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한길교회에서 강의했던 것을 Knowing the Times (기독교세계관학교 발행) 6호에 기고한 것입니다.
유아세례는 언제 베풀어야 하는가?
손재익 목사 (한길교회)
서론
유아세례(infant baptism)와 관련하여 개혁신학에서 주로 다루는 주제는 “유아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이 성경적인가?”하는 것이다. 이는 종교개혁 당시 재세례파가 유아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에 대해 반대하였던 것과 그 이후 침례교가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은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 이에 대해 개혁신학은 벨기에 신앙고백서 제34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74문답,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8장 4절,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66문답,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95문답 등에서 유아세례의 정당성에 대해서 잘 다루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유아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이 성경적인가?” 하는 주제와 깊은 관련이 있으면서도 오늘날 한국장로교회에서 등한히 여겨지는 “유아세례를 베푸는 시점은 언제가 가장 적합한가?” 하는 것에 대해서 다루고자 한다.
이 두 주제는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니다. 유아세례의 시점은 개혁파 교회가 유아에게도 세례를 베푸는 성경적 근거와 깊은 연관이 있다. 유아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을 성경적이라고 믿는다면, 그리고 그 근거가 개혁신학이 전통적으로 말해온 그것이라면, 유아세례를 베푸는 시기 역시 다음과 같아야 한다.
본론
유아세례를 베풀지 않는 침례교회와 성결교회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유아에게 세례를 베푼다.” 이 말은 장로교회에서만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사람에게는 너무나 익숙하고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침례교회에서만 신앙생활을 한 사람에게는 매우 낯선 일이다. 왜냐하면 유아세례는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에서 행해지는 것으로 침례교회는 유아세례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침례교회의 경우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라 하더라도 나중에 청년이나 성인이 되어서 본인이 결단하고 고백한 후에야 비로소 세례를 받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침례교회는 유아세례를 베풀지도 않고, 혹여나 다른 교파에서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이 침례교회로 옮겨온 경우에도 성인세례를 다시 받을 것을 요구한다. 성결교회의 경우 유아세례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시행하지 않고 있다.
침례교회와 성결교회는 유아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는 대신 ‘헌아식’이라는 것을 한다. ‘헌아식’(獻兒式, Baby Dedication)이란 문자 그대로 아이를 하나님께 바친다는 뜻인데, 태어난 이후 교회에 처음 출석한 아이를 목사에게 데리고 나가서 그 아이를 목사가 축복기도를 해 주고 온 교회가 축하해 주는 것이다.[1] 믿는 가정의 아이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는 대신 그 아이가 믿지 않는 가정의 아이와 다르다는 것을 표시는 해야겠기에 헌아식을 행하는 것이다. 유아세례라고 하는 성례는 시행하지 않으면서 그 대신 그에 준하는 의식을 거행하는 것이다.
유아에게 세례를 베풀지만 시점은 애매한 한국의 장로교회들
한국의 장로교회는 장로교회가 믿는 개혁주의 신학에 따라 유아에게도 세례를 베푼다. 그런데 그 시점은 대개 ‘어린이 주일’(5월 첫째 주)이나 ‘성탄절 예배’(12월 25일)이다. 그래서 3월에 태어난 아이의 경우 그 해 12월에 유아세례를 받거나 10월에 태어난 아이는 그 다음 해 어린이 주일에 베푼다. 그리고 이렇게 첫 출석과 유아세례의 시점이 다르다 보니 ‘헌아식’은 아니라 할지라도 ‘헌아식’과 다를 바 없는 의식(?)을 한다. 산모의 산후조리가 끝나고 신생아의 외출이 가능하게 되어 첫 예배에 출석한 때에 ‘하나님께 바친다’는 의미로 목사에게 나아가고 목사가 아이를 위해서 축복기도를 해 주는 의식(?)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어린이 주일’(5월 첫째 주)이나 ‘성탄절 예배’(12월 25일) 때가 되어 유아세례를 베푼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은 장로교식도 침례교식도 아닌 어중간한 방식이다. 앞서 침례교회의 ‘헌아식’을 언급한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유아세례는 언제 베풀어야 하는가?
유아세례를 어린이 주일이나 성탄절 예배 때에 베푸는 것은 아무런 성경적 근거도 없고 썩 어울리지도 않는다. 전 세계에서 한국교회에서만 지키고 있는 어린이 주일이라고 하는 것은 5월 5일 어린이날에 근거한 것으로, 소파 방정환(方定煥)이 처음 제정한 날에 근거한 날이다. 어린이 주일은 성경에서 명령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2] 성부 하나님의 창조사역,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성령님의 역사하심과 전혀 상관이 없는 날로서 임의로 만든 날이다. 그러므로 어린이 주일에 유아세례를 베푸는 것은 썩 어울리지 않는다. 성탄절에 유아세례를 베푸는 것은 아기 예수님과의 연관성 때문인 듯 한데, 과연 예수님의 탄생이 12월 25일이냐 하는 문제는 그 다음으로 두고도,[3] 유아세례는 아기 예수님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 두 날에 주로 유아세례를 베풀다 보니 유아세례를 베푸는 시기가 미뤄지므로 인하여서 헌아식에 준하는 의식과 유아세례를 병행하는 것은 장로교회의 정신과 문화에 전혀 맞지 않다.
그렇다면 유아세례는 언제 베푸는 것이 좋은가? 산모의 산후조리가 끝나고 신생아의 외출이 가능하게 되어 유아가 첫 예배에 출석한 바로 그 때에 행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즉 최대한 빨리 베푸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렇게 하면 유아세례가 곧 ‘헌아식’의 의미를 갖게 되고, 유아세례의 참된 의미도 그대로 드러낼 수 있다. 성례에 또 다른 성례에 준하는 의식을 덧붙일 이유도 없고, 성례가 참으로 성례되게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유아세례는 출생 후 가능한 한 빨리 시행하도록 하였다. 키프리아누스가 의장이었던 카르타고 회의(Carthago, 252년)에서는 유아세례를 태어난 지 8일 이전에 시행해도 되는가 라는 문제를 논의했고 그 결과 유아들이 가능한 한 빨리 출생 후 둘째 날 또는 셋째 날에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결정했으며 그것은 곧바로 일반적인 관습이 되어[4] 사도적 관습으로 여겨졌다. 도르트 교회법(1619) 제46조에 의하면 유아세례는 출생 후 2-3주째 주일에 베풀도록 하고 있다. 도르트 교회법을 근거로 하고 있는 캐나다 개혁교회[5]의 교회질서 제57조와 호주자유개혁교회[6]의 교회질서 제52조는 신자에게서 태어난 자녀의 경우 가능한 한 신속하게 세례를 받도록 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이처럼 대륙(네덜란드 계열)의 개혁교회에서는 산모의 산후조리가 끝나고 신생아의 외출이 가능하게 되어 첫 예배에 출석한 바로 그 때에 유아세례를 받도록 권장한다.[7]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 총회 헌법 예배모범 제8장 1항에는 “유아세례는 공연히 지체할 것도 아니요.....”라고 되어 있다.
유아세례를 베푸는 시기와 유아세례의 성경적 근거와의 연관성
그렇다면 왜 유아세례는 최대한 빨리 행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유아에게도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는 성경적 근거가 되는 2가지 이유 때문이다. 개혁신학이 유아에게도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보는 이유는 첫째, 유아세례는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를 두기 때문이고, 둘째, 유아세례는 구약의 할례 제도와 연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개혁신학이 유아에게도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보는 기본적인 이유는 신자와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에 있다. 유아세례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허락하신 은혜의 방편으로써 유아 당사자의 믿음의 표가 아니라 언약의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표시하고 인치는 성례이다. 유아에게 세례를 베푸는 이유는 그들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신자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이다. 그러므로 ‘언약’이 곧 세례의 조건이 된다.
이에 대해서는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166문답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166문답
166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어야to be administered 합니까?
답: 세례는 가시적 교회 밖에 있어서 약속의 언약the covenant of promise에 대해 외인된 자에게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faith과 그에 대한 순종obedience을 고백할 때까지는 누구에게도 세례를 베풀 수 없습니다.1) 그러나, 양친 혹은 부모 중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순종을 고백하는 경우, 그 유아들infants은 언약 안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므로in that respect, within the covenant 세례를 베풀어야 합니다.2)
1) 행 8:36,37; 2:38 2) 창 17:7,9; 갈 3:9,14; 골 2:11,12; 행 2:38,39; 롬 4:11,12; 고전 7:14; 마 28:19; 눅 18:15,16; 롬 11:16
위의 설명대로 신자인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것만으로 ‘언약’ 안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므로, 그 언약에 근거해서 세례를 베푼다.
그렇다면, ‘언약’은 신자인 부모로부터 출생(잉태)함과 동시에 생겨나므로 출생 직후에 이미 유아세례를 받을 자격이 있다.[8]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The Directory for the Public Worship of God)의 성례의 제정에 관하여(Of the Administration of the Sacraments) 부분에는 이 사실을 잘 명시하고 있다.
“......... 이 약속promise은 신자와 그 후손seed에게 주신 것으로서, 교회 안에서 태어난 신자의 자손posterity과 후손seed은 그들의 출생과 동시에 언약covenant에 참예하므로 그 인치심에 참예할 권한이 있고, 복음 아래서 교회의 외적인 특권에 참예하는 권한을 가졌으니, 은혜언약은 그 본질상 같으므로 구약시대의 아브라함의 자손들보다 못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은혜와 신자들에 대한 위로consolation도 이전보다 더욱 풍성해plentiful집니다....”
개혁신학이 유아에게도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보는 또 다른 이유는 세례가 곧 구약의 할례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구약교회에 허락하신 성례인 할례는 신약에 와서 세례로 대체된다. 골로새서 2:11-12에 의하면, “(11)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라고 해서 이 사실을 분명히 증거한다. 그래서 개혁신학은 구약교회에 속한 유아에게 할례를 행했듯이, 신약교회에 속한 유아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본다. 할례가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에 들어온다는 상징을 드러내는 것처럼, 세례는 하나님의 새언약 공동체인 교회의 회원이 된다는 상징을 드러내는 것으로써 할례와 마찬가지로 유아에게도 베풀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부모에게서 태어난 유아들에게도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본다.
이에 대해서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74문답과 벨기에 신앙고백서 제34조가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74문답
74문: 유아들infants도 세례를 받아야 합니까?
답: 그렇습니다. 그것은 유아들도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언약과 교회에 속하였고,5) 또한 어른들 못지않게 유아들에게도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속죄와 믿음을 일으키시는 성령이 약속되었기 때문입니다.6) 그러므로 유아들도 언약의 표the mark of the covenant인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교회에 연합되고should be received into 불신자의 자녀와 구별되어야 합니다should be distinguished from.7) 이런 일이 구약에서는 할례circumcision를 통하여 이루어졌으나8) 신약에서는 그 대신 세례가 제정되었습니다.9)
5) 창17:7; 마19:14 6) 시22:10; 사44:1-3; 행2:39; 16:31 7) 행10:47; 고전7:14 8) 창17:10,14 9) 골2:11-12
벨기에 신앙고백서 제34조 세례의 성례
“............신자의 어린 자녀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을 비난하는 재세례파의 잘못error을 배격합니다reject. 우리는 동일한 약속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에서 유아들이 할례를 받았던 것처럼, 신자의 자녀들이 세례를 받아야 하고ought to be baptized 언약의 표로 인쳐져야 한다sealed with the sign of the covenant는 것을 믿습니다.12) 정말로 그리스도께서는 어른들의 죄를 씻기wash 위하여 피 흘리신 것만큼 신자의 자녀들의 죄를 씻기 위해서도 피 흘리셨습니다.13) 그러므로 주님께서 율법에서 아이가 태어난 직후에 어린 양을 드리라고 명령하신 것처럼, 신자의 자녀들도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행하신 것에 대한 표와 성례를 받아야만 합니다.14) 이것은 그리스도의 고난passion과 죽음의 성례입니다. 세례가 우리 자녀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풀었던 할례와 동일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바울은 세례를 그리스도의 할례the circumcision of Christ라고 불렀습니다(골 2:11).”
12) 창 17:10-12; 마 19:14; 행 2:39 13) 고전 7:14 14) 레 12:6
위의 설명대로 신약의 세례는 구약의 할례와 관련이 있다. 신약의 세례는 구약시대 교회의 일원이 되던 것을 상징하던 할례를 대신하여 성도와 그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보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할례가 난지 8일 만에 베푸는 것(창 17:12; 21:4)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유아세례는 태어난 이후 빠른 시일 내에 베푸는 것이 바람직하다.
유아세례를 베푸는 시기를 통해 드러내야 할 유아세례의 근거
유아세례를 베푸는 시기를 최대한 빠른 시일에 하는 것은 유아세례를 베푸는 근거가 언약과 구약의 할례에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런 점에서 유아세례를 베푸는 시기의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개혁신학이 유아세례를 성경적이라고 보는 그 이유를 드러내는 하나의 방편이 된다. 개혁신학을 따르는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는 유아세례를 산모의 산후조리가 끝나고 신생아의 외출이 가능하게 되어 유아가 첫 예배에 출석한 바로 그 때에 행함으로써 유아세례가 성경적이라는 사실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
로마 가톨릭과 구분되어야 함
성인 뿐만 아니라 유아에게도 세례를 베풀고, 유아에게 세례를 베풀 뿐만 아니라 개혁신학을 따르는 교회(개혁교회, 장로교회)와 마찬가지로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유아세례를 베푼다 하더라도 그 의미가 전혀 다른 경우가 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외적 형식면에 있어서는 동일하지만 그 의미가 전혀 다른 경우가 있어서 분명히 구분되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바로 로마 가톨릭이다. 로마 가톨릭은 유아에게도 반드시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본다. 또한 생후 100일 이내에 유아세례를 받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 로마 가톨릭이 유아에게도 세례를 베푸는 이유와 유아에게 베푸는 세례를 출생 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하는 이유는 ‘언약’ 때문이 아니라, ‘구원’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은 세례는 그 자체로 역사해서(ex opere operato) 자동적으로 중생으로 이어진다고 믿는다. 그들은 세례를 받으면 원죄와 자범죄, 죄로 인한 형벌도 사함 받으며, 세례를 받으면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며, 천국에 들어간다고 주장한다.[9] 그들의 이러한 믿음을 가리켜서 ‘세례 중생론’(baptismal regeneration theory)이라고 한다. 세례 중생론이란 이미 설명한 대로,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중생한 사람들이며, 세례를 받지 않는 사람은 결코 중생한 사람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10] 로마 가톨릭은 이러한 믿음에 기초해서 생후 100일 이내에 유아세례를 받는 것을 요구한다.
특히 중세에는 오늘날과 달리 영아(嬰兒)들이 일찍 죽는 경우가 있었는데,[11]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모든 소망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생각했다.[12] 그래서 결과적으로 소위 ‘쿠암프리놈’(quamprimum)[13]이라는 유아세례 형식이 유행하게 되었는데, 가능하면 아이가 태어나자마다 세례를 받게 하는 것이 널리 행해졌다.[14]
오늘날에도 로마 가톨릭은 죽을 위험에 있거나 죽음을 앞둔 순간에 있는 유아에게는 사제나 부제가 없어도 신자나 합당한 의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세례를 베풀 수 있고 때에 따라서는 세례를 주어야 한다고 본다. 이를 위해서 모든 평신도는 세례를 베푸는 방법을 익혀 두어야 할 정도이다.[15]
유아에게도 세례를 베풀며, 그 세례를 출생과 함께 최대한 빨리 베푼다는 점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와 장로교회(개혁교회)가 같지만 그 이유가 ‘언약’이냐 ‘구원’이냐 하는 점에서는 두 교회는 전혀 다르다. 그래서 ‘가능한 빨리’ 베푸는 이유가 전혀 다르다. 이런 점에서 의식 자체가 비슷하다고 해서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개혁신학이 유아세례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세례 전에 유아가 중생했을 가능성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실체에 근거한다.[16] 하나님의 제정에 의하면 믿는 자의 유아들은 언약에 속한다. 따라서 그들은 세례를 받는 것이다.[17]
결론
한국의 장로교회는 유아세례를 베풀고 있긴 하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장로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베푸는 시기와 형식은 장로교도 침례교도 아닌 애매한 상태가 되어버렸으니 헌아식과 유아세례를 병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할 것은 유아세례는 유아의 믿음에 근거한 것도 아니요 부모의 서약에 근거한 것도 아닌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자녀를 주신 그 순간에 유아가 세례를 받아야 할 근거가 형성된다. 이 귀한 은혜는 될 수 있는 대로 일찍이 받도록 해야 된다.[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명령하고 있는 은혜의 방편인 유아세례는 제때에 베풀지 않으면서 목사가 아이를 안고 축복기도를 함으로써 헌아식과 같은 의식을 유아세례보다 먼저 행하는 것은 개혁신학의 정신과 문화에 전혀 맞지 않다. 교회에 처음 출석한 유아에게 축복을 하고 기도를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할 수 있는 더 좋은 방식이며 성경적인 방식인 유아세례를 미룬 채로 그것을 한다는 점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허락하신 은혜의 방편보다 더 강조되는 것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산모의 산후조리가 끝나고 신생아의 외출이 가능하게 되어 유아가 첫 예배에 출석한 바로 그 때에 유아세례를 베풀고 목사가 기도하며 온 회중이 함께 교회의 회원됨을 축하해 주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개혁교회와 장로교회가 유아세례를 베푸는 이유와 근거가 바로 ‘하나님의 언약’에 있으며, 구약교회에 허락하신 ‘할례’에 기초를 둔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가장 적합한 방식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유아세례를 베푸는 시점은 언제가 가장 적합한가?”하는 주제는 “유아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이 성경적인가?” 하는 주제와 마찬가지로 본질적인 문제이다.
(작성 완료일: 2015년 12월 26일)
[1] ‘헌아식’에 대한 그들의 성경적 근거는 한나가 서원을 이행할 때 그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쳐 성전에서 자라게 한 기록(삼상 2:18; 3장)과 예수님 당시에 많은 아이들이 그 부모와 함께 예수님께 나왔을 때에 친히 영접하시고 안고 축복하신 일(마 19:14; 막 10:14; 눅 18:16)에 근거한다. 그런데 이것의 도입 자체는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자기들의 주장이 얼마나 잘못 되었는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다.
[2] 유해무, 『개혁교의학』(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7), p.415, n.5 고신총회, 『헌법해설: 예배지침/교회정치/권징조례』(서울: 총회출판국, 2014), 제1부 제7장 제66문답.
[3] 예수님의 탄생이 12월 25일이라는 근거는 전혀 없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탄생 날짜를 아는 사람은 없고, 성경(눅 2:8)을 통해서 추측해 볼 때에 오히려 5월이나 6월쯤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4] Thascius Caecilius Cyprianus, Opera genuine, Pars 1: Epistolae, (Lispiae: Bernhardt Tauchnitz, 1838), 59.
[5] 이 교단의 정식 명칭은 Canadian & American Reformed Churches (http://www.canrc.org)으로써 약어로는 CanRC라 칭하며,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교단과 자매교회 관계에 있다. 고신헌법 교회정치 제14장 제161조.
[6] 이 교단의 정식 명칭은 Free Reformed Churches of Australia (http://frca.org.au)으로써, 약어로는 FRCA라 칭하며,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교단과 자매교회 관계에 있다. 고신헌법 교회정치 제14장 제161조.
[7] 박윤선, 『헌법주석』(서울: 영음사, 1983), 201.
[8] Herman Bavinck, Gereformeerde Dogmatiek (Kampen, 1901), Ⅳ, [537]
[9] 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 1215, 1263, 1257, 1265, 1277, 1279; 조영엽, 『가톨릭 교회 교리서 비평』(서울: CLC, 2010), 161-163.
[10] James Buchanan, The Office and Work of the Holy Spirit, 신호섭 옮김, 『성령의 사역, 회심과 부흥』(서울: 부흥과 개혁사, 2006), 25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8장 5절은 위와 같은 로마 가톨릭의 견해를 매우 염려스러워하면서 위 견해를 부인한다.
[11] 영아사망률이 오늘날처럼 낮아진 것은 현대 의학의 발전 때문으로 매우 최근의 일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만 하더라도 불과 60년대까지만 해도 영아들이 죽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12] 중세의 이러한 발전 과정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을 위해서는 J. D. D. Fisher, Christian Initiation: Baptism in the Medieval West (London: SPCK, 1965)를 참조하라.
[13] 가능한 한 빨리(As soon as possible)이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이다.
[14] James White, Sacraments as God’s Self Giving (Abingdon Press, 1983), 김운용 옮김, 『성례전: 하나님의 자기 주심의 선물』(서울: WPA, 2006), 87.
[15]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유아세례예식』(서울: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2012), 16, 22.
[16] Herman Bavinck, Gereformeerde Dogmatiek (Kampen, 1901), Ⅳ, [537]
[17] 고재수, 『교의학의 이론과 실제』(천안: 고려신학대학원출판부, 20012), 287.
[18] 박윤선, 『헌법주석』(서울: 영음사, 1983), 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