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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은사ㅡ신비의 가야왕국 , 그 흔적을 찾아서ㅡ7

작성자고구려|작성시간24.09.04|조회수47 목록 댓글 0

김해 분산성이 있기에 임진왜란 때에는 이곳에 승병이 주둔 하였다고 전한다.

창건설화에 의하면 .해은사는 수로왕과  수로왕비(허황옥) 그의 오빠 장유화상이 

 

   무사히 항해할 수 있도록 풍랑을 막아준 용왕님께 감사하다는 뜻에서 창건되었다.

 

그러나 창건 이후 조선시대까지의 연혁은 전하는 바가 없어 전혀 알 수 없다.

장유화상

김해에는 수로왕 뿐 아니라 허 황후, 그리고 허 황후와 함께 인도에서 서기 48년에 한반도로

 

건너왔다는 그의 오빠 장유화상, 불교와 차(茶)의 전래 등에 관한 유적지가 많이 남아 있다.

 

『삼국유사』(탑상편 금관성 파사석탑조)에는 허황옥이 바다를 건너다 풍랑에 되돌아오니

 

인도의 부왕(父王)이 파사석탑을 실어 보내 무사히 가락국(김해)에 도착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파사석탑을 싣고 바다를 무사히 건넌 것을 감사하기 위해 지었다는 해은사,

김해시에는 가락국의 시조인 수로왕ㆍ허황후 설화와 관련된 곳이 많이 있으며, 수많은 사찰이

 

 남방불교 전래설에 입각하여 그 창건을 얘기하고 있다. 해은사 또한 그런 사찰들 중 하나이다.

가야 불교 전래의 부정적인 견해

 

삼국시대 불교 수용의 양상을 보면 고구려의 경우 불교 전래 후 곧 초문사와 이불란사를 창건하여

 

순도와 아도를 머물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의 경우에도 불교 수용 후 얼마 되지 않아 많은

 

 사찰이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신라도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를 창건하는 시점에 불교 공인이

 

 이루어진다.삼국에 불교가 수용되는 시기에는 이처럼 국가적인 지원에 힘입어 그들이 가지고 온

 

 불상과 경문(經文)을 봉안하기 위해 사찰이 창건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불교 수용 초기의 일반적인

 

 양상이었다. 그런데 가야의 경우 수로왕대와 허황옥 도래 이후 바로 사찰이 창건되지 않았고

 

제8대 질지왕(452)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왕후사라는 절이  세워지고  본격적으로 불교가 수용된다

 

 이 시기는 신라에 불교가 수용되는 시기와도 큰 차이가 없다. 불교가 도입되는 계기는 4세기 말

 

고구려에 대응하기 위해 백제와 가까워지던 시기에 백제로부터 도입되었을 가능성, 4세기 말

 

고구려 광개토왕군의 남정(南征) 무렵 고구려로부터 전래되었을 가능성 등을 고려해 볼 수 있다

가야 불교 전래의 긍정적인 견해

 

<삼국유사》나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 같은 기록에는 허황옥이 도래하기 이전에 불교가

 

 이미 전래됐음을 보여주는 기사나 설화가 전한다. 김수로왕이 수도를 정하면서 “이 땅은 16나한이

 

 살 만한 곳”〔《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이라고 했다거나, 만어산 독룡의 횡포를 막기

 

 위해 부처님을 청해 설법을 들었다〔《삼국유사》 ‘어산불영(魚山佛影)’〕  기록들이 그것이다

왕전

 

수로왕을 의미하는 대왕전

인도 아유타국 에서 허왕후와 장유화상이 돌배를 타고

 

가락국에 들어오는 모습의 대왕각 내의 벽화

왕전

 

 대왕전 안에 수로왕과 수로왕비(허황옥)의 영정이 봉안되어있다.

 

해은사가 분산성 안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전란 등으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복원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수로왕과 허황후의 진영(眞影)이 조선후기의 작품이므로 이로써 조선시대 역사의 한 부분을

 

 짐작해 볼뿐이다.임진왜란 때에는 이곳에 승병이 주둔 하였다고 전한다

허왕후가 인도에서 입고온 비단가사(바지)를 바치는 모습의 대왕각 내의 벽화

 

수로왕비(허황옥)가 인도에서 가져 왔다는 봉돌이 각각 놓여져 있다.

 

이 돌은 신비한 영험이 있어 소원을 이루어주는 돌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영산전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조와 금관성파사석탑조에 의하면, 허황옥이

 

바다를 건너와 수로왕과 결혼하는 과정에 대한 기록을 살펴볼 수 있다. 창건 이후 조선시대까지의

 

 연혁은 전하는 바가 없어 전혀 알 수 없다. 다. 이후 일제강점기와 6.25를 거치면서 쇠퇴해졌던

 

가람은 1982년에 영산전 중건을 기점으로 여러 법당을 중건ㆍ보수하였다,

산신각

1997년에는 허황후가 배에 실어 왔다는 파사석탑을 재현하였다.

<남기는 글>

 

장유사 .은하사 . 해은사 답사에서 가장 난처한 갓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장유화상이 허왕후와 함께 왔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장유화상은 그의 이름은 1708년 명월사 승려 증원이 찬술한 '명월사 사적비'에 처음 나온다

 

이후'은하사 취운루 중수기' 등 조선 후기 기록에 본격적으로 언급된다

 

그러나 이 문헌은 문헌으로서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조잡한

 

 기록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인제대 이영식(역사학과) 교수, 합천박물관 조원영 관장 등

 

가야사 전공자들은 '장유화상이 조선 후기 민중들과 사찰에 의해 만들어진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허황후의 오빠인 장유화상의 존재에 대해서는 설화로만 전해져 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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