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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림의 소리

방등경은 감로와 같고 독약과 같다.

작성자현림|작성시간26.06.17|조회수29 목록 댓글 0

 

 

『방등경(方等經)』은 대승 경전(大乘經典)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이치가 보편적이고 평등하다는 뜻으로 방등경이라 한 것이다.

감로는 불로장생을 의미하는 약이다. 여기서 불로장생이란

생사를 초월한 열반을 상징한다.

 

“방등경은 감로와 같고 독약과 같다.”라는 이 말은

『대반열반경』 <여래성품>에 나오는 부처님 말씀이다.

경의 게송에 이르기를

 

「어떤 이는 감로를 먹고

몸이 상하여 단명하였고

어떤 이는 감로를 먹고

수명을 연장해 장수했으며

어떤 이는 독약을 먹고 살았다 하고

어떤 이는 독약을 먹고 죽었다 하네.

 

걸림 없는 지혜가 감로

이른바 대승 경전도 또한

독약이라고도 하니

소(穌)ㆍ제호(醍醐) 등과 같이

모든 석밀(石蜜)까지도

잘 삭이면 약이고

못 삭이면 독이라네.

 

방등경도 그러하여

지혜 있는 이는 감로라 하나

어리석은 이는 불성을 몰라

먹으면 독약이 되고

성문, 연각에겐

대승이 감로 된다네.」

@불교 입문의 첫 관문은 불법승(佛法僧) 삼보의 이해다.

그래서 불교의 경(經)마다 이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부처님은 성문이나 범부들처럼

그렇게 삼보를 분별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왜 그런가 하면 대승 경전에는 삼귀의의 차별된 모양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불성(佛性) 가운데 법(法)과 승(僧)이 있지만

성문과 범부들을 교화 제도하기 위한 것으로

단지 모양이 다름을 분별하여 말한 것일 뿐이라고 한다.

사찰에서 예불할 때 이를 예찬하는 것도

중생들을 교화하고 제도하기 위해서 분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두고 미사여구로 장엄하게 설명한 것은

대승 경전에서 부처님이 설한 여래의 비밀스러운 법장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중생들을 위하여 방편으로,

세간법으로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다. 『마하반야바라밀경』의 말을 빌리자면

불법승이란 단이 이름일 뿐

실체가 없는 것을 분별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예를 들면 부처를 여래, 응공(應供), 선서(善逝), 조어장부(調御丈夫),

천인사(天人師) 등등 10가지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는 부처님 공덕의 모습을 말한 것인데

이를 마치 실존하는 실제인 양 여긴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아름다운 여인을 요염한 장미에 비유하기도 하고,

맑고 깨끗한 백합에, 청렴한 수선화에 비유하지만

여인은 장미도 아니고, 백합도, 수선화도 아닌 것과 같은 것이다.

 

이는 실체를 말할 수가 없기에 말과 글로서 방편으로 분별한 것인데

그 참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드러난 말에 집착하여

갖가지 희론을 짓고 이해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그러므로 방등경은 잘못 이해하면 독약도 되고

바르게 이해하면 감로가 된다고 한 것이다.

또 대승 경전의 교리는 계정혜(戒定慧)의 삼학을 근본으로 삼는다.

()는 위의(威儀) 즉 몸가짐을 말하고,

정(定)은 마음의 불난(不亂) 곧 삼매를 의미하고,

혜(慧)는 지각(知覺)이니 곧 불성을 이해하는 지혜를 의미한다.

이는 대승 경전뿐만 아니라

모든 경전에서 일관된 부처님 말씀이기도 하다.

이 삼학의 시작은 계(戒)로 시작한다.

초행자가 처음부터 정혜(定慧)를 수행하기가 어렵기도 하지만

수행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계(戒)를 중시하는 것은 당연하다.

계(戒)의 의미를 좀 더 살펴보자.

 

계(戒)란 금제(禁制)란 뜻이지만

소극적으로 보면 방비(防非), 지악(止惡)을 뜻하고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만선(萬善) 발생의 근본이 된다.

이런 의미를 통하여 교학에서 계(戒)를 강조하여

몸을 다스리고, 어지럽고 산만한 마음을 다스려 정(定)에 들어

일체 고(苦)를 벗어나 바른 지혜를 성취하라는 것인데

그 지혜는 불법의 핵심인 공(空)과 무아(無我)를 이해하여

그 도리를 성취하여 깨달음으로서 열반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행자는 계(戒)의 수행이 37조도품을 비롯하여

많은 절차와 단계가 필요한데 이는 너무 어렵고 난해하여

수행의 과정을 밟는 동안 계(戒)에 집착하여

불법의 핵심인 무아(無我)와

공(空)의 도리에 관한 혼선을 빚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계(戒)가 중요하지만, 경의 본뜻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여

집착하고, 집착함으로 분별을 낳고, 분별함으로 전도(轉倒) 되거나

외도와 같은 사견(邪見)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이를 법애(法愛)라 하는데

법애(法愛)를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법애란 견(見)이나 법(法)에 집착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그래서 방등경은 경마다 법애와 관련하여 표현을 달리하여

경계하고 있는데 그 한 예로 『대승광백론석론(大乘廣百論釋論)』은

계(戒)와 공(空)의 비중을 이렇게 말한다.

「경에 이르기를

“차라리 계행을 파할지언정 바른 소견을 헐지 말라” 하셨으니,

이게 무슨 뜻이겠는가.

계행을 파하는 이는 스스로를 무너뜨릴 뿐이지만

만일 바른 소견을 무너뜨리면 나와 남을 겸하여 무너뜨리고

한량없는 생을 통하여 괴로움을 받고, 또 한량없는 이익을 잃는다.

또 계행을 범하는 이는 계를 범한 까닭에

항상 부끄러운 생각을 품고, 스스로를 꾸짖으나

바른 소견을 무너뜨린 이는 부끄러움이 없고

삿된 소견을 찬성하면서 항상 뽐낸다.

또 계를 범한 이는 삿된 소견이 더하지는 않으나

만일 바른 소견을 무너뜨리면 계를 파하는 죄악이

아직 생기지 않았는데 생기게 하고 생긴 뒤엔

더욱 견고해져서 파괴하기 어렵게 한다.

또 계를 파하면 다만 하늘에 태어날 길을 막지만

바른 소견을 무너뜨리면 열반의 즐거움을 막는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계행은 좋은 길에만 나아가지만

바른 소견은 열반을 얻기 때문이다.

 

계를 파하거나 바른 소견이 무너지면 착한 원인을 손상하고

즐거운 결과를 장애 한다고 말하지만

파계(破戒)는 가볍고 소견을 무너뜨린 것은 극히 무겁다.

계를 지키면 하늘에 태어나되 결박을 더 하여 생사의 괴로움을 받지만

바른 소견은 능히 3승의 보리를 증득하고 열반의 즐거움을 얻는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이는 바른 소견을 파괴하지 말라.

여기서 바른 소견을 파괴하지 말라는 의미는

부처님이 말한 불성의 참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경의 참뜻을 잘못 이해하여 계(戒)에만 집착하게 되면

작은 소득은 있을지 몰라도 참 진리가 아니므로

마치 꼬리가 머리를 흔들게 되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다른 견지에서 보면 이렇게 세간의 열등한 지혜를 가진 무리가

‘나’에 집착[我執]하게 되는 근본 이유를 보면

이는 곧 살가야견(薩迦耶見:몸이 있다는 고집)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 <나>란 소견은 내 것(我所)이란 소견도 겸하여 지니기 때문에

‘나’에 대한 집착이란 말도 역시 저 소견에 포섭한다.

‘나’라는 집착은 비록 바른 이치에 맞지는 않더라도

차라리 그가 일으키는 허물은 가볍거니와 공하여

‘나’ 없다는 소견은 비록 바른 이치에 맞으나

그가 바르게 알지 못하면 그로 인하여 모든 법이 모두 없다고

비방하는 허물이 중하기 때문에 차라리 일으키지 말라고 한 것이다.

이 두 가지 허물이 왜 중하고 가벼운가 한다면

이른바 처음의 ‘나’라는 집착은 오직 열반을 등 질뿐이거니와

나중의 나쁘게 취하는 ‘공’은 겸하여 나쁜 길에까지 빠지기 때문이다.

불법 수행의 목적이 해탈과 열반인데 이로 인하여 열반과 멀어지고

해탈을 증득 못한다면 수행하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에 말씀하시기를

“차라리‘나’라는 소견을 수미산과 같이 일으킬지언정

나쁘게 ‘공’을 취하고서 뛰어난 체하지 말라”고 까지 말하는 것이다.

이는 수행의 목적이 계율을 지킴보다

정(定)과 혜(慧)를 더 중시하라는 의미다.

달리 표현하면 세속의 법은

도덕적인 사람은 착한 사람이지 지혜 있는 자가 아니며

비세속적인 사람은 착한 사람은 아니지만 지혜로운 자라는 것이다.

또한 경에서 설한 공(空)과 무아(無我)에 대한 참뜻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여 전도(轉倒)되어 사견(邪見)을 갖는 중생들이 있다.

중생들은 오온의 가합체에 불과한 존재임으로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무상한 허망한 존재이며,

따라서 즐거움도 없고, 괴로움만 있을 뿐

해탈이나 열반이라는 것은 없다고 여기는 중생들에게는

열반의 상락아정(常樂我淨)을 설하고, 반대로

나는 영원한 존재이며 즐거움과 청정한 몸이라고 여기는

중생들에게는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설한 것이다.

이렇게 상반된 교리를 경에서 말하는 것은 <아>와 <법>의 실체에 대한

유무(有無)의 문제는 어떤 희론이나 분별의 경계가 아니므로

여기에 집착하는 그 마음을 깨트리기 위함인데

이를 알지 못한 완피달이나 일천제와 같은 중생들은

전도(轉倒)된 마음으로 사견(邪見)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중생들은

“법은 없다.” “나라는 것은 없다”라는 말에만 집착하여

온갖 인과(因果)의 바른 이치를 무시하며,

내지는 온갖 선의 근본을 끊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스스로의 소견에 허물이 있을 뿐이요,

공(空)항과 ‘나’ 없음의 허물에 있는 것은 아니다.

나쁜 집착의 공[惡取空]에 의하여 허망하게도 삿된 소견을 일으키어

온갖 나쁜 짓을 행할 뿐이다.

공(空)항과 ‘나’ 없음의 진리는 말이나

마음으로 헤아릴 바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범부는 모든 법은 모두가 공하다는 말을 들으면

부처가 말한 경의 참뜻은 알지 못하고 이내 말하기를

“세속의 인과도 없고, 온갖 착한 법도 없는 것이다.”라고 무시하니,

이 어찌 경의 참뜻을 바르게 이해했다고 하겠는가.

 

그러하므로 방등경에서 설하는 모든 교리를 잘못 알면 독이 되고

바르게 이해하고 소화하면 감로가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경전에서 또 핵심 교리로 사성제(四聖諦)와 12연기를 말한다.

사성제 고집멸도(苦集滅道)의 교리로 고통과 고통의 원인,

그리고 그 고통을 멸하는 것과 그 멸에 이르는 방법을 예시한 것이다.

12연기는 욕구(欲求)가 있으므로 불명(不明:무명)이 되고,

그 무명으로 인하여 행()이 있으며, 지어감으로 인하여 식()이 있고,

식으로 인하여 명색(名色)이 있으며, 명색으로 인하여 6()이 있고,

6입으로 인하여 즐거움[更樂]이 있으며,

즐거움으로 인하여 고통[]이 있고, 고통으로 인하여

애욕[]이 있으며, 애욕으로 인하여 수()가 있고,

수로 인하여 유()가 있으며, 유로 인하여 생()이 있고,

태어남으로 인하여 늙고 죽음과 근심, 슬픔, 괴로움

번민 따위가 있다는 교리다. 이것은 괴로움의 습성이 구족하게 되므로

나고 죽음의 근본이 있게 된다는 것을 말한 것으로

마치 수레바퀴와 같아서 윤회가 이어짐을 설한 것이다.

사성제와 12연기를 설한 목적은 중생을 위한 세간법으로 이를 설함으로써

무루(無漏)의 지혜를 일깨우기 위함인데

중생들은 경을 보면서도 이를 알지 못하고 도리어 분별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무명의 인연으로 모든 행(行)이 있다고 하면

범부들이 듣고 분별을 일으켜

명(明)과 무명(無明)이라는 두 가지라는 생각을 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그 성품이 둘이 아닌 것을 통달하여

둘이 아닌 성품이 곧 실다운 성품임을 안다.

마찬가지로 모든 행의 인연으로 식(識)이 있다고 하면 범부들은

행과 식이 둘이라고 생각하고,

만일 10선(善), 10악(惡), 해도 될 일[可作], 해서는 안 될 일[不可作]

좋은 갈래, 나쁜 갈래, 흰 법[白法], 검은 법[黑法]을 말하면

범부는 둘이라고 말하고, 또 만일 온갖 법이

괴로운 것임을 닦으라고 말하면 범부는 둘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이는 그 성품이 둘이 없음을 알고,

둘 없는 성품이 실다운 성품이라 할 것이다.

 

만일 모든 행법이 무상하고 여래의 비밀스러운 법장도 무상하다고 말하면

범부는 둘이라고 하고,

만일 온갖 법이 내가 없고 여래의 비밀스러운 법장도 내가 없다고 말하면

범부들은 둘이라고 말하고, 나와 내가 없음은 성품이 둘이 아니니,

여래의 비밀스러운 법장이 이치가 그러하여 말할 수 없고

한량없고 가없는 부처님들이 칭찬한 것인 것을

중생들은 경을 보면서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고 함은 한 법인 법을 보고

법의 두 성품을 둘로 보는 것을 말함인데

이는 곧 보리심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보리심이란 무엇인가?

『마하반야바라밀경』에서 보리심을 이렇게 말한다.

「보리라고 말하는 것은 단지 이름만이 있을 뿐이며,

언어로 보리라고 할 뿐이다. 왜냐하면, 이 보리는 있는 것이 아니며,

보리는 근(根)도 없으며. 보리는 머무름도 없고,

보리는 더러움[垢]이 없으며, 보리는 티끌[塵]도 없으며,

보리는 무아(無我)이며, 보리는 잡을 수 없으며,

보리는 색(色)이 없으며, 보리는 형상이 없으며, 보리는 여기에도 없고,

보리는 저곳에도 없으며, 보리는 근심도 없고, 보리는 고뇌도 없으며,

보리는 집착도 없고, 보리는 물듦[染]도 없으며,

보리는 끝도 없으며, 보리는 행위[爲]도 아니다.

보리는 탁함도 없으며, 보리는 모든 근(根)을 초월하며,

보리는 모든 기억과 상(想)과 염(念)을 없애며,

보리는 이미 모든 유위(有爲)의 행(行)을 뛰어넘으며,

보리는 바닥[底]이 없으며, 보리는 알기 어려우며, 보리는 매우 깊으며,

보리는 문자가 없으며, 보리는 모습[相]이 없으며,

보리는 적정(寂靜)하며, 보리는 청정하며, 보리는 위가 없다.

보리는 사유(思惟)가 아니며, 물질이 아니며, 보리는 무위(無爲)이며,

무견(無見)이며, 보리는 상주(常住)하는 것이며, 보리는 허공(虛空)이며,

보리는 무등등(無等等)이며, 보리는 말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방등경을 음미하면 이렇게 병(病)과 약(藥)을 함께 말하지만,

중생은 병(病)에만 집착하여

그 처방된 약(藥)을 알지 못하거나 잘못된 견해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런데 말과 글로 표현하려면 그 대상이 모양 즉 상(相)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상이 없는 보리심에 대한 설명은 공허한 소리인가?

그런데 대방광총지보광명경또한

「보리에는 희론도 없고 희론을 여읜 것도 아닙니다.

이 보리에 희론이 있다거나 보리는 희론이 아니라거나 하는 것은

언어나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면서,

더 나아가 「공해탈문은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요, 무상, 무원, 해탈문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며,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요, 괴로움의 발생ㆍ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며,

4정려는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요, 4무량, 4무색정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세간의 법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요,

출세간의 법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며,

유루(有漏)의 법은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요,

무루(無漏)의 법은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요,

무위(無爲)의 법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한 경에서는 이것이다.”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름일 뿐이다라고 한다.

이러한 역설적인 대귀는 방등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리다.

이는 방등경이 병(病)과 약(藥)을 함께 설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병(病)만 설하고 약(藥)을 설하지 않거나

때로는 약(藥)만 말하고 병(病)을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방등경을 그렇게 설하는 것인가?

중생이 하는 말과 글에 대하여

『대방광사자후경(大方廣師子吼經)』은 이렇게 정의한다.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음성과 언어는 전부 4무애지(無礙智)에 들어간다.

언설(言說)이라는 것은 법무애지(法無礙智)에 해당하며,

언설 아닌 것은 의무애지(義無礙智)에 해당하고,

언설로써 분별하고 나누는 것은 사무애지(辭無礙智)에 해당하며,

현상적인 일로 더불어 상응하여 전혀 막힘이 없게 하는 것은

선설무애지(善說無礙智)에 해당한다.라고 했다.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언설은 전부 이 네 가지 법구(法句)에 포함되지만,

진실한 의구(義句)는 본래 부동(不動)한 것임을

중생들은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동(不動)이라 한 것은 무애지(無礙智)

부처님의 통달(通達) 자제(自在)한 지혜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비유하면 마치 태어날 때부터

소경인 자가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짐작은 하지만,

진실로 보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그러므로 법을 구하려는 자는

자신에게서 구해야 하고, 보리(菩提)를 구하려고 하는 자는

5()에서 구해야 하느니라.라고 했다.

모습 즉 상()이 없는 것은 말과 글로써 표현할 수가 없다.

말과 글로써 표현할 수 없다면 중생들에게 전달할 수 없다.

그러면 무엇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교화하여 해탈과 열반으로 이끌 것인가?

그래서 모양이 없는 것(非相)을 모양()을 지은 것이 경의 말과 글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참뜻은 부동인데 그것을 이해하는 중생은

근기(根器)가 다르게 때문에 자기의 근기에 따라 이해하고

받아드리게 되므로 분별과 희론을 짓게 되는 것이다.

윗글에서 자신에게 구해야 한다는 것은

드러난 상()에 집착하지 말고 스스로 정혜(定慧)로 해결하라는 의미다.

이에 대하여 <조론>의 저자인 승조법사는

일체의 법에는 문자(文字)도 없고 설법할 것도 없으며

문자의 자성까지도 다 여의었기 때문이요,

모든 법은 생겨나는 일도 없고 생겨나는 자성까지도 다 여의었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나아갈 곳도 없고 바른 것에 나아감도 끊어졌기 때문이요,

모든 법은 나타나는 것도 없고 의지하는 곳도 없기 때문에,

(), (), ()을 초월하여 모든 인연을 여의고,

이름도 없고 언설도 없으며 조작함도 없고

보임도 없어서 허물 있는 눈[] 등의 길에 쌓아 모아둘 것도 없느니라.

그리고 생겨남이 없기에 생각도 여의어서 처소마저도 없으니,

모든 처소까지도 여읜 법은 오직 한 글자뿐이니, 이른바 ()’ 자이다.

본래부터 언설이 없거늘 어찌 언설로 말할 수 있겠느냐?라고 했다.

세간의 법은 말과 글이다. 이를 벗어나는 무루법의 이해는

오로지 선정에서 찾아야 한다는 의미다. 이는 계()의 수행도 어렵지만,

()의 수행은 더 어렵고, ()에 들어 혜()의 경지를 알았다고 해도,

그 혜()의 경지에서 보고 느껴진 그것을 중생들에게 전달하기는

더욱더 어렵다는 것을 단적으로 비유한 것이다.

 

보리는 구하려면 오온에서 구해야 한다는 오온은 곧 중생을 의미한다.

중생 밖에서 구하지 말고 중생 안에서 구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는 법의 바른 이해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구해야 한다는 말과 같은 의미다.

드러난 말과 글의 의미가 아니라 그 말과 글 속에 숨은 의미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본다면 말과 글이란 세속의 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승밀엄경(大乘密嚴經)에서도 이르기를

세간의 모든 법과 일체는 오직 이름이 있을 뿐입니다.
다만 생각으로 세웠을 뿐

이름을 떠나서는 별다른 뜻은 없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방등경은 왜 경마다 다른 이름과 서술 방식이 다른가를 살펴보자.

부처를 삼신불로 표현한다.

법신불(法身佛), 보신불(報身佛), 응신불(應身佛)이다.

이는 부처가 3개의 몸()을 가진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작용이 3가지라는 의미다. 그 삼신의 핵심은 법신(法身)이다.

원래 법신(法身)은 하나의 모습이건만

우러러보는 사람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지고,

바른 가르침[正敎]은 치우침이 없건만 말하고 듣는 이에 따라 그 뜻이 달라진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 고르게 내리는 비[]에 비교하셨건만

제자들은 그 말을 달리 들었으니 진실로 근기를 따라

법을 수여(授與)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릇의 얕고 깊음을 따르다 보니

십이분교(十二分敎)의 큰 강령과 팔만법문(八萬法門)

많은 파벌이 생겨난 것이다그것이 바로 방등경이 그렇게 많고

서술 방식까지 다른 이유인 것이다.

 

방등경에 설하는 모든 법은 법성이니,

진여니 하는 갖가지 이름이 붙여져 있다.

그 이름이란 무엇인가? 인연(因緣)이 화합하여 지어진 이름이 법이다.

이는 단지 분별하고 기억하고 생각하는 일에 임시로 이름 붙여진 것이다.

그러므로 반야경에서 보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온갖 이름을 보지 못하며

보지 못한 까닭에 집착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붙여진 이름들이 실제와 다른 허망한 것인가?

아니면 같은 것인가? 이것을 능가경에서 이렇게 설하였다.
비유하자면 마치 거울 속에 보인 상()은 동일한 성품도 아니며

다른 성품도 아닌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관할 때, 이 성품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동일함과 다름의 성품[一異性]을 여의기 때문이며,

동일함과 다름의 성품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경에서 속제(俗諦: 세간법)와 진제(眞諦: 출세간법)를 들어서 말한 것 또한

중생들의 이해를 위한 것이다. 그래서 경은

진 제(眞諦)란 여기에 나아가서 전혀 얻을 것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니,

제일의(第一義)라고 설한 것과 같이 지혜의 인식 영역이 아니거늘

더구나 문자(文字)야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 내외(內外)와 세간ㆍ출세간의 일체 법의 모습과 모든 공덕에 대한

설명이 바로 속제를 건립한 것이니,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할 것이다.라고 했고,

상협경(象脅經)에서는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다 취할 수도 없는 것이며

설명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요. 법이 아닌 것도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또 법의 취사(取捨) 문제에 관하여

대방광총지보광명경(大方廣總持寶光明經)은 이렇게 말한다.

「보리에는 희론도 없고 희론을 여읜 것도 아닙니다.

이 보리에 희론이 있다거나 보리는 희론이 아니라거나 하는 것은

언어나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空)은 소리나 색을 여의었고 온갖 언설을 여의었으나

언설을 여읜 것도 아니다. 선남자여, 법성(法性)도 이와 같다.

공(空)이 문자를 여의었기 때문에 공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또한 말[言]을 여의었기 때문에 공이라고 말하니

선남자여, 공(空)이란 일체 법들의 자성(自性)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이어서

「존자 사리불이시여, 이 공이 만약 언설을 여의었다면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존자 사리불이시여,

일체 모든 법이 모두 언설을 여의었는데

만약 이렇게 말한다면 누가 듣고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장로 사리불이 말했다.

“선남자여, 저 일체법은 모두 문자와 언어를 여의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空), 무상(無相), 무원(無願)이라고 말하고,

취하는 것도 아니고[非取] 버리는 것도 아니며[非捨],

다른 것도 아니고[非理] 다르지 않은 것[非不異]도 아니며,

희론(戱論)을 여읜 것도 아니고 희론을 여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상근기의 중생이라도 이 말의 참뜻을 바르게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하근기의 중생은 어떠하겠는가.

그러므로 하근기의 중생들이 자기의 근기에 맞추어 필요한 말만 취하여

소견을 갖기 때문에 방등경은 독이 되기도 하고 감로가 되기도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두고 옛 고승(古僧)들이 이르기를

”경을 볼 때 글자를 보지 말고

글과 글의 행간(行間)을 보라.”라고 말한 것이다.

경의 글자만 보고 따라가면 독이 되지만,

행간을 음미하면 감로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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