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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나눔방

[스크랩] 산수유로 유명한 봉화 띠띠미마을과, 아계 이산해가 사랑한 평해 월송정과 해월헌을 찾아 가는 역사여행

작성자범털과개털(박갑로)|작성시간15.03.23|조회수94 목록 댓글 0

 

인터넷에서 '아계 이산해' 공부를 하던중 아래와 같은 자료를 보고 ,불현듯 찾아 가보고 싶은 마음이 일었습니다. 동참하실분은 요기로=010-2799-5670(개털기사)

 

여행일시:2015.3.27~28=타지에서 참여하는 분들이 많으면 1박2일을 하고...동참하는 분이 없다면 28일 (토요일) 당일 아침일찍 혼자 갑니다.(일요일은 서울 서대문형무소 근처 안산 걷기행사참여)

여행코스:예천출발-봉화 청암정,춘향전 이도령 실제인물 성이성선생의 종택인 계서당종택(시간 없으면 두곳은 통과,저는 가봤음)-산수유로 유명한 봉화 띠띠미마을-망양정-월송정-해월헌-오곡연당--예천(영덕과 안동을 거쳐서,시간이 있으면 신돌석의병장 유적지답사)띠띠미 마을의 산수유는 어제 막 꽃봉오리가 터졌다고합니다.

 

이산해와 류성룡의 교류는 후손들에 의해 400년 뒤에도 이어졌습니다.구한말 을미의병기 때인 1896년 2월에 안동의병진과 호좌의진의 영남소토사로 영남에 내려온 서상렬의병장등 8읍진이 '예천회맹'을 거쳐 상주태봉의 일본군 병참기지를 공격한후 실패하여 후퇴를 했는데 ,일본병들이 안동부에 방화를 하여 1천호가 불타고,이 때 퇴계선생 종택등도 불탔으며, 학봉 김성일의 주손인  서산 김흥락 선생도 종택에서 수모를 당하고 김회락포대장은 총살을 당한 지경이었는데, 아계 이산해 선생의 14대 종손인 수당 이남규가 신임 안동관찰사로 왔는데 향회의 결정이 없는데도 안동 류도사댁에 들어왓던 것이다.그래서 서상렬 영남소토사는 안동의병진이 자기를 속였다고 오해를 하고서는 류도사를 납치해서 끌고 갔다가 죽령(소백산)넘어 단양에 가서 풀어 주었답니다.

 

수당 이남규는 안동관찰사로서 의병을 해산시키려다가 일본병의 만행(안동부 1천호 방화)를 보고 관직을 던졌으며 ,1907년 정미의병기때는 홍주의병진을 돕다가 아들과 함께 일본병에게 죽임을 당했다.민족을 위해 헌신한 수당 이남규의 4대가 국립묘지에 묻혀있다...어찌  노블레스오블리쥬가 아니라 할수 있으랴~

 

아래 자료중 백암온천 근처의 아계 이산해선생 유적지는 신돌석 의병장 전적지와 중첩됩니다.신돌석 의병장 자료를 갖고 가서 현장도 유추해볼 것입니다.여러분은 혹시...신돌석 의병장이 빨간 머리인지...노란 머리인지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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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추모학술대회 열려

기사입력 : 2009-11-11 16:46:21     작성자 : 신복철 서울/경기지역 본부장 / sjh12@hanafos.com
 

 

한국역사 문화연구원(원장. 이성무)에서 주관한「아계 이산해의 학문과 사상」을 주제로 한 400주년 추모학술대회가 10월 9일 서울 역사박물관 대강당에서 열렸다.

 

아계 이산해 영정
권오영(한국학 중앙연구원)교수의 사회로 열린 이날 학술대회는 이문원 종회 이사장을 비롯한 역사문화 관계관, 교수, 학술회원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7개 주제로 발표와 토론 형식으로 진행됐다.

 

이날 발표한 주제중에서 울진과 관련된 서울대학교 이종묵 교수의『유배체험과 문학활동』을 소개한다.

 

평해 유배시 시문과 산문을 모아 지은 아계 이산해의『기성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자연부락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것에 비해 자연부락과 풍속에서부터 주민의 성씨와 신분에 대해서도 매우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아름다운 평해의 풍물을 시문에 담아 냈기에 기성록 자체가 하나의 지방지라 할 만하다. 기성은 울진군 평해면의 옛이름이며, 평해는 예전에 울진과 대등한 어엿한 군이었다.

 

7번국도로 울진방향으로 가다보면 왼편에 정명촌이라는 마을이 나온다. 그 동쪽에 산이 있는데 곡식을 까부르는 키처럼 생겨 기산이라 불렀다. 기성이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한 것인데, 그 위의 오래된 토성은 옛적 평해 관아가 있던 곳이라 한다.  

 

아계 이산해의 유배생활과 문학 활동

‘조선조 유배문학과 아계 문학의 지위’ 중에서

이종묵 서울대학교 교수

아계 이산해(1538-1608)는 조선 초기 최고의 명문가로 손꼽히는 한산이씨다.

 

이산해는 어린 시절 작은아버지 이지함에게 수학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알성시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들어섰다.

 

홍문관의 수찬과 저작을 역임하고 이조좌랑, 직제학, 동부승지, 대사성, 도승지를 거쳐 영의정에 올라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에 책록되었다. 어렵게 영의정까지 올랐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파천을 주장했다 하여 양사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어 평양 귀양길에 다시 머나먼 강원도 평해로 유배된 것이다.

 

이후 귀양지에서 돈령부영사로 복관되고 대제학을 겸임하였으며 1600년 영의정에 재임, 아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일찍부터 문장으로 명성을 날린 이산해는 선조 17년 양관대제학으로 문형을 잡았으며 대북의 영수로 51세에 영의정에까지 올랐으니 가장 높은 벼슬까지 오른 셈이다.

 

선조 25년 5월 이산해는 결국 백발이 성성한 55세의 몸으로 평양에서 산길을 걸어 한계령을 넘는 신세가 되었다.

 

강릉, 울진을 거쳐 평해로 들어선 이산해는 망양정과 월송정에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월송정 객점에서 여장을 풀었다. 평해는 이산해에게 낯설지 않은 곳이었다. 그의 부친 이지번이 중종 31년(1536)에 유배온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이태 후에 이산해가 태어났으니, 이산해는 평해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인물이라 하겠다.

 

중양절을 넘긴 깊은 가을, 이산해는 황보촌(오늘날은 노동이라 부른다)에 있는 곽간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곽간의 집은 옛날 부친 이지번이 귀양왔을 때 머물렀던 곳이니 묘한 인연이다. 그때의 주인은 곽간의 조부였는데, 그는 이산해의 부친이 벽에 써둔 시를 떼어내어 보관하고 있기까지 하였다.

 

황보촌이 있던 곳은 월송정에서 평해읍 쪽으로 가다가 왼편으로 황보천을 따라 한참을 들어가면 보이는 노동서원이 있는 바로 그 인근이다. 당시 이곳은 매우 가난한 마을로, 작은 집을 만들어 지전을 걸어두고 푸닥거리를 하던 낙후된 땅이었다. 그나마 곽간의 집이 가장 넓었기에 그 집을 비우고 이산해가 들어앉은 것이었다.

 

이산해가 황보촌에 이르렀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푸른 대숲이었다. 긴 대나무 천그루가 빽빽하게 서 있어 푸른 빛이 뚝뚝 떨어질 정도였다. 대나무를 사랑한 이산해는 자신의 호를 죽피옹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산해가 좋아하던 매화도 한 그루 있어 위안이 되었다. 또 집 뒤쪽의 그다지 높지 않은 고개에 오르면 사방이 탁 트였다.

 

집의 양옆으로 두 줄기 개울이 졸졸 흘러내리는데, 흐린 물은 채소밭에 뿌리고 맑은 물에는 손발을 씻었다. 집 남쪽에는 송정이 있어 여름이면 그 그늘에서 더위를 피할 수 있었다. 그 남쪽의 작은 개울에는 월송교가 있었고 그 주변에는 개나리와 가는 버들이 자라났다. 이산해는 황보촌에 집을 정한 소감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벽옥 같은 천 그루 대나무가 에워싸고
푸른 산등성이가 한 면을 막고 섰네.
가을 소리는 자주 비를 뿌리게 하고
산 기운은 절로 노을을 만드네.
나그네 되어 도리어 은자와 같건만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집 없구나.
흰머리로 그저 임금만 그리워하여
꿈에서는 늘 대궐을 향한다네.

황보촌으로 옮겨살며 (아계유고 47-445)

 

황보촌에 정착한 이산해는 산과 물을 볼 때마다 임금의 얼굴을 떠올렸다. 곧바로 다시 서울로 돌아갈 것이라 믿었기에 몇 달 동안 살 집을 정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그가 유배 초기에 지은 시는 임금의 귀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듯 임금이 그립다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깊어가는 가을, 파리한 말을 타고 백암으로 가면서도 하늘을 바라보며 천심이 자신을 도울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임금은 이산해를 부르지 않았다. 해가 바뀌어 봄이 왔건만, 이산해는 여전히 돌아보지 않는 임금을 향해 그립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센 머리카락이 많아진 것도 임금이 그리워서라 하였다.

 

그러나 귀양살이가 2년으로 접어들자 이산해는 서서히 임금 대신 매화를 찾기 시작했다. 열흘 중에 아흐레는 산속을 뒤지면서 미친 듯이 매화를 찾았다. 혹 매화가 피면 돌아갈지 모른다는 마음이 들어서일까.

 

이산해는 황보촌의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되었다. 황보촌으로 들어가는 길가 언덕에는 산다화가 낮은 가시덤불 속으로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다.

 

이산해는 하인을 시켜 넝쿨을 베고 대를 꽂아 잘 자랄 수 있게 해주었다. 잎이 파랗게 자라고 꽃이 빨갛게 피자, 이를 본 이산해는 한편으로 기뻐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누추한 모습을 돌아보고 비감에 젖기도 하였다. 이산해는 시골 늙은이가 되었다.

 

이산해는 중도부처의 형벌을 받아 평해에 유배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가까운 곳을 오가는 것은 허락되었고 가족들의 왕래도 금지되지 않았다. 아내가 넷째아들 경유와 막내딸을 데리고 평해로 오자 이산해는 꿈인 듯 기뻐하였다. 그러나 이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유배온 지 한참이 지난 어느 날, 이덕형에게 시집간 둘째딸이 왜적을 피해 자결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며느리도 이때 함께 죽었다.

 

등불 앞에 오열하여 눈물로 치마를 적시며
“밥 잘 드시고 너무 슬퍼하니 마세요” 하더니
누가 알았으랴 도리어 네가 죽어 영결할 줄을
옷 뿌리치고 나선 일이 이제 깊은 한이 되었네.

딸을 통곡하며 (아계유고 47-447)

 

이산해의 첫아들 경백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섰으나 겨우 20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게다가 유배온지 3년째 되던 1594년, 강릉에서 평해로 온 넷째아들 경유가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늦둥이로 태어난 경유는 젊은 시절 이산해가 친하게 지내던 임억령의 시를 아버지 앞에서 외우기도 하였는데, 그가 영영 저승으로 가버린 것이다. 아들이 죽은 지 반달이 지나도록 이산해는 꿈에서조차 아들을 만날 수 없었다. 이산해는 자다가 발자국 소리를 듣고 아들이라고 여겨 나가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그런 밤을 수없이 보내야 했다.

 

이산해는 처음 유배왔을 때 오직 임금만 그리워했다. 그러나 아들을 잃고 나서는 산을 보나 물을 보나 아들의 잔영만 서리고, 무슨 소리가 들려도 아들인가 싶었다. 아들이 죽고 석 달이 지났지만 그 모습이 잊혀지지 않았다. 짙은 눈썹에 통통한 뺨, 땅에 끌릴 정도로 긴 더벅머리를 한 아들이 꿈에 또렷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산해를 붙잡고 무엇인가를 말하려던 아들은 안개 속으로 멀리 사라져 버렸다. 그럴 때마다 이산해는 꿈에서 깨어나 달빛 아래 서성이곤 하였다. 1년이 지나도록 이산해는 상심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집에 연등을 걸어두고 훗날 저승에서 다시 만나기를 기원할 뿐이었다.

 

이산해는 유배기간 동안 거의 황보촌에서 살았지만 평해의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살기도 했다. 황보촌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았기에 유배객의 답답한 마음을 풀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특히 사랑하는 아들이 죽은 뒤로는 황보촌을 떠나 있을 때가 많았다. 이산해는 바다가 보이는 정명촌과 월송정으로 자주 와서 묵었다. 정명촌은 바다를 바라보고 형성되어 있는 마을로, 황보촌과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가까운 곳이었다. 이곳에 벗 황응청이 살고 있었다는 점도 이산해가 정명촌을 자주 찾은 이유였다.

 

이산해는 황응청의 조카 황여일이 살던 사동에도 자주 출입했다. 사동은 평해에서 월송정으로 가다보면 왼편에 동쪽으로 향해 있는 마을이다. 사동산 서쪽 마악 아래 위치한 이 마을은 봉황새가 나는 듯한 형상의 명당으로 지금도 황여일이 거처하던 해월헌이 대숲 아래 호젓한 자태를 자랑한다. 이곳에는 이산해 외에도 이수광 등 이름난 문인들의 시판이 걸려 있다. 황여일은 김성일 집안으로 장가를 들었으며, 이황의 문하에 출입한 명현이다.

 

이산해가 귀양온 이듬해 여름, 황여일은 부모를 뵙기 위하여 고향으로 왔다가 이산해를 찾았다. 이산해는 좌주로서 과거시험에서 그를 선발한 인연이 있었다. 이 때문에 이산해는 그의 마을을 자주 찾고 또 그곳에서 바닷가 쪽에 있는 서경포에 잠시 집을 빌려 살게 된 것이다.

 

이산해는 입선동에서 서쪽으로 수십리 떨어진 주령 아래의 서촌에도 잠시 살았다. 서촌은 백암산 기슭에서 물길을 따라 내려오면 나타나는 선암사 뒷동네, 그리고 그 북쪽 주령 아래쪽 동구 일대를 말하는데, 주령 아래의 경관이 가장 빼어났다. 이산해는 그곳에서 다시 동쪽으로 한참 떨어진 우암산 달촌에서 몇 달간 살기도 하였다.

 

이산해는 손씨성을 가진 아전의 집을 빌려 봄부터 여름까지 다섯 달을 이곳에서 살았다. 서너 칸 단출한 초가를 짓고 서쪽 언덕에 띠풀을 이어 정자를 지었다. 낮에는 앉거나 누워서 잠을 자고 밥을 먹으며 떠나지 않았다. 흥이 일면 조건을 쓰고 대지팡이를 짚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동자에게 말고삐를 쥐게 하여 해당화 핀 길을 다니며 시를 읊조렸다.

 

이러한 사이 이산해는 자식을 잃은 고통에서 차츰 벗어나게 되었다. 베개에 기대어 마당에서 뛰노는 병아리를 구경하고, 돌솥에 차를 달여 꾀꼬리 지저귀는 나무그늘 아래서 마셨다. 가랑비가 내리고 소슬바람이 불어오면 느티나무 뿌리에 앉아 꿈에서나마 예산의 고향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집에 작은 못을 파고 버들을 심어 조그만 배를 띄우는 풍류도 부려보았다. 새벽이면 발을 걷고 산과 들판을 바라보면서 상념에 빠지기도 하였다. 해가 질 무렵 밥 짓는 연기가 마을에 피어날 때 나무꾼이 소와 양을 몰고 어사용을 부르는 것도 즐겼다.

 

시골노인네처럼 막걸리를 사서 들판으로 나가 잔뜩 취해 들어와 숲속의 정자에 누워 달빛을 구경하였다. 백암산과 주령에서 발원한 개울을 따라 난 길을 걸으면서 10리에 뻗은 해당화 향기에 취하였다. 백암사를 찾아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화려하게 피어 있는 모란을 감상하였다. 이산해는 돌아갈 기약 없는 삶을 이렇게 보냈다.

 

3년을 넘긴 평해 유배생활에 적응한 이산해는 어느덧 평해 사람이 다 되어갔다. 해안의 거센 사투리도 이해하게 되었으며, 농부들과도 거리낌 없이 지내게 되었고, 게와 산채도 입맛에 맞게 되었다.

 

이산해는 3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평해에 이렇게 유배 생활을 즐기다 다시 조정으로 복귀하였다.

아계 이산해의 평해 유적
‘아계 이산해의 평해유적’ 중에서

이해준 공주대학교 교수

아계는 임진왜란이 발발 후 유성룡과 함께 서수론을 주장하여 의주 몽진을 결정하는데 큰 역할을 했고, 이 일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어 평해로 귀양을 가게 된다.

 

54세부터 57세까지 3년동안의 평해 유배생활은 이산해에게 있어 문학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시기였다.

 

아계유고에 실려 있는 시 840수 가운데 절반이 넘는 483수가 이 기간에 지어졌고 특히『기성록』은 16세기말 평해 지방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또 허균은 아계의 시를 평하면서 “초년에는 당시를 배웠고 만년에 평해로 귀양을 가 있으면서 조예가 극도로 깊어졌다”고 하였을 정도다.

 

아계가 평해에 유배되어 수많은 인연을 만들었고 그 유서는 지금까지도 유적과 함께 평해 곳곳에 남아서 전해진다. 평해는 아계 이전에도 한산이문과 인연이 있었던 지역이었다. 특히 관동팔경의 하나인 월송정과 망양정으로 대표되는 경승지의 정자는 시인 묵객들의 음풍 장소로 회자되는 곳으로, 아계의 선조인 가정 이곡의 시가 전하고 있는 곳이다.

 

가정 이곡은 월송정과 망양정을 읊은 다음과 같은 시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남기고 있다.

 

[월송정의 시]
가을 바람에 옛 자취 찾아 말 머리 동쪽으로 돌리니
울창한 정자 소나무 좋기도 하구나
몇 해 동안이나 이 마음은 신선 지경 찾으려 했나
천리 먼 길에 길 떠나려 양식을 방아 찧었네
도끼의 액운이 없으니 한위를 지났고
재목은 큰 집[확묘:廓廟] 지을 수 있으니
기룡(순임금의 어진신하)에도 비기겠네
난간을 의지하여 침음(沈吟)하기 절로 오래인데
졸렬한 붓으로 만분의 일도 형용하기 어렵다

 

[망양정의 시]
강 위의 인가 대숲 밖 마을에
기이한 풍경 좌우 쪽에 보는 곳마다 평원이로세
거듭 찾아오니 백발 친한 친구 놀라게 하고
두어 점 청산은 옛 동산을 격해 있네
성이 넓은 바다를 꼈으니 바람 자못 사납고
땅이 해뜨는 곳에 접하였으니 기운이 항상 따스하구나
우연히 쓴 시구를 지워버림이 마땅하니
어찌 여러 사람의 입에 흘러 전하기를 바랄 것이랴

그런가 하면 아계의 부친 성암 이지번도 중종 31년에 평해로 유배를 와서 잠시 머물렀던 사실이 있다. 특히 부친 성암공이 평해에 머무는 동안 도움을 받고 시문을 교환했던 평해의 곽씨들은 아계의 평해 유배 때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 유배시 거처했던 마을

평해에서의 3년 유배기간 동안 아계는 이 지역의 선비들과 교유하면서 많은 글과 유서를 남겼다. 부친 성암공과 유서를 가졌던 황보촌의 곽씨라든가, 해월헌의 황씨, 그리고 이우윤, 장희도 등은 바로 그러한 인물들이었다.

 

아계가 유배시 살았던 마을들은 달촌, 하오촌, 황보촌, 서촌 등이었고, 이곳들은 백암온천이나 월송정, 망양정, 해월헌에 인접해 있다.

 

기성록에 의하면 아계가 유배되어 깜깜한 밤에 평해에 처음 지접한 곳은 사동의 서경포였다. 이곳에서 아계는 동해안의 어촌 풍습에 놀라면서 이를 기록해 두었다. 이후 아계가 5개월여 살았던 곳은 달촌이었다.

 

현재는 평해읍 삼달리에 속한 달촌에는 평해의 토착 성씨인 손씨와 이씨들이 살고 있었는데, 아계는 달촌기에서 달촌의 형국을 “좌우에서 팔짱을 끼고 읍하는 형국”으로 묘사하고, 고인이 누워서 관부를 내려다 본다는 백암산과 창룡이 꿈틀꿈틀 꼬리를 치며 기어가는 모양의 시내가 수정계를 주목한다. 특히 이곳의 팔선대라는 바위에 대하여 아계는 특별한 애정을 보이는데 팔선대기가 기성록에 수록 되어 있다.

 

마치 뱀과 매가 개구리(팔선대)를 다투는 모습의 형국으로 팔선대라 부른 뜻을 ‘신라 때에는 선인과 도사가 많았으니 영랑과 술랑 같은 이들이 노닐던 곳’이라는 구전도 있었던 모양이다.

 

아계는 “내가 우거하고 있는 달촌이 팔선대와 매우 가까워 복건을 쓰고 여장을 짚고서 날마다 왕래하며 피로한 줄을 모르고.........  그 푸르고 맑은 기운 속을 배회하노라면 심신이 화락하여 물아를 잊게 되었다.“ 고 술회하듯이 매우 애정을 붙였던 곳이다.   

 

아계는 ”만약 이곳이 내 고향이라면 몇칸 오두막을 짓고 여생을 보낼 수 있어 비록 고관대작의 영화로도 이 즐거움을 바꿀 수가 없을 것“이라 하고 또 “팔선대는 일정한 이름이 없는데 후세 사람들은 필히 적선대라 이름할 것이다”고 자신의 유배와 자부심을 북돋우기도 한다.

 

아계가 이어 옮겨 살았던 곳은 황보촌이었다.『황보촌기』에 의하면 아계는 1592년 가을에 곽간의 집을 빌려 거주하게 되는데, 마을 터와 경관이 매우 수려하고 곽간은 생계가 다소 넉넉하여 집을 비워주고 이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기성록의 다른 글을 보면 중종 31년에 아계의 선친이 기성에 귀양왔을때 곽 상사가 소탈하고 탈속하여 좋은 사람이었는지라 그와 어울려 풍월을 완상하고 산천을 유람하는 등 늘 함께 다녔다고 한다.

 

어느날 방문했다가 만나지 못하자 창호지에 시를 한수 써놓았는데 그것을 고이 간직하고 스스로 즐겼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런데 이로부터 58년이 지난 임진년에 아들인 이계가 또 이곳에 와서 곽생의 손자인 곽간의 집을 빌어 살게 되었으므로 그 감회를 읊고 있다.

 

아계의 “매화”라는 시속에 ‘망암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도 평해에 귀양와서 곽생의 아버지와 친하게 지냈던 아버지 성암 이지번을 기다린다는 뜻에서 그렇게 표현했다고 한다.

 

아계는 다시 1594년 월송정 서쪽의 화오촌에 옮겨 살게 되었는데, 이곳은 아계가 월송정기에서 ‘내가 일직이 화오촌에 우거하면서 기이한 경관을 실껏 차지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스한 봄날 새들이 다투어 지저귈 때면 두건을 젖혀 쓴 채 지팡이를 끌면서 붉은꽃 푸른솔 사이를 배회하였고, 태양이 불덩이 같은 여름날 땀이 비오듯 흐를 때면 솔에 기대어 한가로이 졸면서 울릉도 저편으로 정신이 노닐곤 하였다. 그리고 서리가 차갑게 내려 솔방울이 어지럽게 떨어지면 성긴 솔가지 그림자가 땅에 비치고 희미한 솔바람의 운율을 들을 수 있었으며, 대지가 온통 눈으로 뒤덮혀 솔숲이 만마리 흰빛 용으로 변하면 구불텅 얽힌 줄기 사이로 구슬가지 옥잎이 은은이 어리었다.

 

게다가 솔 비늘이 아침 비에 함초로이 젖고 안개와 이내가 달밤에 가로 둘러있는 경치로 말하자면, 비록 용면거사를 시켜 그리게 하더라도 어찌 만분의 일이나 방불할 수 있으리오라고 칭찬하듯 월송정을 마주보는 곳이었다. 화오촌은 현재 도로 건설로 거의 절반이 훼손된 상태다.

 

■ 망양정

관동팔경중 하나인 망양정은 고려 때에는 기성면 망양리 해변 언덕에 세워져 있었다. 가정 이곡이 읊은 망양정 시는 이곳에 처음 망양정이 있을 때의 것이다. 그러다가 조선 세종때 채신보가 망양정이 오래되고 낡았다 하여 이웃한 현종산 기슭으로 옮겼다 고 한다. 그 후 1517년 폭풍우로 넘어지자 중종 13년에 안렴사 윤희인이 평해군수 김세우에게 부탁하여 중수하였다.

 

망양정은 성류굴 앞으로 흘러 내리는 왕피천을 끼고 동해의 만경창파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언덕에 세워져 있으며, 그 경치가 관동팔경중에서 제일가는 곳이라 하여 숙종이 ‘관동 제일루’라는 친필의 편액을 하사하였다.

 

숙종과 정조가 친히 지은 어제시와 정추의 시, 정철의 관동별곡, 채수의 망양정기 등의 글이 전해오고 있다.
2008년 10월 아계 이산해의 망양정 시 현판이 제작되어 망양정에 게첩 됐다. 게첩된 망양정 시도 기성의 옛터에 있을때 지어진 것이다.

 

바다를 낀 높은 정자 전망이 탁 트여
올라가 보면 가슴 속이 후련히 씻기지
긴 바람이 황혼의 달을 불어 올리면
황금 궁궐이 옥거울 속에 영롱하다네

현재의 위치인 근남면 산포리 둔산동으로 이건된 것은 1860년(철종11)으로 울진현령 이희호 때였다. 1959년 오랜세월 풍우로 인해 낡아 울진군, 울진교육청이 국·도비 보조금과 뜻있는 지역 인사들의 도움으로 중건하였고, 1979년과 1994년 재 보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망양정 아래 포구에는 1985년 개설된 망양해수욕장이 있고 인근에 천연기념물 제155호인 천연동굴 성류굴이 있다.

 

■ 월송정

월송정은 신중동국여지승람 평해군조에 “고을 동쪽 7리에 있다. 푸른 소나무가 만 그루이고 흰 모래는 눈 같다. 소나무 사이에는 개미도 다니지 않으며, 새들도 집을 짓지 않는다. 민간에서 전하여 오는 말이 신라때 신선 술랑 등이 여기서 놀고 쉬었다 한다”고 기록된 유서 깊은 곳이다.

 

현재의 월송정은 망양정과 같이 원래의 위치가 아닌 이건된 것이다. 원래 위치는 월송포 만호성이 있던 고을 동쪽 7리에 있었고, 만호성의 남문루였다고 한다. 망양정과 함께 관동팔경의 하나로 제일 남쪽에 위치한 월송정은 팔작지붕 주심포. 고상 누각으로 고려 시대에 창건되었고, 조선에 들어와 관찰사 박원종이 중건하였다고 한다.

 

월송정의 경승에 관하여는 흥미로운 일화가 전해진다. 즉 성종이 국내 명 화가를 시켜 팔도의 사정중 가장 풍경이 좋은 곳을 그려오라고 명하자 그 화공이 영흥의 용흥각과 평해의 월송정을 그려 올렸다고 한다. 이에 성종은 “용영흥각의 연꽃과 버들이 아름답기는 하나 월송정에 비할 수 없다”며 월송정과 그 주변의 경치에 감탄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 되었듯이 월송정은 신라시대 화랑들이 이곳의 푸른 소나무와 흰모래 밭에서 웅지를 품던 도장으로도 알려지고, 정자 위에서 바라보는 빽빽이 우거진 노송림과 명사십리의 아름다운 바다풍경은 가히 손꼽을 만한 명승지이다.

 

월송정은 한때 “달밤에 송림 속에서 놀았다”하여 월송정(月松亭)이라고 했고 월국에서 송묘를 가져다 심었다 하여 월송정(越松亭)이라고도 했으나 전해오는 각종 자료에는 월송정(越松亭)이 더 일반적이다.

 

이 명칭에 대하여 아계는 “어떤이는 ‘신선이 솔숲을 날아서 넘는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하고 어떤이는 ‘月자를 越자로 쓴 것으로 성음이 같은데서 생긴 착오이다’하니 두 설 모두가 어느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그런데 내가 越자를 취한 것은 이 정자의 편액을 따른 것이다”고 했다.

 

2008년 10월 월송정에도 한산이씨 아계공파 종회에서 울진군, 울진문화원과 협의하여 아계 유고 제3권 기성록 잡저편에 실린 월송정기를 게첩하였다.

 

현재의 월송정앞 솔밭은 시귀에 나오는 소나무숲과 별개이다. 이들 숲은 1959~1963년 어간에 식재된 것들이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세월이 흘러 퇴락하자 1933년 황만영 등이 중건하였고 일제말기에는 연합군의 공격목표가 된다고하여 일본군에 의해 철거당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1969년과 1980년 두 차례에 걸쳐 고쳐져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현재의 월송정 현판은 80년 준공 당시 최규하 전 대통령의 친필 휘호이다.
다음은 숙종의 월송정 어제시이다.

 

화랑들이 놀던 자취 어디 가서 찾을 것인가
일만그루 푸른 솔이 빽빽하여 숲일런데
눈 앞 가득 흰모래는 백설인양 방불코나
한번 올라 바라보매 흥겨웁기 그지없다

오곡연당

평해읍 오곡 1리 오곡연못은 아계의 글이 있는 유적이다. 유배처에서 북쪽으로 4~5리쯤 떨어진 곳에 오곡이 있고 연꽃이 매우 만개하였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그 아름다운 광경을 보게 된다. 

 

아계는 오곡연당에서 연꽃을 보고는 마치 천리 밖에서 옛친구를 만난듯 반가워하면서 그 모습을 오곡연당기에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때마침 산에는 비가 막 그치고 물기 머금은 구름장이 아직 걷히지 않았는데
아침 햇빛은 화살처럼 내려와 꽂히고 나무에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옥쟁반
같은 연잎위에 다투어 쏟아지고 있었다. 또 물방울을 받치고 있던 연잎은
차례로 기울어져 물방울을 쏟기를 그치지 않고 붉은 단장을 한 채 물기에
함초롬히 젖은 꽃잎은 필듯 말듯 반개하여 맑은 향기가 그윽하게 두건과 소매,
지팡이와 신발에 스미어 못내 서성이면서 날이 저물도록 떠나지 못하게 했다.

울진군은 이산해의 유서를 기리는 사업으로 오곡연당에 한식 정자 연당정을 2006년 3월에 완공하였고 여기에 아계가 지은 오곡연당기문을 게판하였다.

 

■ 해월헌

해월헌은 평해 황씨들의 유서와 전통이 깃든 유적으로 경북 문화재자료 제161호로 지정되었다. 원래 1588년(선조21) 기성면 사동리 마악산에 건립되었으나, 불의의 화재로 1847년(헌종13)에 현재의 종택 자리로 이축하였다.

 

평해에 유배온 아계는 정명촌의 황응청과 만나 교류한다. 평해 황씨로 호를 대해라 하였는데, 1567년에 은일·학행으로 천거되기도 하였고 시무 4폐를 지적하여 진보 현감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명계에 대해당이란 서당을 열어 후진을 가르쳤는데 평해에 귀양온 아계와 서로 존경하면서 만나 글도 짓고 교류하였다고 한다.

 

아계는 같은 평해황씨의 집성촌인 사동으로 조카인 황여일을 찾아 가는데 아계는 황여일의 문과 급제시 고시관이기도 하여 깊은 인연으로 정을 나누게 된다. 황여일과의 인연으로 아계는 사동기를 짓기도 하고 그의 호를 따라 지은 해월헌의 기문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기성록의 해월헌기에는 “황군이 마악산 아래에 작은 집을 짓고 헌의 이름을 해월이라 하고는 내게 기문을 지어달라고 하기에.... 군자의 마음은 바로 광대하고 고명하여 길이 변치 않는 바다와 달”이라고 하고 있다. 해월헌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전면에는 누마루에 난간을 돌렸으며 가운데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양측칸에 온돌방을 두었다. 현재 해월헌에는 아계의 기문이 게판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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