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이런 말 하면 안됩니다.
손재익 목사
(한길교회)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흔히,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는 구호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교회의 표어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할까?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에는 초대교회는 교회의 원형을 가장 잘 담고 있고, 초대교회는 완전한 교회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담겨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이 문제가 많다는 점을 잘 생각해 보지 않는다. 하지만, 이 말은 문제가 많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에는 초대교회가 완전하다는 오해가 담겨 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봐도 이 말은 틀린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초대교회에 대한 무지이거나, 혹은 초대교회에 대한 잘못된 환상에 근거한 것이며, 초대교회의 일부분을 전체로 오해하여 생겨난 발상이다.
초대교회가 어떠했는지를 조금만 생각해 보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이 얼마나 위험한 지를 알 수 있다.
초대교회는 완전한 교회였는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이 성립되려면, ‘초대교회는 완전한 교회’라는 등식이 성립되어야 한다. 하지만, 초대교회는 결코 완전한 교회가 아니었다. 오히려 초대교회는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고, 신약성경의 상당수 내용은 그 불완전함에 대한 지적과 바로잡음을 기초로 하고 있다.
초대교회의 단편적인 모습일뿐
초대교회의 일부분은 전체로 오해하여 생겨난 발상이라는 점은 사도행전 2:43-47와 사도행전 4:32-37에 대한 것이다.
사도행전 2:43-47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사도행전 4:32-37
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위 구절들에 의하면 초대교회는 정말 이상적인 공동체이다.
이 외에도 초대교회는 아름다운 모습이 많이 있었다. 초대교회는 당시 신분제 사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 노예들, 여성들, 가난한 이들이 있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함께 한 교회를 이뤘으며, 서로 형제, 자매라고 불렀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모든 면에서 완전한 것은 아니다. 앞서 살펴본 부분은 초대교회의 모습 중 일부분만을 보여준 것이다. 무엇보다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아 탄생한 교회의 초기 모습일 뿐 그 이후에 이러한 모습이 계속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초대교회의 나쁜 모습이 바로 이어짐
바로 다음장인 사도행전 5장만 보더라도 초대교회에 나타난 문제를 볼 수 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다. 그들은 자신의 소유를 팔아 하나님께 드리면서 그 일부를 감춤으로써 헌금을 속였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5:3에서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라고 말할 정도였다.
초대교회를 본받으려고 한다면,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권징한 교회의 모습을 본받아야 한다.
또 다음 장인 사도행전 6장을 보면 1절에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라는 말씀이 나온다. 한 교회를 이루고 있는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 간에 갈등이 일어났다.
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직분의 분화가 일어났다.
우리는 초대교회의 갈등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직분이 생겨났다는 사실을 알고, 직분을 허락하신 주님의 의도를 잘 생각해야 한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예루살렘 회의가 나온다. 이 회의가 개최된 계기가 무엇인가? 1절을 보면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라고 한다. 그리고 2절에 보면 이로 인해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라고 한다.
우리는 과연 이러한 모습을 본받아야 하는가? 아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 이러한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오히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교회의 노력을 본받아야 한다.
서신서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모습
우리는 서신서에 나타난 내용을 통해 초대교회가 너무나 불완전한 교회였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고린도교회다. 고린도교회는 분명 초대교회였다. 고린도전후서를 보라.
고린도전서 1:10이하는 고린도교회의 분쟁에 대해 다룬다. 고린도교회는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나뉘어 있었다(고전 1:12).
고린도전서 5:1에 보면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라고 한다.
고린도전서 6:1에 보면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라고 한다.
고린도전서 11:17에 보면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라고 하고, 20-21절에서 “(20)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라고 한다.
이 외에도 고린도교회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 사도는 이에 대해 서신서를 통해 교회로서, 복음을 가진 자들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요한계시록 2-3장에 보면 소아시아 지역(오늘날의 터키 지역)에 있는 7개의 교회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그런데 이들을 칭찬하면서도 이들의 심각한 문제점을 지적한다.
요한계시록 2장을 보면 에베소 교회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2-3절에서는 에베소교회를 칭찬하다가 4절에 보면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5-6절에서 “(5)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6)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라고 말한다.
12절 이하의 버가모교회에 대한 교훈을 보면 14-16절에서 “(14)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16)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라고 말씀한다.
18절 이하에 두아디라교회에 대해 말하기를 20-23절에서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라고 말씀한다.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 사데교회에 대해 말하기를 3:1에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한다.
계속해서 14절 이하에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도 “(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라고 지적하고 있다.
초대교회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이렇게 초대교회의 문제들에 대해 많은 책망을 하고 있는 내용들이 담겨 있는데 막연하게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면 어떤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것인가?
우리는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문제에 대해 지적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 귀 기울여야 한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은 맞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교회 역사 전체를 통해 좋은 것은 본받고, 나쁜 것은 반면 교사로 삼아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1세기 당시의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없다. 교회는 1세기 이후 여러 발전 과정을 나타냈다. 시대를 지나면서 삼위일체 교리가 분명해 졌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도 탄탄해 졌으며, 사도신경을 비롯한 신조가 형성되었다. 교회의 체계가 갖추어졌고, 직분, 예배 등이 발전했다. 초대교회에는 목사, 장로, 집사가 완전한 모습을 나타내기보다 초기 상태였고, 노회는 명확하게 나타나기보다 흐릿하게 나타나고, 시찰회의 경우는 없었다. 제직회도 없었다. 이러한 것들은 교회의 부흥과 확장에 따라 성경에 근거해서 교회 역사가 만들어낸 것이다. 초대교회는 주일예배 외에 다른 모임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에 주일예배 말고 다른 모임은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없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단순했다. 당시에는 교인들이 성경책을 갖고 있지 않았다. 오늘날처럼 모든 성도들이 성경책을 소유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성경책을 읽지 말자고 할 수 없다. 성찬의 경우에 고린도전서 11:20-21에 보면 “(20)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라고 한다. 여기에 보면 성찬식 빵을 각자 집에서 가지고 왔다. 오늘날에는 교회의 당회가 준비한다. 초대교회는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찬송을 부르지도 않았다. 한국교회가 부르는 찬송가에는 아무리 빨라야 3세기 때부터 부른 찬송가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초대교회로 돌아간다는 것은 역사의 발전을 다 거꾸로 돌리겠다는 것이 된다.
교회를 발전시키신 성령님께서는 초대교회에만 역사하신 것이 아니라 그 이후의 교회 역사에도 함께 하셨다. 교회는 점진적으로 발전했다. 그러니 발전된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은 맞지 않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은 문자적으로 ‘성경대로 하자’라는 말과 비슷한 표현으로서 우리가 사용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