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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옛날에 5 '잘 치는 탁구란'

작성자공룡|작성시간20.09.21|조회수865 목록 댓글 43

뭐가 과연 잘 치는 탁구일까요.

많이 오래지 않은 옛날에 롱핌플을 잘 쓰는 누님이 있었습니다.
티바의 베스트셀러 '그라스 디 텍스 OX'를 백핸드에 붙였고 늘 전진을 고수하며 블록 중심의 플레이를 했었지요.

*이 러버의 이름을 영어식으로 '그레이스'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그라스'라는 이름은 '잔디'를 뜻하는 독일어입니다.
롱핌플의 가지런한 돌기 형태를 잔디에 비유한 네이밍입니다.
따라서 '그라스'라고 원어로 읽어줘야 좋고 굳이 영어로 읽으려면 같은 잔디라는 뜻의 '그래스'라고 해야 맞습니다.
'그레이스'는 전혀 다른 의미로 기독교 신앙적인 오해를 부르지요.^^
특히 초보자들에게 탁구지옥을 선사하는 이 러버는 자비나 은혜 따위는 없는 매우 잔인한 러버입니다.ㅋ

이 누님은 '블록 중심의 플레이'가 아니라 '오로지 블록만' 했습니다.ㅋ
누님 레슨하던 코치가 '제발 백에서 롱으로 공격도 좀 하시라'고 그렇게 애원을 해서 레슨 테이블에서는 코스 보고 좀 밀기도 하고 와이퍼 스트로크도 하고 그러다가도 막상 나와서 남들과 게임할 때는 오로지 블록, 주구장창 블록, 영원히 블록만 했더랬지요.ㅋㅋ
그도 그럴 것이 그 누님은 블록을 워낙 잘 했습니다.
매우 잘 치는 남자들의 강력한 파워드라이브도 웬만하면 다 블록했으니까요.
지금 부수로 오픈 4부 정도.. 당시 여자 2부로 오픈게임 다니곤 했으니 게임 실력도 좋은 누님이었죠.
어디 가서 누구와 게임해도 오로지 백핸드 롱핌플 블록으로 승부하는 블록 주전형이었습니다.
누님의 끝없는 블록에 견디다 못해 상대들은 결국 계속 걸고 치다가 실수를 해 점수를 바쳤지요.

이 누님과 같은 구장에서 운동하면서 좋았습니다.
계속 받아주니까 저는 계속 넘기는 연습이 되니까요.
구장에서 가끔 열리던 교류전에서 게임 상대로 만났을 때도 저는 연습처럼 계속 걸고 때리고 넘기며 승패를 떠나 랠리가 즐거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누님이 은연중에 저를 자기보다 하수로 여기고 있다는 걸 문득 느꼈습니다.
긴 시간 동안 연습하고 게임하면서 제가 열심히 치고 거는 공들을 뚫림 없이 다 받아주면서 본인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나 봅니다.ㅋ
그럴 수 있죠.
그래서 하루는 맘먹고 '전투모드'를 가동했습니다.ㅋ
제게 있어서 전투모드란 일반적인 젊은이들처럼 열심히 풋웍하며 강하게 걸고 때리는 모드가 아닌, 상대의 약점을 집중 공략하여 쉽게 점수 내고 이기는 모드입니다.^^

평소처럼 저는 걸고 누님은 블록하며 연습하다가 게임을 제안하니 흔쾌히 수락하는 누님.
바로 전투모드 가동!
'절대로 회전을 많이 주지 않는다, 백쪽으로는 강하게 걸거나 치지 않는다, 페인트모션과 페이크를 계속 쓴다, 타이밍과 코스와 길이와 강약 등을 매우 불규칙하게 운용한다, 인내심을 건드린다..^^' 라는 롱핌플 블록주전 상대 실천목표를 세우고 전투를 시작합니다.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서브부터 무회전 롱서브를 빠르게 밀어 놓고
살짝 떠서 길게 돌아오는 공을 회전 없는 뻥드라이브로 매우 느리게, 하지만 모션은 회전 많이 거는 척 힘든 척 높은 포물선으로 넘깁니다.ㅋ
루프드라이브로 판단하고 평소처럼 블록하면 십 중 십 네트행.
너댓 번에 한 번은 갑자기 많이 찍어서 미들 코스 짧은 서브.
거의 걸렸지만 혹 넘어오면 백핸드 슈트로 길게 흘리기.
누님은 자꾸만 러버를 들여다보며 혹시 돌기가 부러진 부분이 있나 확인합니다.
그리고 결국 제게 짜증을 냅니다.

'드라이브 좀 잘 걸어봐!
오늘 왜 이렇게 회전이 없어?
배고파?'

공에 힘이 없다고 배고프냐네요.ㅋㅋㅋ
좀 미안하지만 여기서 맘 약해지면 안되죠.
회전 많이 걸면 다 막혀서 더 어려운 공이 꿈틀꿈틀 돌아오는데 제가 왜 회전을 줄까요.ㅋ
계속되는 뻥드라이브, 뻗지도 않는 느리고 높은 공에 누님이 참지 못하고 돌아서서 포어핸드로 쳐오면 저는 한 박자 기다렸다가 비어있는 포어 쪽으로 여유있게 카운터.
결국 하프도 안되는 스코어로 이겼습니다.
이런 게임을 서너 번 하고 나니까 이제 저하고는 게임 안 한답니다.ㅋㅋ
참 재미있는 건, 이러고 나서도 그 누님은 실력으로 진 거 아닌 줄 압니다.
누님 생각에 실력이란 자기가 블록을 못할 만큼 강한 회전이나 빠른 공격으로 자기 블록을 뚫어내는 거였죠.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누님 사건보단 꽤 많이 오래된 옛날, 구장에 한 젊은이가 놀러왔습니다.
탁구 배운 지 한 두 해 쯤 된다고 했는데 느리고 감각 좋은 오겹합판 셰이크에 포어핸드에는 보급형 중국러버, 백핸드에는 컨트롤계 러버를 조합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힘없는 조합이었죠.
처음 랠리를 나누는데 공이 깨끗하고 폼이 참 간결하고 예뻤고 특히 잔발이 아주 좋았습니다.
포어핸드 랠리를 하는 중에도 잔발을 쉬지 않고 떼며 모든 공을 정확한 자세로 타구했습니다.
기본기를 정말 충실히 배운 모습.
몸 좀 풀리고 간단히 게임을 하는데.. 예상 외로 정말 진땀 뺐습니다.
제가 넘기는 모든 공을 다 발로 따라가서 간결한 스윙으로 가볍게 촥.
다 들어옵니다.
포어든 백이든 거의 다 기본 랠리하던 그 폼으로 다 잡아냅니다.
공을 보는 눈도 좋아서 회전도 잘 읽고 코스 빼도 조바심 없이 빠른 발로 따라가서 자리잡고 기다렸다가 좋은 타점에서 가볍게 촥.
거의 질 뻔하다가 구력으로 어찌 어찌 우겨넣어 겨우 이겼네요.
힘겹게 게임하며 속으로 믿었습니다, 이 젊은 친구는 금방 1부 되겠다구요.
세월이 꽤 지났으니 지금 쯤이면 분명 여유롭게 오픈 1부 치고 있을 겁니다.

진짜 잘 치는 탁구란 뭘까요.
열심히 레슨 받으며 탁구를 멋지게 치려는 젊은이들을 보면 대개 폼에 연연합니다.
물론 폼은 매우 중요하지요.
기본기의 표출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요.
기왕 치는 탁구 멋있게 화려하게 치면 좋겠죠.
선수 동영상을 찾아봐도 화려하고 멋진 드라이브 모습만 계속 돌려보며 따라하고
어떻게 하면 회전이 많이 먹고 스피드와 파워가 더 나오는지 고민합니다.
다 중요하죠.
하지만 탁구는 상대적인 운동입니다.
그 롱핌플 블록 누님을 상대하던 저나, 제가 상대하며 놀랐던 그 젊은이나.. 강한 회전과 스피드와 파워로 승부하여 잘 친 게 아닙니다.
전자는 심리적 전략적으로 게임을 운영한 거고 후자는 용품이나 파워에 급한 욕심 없이 탄탄한 기본기를 익힌 겁니다.

저 같은 사람이 늘 말하는 거.
'어차피 우리 아마츄어들은 이미 나이 먹어 시작해서 선수처럼 될 수도 없고 또 그다지 승부에 집착할 필요도 없으니 그저 건강하게 즐겁게 운동하자'는 거.
영원한 아마츄어로서의 즐탁 마인드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잘 치는 탁구는
평소에는 즐거운 취미로, 건강을 위한 운동으로 즐탁하는 것과
승부를 겨루는 게임을 해야 한다면 자신과 상대의 장단점을 파악하여 현명하게 임하는 것,
이 두 가지입니다.
(그리고 사실 자주 하지는 않지만 꼭 필요한 경우에 발동하는 '이기는 탁구'는 내가 잘 하는 걸 하는 게 아니라 상대가 못하는 걸 찾아내 하는 거. 미안한 마음은 덤입니다.^^)

즐탁 마인드가 너무 강해서 게임 중에도 맨날 즐겁게 놀다가 파트너한테 자주 혼나는
즐탁공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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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불사조② | 작성시간 20.09.22 배고파에서 웃음이...ㅎㅎㅎ
  • 답댓글 작성자공룡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09.25 😄
  • 작성자작은새.... | 작성시간 20.09.24 "잘치는 탁구" 는 의견이 분분하니다만...

    "제대로 치는 탁구" 라고 한다면..간단명료해질겁니다~
  • 답댓글 작성자공룡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09.25 제대로 치는..
    여기엔 또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겠군요.^^
  • 작성자정옄 | 작성시간 20.11.09 재밌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공룡님 같은 분이 있는 탁장에서 배우면서 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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