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2025150502 김미승
“여기에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먹으면 돼. 그게 다야. 중요한 건 진짜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대사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불확실성”과 “확실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영화에선 많은 것들이 불확실하다. 해미가 종수를 좋아한 것이 맞는 것인지, 혹은 벤을 좋아한 것인지, 벤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는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지, 해미의 고양이는 정말로 존재했던 것이 맞는지, 해미는 정말로 우물에 빠졌던 적이 있는지, 그리고 벤이 해미를 죽인 것이 맞는지. 우리는 인물들의 대사와 정황을 통해서만 사실관계를 짐작할 수 있을 뿐, 실제 사실관계를 파악할 순 없다. 마치 모든 것이 해미가 종수에게 보여 주었던 ‘마임’과 같은 것이다.
더하여 영화에선 “메타포” 즉, “은유”가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영화에서 벤은 음식을 만들어 먹는 행위를 “신에게 제물을 바치듯”이라고 묘사하기도 하고,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행위를 “비”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행위 자체가 다른 행위에 대한 은유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렇다면 이러한 확실성과 불확실성, 은유와 사실을 모두 분명히 구별해야 할까? 종수는 계속해서 확실성에 집착하는 인물이다. 해미에게 정말로 고양이가 있는 게 맞는지 확인하고자 하고, 벤이 비닐하우스를 정말로 태웠는지를 확인하고자 하며, 해미가 정말로 어릴 때 우물에 빠졌던 게 맞는지 확인하고자 하고, 벤이 해미를 정말로 죽인 것이 맞는지 확인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시도 또한 또 하나의 불확실함으로 귀결될 뿐이다. 그리고 결국은 불확실함의 늪에 빠져 벤을 죽이는 선택을 하게 된다.
나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완전히 확실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에 100%는 없다. 내가 사실이라 알고 있는 것 또한 누군가가 지어낸 허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렇게 모든 것이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확실함을 밝히는 것에 집착한다면 오히려 역설적으로 종수와 같이 불확실함의 늪에 빠지게 되어 헤어나올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감독이 이와 같이 모든 것을 확실하게 밝히려다 결국 자멸하게 되는 종수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확실함에 집착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더하여 세상에 정말로 확실한 것은 존재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자 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의심하되, 집착하거나 빠지지는 않는 것이다.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말처럼 인간은 끊임없이 생각하고 의심하지만 결국 의심하는 존재로서의 나 자신은 존재한다. 따라서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도 끊임없이 의심하고 그 의심하는 나 자신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