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동란 후 폐허가 된 칠불사
굴뚝만 덩그러니 남아있고 뒤로는 통광스님의 토굴이 보인다
칠불사는 1948년 여순반란군토벌 때 불에 타버려 그 터만 함석으로 덮어 구들만
보호해 오다가 1982년 복원되어 지금은 스님들의 선방으로 쓰이고 있다
일주문
고대 한반도의 남동지역을 차지했던 가야는 6세기 중엽 신라에 병합된 이후 흔적이 멸실되어 오랫동안
신비의 왕국으로 남아 왔다. 기원후 42년의 비교적 후대의 시기인데도 신화적인 요소가 강한 김수로왕
탄강설화, 인도에서 온 허왕후, 150세 이상을 산 두 사람의 나이, 지리산에서 성불했다는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5세기 이후 홀연히 사라진 왕릉급 무덤 등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많다.
중국 문헌이나 고고학적으로 볼 때 김수로왕 등 가야의 지배층은 신라의 김씨 왕족과 마찬가지로
북방에서 내려온 기마민족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한반도에 처음으로 불교가 들어온 것은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때로 공인되어 있으니 가야의 불교는 그보다 3백 년이나 앞선다는 말이 된다.
이를 부정할 수도, 긍정할 수도 없어 앞으로 더 많은 고증과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초의선사
초의선사 다신탑비
신라 흥덕왕(828)에 사신으로 당나라에 간 대렴공이 차 종자를 가져와 왕명으로 지리산 화개동에
처음으로 심었다. 조선 순조(1828)에 초의선사가 차의 시배지인 화개동에 위치한 이 곳 칠불사
아자방에서 참선하는 여가에 청나라 모환문이 지은 『만보전서의 ㅡ다경채요에서
다신전(茶神傳)을 초록하였다. 이 다신전을 기초로 하여 후일에 동다송을 저술하였다
화개동이 다도의 성지임을 기리기 위해 칠불사 경내에 다신탑비(茶神塔碑)를 세웠다
영지
칠불사의 영지는 칠왕자의 그림자가 나타났다는 연못이다. 수로왕 부부가 출가한 일곱 왕자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와서 왕자를 보려 하자 장유화상은 “왕자들은 이미 출가하여 수도하는 몸이라 결코
상면할 수 없으니 꼭 보고 싶으면 절 밑에 연못을 만들어 물 속을 보면 왕자들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장유화상의 말에 따라 김수로왕 부부는 연못을 만들어 놓고 그 연못을 보니
수도한지 2년 만에 모두 성불하여 일곱 아들이 공중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뚜렷이 나타났다.
그로 인하여 이 연못을 영지(影池)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신라 경덕왕 때 옥보고가 이곳 운상원에 들어와 50년 동안 거문고를 연구하여
왕산악 금법을 정리 신곡 30곡을 지어 속명득에게 전했다.
칠불사가 처음 창건된 시기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수로왕은 서기 42년에 화생하였으며, 남해바다를 통해 가락국에
온 인도 황하 상류의 태양왕조인 아유다국 허황옥 공주를 왕비로 맞아 10남 2녀를 두었다.
그 중 장남은 왕위를 계승하였고, 둘째와 셋째 왕자는 어머니의 성을 이어 받아 김해 허씨(許氏)의
시조가 되었으며, 그 나머지 일곱 왕자는 외숙인 장유화상을 따라 출가하였다. 그들은 장유화상의
가르침을 받으며 이곳 지리산 반야봉 아래에 운상원을 짓고 정진한지 2년 만에
모두 성불하였다고 하여 칠불사라 하였다
장유화상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허황후 관련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지만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장유화상이 허왕후와 함께 왔다는 기록이 없다
가야사 전공자들은 '장유화상이 조선 후기 민중들과 사찰에 의해 만들어진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그래서 허황후의 오빠인 장유화상의 존재에 대해서는 설화로만 전해져 올 뿐이다
대웅전
김수로왕의 칠왕자가 성불한 칠불 목탱화와 조성하여 모셨다
보설루
보설루는 많은 대중을 모아 놓고 설법하는 누각이다
원음각
이곳에서는 조선 시대의 서산대사, 부휴대사, 초의선사 등의 큰스님들이 안거했다
문수전
아자방에 문수보살이 화현하여 스님들이 발심정진케 한 이야기가 여러 가지 전해 오는데,
조선 중엽 어느 해 동안거 결제를 하려고 하는데 어린 사미승이 걸망을 지고 조실스님을 찾아와
아자방에 방부를 들여 달라고 부탁을 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조실스님은 더 커서 오면 방부를
받아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 사미승이 “부처님 말씀에 생사가 호흡하는 사이에 있다고 하셨는데
, 어찌 클 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했다. 조실스님은 기특하게 여겨 방부를 받아 주었다
아자방에서 참선하는 대중들이 한방중이 되어 마구 졸면 그 사미승은 소리를 내고, 땅을 치며
“생사의 괴로움이 아니라면 왜 자고 싶은 잠도 못자고, 먹고 싶은 밥도 제대로 못먹고, 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하는가”라고 했다. 그러면 졸던 스님들이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정진하였다. 해제날 조실스님의 해제 법문이 끝나자 그 사미가 대중 앞에 나와 세 번 절을 하고
“ 온데간데 없었다. 그때야 비로소 대중 스님네들은 그 사미는 문수보살이 화현하여 나타나신 줄
알고서 더욱 발심정진 하였고 한다
설선당
설선당
설선당은 강설도 하고 참선도 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아자방
아자방 (경남유형문화재 제144호)ㅡ자료사진
사찰내 벽의 사진
아자방은 스님들이 참선 수행하는 선방이다
. 아자방은 신라 효공왕 때 구들도사라 불렀다는 담공선사가 축조한 선원으로, 방이
버금 아(亞)자 모양이다. 축조 당시에는 일곱 짐이나 되는 나무를 세 개의 아궁이에 넣어 한꺼번에
때도 화도(火道)가 막히지 않고 높고 낮은 곳이 100일간 고루 따뜻했으므로 신비한 온돌방이라 하여
세계 건축사에 기록되어있으며 중국 당나라에까지 알려 졌으니 가히 국보급의 문화재이다
사찰내 벽의 사진
이 아자방에서 참선공부 할 때는
장좌불와(長坐不臥) ㅡ 늘 앉아만 있고 눕지 않는 것
일종식(一種食)ㅡ 하루 巳時에 한 끼만 먹는 것
묵언(默言)ㅡ말하지 않는 것의 세 가지 규칙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규칙을 지키면서 수행하였기에 이 아자방에서 수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다
아자방 (경남유형문화재 제144호)
신라 말의 고승 도선국사가 저술한 『옥룡자결』을 보면 "하동 땅에서 북쪽으로 1백리 가면
와우형의 명지가 있는데 이곳에서 집을 지으면 부(富)는 중국의 석숭 못지 않고
백자천손(百子千孫)이 번창할 것이며 기도처로 삼으면 무수인(無數人)이 득도할 것"이란 내용을
접할 수 있는데 예로부터 이르기를 음택(묘자리)으로는 강원도 오대산 적멸보궁이 으뜸이고
양택(집터)으로는 지리산 칠불암이 제일이라 한다
아자방 ㅡ사찰내 벽의 사진
2017년 답사 당시 아자방은 보수중이었다
아자방 구들은 1982년 구들장인 김용달 옹이 복원했는데 '아자방의 원리를 알 수 없어 일반 형태로
놓았다'고 하는데 본래의 온돌과는 다른 일반 구들로 놓아 원래의 온기는 유지되지 않고
한번 불을 때면 봄ㆍ가을에는 3~4일 정도 온기가 유지될 뿐이라고 한다
가야 우륵
『삼국사기』권32 악지에 전하는 우륵이 지은 12곡은 대가야 가실왕이 우륵에게 백성을
하나로 합칠 수 있는 음악을 만들라는 명에 따라 가야의 지명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 신라가 통일을 했어도 진흥왕은 가야 음악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우륵을 초청해서
자기들이 멸망시킨 나라의 이름을 딴 가야금을 신라의 음악가들에게 배우게 했다
김해 수로왕릉 ㅡ납릉심문(納陵心門)
쌍어문양
김해에 있는 김수로 왕의 능에는 두 마리 물고기가 조각되어 있는데
강길운교수의 <가야어와 드라비다어의 비교> 라는 논문에서 '가락(Karak)'은 옛 드라비다어로
물고기를 뜻하는 것이고, '가야(Kaya)'는 지금의 드라비다어로 물고기라는 뜻이라고 한다
김해에서 발굴된 가야 물고기 요대
[국립경주박물관] 국보 88호 금관총 금제 허리띠 ㅡ 물고기
국립경주박물관]국보 190호 천마총 금제 허리띠 ㅡ물고기
[국립경주박물관]국보 제192호. 황남대총 금제 허리띠ㅡ물고기
저 물고기들이 우연히 신라 금제허리띠에 장식되었을까?
우리는 어쩌면 '신라와 대등했던 가야'보다는 '신라에게 망한 가야'가
우리의 관념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가야를 단순히 신라의 발전과정 아래 통합되어간 여러 소국 중의 하나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한국 고대사를 고구려, 백제, 신라만의 삼국시대가 아니라 가야를 포함한
‘사국시대’로 재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님기는 말>
그동안 김해 주포를 시작하여 ㅡ망산도(유주비각)- 흥국사--장유사 - 해은사 ㅡ은하사ㅡ수로왕릉
- 수로왕비릉- 구지봉ㅡ밀양 만어사를 거쳐ㅡ지리산 칠불사까지 그 길을 따라왔다
우리 역사에서 가야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데도 역사에 제대로 편입되지 않았고 가야 불교의 실체는
삼국의 불교와는 달리 철저히 장막에 가려져 있다. 사료가 부족한 데다 그나마 남아있는 사료마저
허구성이 짙어 실체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패국의 역사는 묻혀지가 마련이다
가야불교는 서기 48년 가야국 시조인 김수로왕과 결혼하기 위해 인도 아유타국에서 온
허황옥이 파사석탑과 불경 등을 가지고 왔다는 남방 전래설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러나 학계는 고구려 소수림왕(372년) 중국에서 승려 순도가 불상과 불경을 들여온 것을 인정할 뿐
가야 불교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에도 가야사를 말하고 있고 ,<삼국유사>에는
가야의 건국신화와 가야왕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지만 신라 중심의 역사의식을 갖고 있는 <삼국사기>
편찬자들은 <삼국유사>의 의미를 인정하면서도 허왕후의 인도 도래와 불교 전래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다.가야는 자체적으로 역사적인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가야사를 연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유물로 시대를 해석하는 고고학에 크게 의존하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아쉬움을 남게 한다
기원 전후 시기에 고구려ㅡ백제ㅡ신라ㅡ가야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나라를 만들기
시작하여 고령 대가야가 최종적으로 우리 역사에서 자취를 감춘 것은 562년이다 그로부터 불과
100년 뒤에 백제 고구려가 멸망한다 그러면서 100년 앞서 멸망한 가야사를 우리의 역사에서
지워버린다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삼국시대에도 가야는 있었다
가야는 삼국 사이에 낀 고립된 약소국이 아니라 대륙의 문화와 해양의 문화가 합쳐진
찰의 강국으로 동북 아시아에 무역을 이끌었던 당당한 강성국이었다 그런 가야의 역사를 무시하고
삼국의 역사만 말한다면, 우리 고대의 긴 역사 중 일부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임을 잊어선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