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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저 관우상을 녹여 거북선을 만들면 어떨까?

작성자고구려|작성시간24.08.05|조회수83 목록 댓글 1

 

외삼문(남문)

 

동묘는 임금이 성균관에 행차했을 때 성균관 유생들이 어가를 공손히 맞이하는 장소가

 

동쪽의 경우 동관왕묘 앞이었다고 한다 

동묘(보물)

 

동묘는 임진왜란 후 명나라 황제 신종의  압력으로 1599년에 관왕묘 공사를 시작하여 1601년에 완공했다

 

정명가도(征明假道)는 어디가고 명나라는 조선을 구해준 재조지은 (再造之恩)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동묘란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의 동관왕묘로 동대문 밖  관우의 사당이라는  뜻이다

 

중국 송나라 때 관우가 왕으로 봉해지고  명나라 때는 황제로 봉해질 정도로 숭배사상이 깊었다

 

민간에서도 관우를 신으로 모시며 제사 지내는 풍습이 자리잡았다

대소인원하마비(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리라는 뜻)

 

1598년 정유재란 때 원군으로 온 명나라 장수 진인은 임진왜란 때 울산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고

 

한양으로 올라오게 되자 숭례문 밖에 사당을 세운 것이 남관왕묘의 시작이나 한국전쟁 때 불탔다


남관왕묘 본래 자리는 서울역  맞은편인데 현재 남묘파출소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그뒤 고종이 서울의 북관왕묘 서관왕묘를 지었고 민기에서도 관우신앙이 유행했으며 부산 ,동래,인천,

 

평양 전주 등지로 급속히 확산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일본이 항왜 유적으로 폐묘시키고 1908년 동관왕묘만

 

남겨두고 북관왕묘와 서관왕묘에 있던  신상과 유물을 동묘와 합치게 되었다 그 뒤 문을 굳게 닫아 두었다가

 

오늘에 와서야 다시 동관왕묘로 복원 정비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공자를 위패를 모시는 문묘가 있다면 중국의 장수 관우를 모신 "동묘"를 무묘라 한다

 

여기서 "묘"란 사당 묘를 쓰서 사당이라 한다  공자조차 왕으로 봉해졌는데 관우는 당당하게 황제로

 

모시고 있는 것을 보면 중국인들의 관우 신앙이  얼마나 지극정성인줄 알고도 남을 것이다

일데강점기 때  사진에 깃대가 보이므로 당간지주를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어막대

 

어막대는 임금이 종묘에 행차했을 때 가마를 두는 곳이다

 

인조와 현종대 대개 국상을 당해 동대문 밖으로 가는 능행 때 여기에 의식에 쓰던

 

임시 장막인 막차를 설치하던 어막대가 남아있다

 

동관왕묘 월대

동무

 

문묘인 성균관의 공자를 모신 대성전 좌우로 성현을 모신 동무와 서무가 있듯이

 

무묘인 동관왕묘 정전 앞에 좌우로 동무와 서무가 있다

숙종이 지은    무안왕묘비(武安王廟碑)

 

숙종은 1691년 선대의 왕릉에 능행을 하고 환궁하던 중 우연히 동관묘에 들러보고 비망기를 남겼다

 

숙종은   관우를 빌어  신하들의 충성을 유도하려는 의도로 동묘를 대대적인 보수공사와 새단장 후

 

제사 지내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9월에 시 두 수를 지은 뒤  목판에 새겨서 동쪽과 남쪽 두 관왕묘에

 

걸어두게 했다 그 중 현판 하나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영조 때 더욱 강화되었다

 

1785년에 세워진 이 비석의 앞면에는 사도세자가  쓴 글이 있고  뒷면에는 정조가  쓴 글이 새겨져 있다

.

왕은 어필(御筆)이라 하고, 왕세자는 예필(睿筆)이라 표시하는데

 

사도세자는  관왕묘 및 관우의 찬양문, 정조는 관우의 용맹과 충의를 찬양한 글이다

서무

 

동관왕묘의 건물배치는 정문 ㅡ중문 ㅡ정전이 일직선상에 놓이고  정전 앞 좌우로 동무 서무가 배치된

 

아주 간결한 구조다 남북 일직선상의 중심축에 좌우 대칭으로 부속건물을 배치했다 

숙종 어제 어필 [대한 조충절 무안왕 찬양명(大漢朝忠節武安王贊揚銘)

 

뒷면의 “顯靈昭德武安王廟”(현령소덕무안왕묘)라는 해서체 본문은 영조의  글씨로

 

    무안왕은 관우를 말하는 것이다

연지

전사청 터

우물

기둥 아래 흰 띠를 두른 것은 이곳이 향사 공간임을 나타낸 것이다

 

이는 문묘인 성균관 대성전 건물에서도 볼 수 있으며 왕실의 빈전과 혼전에서도 볼 수 있다

기둥의 주련이 모두 14벌 28개로 이렇게 많은 것은  북관왕묘 서관왕묘에서 옮겨왔기 때문이다

 

주련 글씨 대부분은 중국 사신과 상인들이 쓴 것이다

동관왕묘(보물)

 

정전 양 옆의 향나무는 수령 200년 정도 되는 것으로 제사용 향으로 쓰이던 향나무이다

잡상

정전 앞  등명대

 

1912년 <한국건축조사보고서>에 수록된 동묘 석등 사진에는 철제 램프가 놓여 있음을 볼 수 있다

 

원래 등불을 올려 놓는 등받침석이다

성수만년 ㅡ군왕을 축원한다는 뜻이다

 

광서 14년 고종 1888년 제작되어 북관왕묘에 있던 등명대이나 북묘가 폐정되어 동묘로 옮겨왔다

 

아래 "백목전진상"이란 글까지 새겨져 있는데  무명천을 팔던 상인들이 사업번창을 기원하며 바쳤다

광서14년 무자시월일(광서 연호는 청나라 덕종 연호)  즉 1888년 10월 고종 25년에 만들어졌다 

조선왕조 1612년 광해군 때 관왕묘를 수리해야 하자 광해군은 국가에서 묘를 세우지않았으면 모르되

 

이미 창건했으니 신을 모독하는 데까지 이를 수 없다며 동관왕묘 수리를 명하고 매년 봄 가을로 경칩과

 

상강에 제례를 지내도록 제도를 정했다 그리고 수직군사를 보내 잡인의 출입을 금하고

 

제례 때이는 반드시 무관 대신인 장신이 제관을 맡도록 했다

팔작지붕 삼각형 합각의 긴 눈썹지붕은  중국의 관왕묘에서 보이지 않는다

 

건축사가들은 이런 형식은 왕릉 앞에 있는 정자각에서 따온 것이라 보고 있다

정전은 전실과 본실 두 개의 건물이 합쳐진 형태로 중국에서 절이나 사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이다

 

전실은 참배 공간이고 후실은 관우상을 모시고 있는 신전  공간이다

 

동관왕묘는 중국  본토에서도 볼 수 없는 건물로 무려 400년이 넘는다

고종의  어필ㅡ  관우의 시호인 <현령소덕의열무안성제묘>

 

명나라 황제 신종이 4천금을 주면서 선조가 동대문 밖에 관왕묘를 짓도록 했다

 

신종은 <현령소덕무안왕묘>라는 현판을 내려 주었다

 

실록의 사관은 관왕묘의 역사는 매우 허무맹랑한 일로 한 번 짓는 것도 그릇된 일인데 금지하지 못하고

 

이제 또 동쪽 교외에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키니 전쟁에서 살아남은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갈 수ㅡ 있겠는가

 

고 했다 그러나 명나라가 쇠락하고 청나라가 군대가 쳐들어 왔을 때 동관왕묘를 본부로 사용하던

 

청나라 장수들이 명나라 신종황제의 글씨임을 알고 없애버려 전하지 않는다

고종이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을 건국한 뒤에는 <현령소덕무안왕묘> 에서 <현령소덕의열무안성제묘> 로

 

 관우도 황제로 승격되었다 좌우에 두 개의 현판이 있는 이유는 (향사이정.享祀釐正통폐합

 

즉 북묘에 있는 현판이 합쳐지면서 두 개가 되었다

현성전

 

동관왕묘 22개 현판은

 

현성전. 현성보번. 만고표명. 천고완인 등 모두 17세기 전반기 선조와 인조 연간에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이 쓴 것이다

만고충절 천추의열

 

1761년 영조의 글씨로 (길이 남을 충절과 의로움을 뜻한다)

현령소독무안왕묘 (북관왕묘에 있던 것으로 영조 친필이다)

유청집희

 

임오군란 당시 이곳에 주둔해 있던 청나라 사령관 오장경이 쓴 현판 글씨이다

 

시경에 나오는 말로 "말고 밝게 이어진다는 뜻이다

만고표명(임진왜란 뒤 명나라 사신이 쓴 현판)

 

만년을 이어 이름을 표명

현성보번

 

성인이 제후국 즉 조선을 구했다는 뜻이다

영조의 어필 (현령소덕무안왕묘)

천고완인

 

천년을 이어온 완벽한 사람

만고충심

천추의기

 

(만고충절 천추의기) 만고의 충절과  천 년동안 의리를 강조

서울에는 동서남북 관왕묘가 있었다 

 

남묘와 동묘는 선조 때 건립되었고 북묘와 서묘는 고종 때 만들어졌으나 일제강점기 때 

 

동묘에 합쳐졌다 그래서 동묘에는 북묘와 서묘의 유물이 섞여있다

관우상

 

임진왜란 후 명나라 황제 신종은  조선에 관우 사당 건립을 요구하며 금 4천냥에

 

중국 기술자 그리고 자신이 쓴 현판까지 보냈다 정전에 모셔진 신상에 대해서는 <한경지략>에서

 

지금은 없어진 열조통기를 인용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동관왕묘 주조상을 만들 때 만세덕과 여러 장수가

 

10개 풍로에 구리3000근을 다 녹여 부어도 상이 되지 않았다 명나라에서 나온 한빈과 우리나라

 

주물장인인 동장이 울부짖으며 종을 깨어 헌 구리 300여 근을 더 끌어모아

 

녹여서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관우상은 무게 2.4톤 높이 2.5m가 된다

삼국지에 나오는 실존 인물인 관우는 사후에 촉나라에서 받은 정식 시호는 "장목후"이다

 

그래서 관후라  불리며 시후 900년이 지난 12세기 경  북송의 휘종황제가 1107년 관우를 무안왕으로 봉하고

 

무신으로 모셨다 이때부터 관왕으로 불렸다 그리고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나오면서  관우는 대중의 인기를

 

누리며 점점 신격화 되었다

관우상 앞에 호위하는  문인상 왕보 ㅡ무인상 주창 

 

정전 내부에 관우상 3구가 보관되어 있다 감실과 오른쪽 감실에 있는 것은 북관왕묘에서 옮겨온 것이고

 

정전 안쪽에 벽에 기대어 놓은 것은 유지 장비 관우 조각상은 서관왕묘에서 옮겨 온 것이다

 

모두 소조상으로 채색되어 있다 이 조각상은 400년이 되었다

 

주창은 관우가 출정하는 곳마다 종군한 최측근으로 관우가 죽었다는 소식에 자결한

 

충성심 넘치는 장수다 왕보 역시 맥성을 지키다 관우가 전사했음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문인상  관평과 ㅡ무인상 조우 

 

조우는 관우 부자를 호위하다가 전사했다

관평

 

『삼국지연의』 에서는 관평이 관우의 수양아들로 되어 있으나, 『삼국지 · 촉서 · 관우전』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이는 통속문학에서 전해 내려온 말로 보인다.

북묘비(국립중앙박물관)ㅡ2023년 사진촬영

 

관우를 기리기 위하여 고종  1888년 세운 북묘에 있던 것으로 오늘날 서울 명륜동 흥덕골에 있었다고 하나

 

현재 그 터만 남아 있다 비석은 4년 후인 1887년에 세웠다 ㅡ비문은 우리나라에서 관우를 기리게 된 경위

 

북묘를 세우게 된 내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글은 고종 임금이 직접 짓고 글씨는 민영환이 썼다

<남기는 글>

 

영조는 재위 기간동안 무려 17차례나 동묘를 참배하였다

 

<서애선생문집>에 선조 임금께서 몸소 가보실 때 내가 비변사의 여러 막료들과

더불어 수행해 묘정에 나가 그 상에 두 번 절하였다

 

실록에 보면 순조가 십여 차례 헌종이  한 차례 철종이 네 차례 동관왕묘에 참배했다

 

고종은 한 해에 네 차례나 관왕묘를 찾는다 이때 바꿔 단 현판에서 황제를 뜻하는  黃帝의  "제"자가 들어가 있다

그리고 북관왕묘와 서관왕묘를 추가 건립함을써 한양 동서남북에 관왕묘가 들어서게 된다

 

조선의 왕들이 일개 중국의 장수  관우상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2천년 전 중국인들이 숭배하는

 

중국 장수의 사당이  서울 한 복판에 있다는 사실이 새삼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 보게 한다 

 

관우는 왕이 된 적이 없는데 동관왕이라 부르며 관우 사당을  동관왕묘라 칭하며

 

속국의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사대의 예를  취하고 있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 했던가

 

중국의  동북공정이 고구려사를 비롯해 한국의 고대사를 빼앗고 백두산과 간도를 영원히 장악하려는

 

국가 프로젝트로  만약 중국이 신청한 고구려 고분군이 단독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다면

 

고구려의 역사가 마치 중국의 역사인 것처럼 오해될 가능성이 크다

 

2024년 3월 27일 백두산이 중국명 창바이산으로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등재되었다

백두산의 4분의 3은 중국이고, 4분의 1은 북한이 차지하고 있는데 우리가 이 점을 간과한다면

 

 지금의 휴전선이 한국과 중국의 국경선이 될지도 모른다

 

각설하고

 

그 옛날  요동과  요서를 말  달리던  한반도 민족임을 자각하며  동묘 또한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므로 원형을 잘 보존하여 후손들이  보고 느끼며 교훈으로 삼는 것도 필요하리라

 

                                                                ㅡ  중국 지린성  집안의 광개토왕비를 기억하며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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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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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섬진강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8.05

    이 글 제목에

    제 속마음이 드러나

    씁쓰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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