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제(四聖諦)에 관련된 법문을 통칭하여 사성제경(四聖諦經)이라 하는데
사성제경은 아함부 즉 장아함, 중아함, 잡아함. 증일아함에 의거하여
품(品)이나 단일 경(經)으로 설해진 법문을 통칭하는 말이다.
@아함(阿含)이란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아가마(āgama)' 인데
번역하면 전(傳), 법귀(法歸), 무비법(無比法), 취무(趣無), 교(敎) 등을 뜻한다.
傳이란 말은 차례차례 이어받은 의미로 삼세제불의 傳說 하는 의미하고,
法歸는 만법에 歸趣하는 의미다. 無比法은 비교할 수 없는
묘한 법이라는 뜻이며, 趣無는 설한 바의 뜻이 필경에는
歸趣하는 곳이 없다는 뜻이다.
또 아함경은 아함부에 속하는 소승경전의 總稱으로 남전과 북전이 있어
경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나는 것도 있다.
사성제경은 부처님이 보드가야(Bodh Gaya)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보드가야에서 무려 230km나 떨어진
녹야원을 찾아가 그곳에서 머물고 있는 옛 도반이었든 5 비구에게
설법하신 부처님의 초전법륜의 대강(大綱)으로,
현실적인 인생의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三毒과 五欲을 끊고
자아 완성으로 해탈의 경지에 이르도록 권고하신 내용을 담고 있는 교리다.
@이러한 四諦설은 아함에서 설하는 <三法印>과 <緣起法> 등의 교리와
내용 면에서 동일시되고 있다. 아함경의 모든 교리는 이 사제설과
연기설에 근거하고 인용되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이 설한 교리 중
가장 핵심적이며 또한 아함의 핵심 교리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법문을 다른 법문과 달리 유일하게 <제(諦)>를 붙여
<사성제(四聖諦)>라 명명된 것이다.
화성구봉산 신흥사
@<제(諦)>란 범어 satya (팔리어 sacca)로 의미는 眞實不虛를 뜻한다.
진실한 도리로 허망하지 않다는 것을 말함이다. 진리라는 의미다.
그래서 경에서 진리를 구별할 때 俗事의 허망한 도리를 俗諦라 하고,
열반의 寂靜한 도리를 眞諦라 부르는 것이다.
그 의미를 좀 더 살펴보자.
眞諦라 함은 眞言의 변제(邊際)로 곧 至極하다는 뜻이다.
空과 평등의 眞性이라는 의미이다.
『仁王經 上』에 <모든 법성은 진실하므로 無來, 無去 無生
無滅하여 眞際와 같고 法性과 같다>라고 했고,
『유마경 아촉품』에서는 < 非有相, 非無相하여 眞際와 같고.
법성과 같다>라고 했다. 여기에 반하여 俗諦는 世諦라고도 하는데
俗은 俗事 또는 俗人을 의미하며. 一切因緣生의 事相을
진리에 대하여 俗이라 하며 또는 俗人이 아는 것임으로 俗이라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諦>는 진실한 도리 즉 俗事上의 도리를 俗諦라 하며
또는 속인이 아는 도리를 속제라 한 것이다.
사성제는 부처님이 설한 진리임으로
『大日經疏8』에서는 <諦란 여래의 眞實句다>라고 했고,
『義林章2末』에 <諦란 實의 뜻 有如實有와 無如實無로
有無가 허망하지 않음을 諦라한다.>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事는 如實한 事며, 理는 如實한 理로
理事가 어긋나지 않음을 諦라 한다>고 했다.
『二諦義上』에 <諦는 實의 뜻, 有는 凡實이며 空은 聖實이다.
이 二는 모두 實이다.>라고 했는데 이는 제(諦)의 의미가 허망하지 않은
진실함을 사(事)와 이(理)의 도리로 설명한 것이다.
여기서 속제(俗諦)와 진제(眞諦)의 의미를 부연 설명하는 것은
후술 될 사성제의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제(四諦)의 도리 중
고제(苦諦)와 집제(集諦)는 유루(有漏)이며, 멸제(滅諦)와 도제(道諦)는
무루(無漏)인데 이는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의 관련성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것임을 먼저 밝히고자 함이다.
사성제(四聖諦)의 <성(聖)>은 <所見의 諦理가 되므로 聖諦라는 뜻이다.>
풀이하자면 聖은 正이다. 正眞의 諦理가 되므로
이름은 성제(聖諦)라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인왕경12』에 <고집멸도를 사성제라 한다.>라고 한 것이다.
사성제(四聖諦)는 고제(苦諦), 집제(集諦), 멸제(滅諦), 도제(道諦)를 말한다.
@苦諦는 현실의 相을 나타낸 것이다. 현실의 인생은 苦라고 觀하는 것이다.
이는 諸行無常과 諸法無我의 우주관과 인생관에서 일어나는
주관적 가치판단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고제는 현실에 존재하는
유정의 苦를 중점적으로 말한 것으로 유정 각자의 心中으로부터 일어나는
어떠한 발동에 의하여 業(선업과 악업)이 있게 되고, 이 업의 세력에 의해서
유정의 현실이 초래된다. 이것은 인과(因果)의 이치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因이 원래부터 혹업(惑業)이므로 그에 관한 결과는
善이 아닌 惡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善因善果, 惡因惡果의 因果律의 법칙이 생기고
여기서 일어나는 연기는 현상계의 피할 수 없는 원칙이 정립된 것이다.
현실적인 현상계는 인과율의 법칙에 따라서 이루어지므로
善과 惡은 有漏인 것이다. 그러나 有漏라는 말은
理想界인 無漏의 가치를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有漏善*에 국한된 말이 아니고
無漏善*에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인과율에 지배되는
현상계의 유정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인과에 속박되어 자유가 없는 곳을
벗어난 理想界를 실현하고자 하는 데에 불교의 목적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유루선(有漏善): 대 소승에서 무루지(無漏智)를 일으키기 전에
범부가 하는 선(善)한 일로 오계, 십선 등과 견도(見道) 이전에 일어나는
선(善)한 일을 말함.
*무루선(無漏善): 오염되지 않은 선(善)으로
견도(見道) 이상의 성자(聖者)가 일으키는 선(善)
**성문이나 보살이 수행하는 과정의 3단계를 삼도(三道)라 하는데
견도, 수도, 무학도가 있다. 견도(見道)는 온갖 지적인 미혹에서 벗어나는 단계를,
수도(修道)는 온갖 정의적(情意的) 방면의 번뇌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수행을 하는 단계를,
무학도(無學道)는 수행을 완료하여 배울 것이 없는 단계를 말한다.
@고제는 일체 유정이 살고자 하는 맹목적인 본능의 발동력을
因인 惑業으로 하고, 여러 가지 활동력을 助業으로 해서
인생의 현실이 苦가 발생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 惑, 業, 苦는 因, 緣, 果의 관계이니
이것이 바로 인과관계(因果關係)인 것이다. 이 因果關係는
유정세계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고 無情界 즉 器世界에도 통하는 것이다.
이 인과관계는 유정의 의지 여하에 따라서 활동이 있고,
이 활동에 의해서 성립되며` 또 무한히 상속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정세계와 기세계가 단절되지 않고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혹업고의 인과관계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惑業의 因에 의해서 현재의 苦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고과의 現生은 또 惑을 발하고 이 惑因에 의해서 業의 활동력이 생기어
새로운 苦果를 일으키게 된다. 그러므로 유정세계와 기세계(器世界)는
혹업고(惑業苦)의 인과관계의 순환으로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므로
일체 유정의 생사윤회의 苦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苦가 생기며,
공간적으로는 六道四生을 막론하고 惑과 業力의 실질에 따라서
삼계의 윤회하는 苦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경에서 말하는 <八苦>인 것이다. <팔고(八苦)>란 태어나는 괴로움, 늙는 괴로움,
병드는 괴로움, 죽는 괴로움, 사랑하는 것과 이별하는 괴로움[愛別離苦],
미운 것과 만나는 괴로움[怨憎會苦],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괴로움[求不得苦],
다섯 가지 음으로 성하는 괴로움[五陰盛苦]이다.
이 중에서 제일 괴로운 것은 死苦이다.
그러므로 苦를 三界, 六趣, 25有의 正報와 依報를 총칭하여 경은 설하고 있다.
@集諦는 고제의 이유 근거 혹은 원인을 밝히는 것이다.
인생의 고(苦)는 번뇌인데 이는 愛慾과 業이다.
集은 초집생기(招集生起)라는 의미다. 이는 번뇌의 다른 이름이다.
集의 근원은 모든 번뇌의 근본인 갈애(渴愛)에서 나온다.
그래서 중생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不自由. 不自主的인 생활을 한다.
갈애의 근본은 無明이다. 그래서 12연기의 順觀을 集諦에 배대한 것이다.
무명에서부터 미혹한 세계와 미혹한 인간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苦諦는 번뇌의 결과인 미계(迷界)이고
집제는 미계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제는 招集의 뜻으로 有漏業과 번뇌를 지칭한다.
이것이 중생계의 고통의 원인 즉 번뇌의 집착이다.
고제와 집제는 流轉하는 因果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世間因果라 하는 것이다.
@집제(集諦)의 교리를 쉽게 풀이하면 이는 일체 유정은
물질적인 요소와 정신적인 요소가 집합한 것을 살펴본 것이다.
모든 요소가 집합하게 되는 것은 因緣生起의 원리인 것이다.
일체만법은 인과관계에 의하여 성립되고,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이 말은 일체 만유는 시간적인 인과관계와 공간적인 인과관계에 의하여
생성하고 발전하며 연관성에 의하여 共存하고 共立하는 것이다.
일체 유정이 모든 요소에 의하여 성립되는 직접적인 因은
유정 각각의 자신에 있는 것이니 이것이 생성의 원동력이 되어서
緣을 의지하여 유정이 성립되는 것이다. 생성의 원동력은 惑이고,
緣은 業인 것이다. 우리 인간은 맹목적으로 살고자 하는
生의 욕망을 선천적으로 갖추고 있어 이 근원이 되는 무명이
근본번뇌(根本煩惱)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무명은 근본번뇌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번뇌인 동시에 유정을 구성할 여러 가지 요소를
결합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煩惱가 因이 되고 業이
연(緣)이 되어서 일체 유정의 물질, 정신의 모든 요소가 결합되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의 현재가 있는 것은 과거의 因과 업에 의한 것이고,
미래는 현재의 번뇌인과 업에 의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일체 유정 자체가 지은 업력에 의하여 그들이 살아가면서
의지해야 할 器世間과 유정 자체를 전개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 유정과 기세계를 어떠한 조물주가 지은 것도 아니고
일체유정 자신들이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苦)의 원인인
집제를 설명하는 것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 올 이상적인 자신과
기세계에 대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이를 수행의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滅諦는 깨달을 목표, 즉 불교의 이상경(理想境)인 열반을 말하는 것이다.
고제인 迷界의 眞相과 그리고 집제인 미계의 원인을 밝힌 후에
중생들이 나아가야 할 바를 밝힌 것이다. 이것은 미계의 원인을 斷하고
무고안온(無苦安穩)한 열반과 理想境界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근본 번뇌인 무명을 斷 하는 것이 명제(滅諦)인 것이다.
멸제는 무명이 멸하여 없어진 것이니 이것은 12 연기의 역관(逆觀)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멸제를 열반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체 만물의 실체상 파악하는 것이니 곧 實相論에 입각한 것이다.
이 실상 자체는 時空을 초월한 광대무변한 생명의 일체감을 느끼게 되므로
彼此가 하나로 합치되는 경계이다. 이것이 불교의 理想境인
解脫境이 되는 것이다. 초기 경전에서는 이를 아라한이라고 하고
불타라고 하였다. 滅은 寂滅이니 택멸무위(擇滅無爲)를 말하는 것으로
苦集의 이제(二諦)를 멸진 한 경계를 말하는 것이다.
@근본무명인 惑을 제거하면 해탈 열반의 경계가 나타난다.
이 말은 인생들이 생기하는 근본적인 因인 무명만을 제거하면
탐(貪), 진(瞋). 사견(邪見) 등의 일체 번뇌에서 얽매일 일이 없고
또한 생사의 고해로부터 해탈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해탈의 경계가 바로 불교의 최고 목표인 동시에
佛弟子들의 사명인 것이다. 부처님이 설파하신 일체의 법은
다만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해탈 구경에 이르도록 하고자 하는 데 있다.
해탈이라는 것은 일체 온갖 번뇌에 우리들의 一心이 속박되고
그에 따라서 육체도 속박되어 자유스럽지 못한 고통의 일생을 보내게 되는 것이
인생들의 현실상인 것이다. 해탈이란 이러한 상태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뜻한다.
열반이란 우리들의 마음속에 치연(熾然)하고 있는 일체의 온갖 번뇌를
취소(吹消)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열반을 解脫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를 탐 진 사견의 삼독을 永盡한 것이 열반이요,
삼독 번뇌를 버린 아라한의 正智가 마음의 해탈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열반은 해탈이고, 해탈은 열반이라는 것이다.
진실한 열반을 원리(遠離)라고 하는 것은 모든 속박을 버렸기 때문이고,
不生이라는 것은 부모님으로부터 태어나지 않은 것이며,
안온(安穩)이라는 것은 두려움과 근심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열반을 안양(安養), 안온처(安穩處)라 하는 것이며,
또한 이것을 무구(無垢)라고 하는데 이 뜻은 지혜의 광명을 장애 하는
번뇌의 허물이 없다는 뜻이다.
해탈 열반은 모든 두려움과 공포에 있는 일체를 구하고,
모든 인연을 벗어나며 교만(憍慢)과 방일심(放逸心)을 항복 받고
무명을 제거하여 일체의 有爲를 버리고
능히 일체의 유정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다.
일반적 상식으로는 열반이 소극적인 의미 같으나 그렇지 않고
열반은 無上安穩處이고, 지혜의 광명이고, 일미 평등하고
일체의 유정을 구체화하는 것이며, 無上한 眞正道이며,
여래이기 때문에 열반은 적극적인 의미도 강조되어 있다.
소승불교에서는 우리 마음속의 일체의 번뇌가 멸진(滅盡:有餘 依) 하는 동시에
전생의 지은 바 업의 所惑인 四大成身까지도 구멸(俱滅: 無餘依) 하여야만
완전한 열반에 도달한다고 보았다. 이것이 소승불교의 회신멸지(灰身滅智)이다.
그래서 대승은 이를 일심도멸(一心都滅 ) 일향취적(一向趣寂)이라고
비평하는 것이다. 오로지 한 마음을 멸하여 적멸에 나아간다는 의미다.
@道諦는 고(苦)를 멸(滅)해서 해탈경인 열반에 도달하는 방법을 말한 것이다.
곧 실천하는 수단과 방법이므로
悟의 因 즉 깨달음의 인(因)이라는 것이다.
불타께서 성도 하신 후 제일 처음 녹야원에서 5비구를 위하여
초전법륜을 굴리실 때는 오직 八正道만을 설파했지만,
멸도하실 때는, 사념처, 사정근, 사여의족, 오근, 오력,
칠각지, 팔정도 등을 말씀하셨다. 이것이 37조도품인데
이 모두가 苦를 멸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도는 통행의 뜻으로서 적멸의 果에 통행하는 팔정도
즉 고제의 경계에 나아가는 道임으로 구체적으로는
취고멸도(趣苦滅道)라 한다. 이것은 무지와 애욕을 멸각하여
苦를 극복하는 길이다. 멸제와 도제는 還滅의 因果다.
그러므로 出世間因果라고 한다.
이상의 4성제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이를 요약하면 미(迷)와 오(悟)의 인과관계를 말한 것이다.
인과관계에서는 불타는 果를 먼저 밝히고 그다음 인(因)을 밝힌 것이 특색인데
이는 원인을 먼저 제시하는 철학적인 이론보다 인간 생활에서
직접 당하는 결과를 먼저 밝혀 현실 생활에서
먼저 각성을 일깨워주려는 방편으로
그 목적은 구도심을 일으키고자 함에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부처가 말한 독전(毒箭)의 비유와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사성제는 유루법(有漏法)과 무루법(無漏法)을 연관하면서
결과를 먼저 밝히고 다음에 원인을 밝힌 것이다.
곧 유루법(有漏法)의 결과는 고(苦)이며,
유루법의 원인은 집(集)이 되고,
무루법(無漏法)의 결과는 멸(滅)이 되고
무루법의 원인을 도(道)로 설명한 것이다.
또한 사성제는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으로도 연계되어 있다.
@생멸하는 유위법(有爲法)으로서 무루(無漏)에 통하는 법을
유위무루(有爲無漏)라 하는데 사성제 중에 도제(道諦)가 이에 해당한다.
고제(苦諦)와 집제(集諦)는 유위무루(有爲無漏)이고,
멸제(滅諦)는 무위무루(無爲無漏)이며
도제(道諦)만은 유위무루(有爲無漏)이다.
@유위법이란 인연으로 생겨서 변화하는 물심(物心)의 형상을 말하고.
무루법은 번뇌(煩惱)구염(垢染)을 여읜 청정법(淸淨法).
즉 삼승(三乘)이 증득한 계정혜(戒定慧)와 열반을 뜻한다.
여기서 삼승은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을 의미한다.
@유루(有漏)의 루(漏)는 번뇌의 이명(異名)으로
일체 세간의 사체(事體)는 모두 유루법이 되고,
번뇌의 출세간의 사체(事體)를 여의는 것은 모두 무루법(無漏法)이 된다.
사성제의 교리는 초기 불교에서는 위대한 진리였고
대승의 교리에도 다소 영향을 미쳤지만 대승의 공관(空觀), 불성(佛性),
연기관, 반야의 지혜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다.
일례로 사성제의 도제(道諦)와 멸제(滅諦)에서 무루지를 말하고 있지만
대승에서 의미하는 교리와는 엄연히 다르다.
사성제는 소승의 교리에 속하기 때문이다.
@무루지(無漏智)의 본래 의미는 진리를 증득하고
모든 번뇌를 여읜 청정한 지혜를 말하지만
소승에서는 사제의 이치를 증득하는 지혜라 하여 법지(法智)와
유지(類智)를 두고 있는 것이다.
법지는 욕계의 사제(四諦)의 이치를 관(觀)하면서
이 사제의 이치에 미(迷)하여 일어난 번뇌를 끊는 지혜를 말하고,
유지(類智)는 색계, 무색계의 사제의 도리를 관(觀)하여
번뇌를 끊고 얻는 지혜를 말한다.
만유 제법의 진리를 아는 지혜인 법지와 비슷함으로
유지(類智)라 한 것이다. 그러나 대승 유식에서만 보드더라도 다르다.
유식에서는 무루지에 근본지(根本智)와 후득지(後得智)로 분리하는데.
근본지(根本智)는 유식의 성(性)인 진여의 이치를 증득한 무분별지를 말하고,
후득지(後得智)는 근본에서 나와 유식의 상(相)인 인연으로 일어나
모든 만상(萬象)을 아는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반야>와 <보리심>과는 더 확연히 달라지는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사정제는 유정의 번뇌에 집착된 인공(人空)이 되어
대승의 법공(法空) 사상이 없고, 따라서 연기관도 업감연기에 머물러
유식의 아뢰야식 연기나, 법화 화엄 등에서 설한
법계연기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불성(佛性)과 열반에 대한 교리는
『열반경』에서 말하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의 교리와도 상반되어
가려지고 덮이고 희석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대반열반경』 성행품(聖行品)을 보면 이런 법문이 있다.
「살생하는 인연이기 때문에 항상하다고 합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모든 행이 무상하다면 죽인 것과 죽은 것이
둘이 모두 무상한 것이며, 만일 무상하다면
누가 지옥에서 죄의 갚음을 받겠습니까?
만약 반드시 지옥에서 과보를 받는다면
모든 행이 무상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만일 사문이나 바라문이 항상함이 있고 즐거움이 있고
깨끗함이 있고 나라는 것이 있다고 하면 이는 사문이 아니며
바라문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고 죽는 데 미혹되어
온갖 지혜인 대도사를 떠났기 때문이며, 이와 같은 사문ㆍ바라문들은
탐욕에 빠져서 선한 법이 감소하였기 때문이다. 또 이 외도들이
탐욕과 성내는 일과 어리석음의 옥에 갇혀서 참고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 외도들은 업과 과보를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는 줄을 알지만
나쁜 법을 여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업과 과보를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는 줄을 알지만
나쁜 법을 여의지 못했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과의 관계에만 얽매여 유의법을 알면서 인과의 관계를 벗어난
무위법의 경지 곧 법공(法空)의 도리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성제의 교리에 비추어 말하면 사성제의 고집멸도는
아공(我空)의 도리이지 법공(法空)의 도리가 아니라는 의미다.
멸제(滅諦)가 비록 무위무루(無爲無漏)이긴 하지만
대승에서 말하는 무루지(無漏智)가 아니라는 의미다.
공관(空觀)으로 말하면 유(有)에 상대한 무(無)이며 공(空)이지
대승공관에서 말하는 공공(空空)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불성(佛性)에 대해서 『대반열반경』은 이렇게 말한다.
「진실이라는 것은 곧 여래이며 여래는 곧 진실이다.
또 진실이라는 것은 곧 허공이며 허공은 곧 진실이다.
진실이라는 것은 곧 불성이며 불성은 곧 진실이다.
문수사리야, 괴로움이 있고 괴로움의 원인이 있고
괴로움의 다함도 있고 괴로움의 대상도 있다.
여래는 괴로움이 아니며 나아가 괴로움의 대상도 아니다.
그러므로 진실이라 말하고 이치라 말하지 않는 것이다.
또 허공과 불성도 그와 같다. 괴로움이란 것은 함이 있고
번뇌가 있으며 즐거움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래는 함이 있음이 아니고 번뇌가 아니고
고요하여 안락하므로 진실이며 이치는 아니다.」라고 하며
불성(佛性)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한다.
「불성(佛性)은 나는 일도 없어지는 일도 없고, 가는 일도 없고,
오는 일도 없으며, 지나간 것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며,
원인으로 지은 것도 아니고 원인 없이 지은 것도 아니며, 짓는 것도 아니고
짓는 사람도 아니며, 모양도 아니고 모양 없는 것도 아니며,
이름 있는 것도 아니고 이름 없는 것도 아니며, 이름[名]도 아니고
색도 아니며, 긴 것도 아니고 짧은 것도 아니며,
5음ㆍ18계ㆍ12입에 소속된 것도 아니므로 항상하다고 한다.」
또한 사성제의 정신과 물질에 대한 무상관(無常觀)도
대승의 반야사상으로 비추어보면 반(反)하게 되는 것이다.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에서 이를 이렇게 말한다.
「사리불이여, 이 물질은 공하여 물질이 아니로되 공을 여의고는
물질이 없고 물질을 여의고는 공도 없으니, 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이기 때문입니다.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은 공하여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이 아니로되 공을 여의고는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이 없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을 여의고는
공이 없으니, 공이 곧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이요,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 곧 공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18불공법은 공하여 18불공법이 아니로되 공을 여의고는
18불공법이 없고 18불공법을 여의고는 공이 없으니,
공이 곧 18불공법이요 18불공법이 곧 공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이 교리로 사성제를 보면 긍정할 것도 없고,
부정할 것도 없다는 말이 된다.
고(苦) 가 바로 열반이며, 열반이 곧 고(苦)가 된다.
왜냐하면 공(空)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지혜의 수행에 대해서 『발보리심경(發菩提心經)』 은 이렇게 설명한다.
「보살이 지혜를 수행하는 데에는 열 가지의 선사유(善思惟)의 마음이 있다.
이는 성문이나 벽지불과는 공통되지 않은 사유이다.
무엇을 열 가지라고 하는가?
정혜(定慧)의 근본을 분별함을 사유하며,
단(斷)ㆍ상(常)의 두 변(邊)을 버리지 않음을 사유하고,
인연에 의해 제법이 생기하는 것을 사유하며,
중생과 아(我)와 인(人)과 수명(壽命)은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사유하고,
삼세 중 과거ㆍ미래에 걸쳐 지속하는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사유하며,
발하고 행함[發行]이 없는데도 인과를 끊지 않음을 사유하는 것이고,
법은 공한데도 선(善)을 심기를 게을리하지 않음을 사유하는 것이며,
무상(無相)인데도 중생 제도를 그만두지 않음을 사유하는 것이고,
무원(無願)인데도 보리를 구하는 일을 여의지 않음을 사유하는 것이며,
무작(無作)인데도 과보를 받는 몸[受身]을 드러내어
버리지 않음을 사유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따라서 이상을 종합해 보면 사성제(四聖諦)의 교리는
독화살을 맞은 환자를 먼저 치료하는 그것이 급선무이지 화살에 묻은
독이 무슨 독이며, 화살은 어디서 날아왔는지 그와 같은 원인을 찾는
그것이 급한 것이 아니라는 독전(毒箭)의 비유와 같이
대승의 광대무변한 가르침에 앞서 무명의 늪에 빠져
삼독의 번뇌에 고생하는 하근기의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하여
열반으로 인도하려는 것이 주안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승이나 소승이나 모두 부처님의 말씀인데
왜 그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대반열반경』 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부처님 세존의 말씀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세간의 말이며 둘째는 출세간의 말이다.
여래는 성문ㆍ연각들을 위하여 세간의 말로 말씀하시고,
보살들을 위하여 출세간의 말로 말씀하신다.」
이를 유추하면 사성제는 상근기인 보살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근기인 성문, 연각승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