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청와대가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기 전
청와대 주인이 있을 때 작성한 글입니다
이거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등장한다 도지앞마을회관에서 북동쪽으로 200m남짓 거리의 이거사지
아랫마을은 성덕왕이 행차할 때 이곳에서 쉬어 갔다고 "대기실마을"로 불리웠으며,
얼마전까지만해도 대기실로 불리우던 아랫마을은 도지앞마을로 불리다가,
다시 새주소로 바뀌면서 경주시 대기실길로 바뀌었다
삼국사기』 제8권 성덕왕 편
"성덕왕 36년(737년) 2월, 왕이 별세했다. 시호를 성덕이라 하고, 이거사 남쪽에 장사지냈다
.(王薨 諡曰聖德 葬移車寺南)"라는 기록이 있고, 이 절터의 남쪽 약 1km 지점에 성덕왕릉이 있으며, 이 절터와
성덕왕릉 사이에는 이렇다 할 절터가 없다. 그래서 이 절터를 이거사터로 추정하게 되었다
.이거사는 “성덕왕이 재위 35년 만인 736년에 죽자 시호를 성덕이라 하고 이거사 남쪽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성덕왕조’)고 할만큼 유서깊은 절이다
이거사지 비로자나불 좌상
이거사지 삼층석탑 ㅡ하층기단
판석4개 ㅡ엇물식 상층기단
감은사지 삼층석탑은 ㅡ3층 탑신 상면에 사리장엄구가 나타나고
나원리오층석탑 ㅡ3층 옥개석 상면에
구황동 삼층석탑 ㅡ2층 옥개석 상면에
불국사 석가탑 ㅡ2층 탑신 상면에 사리징엄구가 나타나는 반면
이거사지 사리장엄구 특징은 사리장엄구의 위치가 2층 옥개석 하면에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ㅡ 보물(제1997호)
1912년 11월8일 당시 환갑을 맞이한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일제가 한일병합 직전부터
추진중이던 석굴암의 서울 이전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경주 토함산에 올랐다.데라우치가 ‘이런 보물을
산중에 방치하는 것은 아까운 일이니 전부 뜯어 서울로 운반하라’고 지시했다 이리하여 석굴암은 (현장에서)
수리공사를 착공하게 됐다 석굴암 이전계획은 병합 직후까지 추진되다가 지역여론 악화 등의 이유로
무산되었다 1913년 일제강점기 데라우찌총독이 경주를 순시하던 중 당시 경주금융조합 이사였던
오히라료조 정원에 있던 것을 발견하고 이듬해 당시 서울 남산 왜성대(지금의 중구 예장동(옛 안기부 자리)
에 있던 총독 관저로 옮겨졌다 데라우치는 1916년 일본 본국의 총리대신으로 영전되어 떠난 .이후 1939년
경복궁에 새로운 총독관저(현 청와대)가 지어지면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됐다. 2011년 신라문화유산연구원에
서 제공한 일제강점기 자료 '신라사적고에 따르면
도지리 이거사터에서 1913년에 조선총독부로 불상을 옮겼다는 내용이 있다
눈덮힌 서울 남산 기슭의 총독관저 옆 계곡에 안치된 경주 석불.
불상은 1912년 11월 총독의 경주 순시 당시 환심을 사려는 현지의 일본인 유지에 의해 몰래 반출됐고,
개안식 뒤에도 이 사실이 오래 묻혀있다가 21년이 지난 1934년 3월 <매일신보>에 총독부박물관이 불상 소재를
찾았다는 기사가 보도되면서 세간에 알려지게 됐다”면서 “사진들은 데라우치가 개안식을 통해 불법반출된
불상을 사유화하고, 조선 유적지에서 암약하던 일본인들의 문화재 밀반출 행위에 사실상 면죄부를 주었음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청와대 불상은 1939년 북악산 기슭의 청와대 자리에 새 총독관저가 지어지자
다시 옮겨져 현재에 이른다.
데라우치 총독이 옮겨온 경주불상 앞에서 배례하는 장면. 1913년 2월
서울 남산 총독부 관저 부근에서 개안식을 열면서 찍은 것이다. 총독의 뒤에 참석한 승려들도 보인다
데라우치는 1913년 2월16일치 일기에서 관저 앞 절벽 아래 안치된 불상 앞에서ㅡ승려 마루야마 화상의
주재로 야마가타 정무총감, 아카시 장군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개안식을 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총독부신라석불개안식’이라고 쓰여진 불상사진 보존지(커버).
데라우치 총독이 예배했다는 문구도 그 아래 적혀있다.
청와대 석불의 원위치가 경주 도지동 이거사터라는 사실을 적시한
모로가 히데오의 기록. 주진옥 신라문화유산연구원 보존관리팀장 제공
1921년 금관총 발굴과 1926년 서봉총 발굴 과정을 주도한 초대 경주박물관장 모로가 히데오는
1916년 출판한 <신라사적고>에 “이거사에 있던 불상을 총독관저로 옮겼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경주의 석불좌상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고향' 경주를 떠난지 105년이 지났다
청와대 오운각 뒷편의 ㅡ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상(보물)
이 불상은 원래 경주 이거사지에 있던 불상으로 1913년 일제강점기 서울 남산의
왜성대 총독 관저에 놓였다가 1930년대 총독 관저가 지금의 청와대 자리로 이전하면서 함께 옮겨졌다
경주 석굴암 본존상을 계승하는 9세기 통일신라 석불좌상으로 머리에는 크고 높은 지혜를
상징하는 육계가 있으며 목에는 번뇌,업.,고 윤회의 인과를 의미하는 삼도가 있으며
우견편단에 항마촉지인으로 독특한 문양의 연꽃이 새겨진 방형의 대좌는 매우 독창적이다
이거사지
ㅡ청와대에 부치는 청원서 ㅡ
이 불상은 원래 경주 이거사지에 있던 불상으로 1913년 일제강점기 서울 남산의
왜성대 총독 관저에 놓였다가 1930년대 총독 관저가 지금의 청와대 자리로 이전하면서 함께 옮겨졌다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997호)은
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 있어야 할 당위성이나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100년이 넘도록 ‘경주로 돌아오지 못하고 청와대 오운정 뒤편에 그대로 남아있다
김영삼정부는 조선총독부건물을 해체했고
윤석열정부는 조선총독부 관저자리였던 청와대를 비우고 국민의 품으로 돌려줬다
그러나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는 것아 국가이거늘 불행했던 과거 역사의 오점을 관습처럼 그대로 되물림한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지금이라도 보물로 지정된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은
하루 속히 경주국립박물관으로 되돌아 와야 한다 그동안 여러차례 경주 반환 요구를
신청했지만 묵묵부답인 청와대 관계자들은 다시 한번 이 문제를 검토해 주기를 촉구하는
바입니다 아울러 일제 강점기인 1915년 9월, 경복궁에서 개최된 조선물산공진회라는 박람회
전시용으로 옮겨가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중앙박물관에 있는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81호)’과 ‘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국보 제82호)’,등도
아울러 경주 반환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문화재란 제자리 제 위치를 지키고 있을 때 비로소 그 생명이 살아나고
역사적 가치가 살아납니다
문화재가 본래의 자리를 잃는 것은 마치 그 생명의 빛이 바래는 것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