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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의 녹두와 마롱 (부제: "마롱아, 미안해 2")

작성자다같이 셰이크 (구/나홀로 펜홀더)|작성시간20.11.22|조회수493 목록 댓글 4

아침에 볼 일이 있어, 마롱과 판젠동의 경기를 녹화 방송으로 보았습니다. 한창 구경하고 있는데, 점심 식사를 준비하던 아내가 부엌에서 부릅니다. 밀폐 용기 하나를 못 열겠다고, 와서 열어달랍니다.

이걸 먹겠다고?

- 어? 이거 안 버렸어?

- 혹시 몰라서 일단 열어보려고...

 

지난달에 집 정리를 하다가 발견한 녹두입니다. 지하실 창고 한구석, 다른 보존 식품들 사이에 꽁꽁 숨어있었더군요. 뚜껑에는 "2007년 7월"이라고 적혀있었습니다. 아무리 진공 밀폐라도 13년이 넘은 것이라, 못 먹겠거니 하고 쓰레기통에 넣었었는데, 아내가 몰래 가지고 올라왔던 모양입니다.

 

아내의 외할머니의 남동생, 그러니까 외종할아버지께서 주셨던 겁니다. 재작년 요양원에 들어가시기 전까지, 매년 당신의 텃밭에서 기른 녹두를 이렇게 밀폐 용기들에 넣어서 가족과 친지들에게 나누어주셨죠. 2007년 여름, 외갓집 별장에 놀러오셔서도 텃밭에 두고온 작물들 걱정만 가득하셨죠. 그때의 사진을 하나 찾아보았습니다.

2007년 여름, 그때는 살도 통통하셨군요 ㅠㅠ

결국 일자 나사돌리개까지 동원해서 밀폐 용기를 어찌어찌 열었습니다. 고무패킹(이거는 한국어로 뭐라고 하죠?)이 삭으면서 유리병에 아예 늘어붙었더군요.

 

킁킁 냄새를 맡던 아내가 냉큼 하나를 집어 먹습니다.

- 이거, 먹어도 되겠다!

- 먹고서 나 배탈나면 책임져!

 

아내가 점심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마롱과 판젠동의 나머지 경기를 보았습니다. 지난주 월드컵 결승에서 패한 것을 시원하게 설욕하는 마롱을 보면서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2010년에 탁구를 처음 시작한 저에게, 마롱은 벌써 최정상에 있던 선수였습니다. 찾아보니, 2007년에 벌써 독일 오픈을 우승했었군요. 성인 무대에서 막 두각을 나타내는 때였나 봅니다.

2007년 독일 오픈 결승, 그닥 많이 늙지는 않았군요... 나만 늙나?

요 아래, '네트와 엣지'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저도 얼마전부터 '아, 이제는 마롱도 슬슬 나이를 먹는가보다'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경기, 초반부터 한 점, 한 점, 점수 딸 때마다 기합을 넣는 모습은, 열 일곱 살 하리모토 저리 가랄 정도로 패기 있더군요. 승리를 확정지은 후 떨어뜨렸던 탁구채를 다시 집어드는 모습은, 경륜이 있는 자가 보여줄 수 있는 고상한 자제력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점심 먹은지 한 시간 정도가 지났는데, 아직 별 탈이 있는 것 같지 않군요. 몸에 두드러기같은 것도 안 나고, 구토 증상도 없고, 화장실에 뛰어가고 싶은 마음도 없고... 13년전 외종할아버지께서 텃밭에서 흘리셨던 땀이 헛되지 않게 되어 다행입니다. 그냥 버렸으면 참으로 죄송했을 뻔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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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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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네트와 엣지 | 작성시간 20.11.22 저는 런던올림픽이 있던 2012년 여름에 탁구 입문했는데요 런던 금메달리스트 장지커를 보고 뻑~가서
    장지커 영상을 찾아보는중에 어떤 녀석이 감히 올림픽 골드메달리스트를 인정사정없이 패는게 아니겠습니까?
    그때 부터 마롱 팬이 됐지요 ㅎㅎ
  • 답댓글 작성자다같이 셰이크 (구/나홀로 펜홀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11.23 아, 완전 팬이시군요. 저는 팔랑귀에 죽 끓듯하는 변덕이라...
    어제 마롱 응원하고 있는 저를 보면서 아내가 그러더군요. '어? 자기 판(젠동)의 판('팬'의 불어식 발음) 아니었어?'
  • 작성자규신 | 작성시간 20.11.23 미국에 계시나요? 아내분은 미국인?
  • 답댓글 작성자다같이 셰이크 (구/나홀로 펜홀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11.23 스위스에 있습니다. 아내는 프랑스 사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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