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물왕릉 추 향대제(년도 미상)
<광개토왕비문>에는 서기 399년 왜와 가야가 연합해 신라를 쳐들어와 신라의 왕성인 금성을 함락시키자
내물왕은 고구려 영역의 경계선인 북쪽까지 도망가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자 400년
광개토왕이 5만의 막강한 기마군단을파병해 격퇴 시키고 가야까지 휩쓸었다
이때부터 고구려 군은 신라의 주요 거점과 수도인 경주에 주둔하면서 정치적
군사적으로 내정간섭을 하면서 고구려의 속국이 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금석문 기록이 바로 한반도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고구려비석인 충주의 중원고구려 비이다 신라토내당주 [新羅土內幢主] 라는 글귀는
신라 영토 안에 당주가 있었다는 뜻인데 보통 ”당“이라고 하는 것은 군사를 지휘하는 깃발을 의미하고 당주는
군사령관을 뜻한다 즉 신라땅에 있는 군사령관이라는 뜻이다 <일본서기>고구려 주둔기사를 보면 신라에
주둔하던 고구려 군은 휴가 때 신라인을 말잡이로 삼아 고구려에 갔다는 것이다
17대 내물왕릉
주변의 적석목관분인 황남동고분군과 교동고분군에 비해 규모가 작다 뿐만 아니라 괴석이 아닌 할석으로
호석을 축조한 점과 호석에 받침석을 기댄 형식을 하고 있는 점은 무열왕이 조영되는 7세기 후반의 능묘에서
확인된다 따라서 적석목곽분이 축조된 경주분지 내에 위치하고 있지만 7세기 후반의 횡혈식석실분일 가능성이
높다 현재의 능은 조선 영조 1730년 이후 18세기에 삼국유사 왕력에 점성대 서남쪽에 있다는 기록에 의거하여
김씨 문중에서 지정한 것임이 1798년 <집경전구기도>에서 확인된다
능 앞에는 최근에 설치된 의자형 혼유석과 조선 왕릉 혼유석 형태의 상석이 있다
<고구려본기>에는 내물왕과 실성이 명확히 조카라고 표기되어 있다
내물왕은 392년 사촌인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다 그런데 내물왕이 세상을 떠나자 내물왕의 세 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들들이 어려서 화백회의에서 실성을 왕으로 추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401년
고구려에서 돌아온 실성이 402년 왕위에 오른다 고구려에 볼모로 가있던 실성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곳 유력자들과 접촉하면서 차기 왕권을 노렸을 것이고 고구려 또한 자신들의 말을 잘들을 듯한 실성을
왕으로 선택했을 가능성이 있다
실성이 왕위에 오른 후 내물왕의 셋째아들 미사흔을 왜와 화해하기 위해
왜에 볼모로 보내고 412년 둘째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를 보낸다 첫째 아들 눌지는 태자였으므로 보내지
못했다 그러나 내물왕의 장남인 눌지가 나이가 차고 점점 정치적으로 부상하자 실성왕은 고구려군을 동원하여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는 내물왕의 큰아들 눌지를 제거하려다 오히려 고구려군에게 피살된다 눌지를 내세워
실성을 죽이게 한 것 역시 고구려였고 눌지를 왕위에 올린 것도 역시 고구려였다 삼국사기에는 눌지가 스스로
실성을 죽이고 임금이 되었다고 하지만 삼국유시에는 고구려 군이 눌지를 임금으로 앉혔다고 되어있다
왕위에 오른 눌지왕이 왜국과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는 두 동생을 데려오기 위하여 박제상을 고구려에 보낸다
신라 박제상
박제상은 고구려로 들어가 왕을 설득하여 복호를 복호를 무사히 신라로 데려오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지 않고 다시 왜로 건너가서는 자신은 신라 따위를 버리고 왜인이 되기 위해서 왜에 오게 되었다고
왜왕을 거짓으로 속이고 나서 미사흔을 신라로 탈출시키는데 성공하지만 결국 발각되어 체포된다
왜왕이 후한 포상과 벼슬을 내리겠다고 회유하지만 나는 이미 계림(신라)의 개돼지로 있는 몸이니
너희 왜놈들 개노릇은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결국 화형을 당한다
대마도 사고(佐護) 미나토(湊) 마을에 있는 박재상 순국비ㅡ자료사진
(신라국사 박제상공(모마리질지)순국지비新羅國使朴堤上公(毛麻利叱智)殉國之碑)
경주 장사 벌지지
박제상이 떠날 때 그녀는 이를 듣고 쫓아갔으나 남편을 만나지 못했고 망덕사 정문의 남쪽 모래벌에서
아무렇게나 누워서 오래 울었다 그래서 그곳의 모랫벌을 '장사(長沙)'라고 이름지었다고 하며, 친척 두 사람이
부인을 부축하고 돌아오려고 했지만 얼마나 상심했는지 부인의 다리가 풀려서 앉은 채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 땅을 '벌지지(伐知旨)'라고 이름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훗날 부인은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며 남산 치술령에 올라 망부석으로 변했는데 치술령에는 지금도 이 망부석이 남아 있다고 한다
훗날 부인은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며 남산 치술령에 올라 망부석으로 변했는데 치술령에는 지금도 이 망부석이 남아 있다고 한다
신라충신 박제상 추모비
치산서원 ㅡ울산광역시기념물 제1호
홍살문을 지나면 외삼문인 삼강문(三綱門)을 만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745년(영조 21)에 영해박씨 주도로 신모사가 있던 두동면에 다시 건립하여 박제상과
그의 부인 및 두 딸을 제향하고 있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91년에
복원되었다. 현재 매년 3월 초 정일(丁日)에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망해문(望海門)
한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남편을 기다린 마음을 새겨 사당 들어가는 문은 ‘망해문(望海門)’이다
신모사
신라충신 박제상공 국대부인(김씨부인)신위와 영정
망부석(望夫石)과 은을암(隱乙巖)
박제상의 순국 소식을 들은 부인 김씨는 슬픔과 원한을 이기지 못하여 딸 셋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서
왜국를 보면서 통곡하며 남편을 따라 정절로써 죽으려 하자, 딸 셋 또한 따라 죽으려 함에, 둘째 딸
아영에게 이르기를 ‘너는 살아남아서 네 동생 문량(文良)을 양육하여 아버지의 후사를 잇게 하라.’하고
부인 자신과 두 명의 딸, 즉 큰 딸 아기, 막내 딸 아경은 함께 정절사 하였는데, 죽은 세 모녀의 시신은
곧 돌이 되어 망부석이 되었고, 그 넋은 새가 되어 망부석 남쪽 십 여리에 떨어져 있는 국수봉 바위틈으로
날아가 숨었다. 이에 후세 사람들이 새가 날아간 마을이름을 비조(飛鳥, 새가 날아감)라 하였고, 새가 숨은바위
를 은을암(,새가 숨은바위) 이라 하였다. 현재 두동면 만화리에는 비조(飛鳥)라는 마을이 있으며,
국수봉의 척과리 쪽 방향에 은을암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