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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고사(古文故事)

성재(性齋 허전) 행력(行歷)및 성재집(性齋集)

작성자허현|작성시간14.10.06|조회수353 목록 댓글 0

 
왕력 / 서기 / 연령 / 기사
●정조 21   1797    1   경기 抱川縣 木洞里에서 태어나다.
●순조 02   1802    6   외조부 李重泌에게 「小學」을 배우다.
●순조 13   1813   17   漢陽趙氏 趙觀基의 딸과 혼인하다. 부친을 慈仁縣 임소에 가서 뵙다.
●순조 14   1814   18   동생 許儔와 함께 金孝日을 따라 慈仁 賢聖山의 新林寺에서 3년간 독서하다.
●순조 17   1817   21   부친의 명으로 동생과 함께 斗湖에 은거하던 下廬 黃德吉을 찾아가 문하생이 되어 「東賢學則」,「李子粹語」 등을 배우다.
●순조 20   1820   24   부친상을 당하다. 조모상을 당하다.
●순조 21   1821   25 「禮記」, 「儀禮經傳通解」를 읽다.
●순조 22   1822   26 「周禮」를 읽다. 〈警省文〉을 짓다.
●순조 23   1823   27 「禮記」 喪服記, 玉藻, 深衣篇을 연구하여 「法服篇」을 짓다.
●순조 25   1825   29   거처하는 곳을 性齋라 하고 〈性齋記〉를 짓다.
●순조 27   1827   31   黃德吉을 곡하다. 朱子語類」를 읽다.
●순조 28   1828   32   陞補試에 합격하다. <下學箴〉을 짓다.
●순조 30   1830   34  「性理大全」을 읽다.
●헌종 01   1835   39   別試 文科에 급제하다.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다.
●헌종 02   1836   40   2월, 아우 許儔를 곡하다. 모친상을 당하다.
●헌종 05   1839   43   漣川에 있는 許穆의 고택 恩居堂을 重修하는 上樑文과 〈天地辨〉, 〈災異說〉, 〈象緯考〉를 짓다.
●헌종 06   1840   44   부친의 문집인 「一川集」을 편차하다. 麒麟道 察訪이 되다.
●헌종 07   1841   45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오다. 雲岡詩社에 참석하다.
●헌종 08   1842   46   崇陵 別檢에 敍用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헌종 10   1844   48   龍驤衛 副司果가 되다.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으나 곧 체직되다. 사헌부 지평이 되다.
●헌종 11   1845   49   친족 許堡의 아들 허익을 양자로 삼다.
●헌종 12   1846   50   사간원 정언이 되었으나 곧 체직되다. 이조 좌랑이 되었으나 곧 체직되다.
●헌종 13   1847   51   咸平 縣令이 되다.
●헌종 15   1849   53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오다. 홍문록에 뽑히다.
●철종 01   1850   54   홍문관교리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이 되다. 경연에 입시하여 「小學」을 진강하다. 實錄廳 記注官이 되어 「憲宗實錄」 편수에 참여하다.
●철종 03    1852   56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이 되다. 부인상을 당하다.
●철종 04    1853   57   부교리가 되다. 경연에 입시하여 「詩傳」을 진강하다. 경연에 입시하여 「通鑑」, 「詩經」을 진강하다. 부수찬이 되다.
●철종 05    1854   58   교리가 되다. 부교리가 되어 「서전」을 진강하다. 三司가 曺夏望을 탄핵할 때 연명차자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孟山으로 귀양 가다가 高陽에서 持平에 제수되다.
●철종 06    1855   59   龍驤衛 副護軍이 되다.
●철종 07    1856   60   우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이 되다. 사간원 대사간이 되다.
●철종 09    1858   62   下廬 黃德吉의 행장을 짓다.
●철종 11    1860   64   병조 참의가 되다. 「士儀」, 「夏官志」를 짓다.
●철종 12    1861   65 「受廛錄」을 짓다.
●철종 13    1862   66 「宗堯錄」을 짓다. 晉州民亂이 일어나자 三政策을 올려 田政, 軍政, 還穀에 대한 개혁안을 제시하다.「海國圖誌」의 발을 짓다.
●고종 01    1864   68   우부승지가 되다. 경연에 입시하여 「孝經」을 진강하다. 金海 都護府使가 되다. 임지에 도착 首露王陵을 배알하고, 境內 書院을 배알하다. 제생을 데리고 校宮에서 향음주례를 행하다. 〈居官十箴〉을 지어 政堂에 걸어놓다.
●고종 02    1865   69   거처하던 김해의 公餘堂을 개방하여 인근의 학자들을 맞이함으로써 영남의 학자들과 사제의 인연을 맺다.  涵虛亭에서 제생들과 강학하다.
●고종 03    1866   70   新山書院의 원장이 되어 山海亭에서 강학하다. 慶州에 들러 定軒 李鍾祥을 방문하고 星州에 들러 進菴 鄭墧를 방문하다. 문생들과 咸安의 合江亭에 모여 유람하고 이때 지은 시를 모아 〈龍華同舟錄〉을 남기다. 김해 부사로서 殿最를 잘 받아 표리를 하사받다. 부호군이 되다. 동지의금부사 겸 오위도총부총관이 되다. 〈光化門銘〉을 짓다. 한성부 좌윤이 되었다가 용양위 호군이 되다.
●고종 04    1867   71   형조 참판이 되다. 交泰殿ㆍ景福堂ㆍ麟趾堂의 頌을 짓다.
●고종 05    1868   72   동지의금부사가 되다. 〈陽川世稿跋〉, 〈克己說〉을 짓다.
●고종 06    1869   73  〈明倫堂銘〉, 〈漢陰先生年譜跋〉을 짓다. 동지경연사가 되다. 경연에 입시하여 「孟子」를 진강하다.  병조 참판이 되다. 李震相의 深衣問目에 대해 답하다. 〈靈臺銘〉을 짓다.
●고종 07    1870   74   동지경연사가 되다. 延生殿에 입시하여 진강하다. 경연에 입시하여 言路를 넓힐 것을 청하다. 慈慶殿에 입시하여 진강하다. 이조 참판이 되다.
●고종 08    1871   75 「字訓」을 짓다. 연생전에 입시하여 「中庸」을 진강하다. 「詩傳」을 진강하다.
●고종 09    1872   76   耕雲 李基鎬를 곡하다. 〈六玩銘〉을 짓다.
●고종 10    1873   77   도총부 도총관, 용양위 대호군, 한성부 판윤이 되다. 耆社에 들다. 〈靈壽閣頌〉을 짓다. 지경연사가 되다. 지의금부사가 되다. 형조 판서가 되다. 동지성균관사가 되다. 홍문관 제학, 예문관 제학이 되다. 〈東賢學則跋〉, 〈包特辨〉, 「士儀節要」를 짓다. 經筵 日講官이 되다.
●고종 11   1874   78   高宗의 號인 誠軒에 대해 〈誠軒箴〉을 지어 바치다. 경연에 입시하여 井田制를 논하다. 명을 받아 〈箕田圖說〉을 바치다.
●고종 12   1875   79   예문관 제학이 되다. 〈不倦堂記〉, 「哲命篇」, 「家儀」를 짓다. 홍문관 제학이 되다.
●고종 13   1876   80   지경연사가 되다. 〈康寧殿銘〉을 짓다.
●고종 14   1877   81 「初學文」을 짓다. 〈恒說〉을 짓다.
●고종 15   1878   82   駕洛國 首露王陵에 殿號를 내리도록 상소 嵩善殿이라 사액하다. 「哲命篇」, 「宗堯錄」을 올리다.
●고종 17   1880   84  〈麗澤齋記〉, 〈養一銘〉, 〈嵩善殿記〉, 〈存心說〉, 〈安宅銘〉을 짓다.
●고종 18   1881   85   지중추부사가 되다. 이조 판서가 되다. 星湖 李瀷의 諡狀을 짓다.
●고종 19   1882   86   아들 허익의 임지인 果川으로 거처 옮기다. 이때 麥溪錄을 남기다. 大山 李象靖의 諡狀을 짓다. 〈惜寸陰說〉을 짓다.
●고종 20   1883   87   한성부 판윤이 되다. 敦義門 밖 冷泉洞으로 거처를 옮기다.
●고종 21   1884   88   예문관 제학이 되다. 홍문관 제학이 되다. 지중추부사가 되다. 「入學文」을 짓다.
●고종 22   1885   89   판의금부사가 되다. 〈誠敬說〉을 짓다.
●고종 23   1886   90   安山 郡守로 있는 허익의 임소로 가다. 瞻星里에 가서 이익의 묘소를 참배하다. 〈養心銘〉을 짓다. 판돈녕부사가 되다. 9월 23일 安山郡 不倦堂에서 졸하다. 11월 果川縣 菊逸里(瑞草里)에 장사 지내다.
●고종 25   1888  ‘文憲’으로 시호가 내리다.
●고종 28   1891  丹城 法勿里 麗澤堂에서 《性齋集》원집이 간행되다.
●고종 40   1903  密陽 蘆谷 風雷亭에서 《性齋集》속편과 부록이 간행되다.

문집《性齋集(성재집)》
성재(性齋.許傳)는 星湖 李瀷, 順菴 安鼎福, 下廬 黃德吉 등으로 이어지는 성호학파의 적통을 이은 近畿 南人系의 학자로서 <宗堯錄>, <哲命篇>, <士儀> 등의 저술을 남겼고, 문인들도 畿湖 지방뿐만 아니라 嶺南 지방에도 많이 있었다. 이 때문에 저자가 근기 남인계의 학자임에도 문집이 丹城과 密陽에서 간행될 수 있었다.
저자가 졸한 다음해(1887년)에 조카 許運이 족제 許逸, 許邇와 선비 李成九 등과 冶洞에 모여 저자가 지은 <盆城錄>, <大貞錄>, <敦西錄>, <大蓄錄>, <麥溪錄>, <寒泉錄>을 종류별로 모아서 44권으로 편차하였다. 이해 가을에 문인 朴致馥 등이 丹城의 栗谷寺에 모여 저자의 문집 간행을 의논하였으나 흉년으로 중지하였다가, 1889년에 三嘉 雷龍亭에서 모여 문집 간행을 합의하고 刊所를 丹城(山淸) 法勿里 法溪精舍에 두었다. 朴致馥 등이 五道의 士林에게 통문을 띄워 문집 간행 비용을 갹출하고 그해 겨울부터 智異山에서 板材를 실어 오는 등 간행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1890년 봄부터 단성 법물리 商山金氏 齋舍에서 板刻을 시작하여 1891년 판각을 끝마친 다음 법물리 麗澤堂에서 33권 17책으로 문집을 간행하고, 판각을 藏板閣에 보관하였다.
한편 속편과 부록은 경비가 부족하여 간행하지 못하다가 1903년에 大訥 盧相益이 세운 密陽 蘆谷의 風雷亭에서 12권 6책의 목판으로 함께 간행되었다.   註: 한국문집총간 《성재집》 해제(解題)를 참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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