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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탐사대] 25 ‘구산팔해’ 넘고 올라 부처님 뵙다 23. 전남 해남 두륜산 대흥사

작성자박정근|작성시간26.06.21|조회수30 목록 댓글 0

[설화 탐사대] 25 ‘구산팔해’ 넘고 올라 부처님 뵙다

23. 전남 해남 두륜산 대흥사

 

호국불교 정신 깃든 도량

초의 선사로 차 문화 성지

금색 가사 두른 불상 눈길

 

대흥사 대웅보전.

 

서산 대사의 가르침이 깃든 호국도량

전남 해남 대흥사(大興寺)는 두륜산(頭崙山)의 빼어난 절경 가운데 있다. 두륜산은 대둔산(大芚山)이라고도 한다. 절 이름도 원래 대둔사(大芚寺)였다. 1900년대 초 대흥사로, 도중에 다시 대둔사로, 현재는 대흥사다.

 

426(백제 구이신왕7) 신라 정관 스님 창건설, 544(신라 진흥왕5) 아도화상(阿度和尙) 창건설, 자장 스님과 도선 스님의 중건설 등이 있다. 그런데 정확한 창건 시점은 현재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응진전 앞 삼층석탑을 통일신라 말기 경에 세웠다고 추정하므로 늦어도 통일신라 말기 이전에 대흥사를 창건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창건 이후 조선 전기까지 기록은 거의 없다. 조선 후기 서산 대사의 유품을 봉안하면서부터 대흥사는 역사상 두드러졌다.

 

임진왜란 때, 서산 대사(1520~1604), 사명 대사(1544~1610), 처영 대사(?~?), 영규 대사(?~1592) 등 많은 스님이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고자 앞장섰다. 해남 대흥사의 표충사(表忠祠), 밀양 표충사(表忠寺)의 표충사(表忠祠), 공주 갑사의 표충원 등에 이분들을 모시고 있다. 절에서는 흔하지 않은 유교 형식의 사당이다. 불교 문화로 보자면, 훌륭한 스님을 모신 조사전(祖師殿)에 해당한다. 이를 불교문화와 유교문화의 공존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서산 대사는 해남 두륜산은 온갖 재난이 없는 곳이고, 불법을 펼칠 수 있는 곳이다. 그곳에 나의 발우와 가사를 두라라고 유언하였다. 발우와 가사는 스님의 가르침을 상징한다. 스님이 입적하자 제자들은 사리와 영골을 묘향산 보현사와 안심사, 금강산 유점사 등에 봉안하고, 발우와 가사는 유언대로 대흥사에 모셨다. 현재 대흥사 경내 표충사에는 서산 대사를 중심으로 사명 대사와 처영 대사의 영정을 함께 모시고 있다. 금물로 쓴 表忠祠(표충사) 편액은 정조가 직접 써서 내려 준 것이다.

 

따라서 대흥사는 호국불교의 정신이 깃든 도량이다. 그리고 이후 대흥사는 조선 불교의 중심도량으로 변모하였다. 특히 13분의 훌륭한 스승인 대종사(大宗師)가 있었다. 한 분이 초의 선사(1786~1866). 선사는 대흥사를 우리나라 차문화의 성지로 자리 잡게 하였다.

 

산능선에 나타난 부처님.

 

여덟 개의 바다를 건너고 여덟 개의 산을 올라 부처님을 뵙다

대흥사 경내 주차장까지 차로 가는 방법도 있고, 걸어가는 방법도 있다. 도보는 다소 먼 여정이지만, 나름 여러 재미를 준다. 특히 아침 일찍 우거진 숲 사이로 비치는 햇살 풍경은 영화의 한 장면이다. 사하촌에서 대흥사 해탈문까지는 여덟 개의 다리가 있다.

 

불교뿐만 아니라 고대 인도에서는, 이 세상은 아홉 개의 산과 여덟 개의 바다(九山八海)로 되어있다고 보았다. 즉 수미산을 중심으로 나이테처럼 바다와 산이 교대로 둘러싸여 있다. 마지막 바다에는 동남서북으로 네 개의 대륙이 있다. 그 대륙 중 남섬부주(南贍浮洲)에 우리가 산다. 섬부는 인도말 잠부(Jambu)의 음역이다. 즉 잠부라는 나무가 자라는 남쪽 땅이다. 염부제(閻浮提)라고도 한다. 부처님은 계시지 않은 곳이 없지만, 수미산 정상에 계신다고 상정하여 법당에 불상(佛像)을 모셨다. 이에 불단을 수미단(須彌壇)이라 한다. 따라서 사찰을 찾는 여정은, 수미산에 계신 부처님을 뵙기 위해 남섬부주에서 시작하는 긴 여정이다.

 

대흥사 여정에서 건너는 여덟 개의 다리는 여덟 개의 바다를 건너는 다리다. 중생 세계에서 부처님 세계로 가는 다리다. 이렇게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듯이 가면, 두륜산에 둘러싸인 전각들이 나타난다.

 

대흥사 전각은, 금당천을 사이에 두고 북쪽과 남쪽으로 나눠 있다. 북원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남원에는 천불전을 중심으로 여러 전각이 있다. 남원의 오른편에는 표충사, 성보박물관 등이 있다. 표충사 뒤편에는 대광명전이 있다.

 

다시 걸린 대웅보전 현판과 추사 김정희

우선 북원의 대웅보전을 참배한다. 대웅보전 현판은 원교 이광사(1705~1777)의 글씨다. 동국진체라는 서체를 완성한 분이다. 이 현판에는 추사 김정희와 얽힌 사연이 있다.

 

1840(헌종 6)에 제주도로 귀양을 가던 추사는 초의 선사를 만나러 대흥사에 들렀다. 이때 대웅보전에 걸린 이광사의 글씨를 보았다. 추사는 조선의 글을 다 망쳐놓은 자가 이광사라고 혹평하며, 그 현판을 떼고 자신의 글씨를 걸게 하였다. 그런데 8년 동안 귀양살이를 마치고 다시 대흥사를 찾은 추사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추사는 자신의 글씨를 떼어내고 절에서 보관해 둔 이광사 글씨를 다시 달게 하였다.

 

지금 대흥사 대웅보전 현판은 이광사의 글씨이다. 법당 왼쪽 요사채에는 추사가 쓴 무량수각현판이 있다. 추사가 8년 귀양살이 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기에 다른 모습을 보였는지, 사람들은 궁금해한다. 혹시 귀양살이 동안 깊은 사색으로 내가 누군데라는 생각, ‘네가 뭘 알아하는 생각 등, 금강경에서 말하는, 분별에 의한 모든 집착을 내려놓고 하심(下心)을 하였기 때문은 아닌지.

 

대흥사 대웅보전 법당문 앞에서 10시 방향으로 산 능선을 보면,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다. 우리나라 곳곳에 산이나 바위 모습 그대로 나투신 부처님이 있다. 산 능선에 나투신 부처님은 대흥사뿐만 아니라 영월 법흥사, 철원 심원사 등에서 친견할 수 있다.

 

대흥사 천불전.

 

일본에 다녀오신 천불전의 부처님들

다음 남원의 천불전으로 향한다. 필자는 대흥사 천불전이 참 좋다. 먼발치서 보면 마치 새가 날아가는 듯하다. 그리고 천불전 부처님이 일본에 다녀오신 이야기도 재미있다.

 

천불전은 1811(순조 11) 화재로 법당이 없어진 후, 완호 스님이 다시 지었다. 스님은 천불전에 모실 부처님을 쌍봉사 풍계 스님에게 의뢰하였다. 풍계 스님은 경주 불석산에 가서 6년여간 총지휘하여 옥돌로 천 불을 조성하였다. 조성된 천 불을 두 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1817년 경주 장진포를 출발하였다. 해남 대둔사를 향하여 항해하던 도중 울산진에서 풍랑을 만났다. 배 한 척이 표류하다가 일본 나가사키현에 닿았다. 배를 발견한 일본인들은 기뻐하며 부처님을 모시고자 서둘러 절을 지었다. 그런데 일본인들 꿈에 부처님들이 나타나 말씀하셨다. ‘우리는 지금 조선국 해남 대둔사로 가는 중이니 이곳에 있을 수 없다.’ 이를 신비롭게 여긴 일본인들은 이듬해 불상들을 해남으로 돌려보냈다. 그리하여 1818(순조 18) 8월에 비로소 천불전에 천 불을 봉안하였다. 일본까지 갔다가 온 부처님은 모두 768분으로, 어깨나 좌대 아래에 ’()자가 있다.

 

자는 일본인들이 부처님을 보내는 아쉬운 마음에 적어두었다고 전해지지만, 천불전조성약기에 의하면, 1818년 천 불을 모실 때 적어두었다. 또 표류 과정이 자세하게 적힌 일본표해록에는 일본인이 불상을 모시고자 절을 지었다거나 꿈을 꾸었다는 내용은 없다. 그러나 부처님을 모신 배가 일본 항구를 지날 때마다 오색 무지개가 문처럼 나타나서 배가 무지개 중앙으로 지나갔는데, 일본인이 기이하게 여겼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천불전 부처님 모두 천으로 된 금색의 가사를 두르고 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근래에 어떤 신도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가사를 입혀달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후 사찰에서는 4년마다 한 번씩 가사를 갈아 입혀드리고 있다.

 

천불전을 참배한 후 표충사, 대광명전으로 향한다. 그리고 초의 선사가 주석한 일지암, 1시간 정도 소요되는 북미륵암으로 이어진다. 긴 여정이지만, 의미 있는 시간이다. 그래서 여유가 있다면 대흥사는 아침 일찍, 또는 12일의 일정으로 찾아보길 권한다. 그리고 더 여유가 있다면, 대흥사 순례를 마친 뒤에 근처에 있는 미황사, 도솔암 등도 꼭 다녀오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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