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 탐사대] 26 범어사에 조선 관리 ‘불망비’있는 이유는
24. 부산 금정산 범어사
돌기둥 위 짧은 나무 300년전 그대로
정 많은 지역민 성격·마음씨 닮아
낭백 스님 환생 불리운 관리 ‘조엄’
보시행 했던 애민 정신 녹아있어
범어사 조계문(일주문). 자연 암반위에 4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짧은 나무 기둥위 화려한 지붕을 얹었다. 조형미와 구조는 우리나라 최고 걸작이라는 평이다.
‘황금색 우물’에 ‘하늘에서 온 물고기’가 노닐다
몇 년 전에는 태종대, 해운대, 부산대를 부산의 3대라고 농담 삼아 말하였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는 의미에서다. 이는 부산을 상징하는 태종대, 해운대, 금정산을 패러디한 말이다. 그 금정산 동쪽 기슭에 범어사가 있다. 범어사, 합천 해인사, 양산 통도사는 영남의 3대 사찰이다. 다음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 의하면, 금정산(金井山)은 ‘황금색(金) 우물(井)’, 범어사는 ‘하늘(梵天)에서 온 물고기(魚)’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금정산은 동래현의 북쪽 20리에 있으며, 산마루에 3장(丈) 정도 높이의 돌이 있는데, 위에 우물이 있다. 둘레가 10여 자이며, 깊이는 7치쯤 된다. 물이 항상 가득 차 있어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빛은 황금색이다.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한 마리 금빛 물고기가 하늘에서 오색구름을 타고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 하여 이렇게 산을 이름 지었고, 인하여 절을 짓고 범어사라 불렀다.”
〈고적〉(1700년), 〈범어사창건사적〉(1746년) 등에는 범어사 창건 이야기가 전해진다. 요약하면 이렇다.
신라 흥덕왕 10년(835) 동쪽 해안에 왜구가 10만의 병선을 거느리고 나타나 신라를 침략하려 하였다. 그때 대왕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말하였다. “태백산에서 의상 스님이 3000명의 대중을 거느리고 화엄법문을 연설하며, 화엄신중이 항상 그의 옆을 떠나지 않는다. 대왕이 의상 스님을 청하여 함께 금정산 아래로 가서 7일 동안 화엄신중을 독송하면, 왜병이 자연히 물러갈 것이다.” 대왕이 신인의 말대로 하자, 신기하게도 왜구들이 물러났다. 이를 기리기 위해 범어사를 창건하였다.
그런데 흥덕왕 재위 때(826~835)는 의상 스님(625~702)이 열반한 지 훨씬 이후다. 자료가 없는 상태에서 구전과 설화를 바탕으로 절의 역사를 정리하다가 생긴 일이다. 고운 최치원(857~?)의 〈당대천복사고사주번경대덕법장화상전〉에는 신라의 화엄십찰(華嚴十刹) 중 하나, 일연 스님(1206~1289)의 〈삼국유사〉에는 의상 스님이 가르침을 전한 열 곳 사찰 중 하나가 범어사라 한다. 따라서 범어사 창건은 의상 스님이 귀국한 670년(문무왕 10) 이후일 것이다.
육중한 지붕을 지탱하는 네 개의 기둥
범어사 입구 정류소에서 5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범어사 일주문이 있다. 일주문을 범어사에서는 조계문(曹溪門)이라 한다. 조계는 중국 혜능 스님(638~713)이 부처님 가르침을 펼쳤던 지역 이름이다. 따라서 부처님…달마 스님…혜능 스님에게 이어지는 법맥을 잇는 사찰이다.
일주문(一柱門)은 하나(一)의 기둥(柱)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집을 지으면 네 개의 기둥이 네 모서리에 자리하지만, 일주문은 두 개 또는 네 개의 기둥이 일렬로 서있다는 의미다. 이는 일심(一心)을 나타낸다. 한결같은 마음, 부처님 마음을 뜻한다. 또는 이러한 모습의 일주문은 ‘부처님의 다양한 가르침은 결국 하나의 가르침으로 돌아간다’라는 뜻을 나타낸다. 하나의 가르침은 ‘우리가 부처님’이라는 가르침이다.
범어사 조계문은 이러한 일주문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기둥 2개만 있는 여느 사찰의 일주문과 달리 자연 암반 위에 4개의 돌기둥을 세웠다. 그 돌기둥 위에 짧은 나무 기둥을 세우고 화려한 지붕을 얹었다. 조형미와 구조는 우리나라 최고의 걸작이다. 현재 짧은 나무 기둥을 받치고 있는 돌기둥은 약 300년 전에 세운 그대로다. 두툼하고 투박한 돌기둥은 가식 없이 정 많은 이 지역 사람의 성격과 마음씨를 닮았다고 한다. 조계문을 보고자 휴가를 내고 온 유럽의 어느 건축학자는 매우 감탄하며 말하였다. “저렇게 육중한 지붕을 어떻게 네 개의 기둥이 지탱할 수 있을까. 참으로 경이롭다.” 조계문은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범어사 하마비. 사찰 하마비는 절에 들어오는 이는 모두 똑같은 부처님 제자라는 의미가 담겼다.
문을 연 자가 문을 닫은 사람이다.
조계문 조금 못 미쳐 ‘下馬(하마)’라는 글씨가 새겨진 하마비가 있다. 하마비는 서원, 향교 입구에도 있다. 옛날에는 하마비부터는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 걸어서 들어와야 했다. ‘大小人員皆下馬(대소인원개하마)’(대인, 소인 모두 말에서 내려라)라는 글씨가 새겨진 하마비도 있다. 절에 들어오는 이는 모두 똑같은 부처님 제자, 신도라는 의미다.
그런데 조선시대 유생이나 관리들은 하마비를 무시하고 일주문까지 말을 타고 들어오기 일쑤였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이도 있었으니, 이야기의 주인공 조엄(趙뺬)(1719~1777)이 그랬다.
어느 날 범어사 스님들은 중앙에서 높은 벼슬을 지내는 관리가 온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 관리 이름은 조엄이었다. 지방관리가 와도 그러했듯이 모든 스님은 어산교까지 나가서 행렬을 지어 기다렸다. 조엄은 일주문까지 말을 타고 가지 않고, 하마비 못미처 있는 어산교 앞에서 내렸다. 그는 스님들의 안내를 받으며 사찰을 자세히 돌아보았다. 곧 수십 년 전 낭백 스님이 열반하기 직전에 ‘출입하지 말라’고 봉해 둔 방 앞에 이르렀다. 그는 스님들의 만류에도 그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안에는 ‘개문자시폐문인(開門者是閉門人)’(문을 연 자가 문을 닫았던 사람이다)라는 스님의 친필유묵이 있었다. 문을 연 조엄이 문을 닫았던 낭백 스님의 환생이라는 것이다.
낭백 스님이 범어사에 출가 수행할 당시, 불교 박해는 극에 달하였다. 공부할 겨를도 없이 나라에서 부과된 부역에 종사하기에 바빴다. 낭백 스님은 이러한 당시 사정을 개탄하였다. 그리고 금생에 안되면 내생에라도 부역을 면하고 마음껏 공부할 수 있게 하리라 원력을 세웠다. ‘금생에 복을 많이 지어서 내생에는 나라의 고급관리가 되리라. 그 관리의 특권으로 범어사 스님의 부역을 혁파하리라.’ 그날부터 힘이 닿는 대로 복을 지었다. 샘물을 파서 행인에게 식수를 제공하고, 밭을 개간하여 참외, 오이, 수박 등을 심어서 행인에게 보시하고, 짚신을 삼아서 보시하였다. 열반할 무렵에는 범어사 뒷산 숲에 들어가 굶주린 호랑이에게 육신을 보시하였다.
스님은 열반 전에 자신의 환생을 증명할 세 가지 일을 남겨 놓았다. ‘고급관리가 되어 올 때 어산교 앞에서 내리고, 자신이 쓰던 방을 봉해 두었다가 스님 스스로 열고, 사찰의 어려움을 물어서 해결을 약속하리라.’ 세월이 흘러 제자 스님들이 노스님이 될 무렵, 조엄이 범어사를 찾은 것이다. 조엄은 사찰의 어려움을 묻고 36종의 부역을 혁파해 줄 것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즉시 동래부사에게 명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지금 범어사에는 조엄의 공덕을 잊지 않는 불망비(不忘碑)가 있다. 조엄은 스스로 낭백 스님의 후신이라고 한 일은 없다. 그러나 낭백 스님의 원력을 성취하였기에 스님의 환생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보시행을 했던 스님의 모습이 조엄의 애민 정신에 그대로 녹아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고구마를 들어온 이가 조엄이다. 조엄은 1763년(영조 39) 통신사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1764년 귀국길에 대마도에서 고구마 종자를 가져왔다. 고구마는 수확량이 많고 거친 땅에서도 잘 자라 백성의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리라는 애민 정신이 바탕이 된 행위다. 조엄의 〈해사일기〉에는 자세한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구마 재배지는 부산 영도다. 현재 영도구 청학동에는 ‘조내기 고구마 역사기념관’이 있다.
이제 고구마 하면, 범어사가 떠오르지 않을까. 그리고 설화탐사대를 군고구마가 생각나는 계절에 마무리하게 되다니. 함께한 모든 인연에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 다음 인연을 기다린다.<끝>
▶한줄 요약
조계문을 보고자 휴가를 내고 온 유럽의 어느 건축학자는 매우 감탄하며 말하였다. “저렇게 육중한 지붕을 어떻게 네 개의 기둥이 지탱할 수 있을까. 참으로 경이롭다.” 조계문은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