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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이야기를 담다 <1>근대적 지식과 문화의 장 개운사, 대원암

작성자박정근|작성시간26.06.23|조회수27 목록 댓글 0

사찰 이야기를 담다 <1>근대적 지식과 문화의 장 개운사, 대원암

 

석전스님 통해 근대 교육과 문화 공간 자리매김

 

석전 박한영 스님이 192610월부터 1945년 해방 직전까지 주석하며 청년승려 등을 교육한 서울 개운사 대원암.

 

본 난을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은 머리말로 독자 제현께 인사를 드린다. 본 난은 우리 문화사에서 사찰이 가진 불교의 신앙과 수행의 터전으로서의 공간을 넘어, 일반의 사회문화적 공간으로 기능했던 확장적인 국면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독자 제현의 냉철한 죽비를 기다린다.

 

조선 불교 근대 선지식 석전스님

 

중앙불전 운영 일제 간섭 강화로

 

19381124일 교장 직 사임

 

서울 개운사(開雲寺)는 본래 근처 정조 후궁 원빈(元嬪) 홍씨의 능인 명인원(明仁園)에 제사를 지낼 때 두부를 만들어 보내던 작은 절이었다. 부속 대원암(大圓庵)1926년 강원으로 쓸 요량으로 건축한 것으로 보인다.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 1870-1948)192610월 이곳의 강주로 초빙된 이후 1945년 해방 직전까지 줄곧 주석하였다. 석전은 1928년 혜화동에 불교전수학교(31년 이후 중앙불교전문학교로 승격)가 설립되고 염송(拈頌) 등의 교과목을 담당하게 되어 두 곳의 학인들을 교육하게 된다. 그런데 석전은 193811월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직을 사임한다. 아래 시는 석전이 그 해 음력 1217일에 쓴 입춘에 여러 생각이 나서[立春雜感十絶]’ 중 한 수이다.

 

금세립춘침랍중(今歲立春侵臘中)

부빙어이사등공(負冰魚已似騰空)

동풍해파경동설(東風解破經冬雪)

득견북귀강외홍(得見北歸江外鴻)

 

올해는 입춘이 섣달에 들었으니

얼음 속 물고기 허공도 날아가겠네

해 묵은 겨울눈도 봄바람에 사라지면

강 위의 기러기도 북으로 날아가리.

 

일본은 19377월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8월엔 전국의 본말사에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기원제를 강요하였다. 학교 운영에도 일제의 간섭이 강화되자 19381124일 석전은 193311월부터 맡아왔던 중앙불전의 교장직을 사임했다. 하지만 마음속엔 여전히 묵은 것이 남아 있었기에 해 묵은 겨울눈이 봄바람에 사라지듯 마음을 훌훌 털어버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19225월 중앙학림의 휴교는 한국 불교계의 최고학부가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전국 지방학림 출신 스님들이 대원암으로 들어와 학업을 이어갔다. 처음 대원강원에서는 전통적인 강원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19294월부터는 불교연구원을 설립하여 입학 자격을 사교와 대교를 수료한 자로 한정하는 한편, 3년 이상의 수업 연한을 정하고 보조과와 정과를 두었으며, 보조과는 유식론·구사론·상종팔요·법화경·열반경·불교사 등을 임의로 선택하여 연구하게 하고, 정과는 능엄·기신·반야·원각·화엄현담·삼현·십지 중 일부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게 했다. 이런 교과과정은 석전이 전통강원의 교과과정을 근대에 맞게 개편한 것이다.

 

해방까지 20여 년 개운사에 주석

 

대원암서 청년승려 등 교육 매진

 

신석정 서정주 김동리 등도 수학

 

대원암에서 공부하는 것은 스님들만이 아니었다. 신석정, 서정주, 김동리, 이봉구, 이종률 같은 당대의 젊은이들도 와서 공부했다. 말하자면 대원암은 이원적인 교육 제도를 운영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광수, 최남선, 홍명희, 정인보, 변영만과 같은 외국 유학 지식인들도 석전을 찾았다. 오세창, 강청운, 안종원, 김돈희, 고희동 같은 서화예술인, 이병기, 권덕규 등의 문학과 언어를 전공하던 학자들도 대원암을 찾아 석전에게 저마다의 길을 물었다.

 

이들이 대원암을 찾은 이유는 저마다의 필요에 따른 것이었지만 그 필요를 해결하는 방법만은 같았는데 바로 석전과 대화를 통해서 방편을 얻는 것이었다. 석전은 당신이 가진 경험과 학식으로 그들에게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한편, 이런 자리를 더욱 넉넉하고 운치 있게 한 것은 시를 수작(酬酌)하는 것이었다. 시를 지어 주고받으며 상대에 대해 파악하고 서로 간의 우의를 다졌다. 아래의 시는 1932년 가을 이건방, 이범세, 정인보 등이 대원암을 찾았을 때 석전 스님이 지은 것이다.

 

만제국천송엄문(晩霽菊天松掩門)

우성련사청가론(偶成蓮社聽佳論)

한운요옥염향수(閒雲繞屋染香穗)

류수도추명석근(流水到秋鳴石根)

명산동몽련풍락(名山同夢憐楓落)

쌍빈서풍취설흔(西風吹雪痕)

여견취성방외지(如見聚星方外地)

막수모우만성혼(莫愁暮雨滿城昏)

 

비 그친 가을 저녁 솔문을 닫았는데

우연히 절집에서 환한 얘기 듣게 되네

구름은 집을 싸며 향연기로 물들이고

시냇물은 가을날의 돌부리를 울리는데

단풍잎 사랑스런 명산 꿈을 함께 꾸니

눈발 같은 귀밑머리 서풍에 흩날리리

절집으로 별들이 함께 모여 들었으니

저녁비에 성안 가득 어둑해도 걱정마오.

 

난곡·치재·위당이 대원산방에 모여 함께 짓다(蘭谷·恥齋·爲堂會于大圓山房共賦九月八日)’

 

전통강원 교과를 근대 맞게 개편

 

독서회 조직 불서 외 책들도 섭렵

 

불온단체 규정, 석전은 두둔 외호

 

난곡은 정인보의 스승 이건방(李建芳, 1861~1939)이다. 그는 정제두, 이광려로부터 이어진 조선의 양명학파로 한말 강화학파의 중심인물이다. 치재는 조선말 간도땅을 영유하기 위해 외교적 노력에 힘썼던 이중하의 아들 이범세로 그 또한 양명학파의 일원이었다. 이들이 가을비가 그친 저녁 무렵 대원암에 온 것이다. 찾아온 때는 날이 어둑했지만 이들의 방문으로 대원암은 한층 환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시에서 이들은 단풍잎이 사랑스러운 명산을 함께 방문하기를 꿈꾼다. 그러므로 저녁 비에 온 성안이 어둠에 묻힌다 해도 근심할 것이 없다는 호기를 부린다.

 

2005년 대원암 건립된 조계종 초대 종정 영호대종사 대원암 조실 유적지비석

 

난곡 일행이 대원암을 찾던 때는 일제가 만주와 중국 침략에 대한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식민지 조선 사회를 더욱 어려운 국면으로 몰아가던 시기였다. 석전은 난곡에 대해 스스로 방외의 지경(유교의 바깥)에 있는 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난곡 일행을 별들이라 일컬으며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이에 앞서 821일 난곡은 대원암을 찾아 석전과 수인사를 나누고 시를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

 

난곡이 치재와 위당을 데리고 다시 찾은 것은 명산 즉, 금강산을 가보고 싶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산수벽이 있었던 석전은 이미 금강산의 비로봉을 5, 6번 올랐었고 이광수, 이병기, 최남선 등이 석전의 안내로 금강산을 여행하고 금강산 기행문을 내놓아 인기를 모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듬해 여름 석전은 난곡 등을 인솔하여 장안사, 마하연을 거처 비로봉에 오르고 내외 금강과 삼일포 해금강까지 함께 걸으며 방외의 교유를 다졌다. 이후 정인보는 석전의 안내로 충청도와 전라도 일원을 답사하면서 석전을 한층 깊이 존경하게 되었다.

 

대원암에서 석전은 이따금 전문 국악인들을 초청해 연주회를 벌이기도 했다. 이는 불서와 독경 소리에만 매몰된 강원 학인들의 귀를 열어주는 교육적 방편이기도 하였다. 요즘엔 봄, 여름 가을로 산사음악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심심찮게 전해지나 석전 시대에 산사음악회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신()풍경이었다. 이런 점에서 석전은 산사음악회 문화를 일군 선구자이며, 대원암은 근대적 문화공간으로 기능했다고 할 수 있겠다.

 

대원암 강원 학인들은 독서회를 조직하고 불서 외에 다방면의 책들을 섭렵했다. 이 독서회에는 이웃 보성전문(현 고려대학) 학생들도 참여했으며, 이들은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을 비롯하여 <에밀>, <민약론>, <법의 정신> 및 포이에르 바하의 유물론적 변증법 같은 사회과학 서적들을 탐독했다. 일제의 경찰이 이 독서회를 불온단체로 규정하고 회원들을 잡아다가 취조하며 두들겨 패는 일이 있었다. 석전은 이런 독서회 활동을 알면서도 제지하지 않았고, 그들의 처지를 두둔하고 외호해주었다.

 

이처럼 대원암은 석전이라는 인물을 통해 근대적 교육공간이자 문화공간으로 자리했다.

 

 

[불교신문 3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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