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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탁구 - (2) 고수가 된다는 것은?

작성자Oscar|작성시간17.03.31|조회수1,232 목록 댓글 22

(자전거 얘기를 빼고 탁구 얘기에 집중하기로 했어요. 제목도 수정되었습니다.)


탁구는 중독성이 심하죠.

여자 친구 만날 약속도 자꾸 미루게 되고, 기혼자들은 탁구 때문에 가정이 위태위태 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탁구에 빠져 이혼까지 겪으시는 경우도 있을 정도니까요.


탁구는 왜 중독성이 심할까요?



1. 3시간은 쳐야 친 것 같다.


탁구는 타 운동과 비교해서 많은 시간 운동해도 몸에 무리가 감을 덜 느끼는 종목입니다.

한참 탁구를 칠 때에는 3시간 정도 치면 그때부터 몸이 풀리는 것 같죠.

Runner's high 라고 하죠? 마라토너들이 일정 한계를 넘기면 힘든 줄 모르고 달린다고 하죠.

탁구는 어느 정도 치다 보면 힘든 것이 사라지고 계속 칠 수 있게 되는 묘한 특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퇴근 후 탁구장을 가면 12시 넘기기가 쉽습니다.



2. 팀 스포츠가 아니다.


탁구는 팀 스포츠가 아니기 때문에 두 사람만 있어도 경기를 치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경기 내용은 매 점수마다 한 차례씩 승부가 납니다.

그 점수가 모여 셋트가 되고 셋트가 모여 한 경기의 승부가 되지만, 탁구의 본질은 매 순간 이기고 지는 일이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3. 운동 신경과 상관 없이 꾸준히 는다.


축구나 농구 같은 운동들은 노력해도 어느 정도 이상 잘 늘지를 않죠.

개인적인 운동 능력이나 신체 조건에 따라서 어떤 한계가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런데 탁구는 운동 신경이 있건 없건에 따라서 그 속도에 차이는 있으되 열심히 하는데 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계속해서 늘고, 또 느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지요.




여기까지는 모든 분들이 쉽게 동의할 수 있는 정도의 평이한 이야기일 거에요.

저는 여기서 조금 다른 화제를 도입해 보려고 합니다.


한국은 예의범절을 중요시 하는 가부장적 문화를 가지고 있지요.

그런데 "예"라는 것은 권력에 상하 관계의 위계 질서만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예"에 어떤 "도리"라는 것을 추가합니다.


서양은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어 질서를 세우는 것을 그것이 옳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것이 더 낫기 때문이라는 개념이 강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홉스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개념과 루소의 "사회 계약론"입니다.

즉 모든 사람이 상하 위계 질서 없이 서로 경쟁하며 살아갈 때 이 사회는 약육강식의 전쟁터가 될 것이므로,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권력 기관, 혹은 위계적 사회 형태가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서 모든 사람이 자신의 권력을 그 제도에 양여하는 형태의 사회적 계약을 이루게 됩니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그런 위계 질서가 사회의 유지를 위한 편의적인 것이 아니고

그것이 옳은 것이며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그 사람은 곧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닌 것이 됩니다.


만약 서양에서 어떤 사람이 도둑질을 한다면 그 사람은 타인의 물건을 가져감으로 사회의 질서를 헤친 사람이 되지만,

동양에서 도둑질을 한다면 부모의 가르침을 헛되게 한 것으로 인간적 가치 자체가 없는 사람이 되지요.


즉 "예"라는 시스템은 우리 마음 속에 끊임없는 어떤 조심함, 혹은 스스로를 경계함을 요구하고,

단순히 어떤 테두리 안에서만 있으면 자유로울 수 있는 서양적 질서와는 달리,

그 모든 행동에 더 낮은 것과 더 높은 것이 있으므로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 보게 만듭니다.


이런 공자의 "예"로 다스린다는 사상이 갖는 답답함에 대해, 결국 노자, 장자는 무위 자연을 내세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예"라는 가치는 사람을 얽매이되 깊이가 정해지지 않은 끝없는 얽매임이며,

결국은 되어진 그대로의 모습과 그 속에 담긴 자연스러운 가치를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공자의 "예"에 대해 심취하면 심취할수록 노장 사상이 반사적으로 더 위대해 보이기도 합니다.


한번 상상해 보세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양반 가문에서는 3년상을 하지요.

그러면 3년 동안 부모님 무덤 옆에 초막을 짓고 그 속에서 3년을 살아 갑니다.

3년 동안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지요.

그러면 아내는 남편 밥을 챙겨 머리에 이고 아침 저녁으로 산 중턱까지 올라갑니다.

부부가 3년의 세월 동안 생이별을 함은 물론이요, 인간적인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부모님을 위해서 3년을 애곡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규칙을 지킴에 어떤 정해진 한계가 없어요.

3년 동안 산에서 살기만 하면 된다, 이런 것이 아니고,

3년 내내 애곡했다던가, 오래 동안 밥을 제대로 먹지 않았다던가.. 이런 한도 끝도 없는 더 높은 형태의 예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를 중시하는 사회는 끝도 없는 도리를 지키느라 삶의 에너지가 소진되는 사회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람 간의 계층 관계는 말도 안 되게 층층시하, 그 높낮이도 다양하고 복잡할 뿐만 아니라

그 높고 낮음의 정도도 매우 심하지요.


중국은 공자의 예를 현대까지 계속 이어오지 않았지만 (원나라, 청나라 등 외세 정권도 있었으니 자연스럽게 그런 면이 무디어 졌겠죠.)

우리 나라는 고려 시대까지 그래도 좀 자유분방하던 기질이 있던 민족이었는데, 조선 왕조 시대 완전히 예에 붙들린 나라가 되었습니다.

부모 3년상, 열녀비 등이 다 그런 문화지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런 문화적인 틀은 대를 이어오면서 유전됩니다.

유전적인 변이도 유전되지 않고, 획득된 형질도 유전되지 않는데, 문화가 대를 이어 유전된다는 것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한국 사회는 이런 "예"를 존중하는 정신이 유전되면서 사회적 규범을 떠나서 모두가 끝이 없는 규범을 지키기 위해 애를 써야 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런 예 중 하나가 바로 우리 나라 언어에 있는 존대어입니다.


중국도 존대어가 따로 있지 않아요. 친하고 친하지 않은 정도, 친소에 의한 구분은 있지만 우리 나라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본래 한국어에는 6단계의 높임말이 있지요. 제일 낮은 것이 "합쇼체", 제일 높은 것이 "해라"체라고 합니다.



1) 아주 높임(합쇼 체) : 책을 읽으셨습니까?

2) 두루높임(해요 체) : 책을 읽으셨어요? 

3) 예사높임(하오 체) : 책을 읽었오? 

4) 예사낮춤(하게 체) : 책을 읽게.

5) 두루낮춤( 체) : 책을 읽어.

6) 아주낮춤(해라 체) : 책을 읽어라.


이런 예의 사회에서는 누구를 만나던지 서로 간의 높낮이를 정하지 않으면 대화 자체가 힘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나이나 직급을 먼저 묻지요.

언어 자체에 2인칭의 발달이 없어요. 그래서 You 라는 대등한 표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너", "야" 하는 말은 아주 소수의 친구들 간에 쓸 수 있을 뿐이죠.

서양처럼 서로 이름을 부르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만나면 나이나 직장에서의 직급을 묻고 높낮이를 정합니다.

그래야 대화가 되지요.


이런 체제를 갖춘 한국 사회는 복잡하게 얽힌 높낮이 때문에 사실은 숨이 막히는 사회입니다.

더군다나 이런 것을 더욱 강화 시키는 군대 문화가 있지요.

군대에서는 계급에 따라 삶 자체가 천양지판으로 달라지고, 윗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계급이 올라가면서 삶 자체가 아주 드라마틱하게 변하지요.


그러므로 우리 사회는 자연스럽게 '진상' 혹은 "갑'/'을' 문화를 잉태하게 됩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퍼부을 수 있는 권한이 생기면 막 헤퍼부어 버리는 것이지요.

그리고 내가 누군가보다 더 높은 권력을 가지면 갑질을 해 버립니다.


역사적인 면도 있어요.

서양처럼 귀족 문화가 계속해서 현대까지 이어진 것이 아니고 우리는 전쟁을 통해 귀족과 상민, 천민이 뒤섞여 버렸습니다.

625 전쟁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뒤섞여 버리면서 사회 계층은 혼란스러워 졌습니다.

과거 양반이었던 사람은 내가 어떤 사람인데, 하면서 으스대려고 하고,

과거 천한 신분의 사람은 이제 나도 양반이다, 하면서 자기 권한을 누리려고 했죠.

양반 가문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고 하고 천한 가문은 자신들도 양반 가문처럼 되고 싶었죠.

이것이 강력한 동인이 되어 자녀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하는 토양이 되고, 신분 상승의 욕구는 근면의 동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어느 누구도 지고 싶지 않은, 경쟁이 심한 사회가 되어 버린 면도 있습니다.

좋은 차를 가진 사람은 싼 차를 보면서 내 차가 얼마 짜린데, 하면서 끼어 주지 않으려고 하고,

차가 안 좋은 사람은 끼어 주지 않으면 내 차를 무시하나 싶어서 분이 치밉니다.

길을 걸으면서도 서로 팔꿈치로 툭툭 치고 다니더라도 미안해 하는 사람이 드뭅니다.

(물론 먹고 살기 바쁜 경쟁 사회라는 면도 이런 면에는 일조를 하겠지요.) 



지금까지 한국 사회가 "예"를 중시하고, 또 과거 신분 제도를 가진 유교적, 가부장적 사회였기 때문에,

우리들 마음 속에 어떤 답답함 같은 것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얘기했는데요....


그런데 탁구 문화도 이런 면에서는 동일합니다.

잘 치는 사람은 고수로서 대우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 고수로서의 대우는 가부장적 문화, 예를 중시하는 문화 속에서 서양의 탁구계에서는 조금 드문 개념인

어찌 보면 스승에게나 주어지는 것 같은 형태의 보다 더 깊은 의미의 존경과 권위를 누리지요.


이것이 아주 매력적입니다.

어느 누구나 고수가 되어서 그런 권위를 누려 보고 싶은 것이지요.

게임이 끝나면 그 게임 내에서의 승패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가부장적 질서 체계 내에서의 상하 관계가 형성됩니다.


그런데 이 상하관계가 한번에 끝나지 않고, 노력하다 보면 뒤집히기도 해요.

그러니 얼마나 매력적입니까?

내가 탁구를 열심히 치면, 사회적으로 내 위치가 어떠하든지에 상관 없이,

탁구장에서는 권위를 누리는 상부 계층, 양반이나 혹은 스승 같은 그런 의미도 가미된,

그런 귄위를 누리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에 한국 사회의 탁구가 대단히 중독적일 수 밖에 없는 면이 있습니다.


(글이 너무 길어져서, 오늘은 여기까지 쓸께요. 글 나중에 더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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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Osca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04.02 그렇죠~?^^
  • 작성자하하하호호 | 작성시간 17.04.03 글 중반의 '예'에 대한 접근은 스킵합니다..(길어서 눈에 안들어와요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내용은 모든 탁구인에게 해당되는 내용이네요ㅋ
  • 답댓글 작성자Osca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04.03 예, 감사합니다~^^
    (예에 대한 이야기는 뒷글에서도 간략히 요약하니까 스킵하셔도 무방해요~^^)
  • 작성자freebird | 작성시간 17.04.03 고수는 노력의 결과이죠.
    그러나 인간성이 바탕이 된 고수가 진정한 고수이겠죠
  • 답댓글 작성자Osca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04.03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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