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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탐사대] 23 의상 스님과 선묘 낭자 불연으로 세운 가람 21. 경북 영주 태백산 부석사

작성자박정근|작성시간26.06.19|조회수21 목록 댓글 0

[설화 탐사대] 23 의상 스님과 선묘 낭자 불연으로 세운 가람

21. 경북 영주 태백산 부석사

 

불심으로 스님 도운 선묘 낭자

돌 공중 띄워 삿된 무리 제압해

뜬 돌대한 설화로까지 이어져

 

부석사 무량수전 옆 삼층석탑에서 바라본 풍경.

 

봄날 사과꽃이 필 때, 보통 경북 영주 부석사를 추천한다. 필자는 일주문 안팎으로 은행잎이 노랗게 될 때가 더 그립다. 물론 눈 내린 부석사도 좋다. 그 계절에 4시 전후 순례를 시작하면, 무량수전(국보) 앞에서 멋진 장관을 볼 수 있다. 저 멀리 백두대간 능선으로 떨어지는 해가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돌을 공중에 띄워 삿된 무리를 제압한 선묘용

부석사는 676(문무왕 16) 2월에 의상 스님(625~702)이 왕명으로 창건한 화엄종의 중심 사찰이었다. 의상 스님과 원효 스님(617~686)이 당나라 유학길에 비를 피하고자 잠시 머문 무덤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그 계기로 원효 스님은 되돌아가고, 의상 스님은 당나라로 향했다. 송고승전(宋高僧傳)에는 이 이야기와 함께 부석사 창건 설화가 있다.

 

의상 스님은 669년 당나라 등주 해안에 도착해 신도 집에 머물렀다. 그 집의 선묘 낭자는 스님을 연모했다. 그러나 스님 마음은 동요가 없었다. 그러자 낭자는 신도로서 스님을 모셨다. 이후 스님은 공부를 마친 뒤 귀국길에 올랐다. 뒤늦게 스님의 귀국을 알게 된 낭자는 해안가로 달려갔다. 그러나 스님이 탄 배는 이미 항구를 떠나서 멀리 가고 있었다. 낭자는 기도를 올렸다. ‘이 몸이 큰 용으로 변하여 저 배의 선체와 노를 지키는 날개가 되어 대사님이 무사히 본국에 돌아가 법을 전할 수 있게 하리라.’ 그리고는 웃옷을 벗어 던지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진정한 원력으로 낭자는 용이 되어 배를 안전하게 이끌어 나갔다.

 

의상 스님은 귀국 후 불법을 펼칠 장소를 찾아다녔다. 마침내 적절한 곳을 찾았다. 그런데 이미 삿된 무리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때 선묘용은 스님 생각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허공에서 대변신을 일으켜 커다란 바위로 변했다. 허공에 뜬 바위는 막 떨어질 듯하였다. 그 광경에 삿된 무리는 당황하며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마침내 스님은 화엄경을 펼쳤다. 스님 설법을 듣고자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국왕은 스님을 존중하여 논밭 등을 시주하였다.

 

선묘 낭자는 연모의 마음을 불심(佛心)으로 돌렸고, 더욱이 용이 되어 스님이 불법을 펼칠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지금도 부석사 무량수전 밑에는 돌로 만든 용이 묻혀 있다고 한다. 머리 부분은 아미타불상 바로 밑에서부터 시작하며, 꼬리 부분은 석등 아래에 묻혀 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절을 고칠 때 석룡 일부가 묻혀 있는 것을 발견하였고, 자연적인 용 비늘 모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무량수전 오른쪽 뒤에는 선묘각이 있다. 한편, 선묘 설화는 일본의 고산사(高山寺)에도 전해지며, 그곳에서는 선묘 낭자를 불교의 수호신으로 여기고 있다.

 

浮石이라는 글씨가 새겨있는 부석.

 

부석이 실제로 공중에 떠 있다고?

무량수전 왼쪽 뒤에 커다란 바위가 있다. 선묘의 화신이라고 전한다. 언제 새겼는지 모르지만, 바위에는 浮石이라는 글씨가 있다. ‘뜬 돌이라는 뜻이다. 부석사 창건 설화와 관계있는 바위다.

 

30년 전 수업 중에 동국대 모교수는 부석 양쪽에서 실을 잡고 바위 밑을 통과하였다고 말하였다. 실제 뜬 돌임을 경험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부석은 양쪽에서 실을 잡고 지나기 힘든 위치에 있다. 설사 위치가 되더라도 무거운 바위 밑으로 실이 그대로 통과하기 힘들다. 그래도 그 말을 믿고 가능한 방법을 생각했다. 가령 시소처럼 바위가 움직여 오르락내리락할 수 있게 무게 중심이 두 군데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 또한 무거운 바위라 인간의 힘으로 바위를 움직일 수 없다.

 

그런데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1723년에 부석사에 와서 실로 부석을 통과했는데, 그 이치를 이해하기 힘들다는 기록이 있다. 그때 교수가 본인의 경험을 언급한 것인지, 아니면 이중환의 경험을 본인 경험으로 언급한 것인지. 여하튼 통과했다면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많은 전각이 조화를 이뤄 ()’자를 나타내다

부석사 안내는 입구 안내도에서 시작한다. 안내도를 보면, 많은 전각이 ()’라는 글자 위에 조화롭게 있는 듯하다. 화엄종(華嚴宗)의 중심 사찰답다. 그리고 천왕문에서 중심 법당인 무량수전에 이르기까지 크게 세 개의 기단이 있다. 극락에 태어나는 중생의 부류를 크게 상품, 중품, 하품 셋으로 구분한다. 이것을 세 기단과 연결하여 언급하기도 한다.

 

화엄종 사찰의 중심 부처님은 대부분 비로자나불이다. 비로자나불은 진리 그 자체인 부처님으로서 법신불(法身佛)이다. 그런데 부석사는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모시고 있다. 화엄경의 본존은 비로자나불이지만, 화엄경마지막 품인 입법계품(入法界品) 끝부분에는 극락세계와 아미타부처님을 언급한다. 부석사 원융국사비명을 보면, 의상 스님 역시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이유를 입법계품의 내용 등으로 답변하였다. 그런데 무엇보다 대중은 비로자나불보다는 아미타불을 가깝게 느끼기 때문은 아닐까.

 

아미타라는 말은 헤아릴 수 없는 수명(무량수無量壽)’이라는 뜻이 있다. 법당 이름이 무량수전(無量壽殿)인 이유다. 아미타부처님은 서방 극락세계에 계신다. 부석사 무량수전에 있는 부처님을 법당 정면이 아니라 서쪽 측면에 모신 이유다. 그리고 그 부처님 손 모양(수인手印)을 보면, 선정인과 항마촉지인이다. 선정인(禪定印)은 선정에 있는 모습,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은 마왕을 항복시키고자 지신(地神)을 가리키는 모습을 나타낸다. 이처럼 항마촉지인은 석가모니부처님이 깨닫기 바로 직전의 일화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이 수인을 하고 있으면, 석가모니부처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꼭 석가모니부처님만 하는 수인은 아니다. 대부분 부처님이 석가모니부처님과 비슷한 일대기를 거치기 때문이다. 수인으로 부처님을 알 수 있다고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무량수전 측면에 모셔진 아미타부처님.

 

의상 스님의 지팡이가 나무로 자라나다

부석사를 찾으면, 대부분 무량수전 근처에서 발걸음을 돌린다. 꼭 삼층석탑 뒤로 난 산길로 조금만 올라가 보시길. 참으로 한적한 공간이 이어진다. 조사당(국보)에서 자인당에 이르는 오솔길이다. 특히 조사당 앞 철망 속 나무를 꼭 살펴보시길.

 

조사당은 의상 스님 진영을 모신 전각이다. 조사당 처마 밑에는 철망 속에 보호(?)되고 있는 특별한 나무가 있다. 바로 의상 스님의 지팡이가 자라난 나무다. 스님은 지팡이를 꽂으면서 말하였다. “이 나무가 싱싱하게 잘 자라면 나는 세상 어느 곳인가 살아 있는 것이고, 이 나무가 시들어 죽으면 나 역시 생을 마친 것이 될 것이다.” 이 나무는 선비화(仙扉花)’(신선의 집)라 전한다. 또는 택리지에는 잎이 피거나 지는 일이 없어 스님들은 비선화수(飛仙花樹)’라고 한다고 한다. 이야기대로라면 이 선비화는 1300년이 넘는다. 이 나무의 학명은 골담초다.

 

선비화와 관련된 이야기가 또 있다. 조선 광해군 때 경상감사 정조가 지팡이를 만들겠다며 이 나무를 잘라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광해군이 물러나고 인조 때 역적으로 몰려 참형을 당하였다. 선비화를 훼손했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지금도 사람들이 훼손할 염려가 있어서 그런지, 철망 속에 보호하고 있다.

 

이렇게 돌다 보면, 내려오는 길에 무량수전 근처에서 저 멀리 산에 해가 떨어지는 장관을 보게 되리라. 그 순간 바로 여기가 정토다. 모든 것이 하나, 하나가 모든 것인 화엄정토다.

 

한줄 요약

부석사 내려오는 길 무량수전 근처에서 저 멀리 산에 해 떨어지는 장관을 보면 그 순간 바로 여기가 정토임을 알게 된다. 모든 것이 하나, 하나가 모든 것인 화엄정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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