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8:2 Aorist’는 해방 원리 계시
개혁을 외치는 이들이 늘 잊지 말 일이 있습니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새겨 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개혁이란 주님의 진리로의 헌신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신학교마다 성경의 배경 지식에 대해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성경이 구체적 상황 속에서 주어졌기 때문에 그 배경을 정확히 이해하는 일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한 가지 눈여겨 볼 것이 있습니다. 코이네 헬라어 aorist입니다. 이것은 고지식하게 축자번역 원칙을 지킨 고대 라틴역 외엔 드문 표현입니다. 말이 달라지면 사상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은 것은 말이 사상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교회를 비롯한 '교제 중심의 구원관'의 동방 교회들은 지금도 헬라어 성경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대속 중심의 구원관'의 서방교회와 확실히 다른 특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원인들 중 시제 표현의 차이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 보여집니다. 시제 표현 중에서 aorist 문제가 가장 큰 것입니다. 일반 서구어엔 없기에 라틴역이 주류가 된 교부시대부터는 신학적 왜곡이 이 부분에서는 아주 인식조차 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동사의 절반에 해당하는 표현이 aorist인데 이를 오해하니 서구신학은 진리의 시간성 이해에 오해와 왜곡을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현대엔 영어 번역과 영어권 신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니 대동소이합니다. 그리스 정교회 같은 동방교회는 성경을 보면서 쉽게 알 수 있는 원리를 서방 교회는 알기가 쉽지 않은 점을 우리말에는 aorist 표현이 구별 가능해서 서방교회들보다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말세에 우리를 쓰시려는 주님의 은혜의 섭리라고 봅니다. 헬라어 코이네나 산스크리트어엔 있으나 현대 서구어에는 없는 그 aorist가 우리 말에는 있습니다. 이 중요한 부분을 대부분 놓치고 있습니다. aorist에 대한 바른 이해가 성경 진리 이해에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자 오늘은 로마서의 심장 같은 8:2절의 '해방하였음이라'로 번역된 '엘류데로센'을 중심으로 aorist에 대해 살펴봅니다.
1. 먼저 문법상 Aorist란,
다른 언어에는 드문 신약성경의 원어인 코이네 헬라어의 독특한 시상 표현입니다. 헬라어로 'a' + 'oristos' 즉 '한정되지 않음'을 뜻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처럼 한정된 시간이 아니라 사건, 사실 자체에 중점을 둔 표현이기에 이런 표현이 없는 언어로 번역할 때는 유의해야 합니다.
이는 시제보다는 상태 자체에 대한 표현이기에 어떤 때에, 즉, 부정 시제에 (1) 어떤 일의 시작 상태나, (2) 어떤 일의 종지 상태나, (3) 어떤 일의 복합적 존재 상태 자체를 단순히 표현할 때 aorist를 씁니다. 이런 까닭에 성경을 보면 명백한 과거, 현재, 미래의 사건 사실 표현에 공히 aorist가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역성경은 잘 번역하다가도 중요한 구절들을 '상태' 자체가 아닌 과거'시제'로 번역하여 구원파와 같은 크나 큰 신학적 오해의 빌미를 준다는 것입니다.
또, 그러면 이 경우가 왜 (1), (2)의 경우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 동사의 주어가 생명의 성령의 '법' 즉 원리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리란 어떤 일의 시종을 설명한다기보다는 복합적 원인을 나타내 줍니다. 이 경우가 종지상이 아님은 분명한데 혹자는 기동상이라고 합니다. 우리말로도 aorist로 잘 번역된 행 1:26의 '가입하니라'나 2:4의 '시작하니라'는 누가 봐도 aorist의 기동적 용례입니다. 그러나 로마서의 문맥을 보면 6장에서 8장까지 계속 말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영적 원리들에 대해서입니다. 세례를 통한 연합의 원리를 말씀하고 율법과 육신과 성령의 상호관계의 원리를 설명해 줍니다. 우리가 주목하여 살펴보고 있는 곳은 성령을 통한 해방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동일한 경우의 예로 같은 로마서의 한 구절을 봅시다.
(개역개정 롬 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Aorist)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Aorist)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Aorist) 함이라.』
후자가 분명히 미래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킴은 문맥으로나 의미로 볼 때도 분명합니다. 또 죄란 시제를 초월하여 언제라도 사망 안에서 왕노릇하는 것입니다. 또 은혜도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는 것이 항구적 원리이지 시간에 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우리말에 제대로 되었으나 영어로는 잘못 번역된 경우로 헬라어 aorist를 우리말 aorist로 번역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봅니다.
(계 11:17, 개역) 『가로되 감사하옵나니(현재) 옛적에도 계셨고(미완료) 시방도 계신(현재분사)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완료) 왕 노릇 하시도다(aorist)』
(Rv 11:17, NIV) 『saying: "We give thanks to you, Lord God Almighty, the One who is and who was, because you have taken your great power and have begun to reign.』
(계 11:17, KJV) 『Saying, We give thee thanks, O LORD God Almighty, which art, and wast, and art to come; because thou hast taken to thee thy great power, and hast reigned.』
위의 성구에서 밑줄 친 부분이 주님의 재림과 왕노릇하심을 예언하며 객관적 사실로 나타낸 것인데 영어는 aorist가 없으니 힘들게 현재완료나 현재완료를 응용한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말은 aorist를 써서 표현하니 얼마나 정확하게 그 뜻이 전달됩니까? 그런데 롬 8:2처럼 과거로 번역하면 전하려고 하는 의도가 왜곡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niv는 'have begun to reign'이라고 번역하여 주님의 영원한 통치자 되심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절 안에 미묘하게 서로 다른시제 표현들이 있지 않습니까? 시제마다 전달하려는 뜻이 달라집니다. kjv이 hast reigned라고 한 것이 원어의 의미와 맞지 않기에 살려보려고 발버둥을 쳐보지만 영어에 없는 aorist가 그 뜻대로 전달될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말 개역은 이 구절에서 제대로 aorist로 번역하여 완벽할 정도로 그 의미가 전달되고 있는 것입니다.
2. 롬 8:2의 전후문맥은 해방의 원리 설명합니다
인과 관계의 복문 구조를 이룬 1절의 시제가 '이제', 즉, 현재입니다. '현재 계속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즉, 성령을 따라 사는 자라야만 결코 정죄받지 않는 것이요, 반대로 13절에 경고한 대로 은혜로 그리스도인이 된 '너희'라도 육신을 따라 살아가면 '반드시' 정죄를 받아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절은 1절의 정죄 없음의 이유가 오직 성령께서 죄의 역동에서 해방시키는 것라고 합니다.
특별히 동방계열의 사본들이나 kjv은 '그리스도 안에서'란 바로 성령과 진리 안에서 어느 시대나 시간을 초월하여 순종하는 삶임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마귀와 세상과 육신을 따르다 범죄하여 성령을 소멸하면 정죄를 받을 것이니 반드시 회개해야 할 뿐이라고 합니다.
(개역 롬 8:1,2)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kjv과 헬라어 동방 사본들 롬 8:1,2) 『[1] There is therefore now no condemnation to them which are in Christ Jesus, who walk not after the flesh, but after the Spirit.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곧 육신(肉身)을 좇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현재분사) 자에게는 결코 정죄(定罪)함이 없나니) [2] For the law of the Spirit of life in Christ Jesus hath made me free from the law of sin and death.』
그러므로 그 반대의 경우에는 반드시 정죄가 있다고 하십니다.
(롬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현재) 반드시 죽을(현재)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현재) 살리니(Future)』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써의 율법을 불순종함이 죄요 죄의 삯이 사망인데 오직 성령께서만 율법의 요구대로 순종할 수 있게 해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롬 8: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현재분사)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Aorist) 하심이니라』
(고전 15: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또,
(롬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현재)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현재분사)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Future)』
그러므로, 성경은
(계 21:7) 『이기는(현재분사)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Future)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Future)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Future)』라고 선언하십니다.
또 같은 신약성경에
(살전 5:19) 『성령을 소멸치 말며(현재)』라고 하여 신자에게 성령의 소멸 여부가 말씀에 순종하는 거룩한 삶에 따르는 언약적 사실인 것을 가르쳐 줍니다.
또,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이란 지금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라고 성령께서 설명해 주십니다.
(요일 3:23,24) 『[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라 [24] 그의 계명을 지키는(현재분사) 자는 주 안에 거하고(현재)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현재)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현재)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현재) 』
여기서 다시 한 번 로마서 8장 1,2절과 7절을 같이 놓고 비교해 봅니다.
가)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느니라(였음이라)
나)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가), 나)는 문장 구조가 동일합니다.
둘 다 '이는'을 한 가운데 두고 있습니다.
둘 다 전반부에 '~나니' 형식의 우리말 aorist형 연결어미가 쓰여 시제 즉, 때보다는 어떤 사실과 원리 자체를 설명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한 후반부에서는 그 원리,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문맥을 따라 풀어보면,
가) '그러므로, 즉 속사람의 소원대로 하면 성령으로 하나님의 법을 따르게 되고 육신의 소원대로 하면 죄의 법을 따르게 되므로,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받지 않느니라.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생명의 성령의 원리가 있기에, 육신을 따르는 자에게 적용되는 죄와 사망의 법칙에서 너를 해방시키시기 때문이니라.
나)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느니라. 그 이유는 타락한 육신은 죄를 따르는 원리적 본성이 있어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않고 굴복할 수도 없기 때문이니라.
그래서 13절에는 1절과 반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살지 않고' 육신의 소욕을 따르는 자에게는 반드시 정죄가 있다고 분명하게 재확인하며 선언하는 것입니다.
3. 신학적으로 이 구절은 성화적 해방을 가리킵니다
과거적 죄에서의 해방이란 오직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에 의함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이란 로마서 7장에서 볼 때 죄의 역동적 영향력을 지칭합니다. 그러므로 역동적 죄의 영향력에서의 성령의 역사를 통한 해방이란 시제를 초월하는 사실입니다. *과거적이라 함은 영원하고 완전한 속죄 사역을 과거의 죄로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믿는 사건이 과거이기에 구별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칭의와 함께 성화가 시작된다고 하여 이 구절을 aorist 기동적 용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탈문법적인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의미는 미완료나 완료분사로 나타내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혼하다, 난리나다'와 같은 표현은 그 시작과 함께 지속적이기 때문에 기동상 aorist입니다.
그러나 중생과 함께 성화란 언약적 관계적인 특성이 있습니다. 이는 자연신론적인 본질적 변화가 아닙니다. 신자의 새 생명은 종말까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또한 범신론적 내주와 같은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자의 새 생명이란 영원히 성부 성자로부터 나오시는 성령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약 교회는 성령 충만을 구하는 기도 공동체입니다.
중생과 성화는 언약적이기에 성경은 범죄한 신자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진다고 한 것입니다(출 32:33, 시69:28, 계 3:5, 마 10: 33, 딤후 2:12). 그리스도인의 새 생명과 성화와 회개는 역동적 언약적인 것이기에 롬 8:2의 해방 사건은 aorist 복합상 용법이며 당연히 번역도 우리 말 aorist로 번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번역으로 인해 원 의미가 훼손될 위험이 있을 때나 aorist적 번역이 아닌 다른 번역을 시도할 일입니다.
4. 우리 말에는 aorist가 있습니다!
우리말은 aorist 동사나 형용사의 (어미)활용이 명확히 구분됩니다. 전 서울대 교수인 고영근 박사는 우리말의 aorist 현상을 원형동사형으로 과거를 나타낸다고 정의합니다. 임홍근교수는 원형동사꼴을 쓴 글을 절대문이라고 정의합니다. 우리말의 aorist 표현의 대부분의 특성을 간파한 정의들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물론 과거적 의미를 담은 것처럼 쓰인 경우가 많으나 미완료나 완료 과거완료 같은 과거 표현 시제가 엄존한데도 aorist꼴을 쓰는 의미는 그 행동의 '절대값' 자체에 강조점을 두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사전의 표제어꼴처럼 aorist는 말 그대로 부정시상이라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구 특히 영역 성경의 번역처럼 aorist를 취급할 것이 아니라, 성경 번역 주해시 최선을 다해서 그대로 한국어의 aorist로 대응 번역해야 할 것입니다.
간단히 시제 표현 어미를 나열해보면
'과거-현재-미래-aorist'는
'-었,더-'
'- 는,ㄴ-'
'- 겠,리, ㄹ 것-'
'-0-'
등의 조합입니다. 여기서 -0-로 표현한 것은 무표적 부정시상 표현입니다.
예) 먹었다-먹는다-먹겠다-먹다
해방했다-해방한다-해방하겠다-해방하다
이런 경우의 무표적, 곧, -0-형, 원형동사형의 aorist는 시제와 무관하게 사실 그 자체를 흑백사진처럼 단면적으로 나타냅니다. 이 aorist는 사전 표제어, 신문 기사, 서간문, 시, 일기, 회의록, 역사 기록, 종교의 경전들 등 상당히 넓게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일반적 서술문 형식의 마 27:50은 전형적인 표현으로 존칭선어말어미 '-시-'를 가진 경우의 예입니다. '소리 지르다'와 '떠나다'는 aorist입니다. niv는 과거완료와 과거로 번역했습니다.
(마 27:50, 개역)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Mt 27:50, NIV) 『And when Jesus had cried out again in a loud voice, he gave up his spirit.』
동일한 사건을 막 15:37, 눅 23:46엔 '운명하시다'라 한 것이나, 마 14:23, 막 6:46에서 ~ 산에 '올라 가시다', 마 16:4에서 '떠나 가시다', 막 11:11에서 '나가시다', 마 17:17에서 ~ 데려오라 '하시다', 요 8:1에서 ~ 산으로 '가시다', 요 18:1에서 ~ 함께 '들어가시다' 로 번역된 경우들도 aorist에 대한 바람직한 번역입니다. 덧붙이는 말이지만 위의 경우들도 성경의 전체적 흐름과 같이하여 해라체의 어미인 '-니라'를 써서 '떠나시니라', '올라 가시니라'라고 통일하면 더 나을 것입니다.
성경의 경우에는 '어른이 아랫사람에게 어떤 진리나 사실을 넌지시 알려 주는 경우의 해라체 어미인 '-느니라, -니라'와 같은 부정시제적 표현들을 써서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8:2절은 로마서에서 중추와 같이 중요한 곳입니다. 다시 봅시다.
(롬 8:1,2, 개역)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느니라(였음이라)
2절은 1절과 대등한 관계 속의 이유와 원리를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1,2절 관계는 대등관계 속에서 1절의 이유가 되는 진리를 2절에서 밝혀 주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롬 8:2절의 [해방하였음이라]로 번역된 Aorist는 단순한 사실적 진리 서술이기에 시간을 초월하여 어느 시대에나 적용되는 진리이기에 [해방하(느)니라, 해방함이니라] 정도로 번역함이 합당한 것입니다. 물론 앞에서 예로 든 행 1:26, 2:4처럼 개역 성경은 많은 곳에서 aorist를 '-하니라, -하느니라'로 번역하고 있고 마 27:50의 '떠나시다'처럼 -0-다-로 무표적 부정시상으로 잘 번역하고 있음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신학교육에서 aorist를 '단순과거'나 '부정과거'로 잘못 가르친 것을 확실하게 보여 주는 경우라 할 것입니다. 미국의 전수성경공회는 필자의 이런 지적을 3년여 만에 받아들였습니다(아래 표). 또 필자는 더 나아가서 기동상이나 종지상의 경우는 '-니라'가 좋을 것이나 원리를 계시하고 있는 복합상 aorist인 본 절의 경우는 '-느니라' 꼴을 써서 '해방하느니라'라 함이 바른 번역임을 제안했고 그들도 그것이 '더 나은 번역'임을 답변했습니다. 또 영어나 서구어 번역의 경우에도 aorist가 없으니 '진리를 표현할 때 현재시제로 표현하는 경우'를 따르면 좋을 것입니다.
'~ 해방함이니라.' (명사적 부정시상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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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teth~free from~ (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