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사
수선사는 서기 656년 백제 귀족출신인 법묘 비구니가 창건한 사찰로
최익현선생의 유해가 잠시 안치된곳이다
절의 불상도 통일신라시대 금동불상이다
원래는 '규우홍인(九品院)이라고 불리던 비구니의 절이였다가 1573년경 남승의 절로
바뀌면서 이름도 '지유젠지'로 개칭하게 된 절로서 지금은 개인사찰이다
단청기술을 한국에서 배워가지 못한 일본의 절은 단청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修善(수선)이라는 현판은 조선말 판서를 지낸 <김학진>선생님의 친필이다.
지금도 낙관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저 범종을 두고 조선의 종이다 일본 종이다 설왕설래하는데
세계에서 유일무일하게 음통이 있는 것은 우리나라 종 뿐입니다
종은 문화재적 가치로만 보아서는 그 의미를 이해하기 힘듭니다
범종은 불교 교리에 따라 불교의 세계관을 표현한 것입니다
저 여자의 젖꼭지처럼 생겼다 하여 유두라 불리는 9개의 유(乳)에는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의미는 언제 기회가 있으면 현장 답사에서 설명하겠습니다
군산 동국사 동종
참고로 국내 유일의 일본식 사찰 군산 동국사에 있는 이 동종은 1919년
일본 경도에서 다카하시 장인에 의해 주조되어 동국사에 봉안된 것입니다
무엇이 다른지 비교 한 번 해보시지요
이곳 수신사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국서 위조의 현장이기도 하다.
1606년 8월 조선 조정은 일본과 강화 조건으로 이에야쓰 국서와 왜란중 왕릉 도굴범 압송을 요구한다.
국서를 먼저 받겠다는 것은 침략전쟁에 대한 사죄를 받겠다는 뜻이며 도굴범 압송은 나라를
분탕질한 책임을 묻겠다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었다
국서와 도굴범의 진위는 의심의 여지가 충분했지만 일본이 조선의 체면을 세워 주어
강화의 명분을 쌓은바 조선에서는 사신 파견을 결정하게 된다
1617년 일본국원수충(日本國源秀忠)과 조선 국왕 전하는 대등한 관계가 될 수 없다하여
자구수정을 요구하지만 막부는 일본 관례에 따라 왕자를 쓰지 않아 문제가 된 것이었고
결국 대마도에서 수충을 왕자로 고쳐 조선에 보내게 되고 알고도 모르는척 체면을 살리면서 위조된
국서를 받아 왔던 것이다.대마도의 국서 위조 사건은 결국은 양국간의 국교재개를 위한 행위라고
보면 되리라
일본에서는 일찍 잃은 자신의 어린 자식에 대해 부모는 자식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집 마당이나
근처에 이렇게 불상을 두고 아침마다 기도한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아기들이 죽으면 일정기간
혼령을 밖에 모셨다가 장례를 치룬다.불상에 입힌 옷은 앞치마가 아니라 아기들이 밥먹을 때
매어주는 턱받이라고 하는설도 있고 혼령이 추울까봐 옷을 입혀준다는 설도 있다
공동묘지
대마도 3대 성인을 모신 절로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고
승려들은 대처승이고, 위패의 보관과 묘역의 괸리 수익으로 운영되며
월급제 승려들이 많으며 출퇴근을 한다고 한다
면암 최익현 선생
면암 선생은 세 번이나 귀양을 갔다.
첫 번째는 조선말 흥선대원군의 장기집권을 비판하다가 제주도에 귀양 갔으며,
두 번째는 개항과 개화운동에 반대하여 위정척사사상으로 대항하다가 흑산도로 귀양갔다
면암 최익현 선생 순국비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이듬해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과 맞서 싸우다 체포되어
쓰시마(대마도)에 끌려 간 뒤 '왜놈이 주는 밥은 굶어 죽을지언정 먹지 않겠다' 며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굶어죽었다. 유해는 수선사에 안치하였다가 부산으로 이송되었다.
이에 선생의 넋을 기리고자 1986년 한일 유지들이 힘을 모아 수선사 경내에 순국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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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토방에 갇혀 있을 때 일본인들이 밤에 몰래 찾아와 선생의 글을 받아갔다고 한다”
“절 안에는 선생 영정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
1906년 12월 31일, 71살인 최익현 선생은 단식사(斷食死)를 하면서 이런 시구를 세상에 남기였다.
이 몸을 일으켜
북두성 빛나는 조국을 바라보니
백수로 잡힌 몸의 통분함을
억제할수 없어라
만번 죽어도 적국의 부귀를 탐할소냐
오로지 일생에 내 나라 잊지 못하노라
비석 옆에 피어 있는 무궁화가 애잔하다
선생의 꿋꿋한 기개를 기리기 위해 1986년 이곳에 비석을 만들었다
비문의 뒷면에는 면암 최익현 선생이 1907년 1월 1일 대마도 경비대 억류지에서
사망하여 상여가 본국으로 운구될 때에 이 절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선생의
사적이 사라질까 두려워(근심되어) 이 비를 세운다."라고 황수영박사가 쓴 글이 기록되어 있다
순국비가 이곳 수선사에 세워지게 된 유래가 적혀 있다
이즈하라 국분사
국분사는 조선의 마지막 통신사가 묵었던 객관터이다
상태랑(고쿠분쇼타로)은 이완용과 함께 한일병합을 주도한 인물이다 대마도 출신인 상태랑은 조선어에
능통하여 을사보호조약과 한일병합 조약문 초안을 만들고 통역하였던 자이다. 상태랑은 한 때
이토우히로부미의 통역비서 역할도 하였다. 그는 대마도 광청사에 있던 한어학소에서 한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부산의‘ 초량관어학소’를 거쳐 동경외국어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하였다
이완용
그는 이완용과 손잡고 조선인들에게
칼을 휘둘러대다가 1917년에서 1921년까지 이왕직 차관을 지내던 중 62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이완용은 상태랑이 죽자 몹시 슬퍼하였다. 그래서 묘비문을 직접 써 주었다.
이왕직은 일본황실령으로 만들어진 고종황제를 일본의 일개 왕공적으로 격하시키기 위한 직제였다. 대부분
장관은 한국인으로 민영기였고 차관은 일본인으로 정하여 궁중에 관련된 사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이즈하라 국분사 ㅡ종3위훈1등국분상태랑지묘’(이완용 서)
1920년 4월 28일 상태랑은 이은왕자와 일본 황실의 이방자여사의 정략결혼을 추진하였다. 1925년 덕혜옹주의
정략결혼 역시 이왕직에서 추진한 것이었다. 3·1 운동 때 동포를 협박하는 경고문을 3차례나 발표한 공적이
인정되었다. 이완용은 즉시 후작으로 승작 되었다 대마도 수선사에서 만나는 면암 최익현 선생 순국비와
대마도 국분사의 종3위훈1등국분상태랑지묘’(이완용 서) 비문은 역사의 명암이 엇갈리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