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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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유사는 장유화상이 허황옥을 따라 가야로 온 뒤 최초로 창건한 사찰이라고 전해진다
성불한 수로왕 일곱 왕자의 어머니 허왕후를 '부처님의 어머니(佛母)'라 해서 불모산(佛母山)이 됐다
삼국유사에는 452년에 가락국 질지왕이 허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왕후사를 세웠고,
500년이 지난 뒤 왕후사 자리에 창건된 절이 장유사라고 기록하고 있다
장유사 측에서는 왕후사를 없애고 장사(莊舍)로 만들어 곡식을 거두어 저장하는 장소와
말과 소를 기르는 마구간으로 만들었으니 슬픈 일이다.고 했다
그러나 오늘날 유궁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현 김해 장유 신도시 명칭도 장유화상 이름에서 따왔다
장유사
장유사의 창건 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며
한국전쟁 이후 1980년대 초반까지는 양철지붕을 얹은 간이법당 몇 채에 스님들이 모여 수행해
'장유선원'으로 불리기도 했다. 당시 장유선원과 주변에는 옛 사찰의 존재를 증명하는 기단석이나
주춧돌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1980년대 부터 불사가 시작돼 현재 장유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대웅전
지금은 장유사에서 김해평야를 볼 수 있지만 2000년 전에는 김해평야 일대가 모두 바다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서 멀리 진해와 부산까지 볼 수 있었으리라고 추정된다
새로 지은 지 수십 년 밖에 되지 않아 장유사 경내에 들어서도 창건 유래 및 역사에 비해 감흥이 적다.
여러 차례 중건되면서 옛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수로왕과 허황후의 모든 설화와 유적들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주로 불교적 설화와 관계가
깊은 걸로 보아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 윤색됐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것이다
이 절 대웅전 아래쪽에는 장유 스님이 수행했다고 하는 토굴터가 남아있다.
이 토굴의 축대는 허황옥을 따라 가야에 온 아유타국 사람들이 쌓은 것이라 한다
장유화상
가락국사장유화상기적비(駕洛國師長遊和尙紀蹟碑)
장유화상과 일곱 왕자들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화상의 성은 허씨(許氏)이며
이름은 보옥으로 아유타국 왕자이다. 가락국 시조 수로왕 건국 7년에 보주태후(普州太后)
허씨 아유타국 공주가 부모의 분부를 받고 가야로 건너와서 수로왕의 배필이 되었는데 그때 잉신 등
수십명의 일행을 감호(監護)한 이가 화상이니 태후의 오빠다. 1812년 서림사(은하사)의
'취운루중수기'에는 허왕후 오빠로 기술됐다가 1915년 장유사의 '가락국사장유화상기적비'에는
허왕후의 남동생으로 기록됐다.
장유화상사리탑(문화재자료 31호)
팔각원당형이며, 방형의 지대석 위에 연화대석을 놓고 그 위에 탑신을 얹었다
탑의 형태는 조성 양식으로 보아 고려 말이나 조선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때 왜구들이 탑을 도굴해 부장품을 훔쳐갔으며 그 뒤 파손된 탑을 복원하였다
장유화상사리탑의 존재는 장유화상이 적어도 고려 시대부터 각인된 인물이라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현재 김해지역에 남아 있는 불교관계 유물로는 장유암의 "장유화상 사리탑".·"안곡리 삼층석탑 등의 불탑",
"김해 구산동 마애불"·"불암동 마애"불·"초선대 마애불"·"진영 봉화산 마애불"·"장유 유하리 마애불 "등의
불상이 있는데 이들은 가야 당시에 제작된 것이 아니라 모두 고려시대 이후의 유물이다.
<남기는 글>
장유의 지명, 산 이름, 사찰 이름은 허왕후의 오빠인 장유화상에서 유래됐다
그런데 문제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는 허왕후의 추종 신하들의 이름과 그 아내의 이름,
그리고 따라온 노비 수까지도 상세히 기록해 놓고 있지만 장유화상이 허왕후와 함께 왔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장유화상은 고려 말이나 조선 전기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없다.
그의 이름은 우리가 장유사 전에 다녀온 1708년 명월사 승려 증원이 찬술한 '명월사 사적비'에
처음 나온다. 이후 '은하사 취운루 중수기' 등 조선 후기 기록에 본격적으로 언급된다
그러나 이 문헌은 문헌으로서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조잡한 기록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인제대 이영식(역사학과) 교수, 합천박물관 조원영 관장 등
가야사 전공자들은 '장유화상이 조선 후기 민중들과 사찰에 의해 만들어진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그래서 허황후의 오빠인 장유화상의 존재에 대해서는 설화로만 전해져 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