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하원마을 관련자료

[출처] [4.3은 말한다]<395회> 中文面 하원리|작성자 직삼각형

작성자좋은 세상|작성시간11.05.11|조회수101 목록 댓글 0

*하원리
 
48년 11월 24일 토벌대는 중문면 하원리 주민들을 향사에 집결시킨 후 姜得祿(29)을 불러
내 총살했다.

 또 일부 가옥에 불을 질렀다. 당시를 겪었던 주민들은 이 사건이 마을 안에서 벌어진 토벌대의 첫 총살극이라고 기억했다.


 이보다 앞선 9월 15일, 하원리에서는 우익청년단원(도순리 출신)이 살해되고 그 여파로 하
원리 주민 일부가 경찰에 끌려가는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그 후 두달여 동안 별 사건이 벌어지지 않아 비교적 평온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11월 24일에 벌어진 공개총살은 무엇보다도 전도적인‘초토화작전’의 일환이라 할 수 있
다.250가호 규모의 하원리는 이름난 입산자 한명 없는 평범한 마을이었다.

 더구나 일주도로변에 위치해 소개령이 적용되는 마을도 아니었다(다만 법화사 부근에 있던 몇집이 마을 중심지로 소개했다).
 그러나 11월 중순께부터 본격화된 초토화작전의 불똥으로 적지 않은 주민희생을 치렀다.
특히 11월 5일 발생한 무장대의 중문지서 습격사건은 토벌대의 총살극을 가속화시켰다.


 특히 중문지서 피습 때 서귀포에서 지원오던 토벌대가 무장대로부터 매복공격을 받은 속
칭‘어둔마루’가 하원리와 가깝다는 점도 토벌대가 이 마을을 주목하게 된 배경으로 보인
다.


 그런데 대부분의 증언자들은 11월 24일 공개총살된 강득록이 평범한 농삿꾼이였다고 기억
했다. 한 증언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날 응원대장은 집결한 주민 중에서 강득록을 불러내더니 뭐라고 몇마디 묻더군요.

런데‘들어가라’고 해놓고선 강득록이 뒤돌아 몇 발자국 떼어놓자마자 뒤에서 총을 쏘았습
니다. 일종의 시범을 보인 겁니다”


 아무튼 강득록의 희생을 시작으로 잇따라 토벌대의 총살극이 벌어졌다.48년 11월 28일 邊
德廈(43) 趙甲七(35) 姜彰保(25) 金圭封(19) 등이 중문리로 끌려가 속칭‘자운당’에서 총살
됐다.

이어12월 2일에는 姜庚生(42) 姜南圭(39) 姜漢奎(27) 姜恩權(25) 高光斗(24) 등이 총살
됐다.
 한편 12월 4일 토벌대는 중문지서 부근 밭에 관내 여러 마을 주민들을 집결시킨 가운데
공개적인 집단처형을 했다. 이중 하원리 출신 희생자는 任性圭(34) 許福仁(29) 元容勛(24)
高文淑(21) 金基相(20) 金玉相(20) 吳彰洙(20) 등이다.

주민 姜尙孝씨(74·서귀포시 하원동)은 그날을 이렇게 증언했다.
 “그날 토벌대는 마을의 남자들을 모두 중문리에 집결시켰습니다. 가 보니 지서 부근 밭
에 중문면 관내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습니다. 토벌대는 이미 잡아뒀던 수십명의 사람들
을 끌어냈습니다. 우리에게‘귀를 막으라’고 하더니 곧 총을 쏘았습니다. 하원리 사람도
6∼7명이 희생됐는데, 이들이 마을을 주도하거나 특별한 활동을 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토벌대 정보철 안에는 과거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의 명단이 적혀
있었고, 수시로 벌어지는 도로차단·전주절단 사건의 혐의자를 잡기 위해 토벌대는 여러 경
로의 정보망을 쳐놓고 있었다.
 그러나 불법적으로 즉결처형됐기 때문에 희생자들이 어떤 혐의를 받았는지 알 길 없다.
이와 관련 주민 吳功現옹(82·서귀포시 하원동)은 이렇게 증언했다.
 “토벌대는 산쪽을 지원한다고 의심이 가는 사람을 중문지서로 끌고 갔습니다. 쌀 한되라
도 주거나 고구마를 삶아준 혐의가 있다는 것이지요. 토벌대는 고문을 하면서 여러 사람을
들춰내 모두 11명이 줄줄이 중문지서로 잡혀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량한 사람들이었습
니다. 무혐의로 곧 석방될 거라고 했는데 군인들에게 총살당했습니다. 마침 지서에 들른 군
인들이‘이놈들 뭐야?’하니 경찰이‘죄인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총살하게 됐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민들의 희생은 서북청년단의 존재와 떼어놓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당시 중문지
서 순경이던 한 증언자는 “총살집행은 군인들이 했지만, 그 배경에는 서청이 있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중문지서 피습 직후 군인들이 나타나 처음엔 지서 앞마당에 천막치고 살다가 곧 중문국
교로 옮겨 주둔했습니다.

그런데 군인들은 주민들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니까 모든 정보를 서청에게 의존했습니다. 서청은 어디서 알아오는지 아무개에게 무슨 혐의가 있다는 식의 정보를 많이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거의 매일이다시피 처형을 했는데 지서주임조차 그들의 총살에 개입할 수 없었고 일일이 알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의 통제밖에 있었습니다. 나는 경찰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군인들에게 끌려가 곤욕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하원리 상황의 특징 중 하나는 도피자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산으로 피신했다가 붙잡혀거나 무장대로 활동하다가 교전 중에 총살된 것이 아니고 마을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끌려가 희생된 것이다.
 한 주민은‘왜 마을사람들이 피신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다가 희생됐느냐’는 질문에
“특별히 갈 곳도 없는데다가 토벌대가‘한 사람이라도 없는 집안은 삼족을 멸한다’고 떠
들어대니 이제나 저제나 총살극이 그치기만을 기다렸다”면서 “대신 다른 마을들처럼 도피
자가족이라 하여 희생된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한편 49년에 접어들자 주민들은 토벌대의 명령에 따라 마을을 두르는 성을 쌓아 무장대의
접근을 막았다. 주민들의 공포심은 여전했지만 토벌대의 총살극은 그쳤다.


 도순지서와 하원출장소가 신설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동안 중문면 관내에는 중문지서가 유일했는데 하원리와 도순리에 경찰이 주둔하면서 중문면 동부지역을 맡게 된 것이다.
 사태가 거의 끝났다고 생각될 무렵인 49년 12월 29일(음력 11월 10일),무장대가 마을을 습
격해 보초서던 주민을 살해하고 식량을 탈취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 姜甲淑(33) 金基七
(28) 金根重(21) 姜贊柱(20) 등이 희생됐는데 이중 김근중과 강찬주는 납치 후 살해돼 유족
들은 6개월 가량 지난 후에야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하원리는 무장대의 잇따른 공격을 받아 인명이 희생되고 많은 가옥이
불에 타는 피해를 당했다(증언자에 따라 마을이 불에 탄 때가 첫 피습을 당한 49년 12월 29
일이라는 이야기와 이듬해 6월께라는 기억이 서로 엇갈리고 있는데 아무튼 이때 무려 99채
의 가옥이 불탔다고 말했다).


 그런데 한 주민은 큰 부상을 당하면서 무장대와 격투를 벌인 끝에 한 명을 붙잡았다.

부 청년들이 달려들어 그를 죽이고 전봇대에 시신을 거꾸로 매달았다.

무장대원이 죽은데 대한 보복은 곧 이어졌다.


 무장대는 한달여만인 50년 2월 4일(음력 12월 18일) 또다시 습격해 보초서던 金炳斗(47)
姜酉孫(42) 金達洙(40) 宋興玉(14)를 살해했다.

이밖에도 무장대의 습격으로 姜丙生(35,아명 강평석)이 죽고 김일흥 부상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한편 6·25가 발생하자 마을 북쪽에 있는 법화사에 군인들이 대거 주둔해 전쟁이 발발했
음을 실감케 했다.

그런데 예비검속에 의해 吳斗石(29) 吳東植(22) 秦元宅(22) 희생됐다.


 이 무렵 대한청년단 여성 간부였던 金貞順(22)이 무장대에게 납치돼 행방불명되는 사건도
있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