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하정인(月下情人).
'비구니가 기녀를 맞이하다.'.,이승영기(尼僧迎妓)
냇가 버들가지에 새 잎이 돋아나는 봄날에
장옷을 입은 기녀와 보퉁이를 든 비녀(婢女)가
절에 찾아가는데 마중나온 여승이 웃으며 맞이한다.
신록(新綠)이 동면(冬眠)을 깨는 봄날이다.
두터운 나무껍질을 깨고 돋아난.,신록(新綠).
그 곁에 화사한 미소를 머금은 비구니가.,합장.
'비구니 시선은
두 여인의 아랫도리
흰 속곳을 훓어보는듯..'
치마깃을 반대로 여민.,두 여인.
기생과 비녀(婢女)는 주종관계인듯..
기생은 이승이 마중나올 만큼 큰손일까?
이승영기(尼僧迎妓).
이승(尼僧)은 비구니(比丘尼)
영기(迎妓)는 기생(妓生), 맞을 영(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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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하정인(月下情人) & 이승영기(尼僧迎妓).
두 작품 속 여주인공은 혹시 동일인물 아닐까?
두 작품을 그린 혜원과는 평소 잘 아는 사이 같다.
'달빛 아래 정인'을 그린.,'월하정인(月下情人)'
2. 서로 마음이 통하는 친한 친구 사이.,정인(
담모퉁이에서의 만남.
'둘 사이는 어떤 관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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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申潤福, 1758년 ~ ?) 그림.,월하정인.
산수화 풍속화를 잘 그린 조선후기 도화서 화원.
그가 양반 관료들의 이중성과 위선을 풍자한 그림.
조선후기 여성 생활상 그림을 많이 남긴.,그.
화공 가문 출신으로 화원 신한평의 아들이며,
종삼품 서반 무관(武官)인 첨절제사를 지낸 그.
미혼남녀 만남이 금지되었던 조선후기.
혼인 할 상대방 얼굴도 한 번 보지 못한 채
결혼이 성행한 당시 자유연애 그림.,월하정인.
남녀의 신분을 뛰어넘는 애틋한., 사랑.
월하정인(月下情人) 그림 제목부터.,충격.
조선시대에도 자유연애가 가능했던 것일까?
고려시대와 달리 자유연애가 금지되었던 조선시대.
남녀간 연애는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불러 일으켰고
때로는., 자유연애 당사자들의 목숨마저도 위험했었다.
고려시대 자유분방했던 남녀 간 꺼리낌없던 혼욕 풍습.
그와 달리 조선시대에는 신분과 목숨을 전부 다 걸고 연애.
조선시대 지배층 사대부와 궁궐 왕실에서 숱한 염문과 스캔들.
사대부는 겉으로는 성을 금기시 하는 척했으나
실상은 풍류라는 미명 하에 기생들과 성을 향유.
조선시대 자유연애의 최대 피해자는 여성이었다.
조선시대 양인 여성에게 연애는 곧 간통.
미혼 여성이 연애하는 것도 간통이었으며,
유부녀는 이혼이나 재가를 하기가 힘들었다.
조선시대 양인 남성 연애는 너그럽게 용인되었지만
양인 여성의 연애는 심할 경우 죽음도 각오해야 했다.
여성이 자신보다 신분낮은 천민 남자를 사랑한 죄목으로
국가에 의해 이혼 당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도 했다.
자유연애를 꿈꾼 극소수 여성들은 참혹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런 연유로 인해, 조선 후기에 자유연애는
여성의 입장에서는 소극적일 수 밖에 없었다.
남성 당사자에 비해 여성이 불이익을 받기 때문.
마음은 情人에게 기울었어도
속내를 드러낼 수 없는.,女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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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롱불을 든 남자가 여인을 찾아온듯 하다.
치마 밑으로 속곳을 드러낸 여자가.,정인(情人).
처음 만난 것 같지 않고, 보고 또 보고 싶은 사이.
조선시대 치마 안 속옷의 하나로
현재의 속치마와 같은 구실을 하는
단속곳을 한껏 드러낸.,옷차림이다.
살창고쟁이
................조선 후기.,단속곳...................
단속곳은 치마 바로 아래로 엿보이는.,겉속곳.
고급 옷감으로 주로 흰색· 옥색· 회색 등을 사용.
치마만큼 신경을 쓰고 바느질도 정교하게 한 속옷.
아름다움, 기능, 실용성을 두루 갖춘.,고쟁이.
월하정인 단속곳은 조선 후기.,살창고쟁이 형태.
당시 여인들은 겉저고리 안에 '속적삼', '속저고리'
속옷도 아닌 것이 속옷처럼 쓰인 '허리띠'를 입었다.
조선 후기로 오면서 저고리 길이가 짧아지자
허리띠는 겨드랑이 밑의 살을 가리도록 한 것.
아울러, 웃옷보다 치마 속 속옷 가짓수가 많았다.
허리부분을 부풀린 3, 5, 7층 무지갯빛 '무지기',
허리 아랫도리를 한것 부풀려 보이게 하는 '대슘치마'
그 속에 '너른바지' 그 속에 '단속곳' 그 속에 '속고쟁이'.
속고쟁이를 보면 '살창'처럼 생겼다고 해서 '살창고쟁이'
문어다리 같아 '문어고장주', 가위로 잘라내., '가새고장주'.
새색시 시집갈때 격식을 갖추느라 여러벌 옷을 겹쳐 입는 것.
조선후기 여성은 윗 속옷보다 아랫 속옷에 신경썼다.
치마 속이 시원하라고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살창고쟁이.
그당시 기녀들은 男心을 사로잡기 위해 단속곳으로 멋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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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하정인 그림 속
여자가 입은., 단속곳.
아랫단이 살창고쟁이 형태.
월하정인 여자는 옷차림으로 보아 기생인듯.
남자는 의관정재한 옷차림으로 보아 선비 같다
야심한 밤중에, 외딴 곳에서 만나야 할.,관계인듯.
벽체 허물어진.,낡은 집,
달무리 아름다운.,초생달,
담장, 나무 위를 감도는.,안개.
'도화서 화원'인 신윤복 답게
은밀한 분위기를 한껏 고조 시킨,
그림 속에서 배경 설정이 돋보인다.
두 연인의 '만남의 장소'를
후미진 담모퉁이로 설정한걸까?
아니면, '작별의 장소'로 설정한걸까?
남자는 두 발의 발걸음 방향이나
초롱을 든 손의 움직임으로 보면,
어디론가 가자고 재촉하는듯 하다.
그러나, 기생은 마음을 정하지 못한듯.
선뜻 남자를 따라 나서려하지 않는듯 하다.
은근히 남자의 마음을 애태우는듯.,여겨진다.
그러나, 기생의 두 신발은 남자를 향해 있고,
장옷을 가다듬는 손은 이미 속마음을 정한듯.
'이 여인의 속마음을 그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새침한듯 토라진 표정을 짓는.,여심(女心)
그 토라진 여심을 달래려 애쓰는듯한.,남심(男心).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 만이 안다('兩人心事兩人知.)
신윤복 그림의 전체적인 공통점은
작품 연대와 날자를 표기한 것이 없다.
그래서, 항상 많은 이들이 궁굼하게 여긴다.
'월하정인(月下情人)은
그가 언제 그린 작품일까?'
'충남대 우주천문과학과 교수'
(주)천문우주기획 대표 이태형.
그림 속 달 형태를 보고 연대 도축.
그무렵, 월식 천문기록들을 일일히 검토하여
그림 속에 월식이 일어난 시기를 찾아낸 것이다.
'그날 오후 비, 밤에.,부분월식.' - 당시 천문기록 -.
신윤복(申潤福, 1758년 ~ ?)
정조9년 신윤복 36세일때
밤2경부터 밤4경까지 월식.
오후 9시부터 새벽 3시 까지.
부분월식이 진행되면서
자정 경(밤12시).,달 모양.
그래서, 데이트 시간은.,자정.
'기울어져 가는 달이
깊은 밤에 걸리었다.
삼경(三更 : 밤 12시).'
그림에 써있는
글귀와도 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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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럴까?'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 만이 안다.'
'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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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때 좌의정.
김명원.,한시(漢詩)에서
신윤복이 두 귀절을 각색한듯.
沈外三更細雨時
兩人心事兩人知
歡情未洽天將曉
更把羅衫問後期
밤 기울어, 새벽이슬 내릴 때
두 사람의 마음은 둘 만이 안다.
깊은 정 모자란데, 날이 밝아오네.
적삼을 부여잡고 훗날 기약 묻노라.
이 시는 정조 재위 당시 유행한.,한시.
이 시를 외우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였고,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가사를 바꿔 부른.,한시.
조선 영조 재위 때 50여년간.,금주령.
'영조 손자' 정조 재위 때 풀린.,금주령.
그리하여, 뒤늦게 유행하였던.,한시(漢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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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때, 성균관 유생에게 은잔을 하사한 영조.
통금시간에 도성 안을 다닐수 있는 특권이었다.
정조 때에도 성균관 유생의 특권은 그대로 존속.
월하정인 그림 속 남자는 성균관 유생인듯.
정조 때 성균관은 오늘날 성균관 대학교 옛터.
그 건너 편에 '관기와 의녀'들의 숙소가 있었던듯.
장악원 관기들이 들락거리던
조선시대 왕실의 연회장이었던
비원 연경당과 가까운 곳에 위치.
한국예술종합학교 그리고
서울의대 간호대학 기숙사.
일명 "약방 기생"이라고도 불리웠던.,'의녀'.
정조 재위 때, 궁궐 의녀는 궐 밖에서 거주하며
궁녀와 달리 결혼할 수 있었고, 출퇴근이 가능했다.
조선 정조 때 '약방기생' 의녀들의 숙소.
'서울대 간호대학 기숙사'일대로 추정된다.
창경궁 도화서 화원도 그 인근에 있었으리라.
그래서, 신윤복의 그림 속에서는
의녀, 관기, 유생들이 많이 등장한다.
도화서 화관은 장악원과도 업무 상.,밀접.
월하정인 그림 속 '낡은 집' 담모퉁이는
밤 깊어 인적 끊긴 성균관 담장 인근인듯.
오늘날, 대학로 인근에서 가까운 곳인듯 하다.
현재, 서울대학교병원이 들어선 곳은
조선시대 '창경궁 후원'이던., 함춘원 터.
정조 재위 때 성균관 유생들의 로맨스 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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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신윤복이 선조 때 김명원 시를 각색했다면,
이미, 두 남녀는 담 너머 집안에서.,정을 나눈 사이.
밤새도록 정을 나눴어도, 아직 다 채우지 못한.,아쉬움.
그런데, 야속하게도
이미 초승달이 기울어 가고
새벽이 다가와 헤어져야 할 시각.
남자는 정표라도 주려고 하는 것일까?
손을 안주머니에 넣어 무엇인가 찾는듯.
쓰개치마 여성은 다소곳 고개 숙이고 있다.
아직도 아쉬움이 남아있는듯 보여지기도 한다.
신윤복.,월하정인(月下情人).
다양한 상상력 속에 빠지게 하는.,그림이다.
신윤복은 이 그림에서 무엇을 표현하려고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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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신윤복, 김득신.,조선시대 3대 풍속화가.
아버지 화법을 익혔고, 선배 김홍도 영향을 받았다.
하여, 김홍도와 쌍벽을 이루는 독특한 풍속화를 계승.
그러나, 소재선정, 필법, 구성, 색채 표현은 큰 차이점
김홍도는 소탈함과 익살이 깃든 서민층 풍속을 다룬 점.
신윤복은 양반층 풍류, 연애, 향락적 생활을 주로 그렸다.
김홍도는 선이 강하고 빠른데
신윤복의 선은 가늘고 유연하다.
김홍도는 주제를 살리기 위해 배경을 생략.
신윤복은 주변 배경 묘사로 주제를 부각시켰다.
김홍도는 채색을 엷은 갈색으로 되도록 절제.
신윤복은 빨강, 노랑, 파랑., 원색을 즐겨 사용.
신윤복은 남녀의 애정행각을 다룬 춘의도가 많다.
이는 조선 말, 폐쇄적인 성리학 이념에 반하는 일.
사대부들의 위선과 불륜을 대담하게 파헤치고 풍자.
또한, 남존여비 사회에서 여성들을 작품에 등장시키고,
기녀, 기방(妓房), 여속(女俗)에 대한 관심을 끌어올렸다.
신윤복이 이러한 풍속화를 그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18세기 말~19세기 초' 다양한 후원자들 도움이 컸다.
조선 후기, 부를 축적한 중인들 생활까지 작품으로 표현.
신윤복은 양반 사대부의 체면 문화에서 한 발 물러나
향락적 소재에 몰입하며 제도권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그는 당시 남녀 간의 성풍속을 과감하게 화폭에 담았다.
그의 작품은 미술사 연구뿐만 아니라
동시대 생활, 옷차림 연구에 귀중한 자료.
그의 대표작으로는 국보 제135호.,혜원풍속화첩.
단오풍정, 월하정인, 봄나들이, 뱃놀이, 30 점을 수록.
간송미술관 소장품으로 외국에도 잘 알려진.,화첩이다.
이외, 국립중앙미술관에 소장된, 탄금(彈琴) 등 6점.,화첩.
아울러, 19세기 초, 초상화 '미인도'는 걸작으로서 손꼽힌다.
월하정인 작품연대는 1793년(정조9년) 8월 21일이 맞는 것 같다.
월하정인(月下情人) 그림 속에서
선비는 신윤복 그 자신일지도 모른다.
'누가, '월야 삼경' 밀회를 볼 수 있겠는가?'
...........혜원(蕙園).,신윤복(申潤福, 1758년~ ?)...............
조선 후기 관료이자 화가로서, 산수화와 풍속화를 잘 그렸다.
관료들의 이중성과 위선을 풍자, 여성들의 생활상을 많이 표현.
그는 화공 가문 출신으로 화원 신한평의 아들이며,
그도 종3품 도화서 화원, 서반 무관(武官) 첨절제사.
본관 고령, 자 입부(笠父), 덕여(德如), 본명 가권(可權).
대표작.,미인도(美人圖)· 단오도(端午圖).
조선전기의 문신, 학자 신숙주의 후손이고,
일제 강점기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의 8대 방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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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申叔舟, 1417~1475)
영조34년(1758년)에 아버지 신한평과 어머니 홍천 피씨
장남으로 태어난 신윤복은 정확한 생일이 전하지 않는다.
어렸을 적의 이름은 가권(可權)으로 그뒤에 윤복으로 개명.
그의 본명이 가권(可權)으로 밝혀진 것은
그가 그린 유명한 미인도(간송미술관 소장)에
신가권이라는 도서가 찍힌 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미인도
그 아래로 남동생 신윤도(윤수), 여동생 1명이 더 있다.
신윤복은 신숙주의 방계 후손으로, 암헌공 신장(申檣)의
다섯째 귀래정 신말주의 손자 신공섭의 5남 신수진의 7세손.
신수진이 서자라, 그 후손들은 중인(中人) 신분으로 낮아져
수십 명의 역관과 율관, 운관으로서 활동했고, 신세담ㆍ신일흥ㆍ
아버지 신한평 같은 화원들이 나와 그의 가계도 20세기 이후에야
몇 문헌을 통해 알려졌는데, 이는 그가 서출이라 족보에서 생략된 것.
그의 종조부 신일흥과 종증조부 신세담은 도화서의 화원
아버지 신한평도 영조 어진을 두 번이나 그린.,도화서 화원.
정조 초기 그가 그린 어진 중 한 그림이 알아볼수 없다 하여
탄핵받고 유배당하기도 했으며, 관직은 첨절제사(僉節制使).
신윤복도 도화서 관원으로 관직은 첨정과 첨절제사.
인물화와 풍경화 외에도 많은 양의 풍속화를 남겼는데,
그 중에는 양반의 위선적인 태도와 이중 잣대를 풍자하고
부녀자들의 자유 연애와 애환을 묘사했으며 해학이 담긴 그림.
1800년 정조 사후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사라지면서
그의 작품활동도 쇠퇴기에 접어들고 그가 남긴 작품은
1813년 작품까지 전하는데, 1813년 이후에 사망한듯 추정.
그의 정확한 사망 시기와
사망 장소는 알려져 있지 않다.
조선 풍속화의 지평을 넓힌.,신윤복.
단오풍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