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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나눔방

망산도를 ㅡ아시나요ㅡ3

작성자고구려|작성시간24.08.26|조회수73 목록 댓글 2

김해는 쇠와 바다의 땅이다.

쇠가 많이 생산되는 김해를 기반으로 한 덕분에 금관가야가 한때의 강국으로 군림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쉽게 이해가 되지만 김해의 '김'과 금관가야의 '금'은 같은 글자이다, 김해평야 한복판에 위치한

 

금관가야의 김해가 어떻게 그 지명에 바다(해)를 거느렸으며, 무역강국 해상강국의 이름을 드높였을까

그래서 역사를 더 들여다보면 김해평야는 조선 후반 이후 서낙동강에서 올라오는 흙을 모아 사람들이

 

 만들어낸 인조평야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대동여지도'에도 김해는 바다에 닿아 있다.

실제로 김해평야는 일제 때 조성되었다

망산도와 유주암(부산시 기념물 제54호)

 

현재도 인도 공화국에 아요디아 왕족이 존재한다. 아요디아 라자의 궁전에 가면 허황옥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데, 라자도 허황옥이 자기 집안 사람이 분명할 거라고 믿는다. 이 라자 가문은 1999년에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의 초청으로 방한하여 김해 김씨 종친회와 공동으로 수로왕비릉을 참배한 적도

 

있었으며,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개막식에서 김수로왕과 허황옥 왕비의 만남을 주제로 한

 

퍼포먼스를 개최할 때도 마찬가지로 구경을 왔었다.인도 공화국에서는 한국-인도 관계의 상징적

 

인물로서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도 박근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당시 한국과의 인연을 강조하며 허황옥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이를 주제로 한 소설 <비단공주>가

 

인도 현지에서 출간되기도 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인도 공화국에도 한국의 가야 왕국에 공주를 보내어 혼인을 맺었다는

 

객관적인 자료가 없다는 사실이다

유주정

 

  維舟亭 : 밧줄 維,  배 舟,  머문 곳 亭,

 

 즉  배의 밧줄을 묶은(내린) 곳 이란 뜻이며, 후에 이곳에 정자를 세웠다

망산도와 유주정은 역사상 처음으로 국제 결혼 이야기가 서린 곳이다

 

아직도 신하들이 허왕후를 기다렸다는 망산도(望山島)와 배를 매었다는 유주암(維舟巖)이 남아 있고,

 

 근래에는 유주정(維舟亭)을 세워 그 옛날 김수로왕과 허왕후의 신비로운 만남을 증언하고 있다

부산광역시 강서구 송정동 산188번지 (망산도)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고려시대에 김수로왕과 허왕후를 기념하는 경주(競舟)놀이가 매년 7월에

 

열렸다'고 전한다. 백성 뿐 아니라 관리, 군졸이 모여 승점(乘岾·진해 용원 인근)에 장막을 설치하고

 

 술과 음식을 즐기고 떠들면서 허왕후가 먼 바닷길 여정을 거친 뒤 가야의 주포에 닿아 김수로왕을

 

만나러 가는 초야행을 따라한 것이었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고려 전역을 돌아다니며 지역의 내력을

 

 찾아가던 중 옛 가락국의 고도(古都)에서 허왕후 초야행 놀이를 목격한다. 그가 보고 들은 가야 후예들

 

의 축제와 이야기는 허왕후 일행이 인도에서 왔고, 그들이 한반도에 불교를 이식했다는 확신이 되기에

 

충분했다

망산도 비

 

허황옥이 김수로와 결혼하기 위해 먼 바닷길을 왔는데 그가 도착한 곳은 어디일까? 

 

옛날에는 망산도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 가운데에 있었으나 지금은 간척사업과 녹산공단

 

조성으로 육지와 거의 맞닿아 있다 이곳을 『심국유사』에 나오는 망산도로 보기에는 무리가

 

많은 듯 하다 무엇보다도 김해에서 많이 떨어져 있는 데다 근처에 산이 있어 「궁성 남쪽 섬에서

 

배를 보았다」『삼국유사』의 기록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망산도는 유천간이

 

배를 기다린 곳인데, 주석에서는 수도의 남쪽에 있는 섬이라고 한다

일찌기 조선시대의 김정호는

 

 ≪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된 전산도(前山島)로 추정했는데, 이곳은 현재 칠산(七山)이 위치한

 

곳으로. 당시 이 일대가 김해의 내해(內海)였었다는 지리적 상황으로 보아서 타당한 위치이다.

 

 한편 진해시 용원동에는 현재 망산도로 불리는 돌섬이 있고 또 인근에는 유주비각이 세워져 있어

 

이 곳을 망산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후대에 불리워진 듯하다

유주암

 

서기 48년 인도 아유타국에서 뱃길을 따라 '돌로 만든 배(石舟)'를 타고 왔다

 

 

이틀 밤과 반나절을 함께 보낸 수로왕과 허왕후는 타고 온 배의 사공 15명에게

 

각각 쌀 열 섬과 피륙 서른 필을 주어 본국으로 보냈다.

허황옥 일행을 내려 놓고 돌아가던 '돌로 만든 배'가 뒤집혔다는 바위가 '유주암'이다

수로왕이 시조인 김해김씨 족보와 <경상도지리지>에서 허왕후 출신지를 남천축국으로 기술하고 있는

 

 내용이 허왕후가 남인도 출신이라는 근거다. 허황후가 수로왕과 결혼 할 때 많은 물건을 가지고 왔는데

 

그 물건들이 중국 한나라의 화려한 사치품인  "한사장물로 중국 가계의 물건들이라는'얘기가 있었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을 봐서 이 지역이 김해로 통해서 중국의 선진문물이 들어오는 항구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주각(경상남도 기년물 제89호)

 

대가락국태조왕비문태보허씨유주지지(大駕洛國太祖王妃門太普許氏維舟之地)라 새긴 비석이 있으며

 

  1908년 김해 허씨 문중에서 수로왕비 허황옥의 일대기를 길이 후손에게 전하기  위해<삼국유사>의

 

 기록을 바탕으로 허황후가 이 곳으로 와 가락국의 왕비가 되었다는 내용을 명문으로 새겼다

 

매년 음력 3월 열닷새날 김해허씨(金海許氏) 종손들에 의해 제사가 올려진다

허왕후 역시 신라 석탈해나 수로왕과 마찬가지로 다른 곳에서 이주해온 세력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허황후와 수로왕 이 두 세력이 결합하는 과정들이 결혼설화로 재구성되지 않았는가 한다

 유주비에는 '대가락국태조왕비보주태후 허씨가 배를 맨 곳'이라 새겨져 있다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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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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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늘푸른소나무(권영숙) | 작성시간 24.08.27 감사히 잘 보고갑니다 ^^
  • 답댓글 작성자고구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8.27
    부족한 글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잃어버린 가야를 찾아서는

    전체 10부로

    오랜 시간 답사한 것을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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