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 탐사대] 22 미륵불상 전설에 희망을 품다
20. 전북 고창 선운산 도솔암
바위 가르고 깨어난 미륵삼존
도솔암 수호한 검단·의운 선사
인도 나한 가피로 사라진 이무기
고려 초 모신 것으로 추정되는 마애불. 명치 정도에 돌로 막은 뒤 백회로 봉한 자국이 있는데 경전 등을 넣고 봉한 복장감실로 추정된다.
미륵삼존이 바위를 가르고 나타나다
고창 선운산 도솔암은 선운사에서 3km 정도 되는, 산 깊은 곳에 있다. 도솔암에 다다를 때쯤 쭉 뻗은 나무 한 그루가 오른쪽 길옆에 있다. 소나무의 한 품종인 반송으로서 높이 23m이며, 지상 2.2m 높이에서 2개로 갈라져서 자란다. 수령은 600년이라 추정하고 있다. 옛 지명인 장사현에서 유래하여 장사송(長沙松)(천연기념물 제354호)이라 이름하며, 진흥굴 앞에 있어 진흥송이라 한다. 장사송의 존재를 모르면, 진흥굴을 그냥 지나치기 쉽다. 어쩌면 장사송은 진흥굴을 안내한다고나 할까.
도솔암은 백제 때 창건되었다고 하지만, 정확한 창건 사실은 알 수 없다. 여러 기록에 의하면, 선운사와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 진흥굴은 그 창건 설화와 관련 있다. 신라 진흥왕(재위 기간 540∼576년)은 왕위를 버리고 이 굴에 와서 기도하였다. 이때 미륵삼존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꿈을 꾸었다. 이에 진흥왕은 크게 감응하여 선운사, 도솔사, 중애사 등을 창건하였다. 진흥굴은 미륵삼존이 바위를 가르고 나온 굴이라 하여 열석굴(裂石窟)이라 부른다.
선운사 편에서 언급하였지만, 당시 이곳은 신라와 세력다툼이 심한 백제의 영토였으므로 신라의 왕이 이곳에 사찰을 세웠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검단 선사의 창건을 정설로 여긴다. 그래서인지, 현재 도솔암에서는 선운사 등을 창건한 검단 선사와 참당암을 창건한 의운 선사를 산신각에 모시고 있다.
산신이 되어 중생과 함께하리라
도솔암에서 지나치기 쉬운 전각 가운데 하나가 산신각이다. 지장보살을 모신 도솔천내원궁 뒤쪽에 있기 때문이다. 내원궁 뒤로 가지 않는 한 존재조차 모를 수 있다. 그곳에는 여타의 산신각과 다른 인연을 가진 산신이 있다.
오늘날 산신각의 산신은 대부분 할아버지 산신이다. 간혹 지리산 쌍계사 삼성각처럼 할머니 산신도 있다. 또는 마곡사 국사당, 구룡사 삼성각처럼 할아버지 산신과 할머니 산신이 함께한다. 이러한 차이는 예로부터 산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과 시대의 문화 변화 때문이다.
어떤 이는 말한다. 처음에는 산신은 여산신이었다. 산은 모든 생명을 품어주고 생겨나고 자라게 한다. 산은 어머니의 품처럼 모든 중생을 안아주는 신이 되었다. 그래서 여산신으로 등장하였다. 그런데 이후 음양 사상에 따라 여산신의 남편을 설정하여 부부 산신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조선 시대에 이르자 남존여비 사상에 따라 여산신은 남산신으로 바뀌게 되었다. 또 어떤 이는 말한다. 옛날 가장 인간에게 두려운 존재는 호랑이였다. 그래서 호랑이에게 ‘산의 군자(산군山君)’라는 아부성 명칭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호랑이는 곧 산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호랑이의 용맹스러움에 할아버지 산신이 되었다.
이처럼 산신은 산이나 호랑이와 관련이 있다. 그런데 도솔암 산신은 다른 인연이 있다. 이 산신들은 바로 절을 창건한 검단 선사와 의운 선사다. 이분들은 열반한 뒤에도 불법을 지키고 전하며 중생과 함께하는 도솔산 산신이 되겠다고 발원하였다. 그리하여 산신이 된 두 스님을 모시고 있다. 선운사 삼성각에는 기존 산신과 함께 두 분의 산신이 있다.
주민을 괴롭히는 이무기를 물리친 나한
도솔암은 본래 상하 동서남북 여섯 도솔암이 있었다고 한다. 한때는 도솔산 중사(仲寺)라고 불렀다. 조선 후기에는 세 개의 이름으로 불렀다. 상도솔암, 하도솔암, 북도솔암이다. 상도솔암은 지금의 도솔천내원궁이고, 하도솔암은 마애불상이 있는 곳이며, 북도솔암은 지금의 극락보전 자리다. 지금은 모두 합하여 하나의 암자로서 도솔암이라 이름하고 있다.
도솔암 순례길에서 도솔천내원궁 뒤에 있는 산신각을 놓치듯이, 마애불상 옆에 있는 나한전 이야기를 놓치기 쉽다. 물론 지금은 나한전 앞에 안내문이 있어 관심을 보이지만. 나한전은 나한, 즉 아라한을 모시는 법당이다. 아라한은 부처님 제자로서 깨달음을 얻고서 더 배울 것이 없어 무학(無學), 진리와 함께하기에 응진(應眞), 그리하여 응당 공양받을 분이기에 응공(應供)이라 한다. 불보살님의 모습과 달리 나한은 스님의 모습으로, 우리 중생의 모습이기 때문에 가피가 가장 빠르다는 속설이 있다. 누구 마음은 누가 알듯이.
전설에 의하면, 마애불상 옆으로 산길을 5분 정도 가면, 용문굴이라는 큰 바위굴이 있다. 이곳에 이무기가 살면서 주민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를 물리치기 위해 인도에서 나한상을 모셔와 이곳에 안치하였더니, 이무기가 사라졌다. 그 후 이무기가 다시는 나타나지 못하도록 이무기가 뚫고 간 바위 옆에 나한전을 건립하였다. 그때 모신 나한의 행방은 알 수 없고, 현재 나한전에는 1910년 용문암에서 모셔온 16나한상이 있다.
진흥굴.
미륵불상 배꼽서 세상 바꿀 비결 손에 넣다
도솔암은 미륵신앙과 관련이 깊은 도량이다. 지금 도솔천에 있는 미륵보살은, 56억7천만 년이 지나면 이 땅에 내려와 용화수 밑에서 깨닫고 미륵부처님이 된다. 그 뒤 3회의 설법으로 많은 중생을 제도한다. 이러한 내용에 따라 미륵신앙은 두 가지가 있다. 세상을 구제하려 미륵보살이 하생하기를 바라는 미륵하생신앙, 미륵보살이 주재하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미륵상생신앙이다.
56억7천만 년 뒤에 오실 미륵불을 뵙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선업을 쌓아 도솔천에 올라가면 된다. 사후 도솔천에 올라가 미륵보살 옆에 있다가 미륵보살이 내려올 때 함께 지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처음 법회에 참석한다. 이것이 미륵상생신앙이다. 반면, 56억7천만 년은 단지 숫자에 불과하니, 지금 당장 미륵보살이 이 땅에 내려오기를 원한다. 이것이 미륵하생신앙이다. 이러한 미륵하생의 염원은, 소박한 마음으로 뒷산 바위를 통해 미륵불을 찾기도 하고, 이 땅을 바꾸고자 하는 마음으로 미륵불을 찾기도 하였다.
그 미륵불 중 한 분이 도솔암 마애불(보물)이다. 고려 초에 모신 것으로 추정하며, 사람들은 미륵불로 여긴다. 마애불 명치 정도에는 돌로 막은 뒤 백회로 봉한 자국이 있다. 불상을 조성한 후 경전 등을 넣고 봉한 복장감실로 추정한다. 이 감실과 관련하여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선운사 석불 배꼽에는 신기한 비결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세상에 나오는 날에는 한양이 망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벼락살도 들어 있어서 거기에 손을 대는 사람은 벼락에 맞아 죽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1830년 어느 날 전라감사 이서구가 마애불이 있는 곳에서 서기가 뻗쳐 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주저 없이 가서 배꼽(감실)을 열어보니, 책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벼락이 치는 바람에 두려워서 ‘전라감사 이서구가 열어 본다’는 글귀만 보고 책을 다시 넣고 봉해버렸다. 지금 마애불 가슴에 있는 회칠이 이때 흔적이라나.
이 전설 같은 이야기는 갑오농민전쟁(동학혁명) 때 실제 사건으로 연결되었다.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기 1년 7개월 전인 1892년 8월 어느 날, 손화중을 비롯한 동학교도 사이에 그 비결을 꺼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나 모두 벼락살을 걱정하였다. 그런데 도인 오하영의 ‘이서구가 열었을 때 이미 벼락이 쳤으므로 벼락살은 없어졌다’라는 말에 실행에 옮겼다. 선운사 스님들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일을 진행하였다. 그 일로 주모자 등은 강도 및 역적죄로 사형을 받았으며, 나머지는 매를 맞고 풀려났다. 그런데 그 속에 과연 무엇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당시 민초들에게는 희망이 되었을 것이다. ‘누가 세상을 바꿀 비결을 손에 넣었다. 이제 좋은 세상이 온다.’ 실제 이 사건 이후 손화중 중심으로 더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힘든 세상을 사는 이들에게는 미륵불은 먼 미래의 부처님이 아니라 바로 지금 함께할 부처님이다. 그런데 경전에는 미륵불은 평화로운 세상에 오신다고 하니, 필자는 이 땅에 평화가 함께하기를 기원한다. 그 세상이 바로 미륵세상이리라.
▶한줄 요약
힘든 세상을 사는 이들에게는 미륵불은 먼 미래의 부처님이 아니라 바로 지금 함께할 부처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