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8일(목) 야고보서 4:11-17 찬송 409장
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17.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개역 개정)
- 성도 상호간의 비방과 세속적 삶에 대한 경계 -
성도간의 다툼에 대해 경계하고 다툼 해결을 위한 구체적 방법을 제시한
어제 말씀(1-10절)에 이어 오늘 말씀도 교회 공동체에 주는 교훈으로
11-12절은 성도간에 비방을 금할 것을 권고하는 교훈이다.
이러한 권고는 다툼을 금할 것을 권고하는 어제 말씀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왜냐하면 다툼 중에는 으레 상대에 대한 비방이 따르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성도간에 비방하는 것을 금지한 후에
성도들이 피차 비방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밝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형제를 비방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11절)
율법은 분명하게 ‘형제를 사랑하라’(레19:16-18; 약2:8)고 명령하고 있다.
이는 형제가 비록 자신의 눈으로 보기에 부족한 것이 있다 할지라도
그 부족한 면까지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둘째,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2절)
인간들을 판단하고 그 생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신32:39)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놓는 지극히 교만한 행위라 아니할 수 없으며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에서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기보다 형제의 단점을 꼬집어
비방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나아가 형제 사랑하기를 마치 자기 몸을 사랑하듯이 사랑하라
(마22:37-40; 롬13:8-10)하신 주님의 말씀을 준행하기 위해 더욱 힘써야 한다.
그리고 13-17절은 하나님의 뜻을 도외시하고
자행 자지(自行自止)하는 세속적 삶을 경계한다.
야고보는 먼저 수신자들의 물질 중심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삶을 지적한다.(13절)
그리고 인생을 안개에 비유하여 하나님 없이 세속적 가치관에 따라
사는 자들의 삶이 얼마나 불확실하고 허무한가를 논한다.(14절)
이어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에 절대 의지하여 살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며(15절)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의 수완이나 재주 등만을 믿고
자행 자지하는 것은 악이요 죄임을 밝힌다.(16-17절)
이러한 본문은 교회 공동체에 속한 모든 성도들의 삶의 자세는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유익을 좇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서 주의 뜻을 좇아 행하는 것이어야 함을 교훈하고 있다.
사실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삶과 관련한
최고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고전4:19; 16:7)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하는 일의 성패 여부는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세상적인 가치관에 따라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자신의 만족만을 위하여 산다면 그 인생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비록 사람이 계획을 세운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능히 그것을 이룰 수 없다.(잠16:1, 9; 19:21)
특별히 성도들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17절)
즉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행치 않는다면 그것은 성도로서의 본분에 위배되는 것이다.
성도는 마땅히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여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롬12:2)
15절)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5절은 우리가 성도라면 모름지기 매사에 있어
자기 뜻과 계획을 내세우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것을 힘써 행해야 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교회나 성도들을 보면 성경이 말씀하는 교훈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뜻을 잘못 내세우거나 악용함으로써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일이야말로 아예 하나님의 뜻을
입에 담지 않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잘못되게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것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자기의 뜻과 욕심을 하나님의 뜻으로 교묘히 위장하는 것이다.
실제적으로는 자기 뜻과 욕심인데 이를 하나님의 뜻이라 주장하며
이를 반대하는 사람을 거꾸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자들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교회에서 오로지 인간적 야심으로 가득 찬 여러 계획들을
하나님이 주신 비전 운운하면서 무조건 밀어붙인다.
또 어떤 이는 소위 적극적 사고 방식이라는 인간적 철학을 교묘히 성경에 끌어들여
자기 욕심을 마치 하나님의 뜻인 양 말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심지어 어떤 이는 자기가 원하는 이성과 결혼하기 위해
그 결혼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등의 말을 서슴지 않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두말할 것도 없이 이처럼 자기 욕심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도둑질하는 사단적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먼저 자기 욕심대로 행하고는 나중에 이를 하나님 앞에 내놓으며
추인(追認)해 달라는 식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선조치 후보고’식이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 역시 하나님을 시험하는 사단적 행위이다.
이는 마치 먼저 성전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받쳐달라고 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이다.(마4:6-7)
그러므로 영성 신학의 대가들은 오히려 이 점에서
‘경건한 망설임’이 있어야 한다고 교훈한다.
즉 섣불리 하나님의 뜻을 말하기 전에 먼저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묻고 또 묻는 진지한 태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기 욕심에 이끌려 이러한 과정없이
모든 것을 ‘빨리빨리’식으로 해치우고는 이를 하나님께 내어 밀며
오히려 자기들이 경건하다고 착각한다.
그리고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알기까지
행동을 자제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믿음이 없다고 비웃는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아무런 노력 없이 되는 대로 살아놓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모슬렘들이 말끝마다 인샬라(inshaallah)
곧 ‘알라의 뜻대로’를 내세우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뜻은 모슬렘의 그것처럼 일종의 운명론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들을 나무토막처럼
운명의 물결에 휩쓸려 가는 무력한 존재가 아니라
자기 인생을 개척할 수 있는 독립적이고도 자유로운 존재로 지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욕심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거나,
먼저 욕심대로 행하고 이를 하나님께 내어밀거나,
아니면 되는 대로 하나님의 뜻 운운하는 불경한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오직 먼저 하나님의 뜻을 마음을 다해 묻고 그 뜻이 확실하면 전심을 다해
이를 힘써 행함으로써 이 땅에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
「사울이 이르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는지라」 (삼상1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