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위 삼장군제
집필자 성병희
정의
경상북도 군위군 효령면 장군리에서 매년 음력 오월 단오에 지내는 마을 공동 제의.
장군리 서쪽에 있는 삼정산(三井山)을 장군봉 또는 장군댕이라 부르는데,
그 정상에 세 장군을 모시는 삼장군당(三將軍堂)이 있다.
세 장군은 신라 김유신(金庾信) 장군, 당(唐)나라 소정방(蘇定方) 장군과 이무(李茂) 장군이다.
이 당집을 이곳에서는 흔히 장군당이라 하고,
기록에는 간혹 김유신사(金庾信祠), 효령사(孝靈祠) 또는 삼장군당(三將軍堂)이라 하였다.
유래
삼장군은 서기 660년(무열왕7) 삼국통합의 첫발인 나당연합군의 백제 공략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곳에 전하는 유래에 의하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당나라에 청병(請兵)을 했다.
당은 곧 원군(援軍)을 파견하였는데, 원군의 대장은 소정방, 부장은 이무였다.
이들이 신라로 오고 있을 무렵, 신라에서는 김유신 장군과 많은 군사를 보내어 마중하게 했다.
김유신 장군은 장군리 넓은 들에서 당군(唐軍)과 만나게 되었다.
나당연합군은 잠시 효령에 군사를 머물게 했으며,
삼장군은 장군봉에 지휘소를 마련하고 백제를 공략할 작전을 수립했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후 삼장군은 다시 효령에 들러
장군봉에 올라 큰 소리로 “삼국통일이 되었으니, 안심하고 살아라.”라고 말한 뒤에 떠났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은 삼장군을 잊고 지냈다.
그런데 고려 후기 어느 때부터인지 장군봉 인근에서는 말을 타고 그냥 지나가면
말발굽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을사람들은 장군봉 밑에 하마비(下馬碑)를 세우고,
말을 탄 사람은 반드시 내리게 하였다.
또 장군봉 정상 부근에 접근하는 사람이나 가축이 변을 당하는 사건이 자주 일어났다.
이를 괴이하게 여긴 마을사람들이 그 까닭을 캐어보니 삼장군이 삼국을 통일하여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해주었는데도 백성들이 고마움을 모르고 제사도 올리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래 전부터 이 마을에 터를 잡고 살던 사공씨(司空氏)가 나라에 상소하여
마침내 나라의 명으로 삼장군당을 짓고, 매년 오월 단오에 관민이 합심하여 제사를 올리게 되었다.
삼장군제는 19세기 후반까지 전승되어 왔다.
단옷날이 되면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영신(迎神) 행진을 한다.
현의 우두머리 아전이 말을 탄 채 앞장서고,
울긋불긋한 여러 깃발들을 들고 말에 실은 큰 북을 둥둥 치면서 거리거리를 누빈다.
이렇게 영신 행진이 끝나면 장군당에 다같이 올라가서 삼장군께 경건한 제사를 올린다.
제사가 끝나면 꽹과리, 징, 북, 소고를 울리며 뒤풀이를 한다.
이때는 삼신(三神)을 모시고 신유(神遊) 행진을 계속한다.
19세기 후반에 들어 음력 정월 보름 제사가 추가되어 일반 동제와 같은 성격이 되었다.
이 무렵부터 당제에 대한 관의 지원이 끊어지고,
18세기 후반에 불로리에 입촌한 김해김씨들이 제사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제례는 김유신 장군의 후손으로서 제사권을 주장하는 김해김씨가 맡고 풍물, 영신 등
오신행위(娛神行爲)는 인근 마을의 사공씨를 중심으로 한 주민들이 맡았는데,
이 무렵 제례에 향사적 성격의 홀기(笏記)가 등장하여
민속신앙적 의례행사가 점차 변모하는 계기가 되었다.
1920년대 들어 일제의 간섭이 심해져 제의 규모가 극도로 축소되었다.
그리고 제의 주체가 주민에서 김해김씨에게로 넘어가면서,
마침내 제례가 향사(享祠)로 변하게 된다.
1953년 김해김씨들이 장군봉 아래에 세운 제동서원(濟東書院)이 자리를 잡자,
삼장군의 신좌를 서원의 숭무전으로 옮기게 된다.
제일(祭日)도 단오에서 삼월 초정일(初丁日)로 바뀌었다가 1981년부터 삼월 삼짇날에 지낸다.
내용
1995년 원래의 장군당 초석 위에 효령사(孝靈祠)라는 삼칸 와가(瓦家)로 복원하고,
세 장군의 위패 또한 바꾸었다.
위패에 김유신 장군은 ‘개국공순충장열흥무왕지위(開國公純忠壯烈興武王之位)’,
소정방 장군은 ‘신위도대총관소도독(神位道大摠管蘇都督)’,
이무 장군은 ‘좌위중랑장신라연안후(左衛中郞將新羅延安侯)’라고 쓰여 있다.
현재 삼장군제는 단옷날 오전 10시를 기하여 행해진다.
제관들은 미리 선정하는데, 군수가 초헌관을 담당한다.
제물은 조, 쌀, 돼지머리, 녹포, 대구포, 육포, 어포, 미나리, 무, 대추, 잣, 밤, 은행, 호도 같이
날 것을 사용하고 제상(祭床)에는 수저가 없다.
옛날 장군들은 날짐승을 칼로 베어 먹었기 때문이다.
제관을 비롯한 참례자들은 제동서원에서 준비하여 시간이 되면 장군당으로 이동한다.
제의 절차는 향사와 같다.
다만 초헌관이 세 신위에 모두 잔을 올린 다음 축문을 읽고,
아헌관 또한 세 신위에 모두 잔을 올리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종헌을 한 뒤 초헌관이 음복하고 망료례를 함으로써 제의는 끝난다.
이후 참례자들은 제동서원으로 이동하여 음복한다.
19세기까지 행해졌다는 영신행진과 신유는 행해지지 않고, 유교식 제사만 지낸다.
의의
삼장군당은 원래 마을사람들이 세운 민속신앙 차원의 당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애초에 초가였던 것이 현의 지원으로 와가로 바뀌었으며,
위패도 열향(列享)이었다가 점차 김유신이 주향(主享),
두 장군이 배향(配享)으로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오랜 세월 전승되면서 외형이나 내용이 변화를 거듭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경상도 군위현에 김유신사가 있는데
거기에는 그의 어머니 만 명을 모시고 있으며,
무녀들이 그 만 명을 섬기는데 신당에는 반드시 명도라는 구리거울을 걸어놓았다.”라는 내용으로
무당의 신당 이용을 짐작할 수가 있다.
강원도 대관령 산신당은 김유신 장군을 산신으로 모시고 있고,
강릉 시내 김유신 사당인 화부산사(花浮山祠)에서도 매년 단오에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보면
군위의 삼장군제는 강릉단오제와 같은 단오문화권(端午文化圈)의 축제였음을 알 수가 있다.
참고문헌
東國歲時記, 新增東國輿地勝覽, 五洲衍文長箋散稿 將軍堂 復元
學術調査報告書 (軍威郡·安東大學, 1988)
출처 – 한국민속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