희태(金希泰)는 연회장을 사치스럽게 치장하고 음식을 푸짐하게 장만하여 마치 대국의 제후를 섬기듯이 하였다. 대낮부터 밤새도록 묵은 회포를 풀고서야 파하였다. 밀물이 바로 이를 것이라고 하였다.
21일(경술) 새벽에 말을 달려 포(浦)에 이르니 태수가 쫓아나와 전별하였다. 조수가 고르지 못하고 매우 사나웠다. 교자를 타고 배에 오르니 서풍이 매우 빠르고 파도는 산더미같이 솟아올랐다. 돛을 반쯤 올리고 바로 창사(倉舍)에 이르니 동장(洞長)인 별좌(別坐) 이원두(李元斗)가 먼저 나와 맞으며, 술자리를 마련하여 위로해 주었다. 배와 세미에 대하여 알아보니 모두 정리되어 있다 했다.
22일(신해) 세미 싣는 일을 감독하고 장계(狀啓)를 올렸다. 원 김기(金錡)가 세미를 배에 싣는 일의 감독을 마치고 내게 인사를 왔다. 포시(晡時)에 떠나서 어두워서야 만경(萬頃)에 도착하였다. 이곳의 원인 민형(閔浻)은 나와 같은 해 무과(武科)에 급제한 사람이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삼고(三鼓)가 되었다.
23일(임자) 부안(扶安)에 도착하니 비가 몹시 내려 머물기로 하였다. 고홍달(高弘達)이 인사를 왔다. 창기(倡妓) 계생(桂生.매창을 말함)은 이옥여(李玉汝.李貴)의 정인(情人)이다. 거문고를 뜯으며 시를 읊는데 생김새는 시원치 않으나 재주와 정감이 있어 함께 이야기할 만하여 종일토록 술잔을 놓고 시를 읊으며 서로 화답하였다. 밤에는 계생의 조카를 침소에 들였으니 혐의를 피하기 위해서이다.
24일(계축) 비 때문에 떠날 수가 없었다. 오정 때쯤 비가 개자 고부(古阜)에 도착하여 이장(李丈.이씨 어른)과 만났다. 어른의 이름은 우(瑀)이며 율곡(栗谷) 선생의 아우이시다. 내게는 고향의 어른이 되는데 시와 그림과 글씨를 모두 잘하여 존경하는 분이다. 민인길 숙정(閔仁佶叔正)이 죄가 있어 부안에서 파직되어 군(郡)에 잡혀 있었으므로 불러 함께 묵었다.
25일(갑인) 흥덕(興德)에서 잠시 머물고 저녁에 무장(茂長)에 도착하였다.
26일(을묘) 법성창(法聖倉)에 이르니 태수 경퇴부(慶退夫.경섬)는 세미를 배에 싣는 일이 끝나지 않았다고 군에 맞아들였다. 어릴 적 친구인 정홍연(鄭弘衍)이 임희윤(林禧胤)과 함께 찾아왔다. 서울 기녀인 낙빈(洛濱),선래(仙萊),산월(山月)이 함께 그곳에 살고 있어 모두 와서 위로해 주었다. 술은 잔에 넘쳐 흐르고 거문고와 노래를 번갈아 연주하는데 우스개 소리를 하다가 달구리가 되어서야 파하였다.
27일(병진) 좌랑(佐郞) 강항(姜沆)이 인사를 왔다. 부체찰사(副體察使) 한준겸(韓浚謙)과 방백(方伯) 이홍로(李弘老)가 광주(光州)에서 호군(犒軍.군사에게 음식을 주고 위로함)하고 있고 태사(太史) 소광진(蘇光震)이 왕명을 받들고 와 있어 모두 서면으로 안부를 물었다. 한준겸은 조졸(漕卒)을 선격(船格.사공의 일을 돕는 사람)으로 배치하는 데는 만나 의논해야 한다고 나에게 만나자 하였다.
28일(정사) 지름길을 잡아 사기원(四岐院)에서 점심을 먹었다. 친척인 정성일(鄭成一)과 그의 아들 경득(慶得),희득(喜得)이 찾아왔다. 해질 무렵에야 광주에 도착하니 광주에서는 마침 사신(使臣)을 대접하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연회에 참석하라고 여러번 요청하였으나 가지 않았다. 광주에는 젊은 날 서울에서 정을 준 기녀 광산월(光山月)이 있었는데 그를 보내어 굳이 독촉하니 할수 없이 참석하였다. 이웃 고을의 소리하는 이는 모두 모아 놓았는데, 술은 동이에 넘치고 고기는 산과 같이 많아 품위가 없었다. 저녁에 한공과 함께 묵었었다. 광산월이 와서 위로하였는데, 평생의 즐거움을 나누며 밤을 새웠다.
29일(무오) 소 태사가 장성(長城)으로 떠난다고 인사를 왔다. 그의 나기(羅妓)는 도사(陶辭.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부를 줄을 알았다. 술을 조금 마시고 떠났다. 저녁에 옛 관아(官衙)에서 묵었다. 광산월이 찬을 보내왔다. 그의 두터운 정이 느껴진다.
30일(기미) 한공(韓公)과 방백(方伯)은 모두 떠나고 나는 만류하여 그대로 머물렀다.
8월 1일(경신) 목사[主牧] 이상길(李尙吉)과 초5일에 광산월을 오성(筽城)으로 보내기로 약속하고 말 두 필과 서자(書者.역의 아전)를 남겼다. 정오에 나주(羅州) 관아에 도착하여 목사 권협(權悏)을 뵙고는 바로 자승(子昇.임현)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영암(靈巖) 땅 구림(鳩林)으로 향하였다. 길이 매우 멀어 산소 곁 재실(齋室)에 도착하니 밤은 이미 칠흑같이 어두웠다. 군공(郡供.군에서 제공하는 음식)이 오지 않아 상가(喪家)에서 소소(蔬素. 채소 반찬 음식)를 대접받았다.
2일(신유) 영구(靈柩)에 제물을 차려 제사하고 글을 지어 곡하였다.
3일(임술) 묘시(卯時)에 하관(下棺)하여 묘혈에 넣으니 아, 아득한 이 이별로 평생의 일은 이제 끝이 났구나. 돌아와 금성(錦城)에 묵었다. 동년(同年.같은해 과거에 합격한 사람)인 진사(進士) 진경문(陳景文)이 찾아와 율시 한 수를 주었다. 시가 매우 맑아 깨우쳐 주는 데가 있었다.
4일(계해) 권공(權公)과 작별하고 돌아와 사기원(四岐院)에 도착하니 정씨(鄭氏) 문중의 다섯 사람과 외가 쪽의 첨지(僉知) 유대린(兪大獜)이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위로해 주었다. 저녁에 오성(筽城)에 돌아와 경퇴부(慶退夫),덕원(德遠),내기(萊妓) 등과 먼저 만나 즐겁게 마시고 놀았다. 잠자리에 들어 내기가, “해양(海陽)에서 옛 정인을 만났느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했더니 “그가 여기 올 생각이 없더냐.”고 하므로 “목사가 보내주려 했는데 내가 사양했다.”고 속여 대답했다.
5일(갑자) 새벽녘에 내기가 먼저 일어났다. 이상하게 생각했더니 과연 경퇴부와 함께 나를 속일 계책을 세우고는 먼저 마두(馬頭.역마를 맡아 보는 사람)를 속여 “광산월이 사기원에서 묵고 아침에 군에 들어설 것이다.”고 하였다. 마두는 광산월에게 말을 남겨둔 것을 보았으므로 그 말을 믿고 내게 와서 고하였다. 나는 마음속에 깨닫는 바가 있어, “광주(光州)는 여기서 하루 걸리는 거리인데 그가 왜 중도에서 묵겠는가.”하고 생각하였다. 세 사람은 늙고 추한 기생을 꾸며 가지고는 내가 정청에 나가는 틈을 이용하여 방에다 숨겨 놓았다. 조금 후에 강태초(姜太初)와 군인(郡人) 이곤(李琨)과 강극문(姜克文)이 찾아왔다. 얼마 뒤에 반인(伴人.시중드는 사람)을 속여 내 귀에 대고 “광인이 벌써 와서 방에 들었다.”고 속삭이게 하고는 거짓으로 방안에서 절절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나는 경퇴부의 얼굴에 웃음을 참는 모습이 있는 것을 보고는 이미 짐작하였다. 퇴부는 “방에 들어가면 즐거운 일이 있을 것이니 다녀오지.” 한다. 아마도 내가 방에 들어가면 노기로 하여금 나를 끌어당기고 하여 곤란하게 하여 웃음거리를 만들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굳이 사양하고 일어나지 않았다. 퇴부도 방에 들어가 문안하는 말을 극진히 늘어놓았다. 얼마 안 있어 점심 때가 되니 상차려 식사까지 대접하였다. 마두는 광주에 남겨두고 온 서자(書者)가 당도하지 않은 것을 보고 비로소 속은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반인을 불러 귓속말로 광산월이 오는 길목에 가서 광산월에게 길을 재촉하라고 일렀다. 해가 어스름해지자 과연 당도하였는데 고운 화장과 아름다운 옷을 입고 들어오니 함께 있던 사람이 모두 멍하니 쳐다보았다. 경퇴부는 그의 계책이 성공하지 못한 것을 매우 분해 하고 내기(萊妓)도 불만스러워하는 모양이어서 웃음이 나왔다. 이어 술과 풍악으로 즐거움을 다하고 사고(四鼓)에야 겨우 잠자리에 들었다. 두 기녀도 모두 머물렀다.
6일(을축) 창(倉.法聖倉)에 나가 나는 먼저 관선(官船)에 타고 태수를 기다렸다. 조금 있으니 바닷물이 빠지기 시작했다. 할 수 없이 먼저 내려갔다. 태수는 덕원과 여러 기녀를 데리고 쫓아와 작은 배에 타고는 내가 먼저 내려간 것을 안타까워하며 중류로 노저어 따라와서 관선에는 오르지 않았다. 배 안에서는 퉁소와 북, 노래 소리가 섞이어 시끄러웠는데, 관선 위를 예닐곱 바퀴나 맴돌았다. 나는 율시(律詩) 한 수를 지어 보냈더니 그제서야 퇴부가 관선에 올랐다. 노저어 해문(海門)을 나서니 바람은 급하고 물결은 용솟음쳤다. 해질 무렵에야 창사(倉舍)로 돌아왔다.
7일(병인) 초운수미(初運收米.처음으로 운송하는 세미) 3700석과 세로 받은 콩 1000석을 배 13척에 포장하여 실었다. 익산(益山) 태수 정언충(鄭彦忠)이 석란창(石欄倉)의 쌀을 운반해 오지 않았으므로 함께 보고하고 영암(靈巖)의 아전 30명을 신문하였는데, 해량(海粮.해운하는 곡식)을 훔친 혐의다.
8일(정묘) 퇴부,덕원과 작별하고 무장(茂長)에 당도하니 그곳 원 이충(李冲)이 매우 정성스레 접대해 주었다. 광산월은 완산(完山)으로 간다고 따라왔다.
9일(무진) 고창(高敞)에 도착하니 방백은 13일이 자기 어머니 생신이라고 조심하느라 연회를 열지 않았다. 15일에 잔치를 차리니 참석해 달라고 하여 답서를 보냈다.
10일(기사) 출발하려 하였으나 비가 와서 머무르니, 이곳의 원 황입중(黃立中)이 조촐한 술상을 차렸다. 저녁에 비가 개어 정읍(井邑)에 도착하였다. 광기(光妓.광주 기생) 두 명이 방백의 잔치 때문에 뒤따라 왔으므로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하게 하다가 이고(二鼓)에야 파했다.
11일(경오) 태인(泰仁)에 도착하니 이곳의 원 김자(金滋)가 굳이 만류하여 양진당(養眞堂)에서 묵었다.
12일(신미) 점심 때는 금구현(金溝縣)에서 쉬고 저물녘에 전주(全州)에 들어가니 방백이 찾아와 인사하였다.
13일(임신) 진남헌(鎭南軒)에 나가 방백과 함께 장간(長竿.장대놀이),주승(走繩.줄타기),도상(跳床.높이뛰기) 등 여러 가지 재주 놀음을 모두 보여주었다. 저녁 무렵 대부인(大夫人)이 설익은 감을 먹은 것이 체하여 부축하고 들어가더니 초저녁에 병이 매우 위태로워졌다. 나는 부사(副使) 채형(蔡衡), 중군(中軍) 이홍사(李弘嗣), 판관(判官) 신지제(申之悌)와 밤새 동헌에 앉아 결과를 기다렸다.
14일(계유) 진시(辰時)에 병을 돌이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나는 머물러 상사를 치르기로 하였다.
15일(갑술) 우도(右道.전라북도)의 재차(災差) 강홍립(姜弘立)이 도착하였다. 강형은 어릴 적 친구이자 동년(同年)이라 정이 매우 두터웠는데, 서로 만나게 되어 기뻤다. 그의 숙소에 함께 묵었다.
16일(을해) 상(喪)은 대렴(大斂)을 마치고 빈소를 마련하였다. 좌도(左道.전라남도)의 재차(災差)인 김정목(金廷睦)이 도착하여 강홍립의 숙소에서 만났다.
17일(병자) 성복(成服.상주들이 상복을 입음)하였다. 나는 김정목과 강홍립 등 두 행대(行臺 .종사관)와 이별하고 저물녘에 익산에 도착하였다.
18일(정축) 비가 와서 머물렀다. 고산(高山)의 원 신순일(申純一)이 찾아왔다. 저녁에 이유위(李有爲)가 임천(林川)에서 찾아왔다.
19일(무일) 진안 현감(鎭安縣監) 심인조(沈仁祚)가 인사하러 왔다.
20일(기묘) 군의 무거(武擧.무과에 합격한 사람) 소문진(蘇文震)의 첩과 그의 집에서 같이 일하는 계집아이가 일에 매우 익숙하였다. 그들이 주안상을 차려가지고 와서 위문하니 광산월도 함께 돌보았다. 종일토록 피리 불고 노래하여 즐거웠으며, 이유위는 일어나 춤을 추기도 하였다.
21일(경진) 소랑(蘇娘)의 집을 방문하였다. 술상은 매우 푸짐하였다. 동리 사람들이 구경하려고 꽉차게 모여들었다. 저녁에 임피(臨陂)에 도착하니 이곳의 원 김료(金璙)가 술자리를 마련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22일(신사) 이유위와 함께 소안역(蘇安驛)으로 윤강길(尹降吉)을 방문하니 노래와 피리로 즐겁게 해주었다.
23일(임오) 광산월과 작별하고 이유위와 함께 나시포(羅時浦)를 건너 한산(韓山)에 도착하여 태수 한회(韓懷)와 만났다. 저녁에 임천(林川)에서 묵었는데, 저보(邸報)를 보니 나의 큰형(許筬)이 전라도(全羅道)의 방백(方伯.관찰사)으로 임명되었다.
24일(계미) 이유위와 헤어져 고원(古院)에서 점심 먹고 정산(定山)에서 묵었다. 이사손(李士遜)과 그의 아들 필수(必壽)가 찾아왔다.
25일(갑신) 유구(維鳩)에서 점심을 먹고 저물녘에 온양에 도착하였다.
26일(을유) 간옹(艮翁) 댁에 찾아가서 인사를 드렸다. 간옹은 홍공(洪公.洪可臣)의 호이다. 저녁에 용궁(龍宮)의 집에서 묵었다.
27일(병술) 창사(倉舍)에 도착하였다.
28일(정해) 거두어 들인 쌀 2300석을 배 6척에 싣고 보고서를 올렸다.
29일(무자) 직산(稷山)에서 형님을 맞았다. 원 임자중(林子中)과 진천 현감(鎭川縣監) 임희지(林羲之)가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물녘에 형님이 도착하였다. 헤어진 지 3년 만에 만나 매우 기뻤다. 한이불을 덮고 잤다.
9월 1일(기축) 변산(邊山)에서 조선(漕船) 6척을 제조하여 보고서를 올렸다. 남쪽으로 돌아가 형수님을 기다렸다.
2일(경인) 형수님이 조카 셋을 거느리고 도착하셨다.
3일(신묘) 형수님을 모시고 전주로 향했다. 천안(天安)에서 점심을 먹고 덕평원(德平院)에서 묵었다.
4일(임진) 궁원(弓院)에서 점심을 먹고 저물녘에 공주(公州)에 도착하였다. 목사 김상준(金尙寯)이 극진히 대접하여 하인들까지도 대접을 잘 받았다.
5일(계사) 목사는 상아(上衙)에서 형수님에게 인사하였다. 정오에는 니산(尼山)에서 쉬고 저녁에는 은진(恩津)에서 묵었다.
6일(갑오) 여산(礪山)에서 묵었다. 이곳 태수는 장원급제한 이성길(李成吉)이다. 그의 관아에 가서 인사하였다.
7일(을미) 삼례(參禮)에서 점심을 먹고 전주로 들어가는데 판관이 기악(妓樂)과 잡희(雜戲)로 반마장이나 나와 맞이했다. 북소리 피리소리로 천지가 시끄럽고, 천오(天吳.바다 귀신춤),상학(翔鶴.학춤)과 쌍간희환(雙竿戲丸)과 대면귀검(大面鬼臉 탈춤) 등 온갖 춤으로 길을 메우니 구경하는 사람들이 성곽에 넘쳤다. 나는 큰조카에게, “이 길이 네가 과거에 합격해서 돌아오는 길이 아닌 것이 한스럽다.”고 농담을 하니 그도 배를 잡고 웃었다. 마침내 동헌에서 형님을 뵈었다. 중동헌(中東軒)을 비워 나의 숙소로 하였다.
8일(병신) 그대로 머물렀다.
9일(정유) 전주(全州)를 떠나 점심 때엔 금구에서 쉬고 태인에 이르러 양진당에 도착하였다. 주위엔 노란 국화와 아름다운 돌들이 어울렸는데 뉘엿뉘엿 지는 석양에 푸른 산 빛 피어나 유달리 맑은 정취가 있었다. 오늘이 구월 구일이라서 주인이 높은 곳에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내가 이곳을 지나간 지 겨우 27일인데 풍경은 딴판이며 함께 감상할 사람도 없이 도리어 옛일을 그리는 감회가 있으니 이토록 감정을 자제하지 못한단 말인가. 역시 도량이 좁디좁구나.
10일(무술) 천원(泉源)에서 잠깐 쉬고 어두워서야 장성(長城)에 도착하였다. 조카 박정백(朴正伯)은 큰형님이 체임되어 가셔서 이곳에 머물러 대신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11일(기해) 광산월이 도착하였다. 청암찰방(靑巖察訪) 김효남(金孝男)이 찾아왔다.
12일(경자) 그대로 머물렀다.
13일(신축) 사기원 정씨 집에 이르러 그 누(樓)에서 머물렀다.
14일(임인) 퇴부, 덕원, 그리고 원 이정경(李禎慶)이 강태초와 함께 와서 잔치를 배풀고 밤중에야 파하였다.
15일(계묘) 모두들 떠났다.
16일(갑진) 그대로 머물렀다.
17일(을사) 육선(六船)의 군격(軍格.사공의 일을 돕던 사람)이 모두 도착하여 점검을 마치고 장부를 작성하여 장계(狀啓)를 올렸다.
18일(병오) 나주에 도착하였다. 아사(亞使)와 목사가 찾아왔다.
19일(정미) 맏형님이 순시차 도착하니 목사가 큰 잔치를 마련하여 대접하였다.
20일(무신) 우수사(右水使) 유형(柳珩)이 찾아와 인사하였다. 저녁에 노인(魯認)과 함께 묵었다. 노인은 나주 사람이다. 정유년(1597)에 왜적(倭賊)에게 붙잡혀 서해도(西海道)에 이르렀을 때 몰래 중국배에 타고 복주(福州.중국 복건성의 지명)에 도착하여 무원(撫院) 김학증(金學曾)에게 호소하니 학증은 돈을 후하게 주어 무이서원(武夷書院)에 있게 하였다. 서원의 여러 학생들도 모두 그를 잘 돌보아 주었다. 안학사자(按學使者) 서즉등(徐卽登)은 인에게 동국(東國)에서 가장 숭상하는 학문이 무엇인지 자세히 서면으로 대답하게 하였는데, 노인은 고정(考亭.주자를 가리킴)을 가장 숭상한다고 하였다. 서즉등은 육왕학(陸王學)을 공격하는 사람이라 매우 기뻐하여 자기의 책을 모두 주고 빈객(賓客)처럼 극진히 대접하였다. 기해년(1599)에 차관(差官.파견하는 관리)으로 본국에 돌아가게 해 달라고 무원(撫院)의 김학증에게 청하니 학증이 허락하고 사여림(史汝霖)을 딸려 만세덕(萬世德)에게 공문서를 보냈다. 마침내 태주(台州)를 거쳐 천태산(天台山),안탕(雁宕),진망(秦望)의 훌륭한 경치를 보고 소흥(紹興)에 이르러 섬계(剡溪),운문(雲門),약야(若耶),난정(蘭亭)의 유적지를 보고 여항(餘抗)에 10일간 머무르며 서호(西湖)와 서산(西山)의 경치를 샅샅이 찾아보고 가흥(嘉興),호주(湖州),소주(蘇州)를 거쳐 오월(吳越)의 산천을 두루 돌아보고 남경(南京)에 들어가 육조(六朝)의 유적을 찾아보고 진회(秦淮)를 지나 양주(楊州) 24교(橋)에 노니니 육가(六街)의 번화함은 당(唐) 나라의 전성시대와 같은 듯하였다. 서주(徐州)를 지나 산동(山東)에 이르러서는 곡부(曲阜)에 가서 부자묘(夫子廟)에 절하고 대종(岱宗 태산(泰山))을 바라보고 돌아와 제도(帝都)에서 본국(本國)으로 돌아왔다. 그 먼 곳에 노닐고 경치 좋은 곳을 돌아다닌 이야기를 하는데 마치 눈에 보는 듯하여 들을 만하였는데, 쓸데없이 매달려 항아리 속에 갇힌 듯한 나의 신세가 한스러워, 노생(魯生.魯認)에게 부끄러운 점이 많았다.
21일(기유) 방백,수사(水使),아사(亞使),목사 등이 임탁(林㤞)의 강정(江亭)에서 놀았다. 나도 함께 하였다. 정자는 매우 산뜻하고 멀리까지 바라다 보이며 물과 돌의 경치가 좋았다. 주인은 본디 세상을 피해 살기를 좋아하고 선(禪)을 터득하여 담론할 만한 사람인데, 성대한 음식과 시끄러운 고악(鼓樂) 소리에 귀와 눈이 피로하여 재미가 없었다. 시중드는 자들을 물리치고 하루저녁 청담(淸談)을 나누지 못한 것이 섭섭하였다. 바쁜 여행길에 어찌 이런 일을 쉬이 얻을수 있을까 안타까운 일이다.
22일(경술) 형님과 헤어져 장성에 도착했다.
23일(신해) 노령(蘆嶺)을 넘어 고부에서 묵었다.
24일(임자) 부안에 가서 선장(船匠.배 만드는 장인) 67명을 점검하고 일에 종사하게 하였다. 본읍에 격문을 보내 예목군(曳木軍.나무를 운반하는 인부) 300명을 징발하니 이 고을 원 임정(林頲)이 와서 이에 따르는 여러가지 폐를 이야기하며 매우 어려워하였으나 그의 말에 따를 수 없었다.
25일(계축) 그대로 머물렀다.
26일(갑인) 김제(金堤)에서 묵었다.
27일(을묘) 돌아와 전주에서 머물렀다. 이번 길에 시 56편을 지었다.
10월 13일(신미) 형님이 순행을 마치고 돌아오셨다.
16일(갑술) 12읍의 삼수병(三手兵)이 교장(敎場.연병장)에 모여 전체 사열을 하는데, 나는 형님을 모시고 참관하였다. 군사들은 모두 주먹이 날래고 용감하였다. 좌우군(左右軍)을 펴서 어려진(魚麗陣)과 아관진(鵝觀陣)을 만들었는데 병기는 예리하고 깃발은 선명하고 북과 피리의 군호 소리는 우렁찼다. 나아가고, 물러서고, 앉고, 서는 동작이 모두 절도에 맞으니 이(군대)것으로 충분히 적을 물리칠 수 있을 터인데 벌벌 떨며 남쪽을 돌아보고 걱정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저녁에야 파하고 여러 가지 놀이를 벌여 잔치하여 군사를 먹였다. 밤이 되니 불을 밝힌 성 안은 대낮같이 밝았다.
10월 22일(병진) 배 만드는 일이 완성되었다.
11월 1일(무자) 큰 눈이 왔다.
3일(병인) 오늘은 내 생일이다. 형님께서 큰 잔치를 마련하여 축하해 주었다.
23일(병술) 저보(邸報)를 보니 천자(天子)가 황장자(皇長子)를 태자(太子)로 책봉하였으니 조사(詔使)가 올 것이라고 하였다.
12월 2일(무오) 내집 종이 서울에서 와서 한림시강(翰林侍講) 고천준(顧天峻)과 행인(行人) 최정건(崔廷健)이 나온다고 하며 나는 원접사(遠接使) 이정귀(李廷龜)의 건의로 교체되고 사직(司直) 권운경(權雲卿)이 나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내가 형님과 헤어진 지 3년 만에 처음으로 한데 모여 여러 조카들이 모두 곁에 있어 몇 달 동안 즐거움을 같이해도 흡족하지 않을 터인데, 갑자기 멀리 떨어져야 할 일이 생겼으니 매우 섭섭하다.
9일(을축) 형님이 송별연을 마련하였다.
12일(무진) 떠나는 인사를 하였다. 북풍은 소슬하게 불고 찬 눈은 길에 가득하니 떠나는 마음이 매우 괴롭다. 눈물을 닦으며 길을 떠나 저녁에 여산에 도착하여 이장원(李壯元.李成吉)과 밤새도록 이야기하였다.
13일(기사) 은진에서 묵었다.
14일(경오) 광산월과 이별하였다.
15일(신미) 공주에 도착하여 삼창(三倉)의 아전들을 모아 중기(重記.사무 인계서류)를 만들었다. 목사는 상경하고 이유위가 찾아와 인사하였다.
16일(임신) 그대로 머물렀다.
17일(계유) 연기(燕岐)에서 묵었다.
18일(갑술) 큰누님과 자형(姊兄), 사어(司禦) 박순원(朴舜元)을 사탄(槎灘)으로 찾아뵈었다.
19일(을해) 그대로 머물렀다.
20일(병자) 청주(淸州)에 들어갔다. 목사 서인원(徐仁元)이 찾아왔다.
21일(정축) 낮에 청안현(淸安縣)에서 쉬고 저녁에 음성(陰城)에 닿았다.
22일(무인) 충주(忠州)에 도착하여 목사 김정수(金正受)와 이야기하였다. 별좌(別坐) 손을남(孫乙男)이 와서 인사하였다.
23일(기묘) 엄정(嚴井)에 도착하여 지사(知事) 김신원(金信元)을 뵈었다.
24일(경진) 노수(蘆藪)의 분암(墳庵.齋室)에 이르러 성묘하였다.
25일(신사) 주(州)에 들어가니 목사 강대호(姜大虎)가 찾아와 인사하였다. 저녁에 처가(妻家)에 도착하였다.
30일(병술) 분암에 돌아와 연말을 보냈다.
임인년(1602) 1월 1일(정해) 산소에 제를 올리고 저물녘에 여주(驪州)에 이르니 목사 송진보(宋晉甫)가 찾아왔다.
2일(무자) 양근(陽根)에서 묵었다. 군에 군수가 없어 하인(下人)이 나오지 않아 저녁도 굶은 채로 묵었다.
3일(기축) 광주(廣州)에서 묵었다. 목사 최중망(崔重望)이 와서 인사하였다.
4일(경인) 서울에 들어갔다.
5일(신묘) 배은(拜恩) 하였다. 권운경(權雲卿)이 찾아왔으므로 문서와 도장을 모두 그에게 전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