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범어사의 말사이다
장유화상이 이곳에 온 것을 기념해 지었는데 당시 이름은 서쪽 인도에서 왔다는 뜻에서
서림사(西林寺)지었으며, 동쪽에 동림사(東林寺)를 지어 구야국의 번영을 기원했다고 한다.
은하사에 관한 문헌기록은 '조선사찰사료 상권에 있는 활천면 서림사조가 유일하다
이 기록에는 42년에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에 의해 창건되었다. .창건 이후 임진왜란 때
절이 전소되었다가 인조(1644년)에 중건되면서 절 이름을 서림사(西林寺)라 하고 하였다
신어산의 옛 이름이 은하산인 것으로 전해진다. 사찰의 창건연대는 불분명하다 사찰에서 출토된
토기 파편을 토대로 삼국 시대에 창건된 절인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조선 중기 이전까지 있던
건물은 동림사와 함께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조선 후기의 양식이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은하사란 이름은 약 200년 전 이 절을 중수하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허왕후의 불교 전래설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
한국 고대사회에서 불교가 수용되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초기국가의
왕들은 하늘의 자손이라는 설화를 형성하였고 무속신앙은 왕의 권력을 유지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새로이 권력을 장악한 지배집단은 강력한 왕권을 형성하여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를 갖추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부족적인 성격을 지닌 무속신앙을 대체하여 왕권을 지지해 줄 새로운 사상체계가
필요하게 되었고, 그 결과 새로운 종교인 불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불교가 공인될 무렵에
각 국가마다 율령(律令)이 반포되었다는 점은 불교라는 사상적 뒷받침을 받아 정치적으로도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공고히 하겠다는 왕권의 의지로 볼 수 있다.
삼국의 불교 수용은 우리의 역사자료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통하여 대체적인 사정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가야의 경우는 삼국처럼 불교가 공식적으로 수용되었다는 기록이 없다.
물론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가락국의 불교 관련 기록이 보이지만 기록대로라면 기원 1세기 중반
에 해당하는데, 이 시기는 가야가 이제 막 국가를 형성하던 단계였으므로 불교를 수용할 만큼 사회적
여건이 성숙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수로왕 당시 허왕후가 가야에 오면서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점은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
허왕후 이야기는 지나치게 불교적으로 윤색되어 있다. 이것은 현재까지 전해오는 대다수의 역사자료와
마찬가지로 「가락국기」가 전해주는 역사적 사실은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많은 내용이 추가되기도
하고 삭제되기도 하여 허왕후 당시의 내용과는 상당한 차이를 지닌 채 『삼국유사』에 수록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락국기」는 가야의 국가 이름과 불교와의 연관성에 대한 증거자료로서는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가야의 국명과 불교경전을 연관짓는 견해 또한 문제가 있다. 증거가 되는 경전들이 모두
한문경전이라는 점이다. 만약 한문경전에서 그 국명을 따왔다면 가야 불교가 인도에서 바로 건너왔다는
것과 모순된다. 또 관련된 불교경전이 한역된 시기가 「가락국기」에 나오는 불교 전래 연대보다 훨씬
후대라는 사실도 문제점으로 지적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법화경』의 경우 406년에 한역되었다.
이러한 주장에 가야불교 주창자들은 삼국유사를 쓴 일연스님은 "신라는 자기정체성과 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면서 가야의 흔적을 지웠다. 신라가 가야를 합병하면서 가락의 역사는 완전히 파괴돼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가야사와 가야불교사는 단지 과거의 이야기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고 반박한다
신어산( 630m)은 김해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는 금관가야의 지킴이산이었다.
김해 고을의 진산인 분성산(327m)은 신어산에서 맥이 뻗는다
삼성각 ㅡ장유화상 진영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장유화상이 허왕후와 함께 왔다는 기록이 없으나
은하사 '취운루 중수기(翠雲樓 重修記)'에 내용이 적혀 있다.
서림사(지금의 은하사) 대웅전 취운루중수기 현판(1812)에 의하면 허왕후와 장유화상이 인도로부터
건너온 뒤에 수로왕의 명으로 명월사 등과 함께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수로왕 (42년)은
아닐지라도 수로왕대에 창사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취운루중수기 현판보다 앞서 중종(1530)에
증보 간행된『신증동국여지승람』의 김해 불우(佛宇) 및 고적(古跡)조에는 감로사, 금강사, 명월사,
왕후사 등의 절 이름은 보이지만 서림사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중종대까지도 서림사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대웅전(도 지정 유형문화재 238호)
은하사 대웅전 본존불이 관음보살이라는 점도 은하사와 인도와의 관계를 짐작하게 한다.
관음신상은 인도로부터 한반도에 직수입된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정설이기 때문이다
법당 내부에 그려진 물고기
장유화상이 불교 유입을 기념해 신어산에 지었다는 은하사 대웅전 수미단에는 허왕후와 관련 있는
것으로 전해지는 쌍어문이 있다 쌍어 문양은 허황옥의 출신지로 기록된 아유타가 인도의 한
왕국이라는 가설에서 종종 인용된다. 은하사가 위치한 신어산의 이름도 '신의 물고기'라는 뜻이다
대웅전 동편 벽 뒤에 걸린 판문에는 허황후의 오빠인 장유화상이 아유타국에서
그녀와 함께 왔다는 글이 실려 있다
<남기는 글>
장유화상은 인근 굴암산 기슭 장유사도 창건했는데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불교가 전래됐다는
남방불교전래설을 입증하는 사찰로 회자된다 그러나 신어 외에는 다른 흔적을 찾을 수 없음이 아쉽다
[수로신화]는 고려 제11대 문종 때에 김해지방의 관리를 지낸 문인이 남긴 글을 일연이 '삼국유사'에
옮겨 실었다고 한다 거듭 밝히는 것은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허황후 관련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지만 하황후에게 장유화상이라는 오빠가 있다는 이야기는 <삼국유사> 그 어떠한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말 그대로 장유화상은 "토끼의 뿔이요 거북이의 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