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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는 향기롭다ㅡ(김수로/허황후왕릉)ㅡ8

작성자고구려|작성시간24.09.06|조회수42 목록 댓글 0

 구지봉

 

김수로왕의 건국신화 시작점이 바로 이곳이다

 구지가(龜旨歌)

 

구하구하(龜何龜何)

 

수기현야(首其現也)

 

약불현야(若不現也)

 

번작이끽야(燔灼而喫也)’.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만약에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

천강육란석조상(天降六卵石造像)

 

 백성들의 이 같은 합창에 하늘에서 6개의 황금알이 내려왔고, 그중 제일 큰 알이 금관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이 됐다는 것이다. 삼국유사 등 옛 문헌에서 전하는 김수로왕의 탄생 설화다

 

수로왕은 구지봉 남쪽에 왕궁을 짓고 157년간 금관가야를 다스렸다

 

나머지 다섯아이도 각각 다섯나라의 왕이 되었다

<자료사진>

 

여기서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외부에서 선진 문물을 가지고 온 외부세력과 토착집단과

 

결합해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표현한 것이라 추정한다

숭화문

 

 가야에 속한 국가들은 금관가야.대가야.소가야.아라가야.성산가야.고령가야이다

 

이 중에 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금관가야와 이진아시를 시조로 하는 대가야가

 

가장 강한 맹주국이 되었다 그러나 신라와 백제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서 강한 통치정부를

 

 세우지 못하고 신라 진흥왕 562년에 신라장수 이사부와 사다함에 의해 정복 당하였다

하마비

 홍살문

 

경의를 표하라는 뜻이며 신성 구역을 나타나는 상징이다.

 

[수로신화]는 고려 제11대 문종 때에 김해지방의 관리를 지낸 문인이 남긴 글을

 

일연이 '삼국유사'에 옮겨 실었다고 한다

 가락루

 성생대

 

가락국 시조대왕과 왕비의 춘추대제때

 

진설할 시생(돼지) 의식을 진행하는 곳이다.

 

납릉 정문 앞에 위치해 있으며 이 의례를 생성례(牲省禮)라하는데

 

제례 하루전인 음력3월 14일과 9월 14일에 숭선전 참봉주관하에 진행한다

포덕문

숭신각

 

가락국 태조왕릉 중건신도비명

 

가락사와 숭선전사가 기록된 비

'가락국 태조왕 승선전 납릉후릉 중수비와 가락국 태조왕릉 중수기적비/ 중건신도비명

김해 수로왕릉 ㅡ납릉심문(납릉은 수로왕릉의 별칭이다)

 

 금관가야의 시조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은 42년부터 199년까지 ‘무려 157년’을 재위했다는

 

것이 삼국유사가 전하는 기록이다. 무덤이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각종 기록을 보면

 

고려 문종대까지는 비교적 능 보존상태가 좋았으나, 조선 초기에 많이 황폐했던 듯하다.  무덤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선조(1580) 수로왕의 후손인 허수가 수로왕비릉과 더불어 크게

 

 정비작업을 마친 이후다. 지봉유설 기록에 따른다면 임진왜란 때 일본인들에 의해 능이 도굴을

 

당했는데 당시에 왕이 죽으면 주위에서 함께 생활하던 사람들을 같이 묻는 순장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쌍어문양

 

<삼국유사>에서는 가야, 가락이 물고기 '어(魚)'를 뜻한다고 했다.

 

, 허황옥이 왔다고 전하는 인도의 아유타 태국의 아유타, 중국 양자강 유역의

 

'보주(普州: 지금의 사천성 안악현: 허 황후는 보주태후로 기록되어 있는데,이곳엔 지금도 허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고 한다)'이곳에서도 두 마리의 물고기 무늬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김수로왕비 허황옥 쌍어의 비밀>의 저자이자 인류학자 김병모선생은 언어학자

 

강길운교수의 "가야어와 드라비다어의 비교 "라는 논문에서 '가락(Karak)'은 옛 드라비다어로

 

물고기를 뜻하는 것이고, '가야(Kaya)'는 지금의 드라비다어로 물고기라는 뜻이라고 한다

허황옥이 죽은 후 수로왕은 199년  158세로 세상을 떠난다

 

나라에서는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며 1월 3일과 7일, 5월 5일 단오, 8월 5일과 15일 추석에 제사를

 

지내는데 마지막 9대 왕 구형왕까지 한 번도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신라 문무왕은 자신의 어머니

 

 문명왕후가 김유신의 누이동생으로 가야계인 것을 들어 수로왕을 15대 선조라 천명한 후

 

제사를 지내도록 한다

 사적 제73호 수로왕릉

 

그렇다면 허황옥은 왜 인도인이 되었고 쌍어문양처럼 신성시되었을까

 

, 박혁거세, 고주몽, 해모수 등 고대 국가의 개국에는 전설이 다 있다. 가야의 경우에는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먹으리" 라는 노래로 대표되는 건국 신화가

 

 있다. 허황옥의 경우도 이런 건국 신화처럼 후대에 각색하고 신성시한 거라고 볼 수 있다.

 

서울대 의대 서정선 교수 등이 허황후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김해 옛고분의 왕족 유골 DNA를 분석한

 

 결과 유골의 주인공이 인도의 남방계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고 한다.

허황후의 인도 도래설이 한층 힘을 얻게 된 셈이다

하지만 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일부 학계에서는  

 

허왕후가 수로왕과의 혼인을 위하여 인도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기는 힘들다

 

 허왕후 역시 탈해나 수로왕과 마찬가지로 다른 곳에서 이주해온 세력으로  아마도 이 두 세력이

 

 결합하는 과정들이 결혼설화로 재구성되지 않았는가 한다.즉 북방 유목민족 출신의 김수로 집단과

 

남방 인도 출신의 허황옥 집단이 현지 토착세력과 힘을 합해 가야라는 나라를 운영한 것이다

 

애초에 가야사와 관련된 기록이 극소수일 뿐더러, 그나마도 부실하고 유적 발굴에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계에서는 기록 그대로 인도에서 왔을 것이라는 학설, 본래 토착민인 허황옥을

 

불교적으로 윤색하고 신성성을 부여시킨 것이라는 설과 인도 혈통의 중국인이 다시 한국으로

 

건너온 것이라는 절충설 등이 있다

수로왕은 알 중에서 맨 처음 나왔다 하여 “수로” 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는

 

 199년에 158세로 수로왕이 붕어하자 대궐 동북쪽 평지에 높이 일장(一丈)의 빈궁(賓宮)을 짓고,

 

 장사를 지낸 후 주위 300보를 수로왕묘(首露王廟)라 하였다고 전한다

왕릉의 축조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여러 번 수축한 기록이 있다

 

가락국기가 기록된 때인 고려 문종 1076년 당시 왕릉은 허물어지지 않았고

 

그때 심었던 나무도 시들어 죽지 않았다 그 후 황폐해진 왕릉을 세종 1439년과 1446년

 

왕릉 수호지역으로 정하고 표석을 세웠다

숭정각

 

수로왕과 허황후의 영정을 모신곳

<자료사진>

숭선전

 

숭선전은 가락국 시조인 수로왕과 허왕후의 위패를 모신 전각이다

 

숭선전은 1889년 고종 때 김해부사였던 허전이 '수로왕과 허왕후의 신위를 모시는 재실당호를

 

숭선전으로 정해 달라'고 고종에게 진언을 올린 뒤 만들어졌다.

 

숭선전 대제는 춘추향 2회로  제10대 구형왕(532)까지 334년 동안 모시고 있었다고 한다. 

 

  신라에 합병된 이후에도 제향은 계속되었는데 신라 30대, 문무왕 즉위년(661)에는

 

 제금을 내려 종묘제례로 계속 시키게 했다

<자료사진>

 

오늘날 가야는 역사속으로  사라졌지만  김수로왕릉만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있을 뿐 아니라

 

가야가 신라에 의해  망하고도 끊이지 않고 수로왕릉에 제례를  지낼 수  있었던 까닭은

 

신라 30대 문무왕 자신의 외가이며 15대 시조가 되기에 김수로왕릉을 종묘와 함께 제사를 지내게

 

하였기 때문이다

안향각

 

춘추대제전에 예조에서 보내온 향(香)과 축(祝)을 봉안하는곳

 숭안전

 

1990년에 신축한 숭안전이 있다. 금관가야에는 왕이 총 10명 있었다고 한다. 수로왕릉과 허왕후릉은

 

 온전히 남아 있지만, 2대 도왕부터 9대 숙왕까지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숭안전은 이런 왕과 왕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숭모제

 전사청

 

제수와 제기를 보관하고 있는 곳

서원청

 

춘추대제시 사용하는 제기를 보관하는 곳

 허황옥은 아유타국 출신으로 수로왕 7년 16세의 나이로  48년 배를 타고 가락국에 도착하여

 

김수로왕과 결혼한 여인이다. 그들은 12남매를 낳았고, 오늘날 6백여 만명이나 되는 한국 최대의

 

 성씨인 김해 김씨를 이루었다. 또한 허황옥의 성을 따른 두 아들의 자손은 김해 허씨의 조상이 되었다.

 

 따라서 2천년이 지난 오늘 날에도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가 서로 결혼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허황후는 189년 157세에 세상을 하직하였다.사람들은 서거한 허황옥을 수로왕이 처음 나타난

 

 구지가의 무대 구지봉에 장사지낸다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릉

 

허황후가 정말 인도에서 왔을까 하는 의문에 대해서

 

 아유타국은 인도에 실제 있었던 나라이다. 현장 스님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따르면

 

아유타국은 주위가 5000여 리, 대도성(수도)의 둘레가 20여 리나 되는 나라였다. 농작물이 풍성하고

 

 화초가 무성하여 매우 살기 좋은 곳으로 사람들은 복 짓기를 좋아하고 학예에 힘썼다고 한다.

 

이 나라에는 100여 곳의 가람과 3000여 명의 승려가 있었는데, 대·소승불교를 함께 배웠다고 한다.

 

 아유타국은 《승만경>의 중심무대로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 같은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허황옥이 인도에서 가야로 왔음을 인정한다면 그에 의해 불교가 전래됐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릉

 

허왕후의 출신지인 아유타국의 또 다른 설의 제기는

 

허황옥의 고향은 인도 갠지스강 중류의 아유타국이란 게 일반적인 인식이다.

 

쌍어문양은 현재 인도 아요디야 주 정부의 문양이라고 한다

 

이 신어 사상이 허황옥을 통해 가락국에 전파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2,000년 전에 허황옥 일행을 태운 중형 선박이 머나먼 바닷길을 항해해 수개월, 또는 몇 년을

 

 걸려 인도양을 돌아 동중국해를 거쳐 김해 해변에 도착할 수 있을 만큼 인도인들이 뛰어난 항해술을

 

 가졌다고 믿기 어렵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그래서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이

 

보주태후(普州太后) 에서 보주는 어디인가 인도 아요디아와 가락국의 중간지점이 보주이다

 

즉  중국  주나라에서 송나라까지 존속했던 사천성의 안약현 지명이라는 설이 있다

 

보주 허씨 인구는 15만명이며  씨족끼리 사당을 짓고 살고 있는데 그 사당에

 

가락국 쌍어문양이 걸려있다  당시 인도 아유타국이 멸망해 유민들이 중국 사천성 쪽으로 흘러들어

 

 갔는데 일부는 사천성에 남고  나머지 일족은 살 곳을 찾아 가야로 넘어왔다는 학설도 있다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릉

 

허왕옥이 157세에 돌아가시면서 유언하기를 내가 죽으면 김해 북쪽 높은 곳

 

언덕에 능을 조성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파사각

 

《삼국유사>‘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 조에 따르면

 

아유타국의 공주였던 허황옥은 부왕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향해 가려했지만

 

수신(水神)의 노여움을 사 가지 못했다고 한다. 허황옥은 다시 부왕의 명에 따라 파사석탑을 싣고 길을

 

떠났는데, 그제서야 순조롭게 바다를 건너 금관국의 남쪽 바닷가에 정박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기록될 당시까지 파사석탑은 온전하게 남아있었던 듯 일연 스님은 “탑은 사면 5층으로

 

그 조각이 매우 기묘하며, 돌에는 옅은 무늬가 있고 그 질이 좋다. 그러나 우리나라 것이 아니다”라고

 

 기록했다

파사석탑(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27호)

 

이 석탑은.원래 호계사에 있었는데 폐사된 후, 김해부사로 있던 정현석이 현재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파사석탑 설화의 성립 시기는  고려 초기, 또는 중기였을 것이다

 

이 돌은 국내에는 없으며  <신농본초>에 닭벼슬 피를 떨구면 굳지 않는다고 하며  파도를

 

진정시켜준다는 신령스런 탑으로 일명 진풍탑으로 불린다 파사석탑의 현재 모습은 네모난 모습의

 

돌들이 포개져 있고, 돌의 재질도 화강암이 아니라 매우 무른 특이한 종류여서, 일반적인 한국 석탑의

 

 계보를 따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실제로  인도에서 직접 전래되었는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고려시대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통해 가야불교에 얽힌 이야기를 역사의 기록에 남긴 후

 

724년이 지났지만 가야불교는 여전히 온전하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역사적 가치는

 

 인정하지만, 가야불교가 등장하는 '가락국기', '파사석탑조' 등은 신빙성이 낮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아직도 허황후가 정확히 어디에서 태어나 어디에 와서 왕후가 되었는지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파사석탑에 대해 "문헌과 고고학 자료에 따르는 한, 파사석탑을 허황옥의 도래에 직접 연결하기는

 

쉽지 않다. 남쪽 바닷길을 거쳐 가야에 전해지던 선진문물의 한 갈래로 해석하는 것이 좋다"며

 

학자들은 인도와 관련성이 희박하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아직 가야불교 관련 유물, 유적 가운데

 

가야시대로 추정되는 국가지정 문화재가 드문 현실도 이러한 입장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가야불교 2000년, 그 믿음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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