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아유타국에서 허왕후와 장유화상이 돌배를 타고 가락국에 들어오는 모습
삼국유사』탑상편에 실려 있는 금관성 파사석탑 조의 기록을 따르면, 파사석탑은
서기 48년에 허황후가 인도 아유타국에서 김해에 가지고 들어왔기 때문에,
당시에 남방 불교의 전래가 있었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가야불교가 인도에서 바다를 통해 들어왔다는 주장을 인정한다면 불교가 중국에서 고구려로
전파됐다는 고대 문화사를 새로 써야 한다. 사안이 그 만큼 민감하기 때문에 아직까지 역사학계에서는
공론의 장에서 가야불교를 구체적으로 다룬 적이 없다
김해는 가야 연맹의 맹주였던 금관가야의 5백 년 수도였으나 긴 도읍기간에 비해 유적과 유물은
많이 남지 않은 편이다 김해지역에는 아직까지도 허황후가 가락국에 도착해서
수로왕과 혼인하기 위해 거쳐갔던 곳을 중심으로 전설과 얽힌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그러나 신라 중심의 역사의식으로 인해 우리는 가야란 나라의 참모습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한국사에 대한 역사왜곡은 일본·중국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이제까지 서슴없이 저질러 왔던 것이다
일본사 교과서나 참고서에서는 아직도 가야가 일본의 강한 영향력 아래 있던 것처럼 언급한다.
임진왜란을 겪고 일제의 억압을 받는 시련을 겪었으면서도, 아직 가야사가 한국 고대사에서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유감스럽게도 가야에 대한 기록은 현재 '삼국유사'의
'가락국기'가 유일하다.그 속에 수로왕의 탄생신화와 허황후와의 혼인 등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래서 이 기록에 남겨진 부산과 김해의 유적지를 따라 허황옥 일행이 기야에 도착해 육지에
오르기 위해 배를 댄 곳으로 전해 지는 옛 나루터인 '별포진(別浦津) 창원시 진해구 가주동
주포마을을 시작으로 ㅡ망산도(유주비각)- 흥국사-장유화상 부도가 남아있는 불모산 장유사 -
파사석탑을 싣고 바다를 무사히 건넌 것을 감사하기 위해 지었다는 해은사 ㅡ
장유화상이 지었다는 신어산 은하사 ㅡ수로왕릉- ㅡ수로왕비릉- 구지봉ㅡ
밀양 만어사ㅡ마지막 지리산 칠불사까지 그 길을 따라가 보았다
인간의 역사는 크게 두 가지 형태로 전승된다고 한다. 하나는 문헌이요, 또 하나는 구전이다.
. 그러나 고대의 역사는 반드시 문헌으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인간의 입과 머리를 빌려
구전이라는 형태로 전해지기도 한다. 이 두 가지 형태가 동시에 전해져 오는 곳이 바로 김해 가야다
가야의 역사는 경남 거창·산청·함양·의령·창녕·하동·함안·합천·고성, 경북의 고령·성주·달성 등 영남권
뿐만 아니라 전북 남원·장수,전남 광양·순천·구례 등17개 시·군은 에 뻗쳐있는 것으로 입증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가야는 한동안 잃어버린 역사였다.
가야 연맹은 고구려·백제·신라만큼이나 자신만의 독특한 문화를 일군 나라로 역사도 무려 500년
이상이나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 시대에《삼국사기》를 쓴 김부식과《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삼국과 가야연맹이 있던 시기에 그들은 가야 연맹이 신라에 흡수된 것만을 생각하여
가야의 역사를 무시하고 삼국의 역사만을 기록하였기에 우리 고대의 긴 역사 중
일부를 잃어버리게 되는것임을 잊어선 안될 것이다
창원시 진해구 가주동 주포마을
허황후가 처음 배에서 내린 도두촌을 주포촌 ㅡ별포진
이곳이 바로 허황옥 일행이 육지에 오르기 위해 배를 댄 곳으로 전해 지는 옛 나루터인
'별포진(別浦津)'이 있던 자리다. 주포(主浦 : 으뜸나루)는 임이 내린 갯가라 하여 지금도 임개로
불리고 있으며 수로왕과 허황옥 시절에는 이곳부터가 육지였다는 사실이다
주포 정자나무에서 바라본 전경ㅡ눈앞에 보이는 저 곳이 다 바다였다
김수로왕은 서기 42년 하늘에서 내려와 알에서 태어난다.김수로왕이 6년이 넘도록 혼자이자
혼인하라는 신하들의 청에 "하늘이 보내줄 것"이라고 한다 이 내용은 신라 혁거세와 알영 탄생에
6부촌의 촌장이 개입되는 정황과 비슷하다
허왕후가 인도에서 입고온 비단가사(바지)를 바치는 모습
그러면서 왕은 유천간(留天干)에게 망산도에 가서 기다리도록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 승점(乘岾)에
가도록 했다. 바다의 서남쪽 모퉁이부터 붉은색 돛을 달고 붉은색 깃발을 휘날리는 배가 와서 사람들이
땅으로 내려왔다. 왕은 궁궐 서남쪽 산기슭에 임시궁궐을 만들고 왕후를 기다렸다. 왕후는 별포나루에
배를 대고 높은 산 위에서 쉬면서 입고 있던 비단 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바쳤다. 종까지 헤아리면
20여 명이나 되었다. 왕은 왕후를 맞아 임시궁궐로 들어갔다. 왕후는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입니다.
성은 허이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부왕께서 상제의 명령이라며 가락국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했다.'(<삼국유사> 가락국기조)
주포다리
주포 정자나무에서 바라본 전경
눈앞에 보이는 저 곳이 다 바다였다
허왕후는 기원 189년 1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묻힐 때까지 왕의 곁에서
내조를 다했다.백성들은 왕후를 잊지 못하여 왕후가 처음 배에서 내린 나룻가의 마을을 주포촌(主浦村)
이라 했다≪삼국유사≫의 허왕후 관련 기록은 설화적 요소가 내포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고 후대의
불교적 윤색도 가해져 있기 때문에 해석상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런 기본적인 관념을
전제로 하고 이 이야기를 살펴 보아야할 것이다
주포 정자나무에서 바라본 전경
김해지역에는 아직까지도 허황후가 가락국에 도착해서 수로왕과 혼인하기 위해 거쳐갔던 곳을
중심으로 전설과 얽힌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망산도, 승점, 주포, 능현, 왕후사터 등이 그 곳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허왕후의 도래 시기인 기원 1세기경은 물론이고 ≪삼국유사≫가
쓰여질 당시인 고려시대의 지형은 지금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지질학적 연구에 의하면 지금의 김해시
중심부 남쪽은 예전에는 바다였다. 삼각주가 형성되고 평야지대로 변한 것은 근래의 상황이다
주포는 허왕후가 내리던 곳으로 '산외별포진두(山外別浦津頭)'라고 기록되어 있다. 수로왕이 서남쪽에
장막을 치고 있을 무렵에 내린 곳이다. 일단 주포는 입지조건으로서 망산도의 가시거리 내에 있어야
하고 배가 정박하기 쉬운 곳이어야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김해부와 진해의 경계지점에 주포가
있었다고 하고 현 지명에도 진해시 가주동 북쪽에 주포라는 곳이 있으나 이 지역으로 비정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 주포는 가락국의 주요 항구였을 것인데, 현 김해시 생곡의 장락 또는
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미음동에 비정하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