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검
[ 雲劍 ]
원래 ‘운검(雲劍)’은 2품 이상의 무반(武班) 두 사람이 큰 칼[운검(雲劍)]을 차고 임금의 좌우에 서서 호위하는 임시 직책이며, 나라에 큰 잔치나 회합이 있어 임금이 참석할 때에 유능하고 이름 있는 무장(武將) 중에서 가장 믿는 사람을 골라서 임명하였다. 그들의 정식 명칭은 별운검(別雲劍)이라 하였고, 이들은 경호상의 목적도 없지 않으나, 주된 역할은 의장 내지는 호위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이들이 사용하는 칼을 운검 혹은 별운검이라고 불렀다.
현재 운검은 단 1자루만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운검은 각 부분이 모두 온전하게 전해지고 있는 유물로 당시의 호위용 도검의 면모를 알게 하여 주어 매우 중요한 도검이라 할 수 있다.
육군박물관에 소장된 운검은 칼날의 길이는 64.4cm, 손잡이의 길이는 20.1cm이며, 칼집의 길이는 73.5cm에 이르러 칼날에 비해 칼집이 필요 이상 긴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운검의 칼집에는 휴대를 위하여 고착된 두 개의 고리가 너무 긴 사이(47cm)를 두고 형성되어 있다. 이는 다른 도검에 비해 상당히 긴 것으로 다른 도검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운검에서 두 고리의 간격이 긴 것은 아마도 어깨에 둘러매기 위한 용도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물론 왕이 참석할 때에는 두 손으로 소중히 감싸쥐었을 것이다. 하지만 왕이 주변에 없을 시에는 운검 해당자는 편의적으로 어깨에 둘러매기도 하였던 것 같다.
칼집과 손잡이는 사어피(沙魚皮)로 장식되어 있으며, 장식 및 마구리의 재질은 황동이다. 칼막이의 앞뒤에는 소나무, 학, 불로초 등의 문양이 둘러져 음각되어 있으며, 칼집의 놋쇠장식은 후에 보수를 한 것으로 보인다. 십장생의 문양은 이 칼의 의미를 보여주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원래 운검(雲劒)이란 칼 이름의 유래는 칼집과 칼자루에 그려진 구름 모양의 장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였다. 구름무늬는 구름을 타고 승천하는 용, 곧 왕을 호위하는 상징성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현존하고 있는 유물에는 그러한 구름 문양 대신 십장생 문양이 들어 있다. 한편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별운검에는 죽엽문(竹葉紋), 서화문(瑞花紋), 치우천왕문(蚩尤天王紋) 등이 드리워져 있고, 장식물에는 서화와 쌍복문(雙蝠紋)이 형성되어 있다. 따라서 천자인 왕을 호위하는 존재로서의 고귀한 상징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문헌상에 나타난 운검의 경우에 칼집의 재료가 사어피(沙魚皮;상어가죽)이고, 장식도 고급인 백은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 운검은 특이하게도 손잡이 부분에 매어 있는 매듭 끈의 말단에 이 검을 쓰던 인물의 호패가 매달려 있어 매우 이채롭다. 호패명에 의하면 "정기화 병오생 무과경진(鄭基禾 丙午生 武科庚辰)이라고 되어있다. 이 운검은 대략 17세기 유물로 추정하고 있으며, 무게는 690g이다. 그러나 문헌에서와 같이 주홍색을 띠거나 백은이 사용되지는 않았다.
역사적 사실
운검에 대해서는 《세종실록》 권133, 오례(五禮), 군례서례(軍禮序禮)에 그 형태가 언급되어 있다. 문헌에 의하면 조선 초기의 칼로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운검(雲劍)으로 그 칼집은 어피(魚皮)로써 싸고, 칠은 주홍색(朱紅色)을 사용하고, 장식은 백은(白銀)을 사용하며, 홍조수아(紅絛穗兒)로써 드리우고, 띠는 가죽을 사용한다고 하였고, 둘째는 패검(佩劍)으로, 우리나라 말로 환도(環刀)라 하며 제도는 운검과 같은데, 검은 칠을 하고 장식은 황동(黃銅)을 사용하고 홍조수아로써 드리우고 띠는 녹비(鹿皮)를 사용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조선 초기의 칼에는 운검과 환도가 있는데, 두 칼은 거의 같은 칼이지만 장식이 달랐다. 운검은 칼자루와 칼집을 어피로 장식하고, 붉은 색을 칠하였으며, 칼막이에 여러 가지 장식을 하였다. 즉 운검은 환도와는 달리 의전행사용으로 사용되었기에 고급스럽게 장식하였다. 또 운검은 명칭상 양날의 검으로 보이지만 실제는 외날 칼인 도이다.
원래 도(刀)와 검(劍)은 우리나라의 전통무기 가운데 대표적인 단병기(短兵器)이다. 도는 날이 한 쪽에만 있으며 곡선의 형태로 되어 있고 자루가 길면서 칼집도 없었다. 주로 베어서 살상효과를 냈다. 반면에 검은 날이 양쪽에 있으며 형태는 직선으로 되어 있으며, 도에 비해서는 자루가 짧고 칼집이 있다. 기능면으로는 도는 겨드랑이에 차고 다닌 것에 비해 검은 손에 들고 다니는 병기였다. 검은 베는 것 외에도 찔러서 살상(殺傷)효과를 높힐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검(劍)보다는 도(刀)를 숭상하였기에 전투용으로는 도(刀)가 보편화되었다. 그 이유는 첫 번째로 전장(戰場)에서의 효용성이 도에 비해서 검이 우세한 점이 없고, 기병의 경우 오히려 검은 도에 비해 많은 단점을 지니고 있다. 두 번째로 도는 검에 비해 제작 공정이 간단해 짧은 시간에 대량생산이 가능하며, 제작후에는 대단히 견고하다.
즉, 양쪽 날을 세우는 검에 비해 도는 한쪽 날만을 세우기 때문에 공정이 간단하고 쉽다. 또 도가 한쪽 날만을 세우고 다른 한쪽은 두꺼운 등을 만들기 때문에 양쪽날을 세운 검에 비해 견고하다. 따라서 많은 수공을 들이지 않고서도 대량생산이 가능하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도는 전투용 무기로서 보편화되었다. 전투용 도(刀)가 보편화됨에 따라 패용(佩用)의 편리성을 높이기 위해 종래 검(劍)에만 있었던 칼집이 도에도 갖춰지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도검은 전투병기의 기능 변화와 제도적인 한계에 따라 점차 개인 호신용(護身用) 무기로 전락하게 되었다. 도검이 개인 호신무기로 여겨지면서 칼집에 여러 가지 장식이 들어가 화려하게 치장되기도 하였다. 특히 인검(寅劍)∙운검(雲劒) 등과 같은 상징성이 강하고, 의전용 무기인 경우에는 칼막이 내지는 칼집에 상감(象嵌) 등의 방법으로 여러 가지 무늬를 새겼으며, 옥을 검에 매달거나 혹은 박아 끼운 옥구검(玉具劒) 등도 등장하였다.
에피소드
이 운검은 1456년(세조 2)에 사육신인 성삼문(成三問)과 박팽년(朴彭年) 등이 주동이 되어 성승(成勝)∙유응부(兪應孚)를 별운검으로 선정하여 명나라 사신 윤봉(尹鳳)을 영접하는 창덕궁(昌德宮)의 연회장(宴會場)에서 세조를 살해하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세조의 모신(謀臣)인 한명회(韓明澮)가 비밀히 탐지하고서 세조에게 아뢰어 연회 당일에 운검을 폐지시킴으로써 결국 이 거사가 중지되고, 뒤따라 동모자(同謀者)의 한 사람인 김질(金礩)의 고변으로 이들 사육신이 모두 처형된 사건으로도 유명하다.
《연려실기술》 제4권, 단종조를 바탕으로 당시의 상황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456년 6월, 명나라 사신인 윤봉이 태평관(太平館)에 왔는데, 세조가 창덕궁 상왕 어전에서 사신을 청하여 연회를 하기로 하였다. 이때 박팽년·성삼문이 모의하여 그 날에 성승(成勝)과 유응부로 하여금 운검(雲劍)을 삼아서 잔치가 한창 벌어진 때에 일을 시작하여, 성문(城門)을 꼭 닫고 세조의 우익(羽翼)을 베면, 상왕을 복위하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쉬울 것이라 하였다.
당시 유응부는 “임금과 세자는 내가 맡을 것이니, 나머지는 자네들이 처치하라”라고 말하였다. 이에 성삼문은 “신숙주(申叔舟)는 나의 평생 친구이지만, 죄가 무거우니, 베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형조정랑 윤영손(尹鈴孫 ; 화산부원군 권전(權專)의 사위)을 시켜 신숙주를 죽이기로 하였다. 이때 성삼문은 김질에게 “일이 성공하면 자네의 장인 정창손(鄭昌孫)이 수상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고, 단종 복위계획이 차질없이 준비되었다.
한편 한명회(韓明澮)는 세조에게 아뢰어 창덕궁 광연전(廣延殿)이 좁고 또 찌는 듯이 더우니, 세자는 들어오지 말고, 운검(雲劍)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세조도 이를 따랐다.
연회 당일 성승이 칼[운검]을 차고 연회장에 들어가려 하자, 한명회가 “이미 운검은 들이지 말라 하였다”라고 하여 가로막았다. 이에 성승이 물러나면서 한명회를 쳐죽이려 하였으나 성삼문이 “세자가 오지 않았으니, 한명회를 죽여도 소용이 없다.”하여 만류하였다. 또 유응부가 그래도 들어가 치려 하자, 박팽년과 성삼문이 “지금 세자가 본궁에 있고, 또 운검을 들이지 않으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라, 만일 여기서 거사하였다가 세자가 경복궁에서 군사를 일으키면 성패를 알 수 없으니, 다른 날에 임금과 세자가 같이 있는 때를 타서 거사하여 성공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며 굳이 만류하였다. 이에 유응부가 “일은 신속하게 처리하는 것이 중요한데, 만일 후일로 미루면 일이 누설될까 두렵다. 세자가 비록 본궁에 있지만, 모신과 적자가 모두 수양을 따라 여기에 왔으니, 오늘 이 무리를 다 죽이고 상왕을 복위시켜 호령하면서, 한 떼의 군사를 거느리고 경복궁에 들어가면 세자가 장차 어디로 도망하겠는가. 비록 지혜있는 자가 있다 해도 계교를 내지 못할 것이니, 좀처럼 만나기 힘든 기회라, 놓쳐서는 안된다.”라 하였으나 박팽년 등이 굳이 만전지계(萬全之計)가 아니라고 하며 거사하지 못하게 하였다.
또 윤영손도 계획이 정지된 것을 알지 못하고 신숙주가 한쪽 마루에 나가서 머리 감는 것을 틈타 칼을 가지고 제거하기 위해 앞으로 다가갔으나 성삼문이 눈짓하여 만류하였다. 이후 김질은 일이 성사되지 않는 것을 보고 달려가서 정창손에게 “오늘 특별히 운검을 들이지 않고 세자도 오지 않았으니, 이것은 천명이라, 먼저 고발하면 부귀를 누리리라.”라고 말하자, 정창손이 그 말대로 김질과 함께 대궐로 달려가서 변란을 고하였다. 정창손은 “신은 실상 알지 못하는데, 김질이 삼문의 무리와 ··· 만 번 죽어 마땅한 죄입니다.” 라 하였다.
이에 세조가 김질을 불러들여 그 진상을 추궁하자 김질은 “성삼문이 신을 보자고 청하기에 신이 가 보았더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근일에 상왕께서 창덕궁 북쪽 담을 터놓고 유(瑜)의 예전 집에 왕래하는데, 이것은 반드시 한명회 등의 헌책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그런가.’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그 자세한 사항은 알지 못하나, 이는 상왕을 좁은 곳에 넣어두고 한두 명 장사로 하여금 담을 넘어 들어가서 불궤(不軌) 한 일을 도모하려 함일 것이라.’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상왕과 세자가 모두 어리니, 만일 이 뒤에 임금이 죽고 왕위에 서기를 다툰다면 상왕을 돕는 것이 옳으니, 꼭 너의 장인에게 이르라.’고 하였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세조는 곧 여러 승지를 불러들여 성삼문을 결박하고 심문하였다.
공조참의 이휘(李徽)는 일이 발각됨을 듣고 정원에 나가서 성삼문 등의 음모를 고하여 아뢰기를, “신이 곧 아뢰려 하였으나, 그 실상을 알지 못하여 감히 곧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세조는 승지 윤자운(尹子雲)을 보내어, 상왕께 고하기를, “성삼문이 심술이 좋지 않으나 조금 학문을 알기로, 정원에 두었다가 일하는 데에 실수가 많기에 예방승지에서 공방(工房) 승지로 고쳤더니, 마음에 원망을 품고 말을 지어내기를, ‘상왕을 유(瑜)의 집에 왕래하게 하는 것은 반드시 몰래 불측한 일을 하려 함이라’ 하고, 이어서 대신을 모조리 죽이려 하였다 하므로, 지금 국문하고 있다.” 하였다. 상왕이 윤자운에게 술을 주었다.
이후 세조가 편전(便殿)에 나와 좌정하니, 성삼문이 승지로 입시하였다. 무사로 하여금 끌어내려, 김질(金礩)이 고한 말로 심문하매, 성삼문이 한참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가 아뢰기를, “김질과 대질하기를 원한다.” 하였다. 세조가 질에게 명하여 그 실상을 말하니, 성삼문이 그치게 하고 웃으며 아뢰기를, “다 참말이다. 상왕께서 춘추가 한창 젊으신데 손위(遜位)하셨으니, 다시 세우려 함은 신하된 자가 마땅히 할 일이라, 다시 무엇을 묻는가.” 하고 김질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네가 고한 것이 오히려 말을 둘러대어 직절(直截)하지가 못하다. 우리들의 뜻은 바로 이러이러한 일을 하려 한 것이다.” 하였다. 명하여 국문하니, 성삼문이 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박정이 그 계획을 안다고 끌어대었다. 세조가 말하기를, “너희들이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는가.” 하니, 성삼문은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옛 임금을 복위하려 함이라, 천하에 누가 자기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는가. 어찌 이를 모반이라 말하는가. 나의 마음은 나랏 사람이 다 안다. 나으리가 남의 나라를 도둑질하여 뺏으니, 나는 신하가 되어서 차마 군부(君父)가 폐출되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나으리가 평일에 곧잘 주공(周公)을 끌어댔는데, 주공도 이런 일이 있었는가. 성삼문이 이 일을 하는 것은 하늘에 두 해가 없고, 백성은 두 임금이 없기 때문이라.” 하였다. 세조가 발을 구르며 말하기를, “선위를 받을 때에는 어찌하여 저지하지 않고, 도리어 내게 붙었다가 이제 나를 배반하는가.” 하였다. 성삼문이 말하기를, “사세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내가 원래 그것을 저지하지 못할 바에는 물러가서 한 번 죽음이 있을 뿐임을 알지만, 공연히 죽기만 해야 소용이 없겠으므로, 참고 지금까지 이른 것은 뒤에 일을 도모하려 함이라.” 하였다. 세조가 말하되, “네가 신이라 일컫지 않고 나를 나으리라고 하는데, 네가 내 녹을 먹지 않았느냐. 녹을 먹고 배반하는 것은 반역이다. 겉으로는 상왕을 복위시킨다 하지마는, 실상은 네가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성삼문이 말하기를, “상왕이 계신데, 나으리가 어떻게 나를 신하로 삼을 수 있는가. 내가 또 나으리의 녹을 먹지 않았으니, 만일 믿지 못하거든 나의 집을 적몰(籍沒)하여 따져 보라. 나으리의 말은 모두 허망하여 취할 것이 없다.” 하였다. 세조가 극도로 노하여 무사로 하여금 쇠를 달구어 그 다리를 뚫고 그 팔을 끊으나, 얼굴빛이 변하지 않고 다른 책에는 쇳조각을 달구어 배꼽에 놓으매, 기름이 지글지글 끓어 탔다 하였다.
쇠가 식기를 기다려 말하기를, “다시 달구어 오게 하라. 나으리의 형벌이 참 독하다.” 하였다. 그때, 신숙주가 임금의 앞에 있었다. 성삼문이 꾸짖어 말하기를, “옛날에 너와 더불어 같이 집현전에 번들 적에 영릉(英陵 ; 세종의 능호)께서 원손(元孫)을 안고 뜰을 거닐면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천추만세 뒤에 너희들이 모름지기 이 아이를 잘 생각하라’ 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귓전에 남았는데, 네가 어찌 잊었는가. 너의 악함이 이 정도에 이를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하였다. 세조가 신숙주더러 “뒤편으로 피하라.” 하였다. 세조가 박팽년의 재주를 사랑하므로, 가만히 사람을 시켜서 전하기를, “네가 내게 항복하고 같이 역모를 안 했다고 하면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박팽년이 웃고 대답하지 않으며, 임금을 일컬을 때에는 반드시 나으리라고 하였다. 세조가 크게 노하여 무사로 하여금 그 입을 마구 때리게 하고 말하기를, “네가 이미 신이라 일컬었고 내게서 녹을 먹었으니, 지금 비록 신이라 일컫지 않더라도 소용이 없다.” 하였다.
박팽년이 말하기를, “내가 상왕의 신하로 충청감사가 되었고, 장계에도 나으리에게 한 번도 신이라 일컫지 않았으며, 녹도 먹지 않았다.” 하였다. 그 장계를 대조하여 보니, 과연 신(臣)자는 하나도 없었다. 거(巨)자로 썼다. 녹은 받아서 먹지 않고, 한 창고에 봉하여 두었다. 세조가 유응부에게 묻기를, “너는 무엇을 하려 하였느냐.” 하니, 유응부가 말하기를, “잔칫날을 당하여 한 칼로 그대를 폐하고 본 임금을 복위하려 하였더니, 불행히도 간인이 고발하였으니, 다시 무엇을 하랴. 그대는 빨리 나를 죽이라.” 하였다. 세조가 노하여 말하기를, “네가 상왕의 이름을 내걸고 사직을 도모하려 하였구나” 하고, 무사로 하여금 살가죽을 벗기며 물으니, 유응부가 성삼문 등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람들이 말하되 서생과는 같이 일을 꾀할 수 없다 하더니 과연 그렇도다.
지난번 잔치를 하던 날에 내가 칼을 시험하려 하니, 너희들이 굳이 말하기를, ‘만전의 계책이 아니라’ 하여 오늘의 화를 당하게 되었으니, 너희들은 사람이라도 꾀가 없으니 짐승과 무엇이 다르랴.” 하며, “만약 실정 밖의 일을 물으려거든 저 어리석은 선비에게 물으라.” 하고, 즉시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세조가 더욱 노하여 쇠를 달구어 배 아래 두 허벅지 사이에 넣으니, 지글지글 끓으며 피부와 살이 다 익었다. 유응부가 얼굴빛을 변하지 않고 쇠가 식기를 기다려 쇠를 땅에 던지며, “다시 달구어 오라.” 하고 끝끝내 항복하지 않았다. 이개(李塏)는 단근질하는 형신에 임하여 천천히 묻기를, “이것이 무슨 형벌이냐.” 하매, 세조가 대답하지 못하였다.
하위지의 차례가 되자, 하위지가 말하기를, “사람이 반역이란 죄명을 쓰면 마땅히 베는 형벌을 받게 되는데 다시 무엇을 묻는가.” 하매, 세조가 노여움이 풀려서 단근질하는 형신은 하지 않았다. 성삼문에게 공모한 자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박팽년 등과 우리 아버지뿐이다.” 하였다. 다시 물으니, 대답하기를, “우리 아버지도 숨기지 않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랴” 하였다. 그때에 제학 강희안(姜希顔)이 이에 관련되어 고문하였으나 불복하였다. 세조가 성삼문에게 묻기를, “강희안이 그 역모를 아느냐.” 하니, 성삼문이 대답하기를, “실지로 알지 못한다. 나으리가 선조(先朝)의 명사를 다 죽이고 이 사람만 남았는데,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아직 남겨 두어서 쓰게 하라. 이 사람은 진실로 어진 사람이다.” 하여, 강희안은 마침내 죄를 면하였다. 성삼문이 나갈 때에 좌우 옛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어진 임금을 도와서 태평성세를 이룩하라. 나는 돌아가 옛 임금을 지하에서 뵙겠다.” 하였다.
이후에도 일당들을 국문하니, 성삼문이 대답하기를, “김문기(金文起)․권자신(權自愼)․송석동(宋石同)․윤영손(尹鈴孫)․이휘(李徽) 및 우리 부자라.” 하였다. 사람을 시켜 묻기를, “상왕도 또한 아는가.”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권자신을 시켜 통지하였다.”고 말했다. 이에 권자신·김문기 등 칠십여 인을 차례로 잡아 국문하고 율(律)에 의하여 처단하여 한 명도 모면하지 못하였다. 허조(許慥)는 이개의 매부로 모의에 참여하였다가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운검 [雲劍]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국의 몬스터),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