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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 해어화(解語花).

작성자선경나라|작성시간16.11.17|조회수613 목록 댓글 0

해어화 



해어화(解語花).


 

해어화 

 

明皇秋八月, 太液池有千叶白蓮數枝盛開.

帝與貴戚宴賞焉. 左右皆嘆羨久之.

帝指貴妃示於左右曰, 爭如我解語花.


<開元天寶遺事> 解語花 - 王仁裕.

<개원천보유사> 해어화 - 왕인유.


명황(明皇, 당현종(唐玄宗) 가을의 8월에,

장안 태액지(太液池)에 흰연꽃 몇송이 만개.


황제와 귀척(貴戚)들이 연꽃을 감상하였는데

주위 사람들이 모두 연꽃을 보며 오랫동안 감탄.


황제가 양귀비를 가리키며 좌우에게 말하길.

“나의 해어화와 견줄 만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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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의 아름다움도

‘말을 이해하는 이꽃에는 

미치지 못하리라.” - 당 현종 -


미색이 다양한 양귀비 꽃 

 

'양귀비'의 아름다움을

꽃에 비유한 고사(古事)에서

유래된 말이.,해어화(解語花).


부부간의 금실을 100년 늘려준다는 ‘양귀비수술’ 

 

양귀비(楊貴妃 : 719~756)는 당 태종의 귀비.

안사의 난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어.,경국지색.

서시, 왕소군, 초선과 더불어.,중국의 4대 미인.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 조차 잊게 하는.,서시.

기러기가 날개짓 하는 것을 잊게하는.,왕소군.

달이 부끄러워 자신의 얼굴을 가리게 하는.,초선.

연꽃이 부끄러워 잎을 말아올려 얼굴 가린.,양귀비.


양귀비 : 왕조의 여인 

 

중국 4대 미인 중에서도

'말을 알아듣는 꽃.'.,양귀비.

중국 역사 상에서, 최고의 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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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량들이

술자리에서 시중을 드는 

'말하는 꽃.'이라는.,해어화.

 

'고려~조선'시대 기생은 천인(賤人)신분에 속했다.

그러나, 이들은 위로는 왕후재상(王候宰相)에서부터

아래로 한량에 이르기까지 요염한 자색으로 사교를 진행.

 

가무(歌舞), 시(詩), 서(書), 화(畵)가 능했고,

지조(志操), 지략(智略), 의협(義俠)도 있었다.

 

기생은 국내외 연회석상에 꼭 있어야 할 존재였고

국제무대에서까지 이들의 활동무대는 매우 넓었다. 

 

우리나라 기생은 백제 유민에서 유래.

남자를 노(奴), 여자를 비(婢)라 하였다.

.

이들 몸에서 남아가 태어나면 노(奴)로 삼고

여아가 태어나면 기생으로 만든 것이 기생의 시초.

 

고려 태조때 고집이 세어 다루기 어려운 수척들을

각 읍에 예속시켜 노비로 삼고 기녀로 삼은 것이다.

 

고려 현종 때 교방(敎坊)이 있었고

문종때 교방이 여제자(女弟子)를 두어

여악(女樂)에 기녀를 썼다는 기록이 있다.

 

또 예종 11년(1116)에는 창우(倡優) 잡기(雜技)는

물론 성밖 기생들도 원근(遠近)을 가리지 않고 징발.

포곡가(布穀歌)를 부르게하여 즐겼다는 말이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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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은 공주 또는 무당에서

유래되었다는 말도 전해온다.


야사에서는 조선시대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

가산이 적몰되고 유배되어 순천 관비가 되었고,

순천부사가 관비의 노역을 시키려 하자 이를 거부.

조선실록에서는 노비로 강등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단종 폐위와 사육신 사건에 연루된 경혜공주 & 남편 정종.

정종은 유배되었으나 경혜공주의 병으로 한양으로 잠시 귀환

다시 유배된 뒤 거열형을 당했고 경혜공주는 비구니가 되었다.


정종이 죽은 후 비구니가 되었는데 무척 가난해

세조는 불쌍히 여겨 경혜공주에게 집을 지어주고

몰수한 재산과 노비를 하사해 경혜옹주의 유일한 아들

정미수에게 재산을 상속한 분재기(分財記)가 공개되었다.


공주가 죽기 사흘 전인 성종5년(1474년) 음 12월 27일 제작.

'경혜공주지인(敬惠公主之印)'이라는 붉은 도장이 찍혀 있어

경혜공주가 죽을 때까지 공주의 신분을 유지했다는 증거가 된다.


예종 때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는 종친의 예로서 서용.

1473년(성종4) 12월 30일 졸하였으며 성종은 부의(賻儀)로

쌀·콩 70석, 정포 50필, 종이 백권, 석회 60석, 촉랍 30근 하사.

경혜공주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대자골에 있다.


아득한 옛날 '8도의 지배자.'는 모계사회.,공주.

모계사회가 부계사회로 바뀌면서 무당으로 전락.

삼국시대 불교가 국교화 되면서부터 기생으로 전락.

 

'모계사회' 배 다른 배달민족의 모계풍습이

'부계사회' 성씨 대물림 풍습으로 뒤바뀐 것.

여성 중심 사회에서 남성 중심 사회로 바뀐 것.

 

일모다부(一母多父) 제도권에서

일부다처(一夫多妻) 제도권으로

또는 남존여비 사상으로 바뀐 것.

 

역사 상에서 대표적인 여인.,천관녀.

'천신과 인간' 세상을 이어주던.,여사제.

신라에 불교가 정착되면서 기생으로 전락.

 

천신과 인간 사이 중재자.,여사제.

'여사제'는 무당이 되고 기생이 되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8천민으로 전락.


신라 화랑문화가 조선시대 들어와 변질된 풍류.
남무(男巫). 창우(倡優). 유녀(遊女). 무동(舞童).
술을 마시고 여자들과 질탕하게 노는 뜻으로 타락.

.

기생이란 해어화, 유녀, 노는 계집, 의녀,
기녀, 예기. 의기. 은근짜. 탑앙모리, 창기,
여사당, 현지 처, 색주가(작부), 창녀, 갈보,

양공주. 등 시대에 따라 다양한 호칭.
기생이란 몸을 파는 여성을 의미한다.

 

영화 [해어화] : 영상예쁘고 노래 좋은데 왜 평이 안 좋은지 알겠다..

조선 유림들이 세종대왕에게 상소한 관기제도 폐지.
기생 때문에 추한 반목과 유흥 폐해가 적지 않은 때문.
훗날, 좌의정까지 지낸 청백리 허조(1369~1439)는 반대.

"남녀관계는 인생의 큰 욕구 중 하나라 금할 수 없다.
관기를 없애면 인재들이 어염집 처자를 범해 벌 받는다"
'중종 때 대사헌 조광조(1482~1519)는 여악 폐지를 주장.'


당시, 관기로 인한 퇴폐풍속을 고치려다 반대에 부딪쳐 좌절.
1945.8.15 해방 후 성매매를 불법으로 간주하고 처벌했지만 실패.
수요와 공급이 맞고, 성매매에 대해 관대한 사회적인 분위기가 한몫.


해어화 

2004년 11월 23일 성매매 처벌법 시행 후, 성매매 논쟁.
인신매매. 감금, 성매매 엄벌, 근절되어야 한다는 공감대.
그러나, 성매매를 줄일 수 있는 근본적인 대안은 무엇인가?

2004년, 한국 형사정책 연구원 조사에 따른.,한국 성매매 현주소.
총 규모는 연간 24조원으로 국내 총생산(GDP)의 4.1%를 차지한다.
매춘여성 33만명, 성매매 종사자 150만명이란., 여성단체 주장도 있다.

'고려 ~조선' 시대 우리나라 기생문화는 정치와 외교의 산실.
성종, 연산군 시절 기생은 왕족, 양반들의 위안물일 뿐 아니라,
'두만강 6개 진' 병사들을 달랬고, 외교사절에게 관기를 제공했다.

'조선 후기는 관기로

외교를 유지해야 할 만큼

왕실의 정권 밑바탕이 취약.'

 

조선시대 기생 모음

해어화(解語花)는 '말을 알아듣는 꽃.'

조선시대  슬프고도 가련한 천민이었다. 

'여사당 자탄가'는 이들의 실상을 대변한다.

'한산 세모시로 치마저고리 예쁘게 차려 입고
안성 청룡사로 줄타기 놀이를 하러나 가세나.'

'이 내 손은 문고리인가?

이놈도 잡고 저놈도 잡네.'

.

'이 내 입은 술잔인가?

이놈도 핥고 저놈도 핥네.'

.

이 내 배는 나룻배인가?

이놈도 타고 저놈도 타네.'

-조선 혜어화사 中에서-

 

평양기생학교

구한,말 대원군은 평양기생을 조선의 3대 병폐로 지적.
평양기생이 어떤 존재기에 나라의 일인자가 지적한걸까?
평양은 옛부터 기름진 옥토로 모든 것이 풍부한 천혜의 땅 .

벼슬아치들은 평양기생과 멋지게 놀아보는 것이 꿈.
나중에 정신을 차리면, 땡전 한 푼 남아나지 않을 망정.
벼슬아치라면 평양으로 발령 받는 그 자체가 소원이었다.

평양은 조선시대에 첫손가락 꼽는 색향으로 명성 높았다.
예전에 개성은 절개를 상징하는 소나무가 많아 송도(松都).
평양은 흐드러진 유흥을 뜻하는 수양버들이 많은 유경(柳京) .

개성에는 절개 과부가 많고, 평양에는 풍류기생이 많다.
평양은 명기의 고장이라 한양기생을 주로 공급하는 고장.
18세기에는 80 여명 남짓이었지만 16세기 말에 약 180 여명.

평안감사로 도임하면 기녀들 200 여명이 길가에서 영접.
마치, 꿈속에 도원경을 날아다니는 기분이었다고 전한다.

평양은 대동강가 경치가 일품이고 어여쁜 기생도 많아,
평안감사도 저 하기 싫으면, 그만 이란 말이 생겨날 정도.

평양은 예로부터 중국과 이조 사신들이 오가던 길목
하여, 평양기생이 유명해진 것은 지리적인 특성 때문.

 

수정////1904년 평양 기생학교

1904년 평양 기생학교.

관기는 대부분 인물이 곱고 재주 많은 천민 소녀 출신.
조선시대에는 기녀 양성소 교방에서 특별 교육을 시켰다.
기생들은 공식적으로 1년에 백미 한 섬을 연봉으로 받았다.

그러나, 연희에 불려가 몸 팔아 받는 해우채가 주 수입원.
하여 풍류양반 중 기생에 빠져 가산탕진하는 일도 비일비재
'이춘풍전' 이서방이 재산을 기생에게 빼앗기는 소설이 대표적.

이와 반대로 몰락한 사대부를 입신양면 시킨 기생도 있다.
임진왜란 때 적장의 머리를 베게 한 뒤 자결한 의기 계월향.
훗날 시인 한용운은 계월향의 의기를 높이 평가하는 말을 한다.

“나는 황금 소반에

아침 햇볕을 받치고

매화가지에 봄을 걸어

그대의 잠자는 곁에다

가만히 놓아 드리겠오.”

선조 때 시재에 뛰어나 천재칭송을 받았던 임제(林悌)와
화담을 나눈 평양 기생 한우(寒雨)를 먼저 손꼽을 만하다.
한우와 술잔을 나누던 임제가 슬쩍 한우의 마음을 떠본다.

북창(北窓)이 맑다커늘

우장(雨裝)이 업시 길을 나니
산(山)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 비 맛잣시니 얼어 잘까 하노라 - 임제 -

어이 얼어 자리 므스 일 얼어 자리
원앙침(鴛鴦枕) 비취금(翡翠衾) 어듸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 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 한우 -

.

오늘날, 평양 예술단원 여성들의 미모는 세계적으로 유명.

조선시대 평양기생은 뭇 남성들이 한번만 보길 꿈꿨을 정도, 

자칫, 빠져들면, '만석군 부자도 패가망신할 정도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관아에서 양성한.,관기.

.

북한은 국가에서 양성하는.,예술단.

전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사회.,북한.

북한 체제의 홍보를 위해 만든.,평양예술단.

 

조선시대 폐쇄된 사회보다

더 폐쇄된 느낌을 갖게 한다.

 

평양 예술단 대경연출

평양 예술단.

북한 노래감상

.

조선 후기, 평양기생은
만석군 전답이 다 들어가도
그 흔적 조차 없다고 전해온다.


만석 전답보다

넓다는 한치 그곳.

 

평양기생 장연홍,퇴계선생의 여자 "두연"기생

'1911년 출생한 평양기생' 장연홍.,묘.

평양기생 장연홍,퇴계선생의 여자 &quot;두연&quot;기생 

 

한반도 기녀 제도는 고구려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 유녀에서 비롯, 관기가 전국 관아에 배치.
그러나, 삼국시대 이전에도 기녀가 있었던 듯 싶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김유신과 천관녀의 사랑 이야기
신라 초 진흥왕 무렵 원화제도, 백제 '꽃쟁취'라는 유녀
우리나라 기녀 역사는 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특히, 고구려가 정벌한 부족들의 부녀자들이 유녀로 전락.

고려시대에는 중앙집권 체제가 정착되면서 관기가 된.,유녀.
조선시대 기녀 외 유녀 집단이 존속되면서.,유녀금지론 대두.

 

&gt;별순검3&lt; 조선 최초 포르노그라피 &gt;특패기생 진금홍&lt;에 &gt;가루지기&lt;김신아

조선시대 기녀란 오직 관아 소속인 관기 만 가리키는 것.
기녀란 가무 기예를 익혀 나라에 필요할 때 봉사하던 여인
따라서, 관기는 지방 관청 소속이며, 신분 상 천민에 속했다.

관기는 또 경기(京妓)와 지방기(地方妓)로 나뉘어 졌으며,
지방기 중 자색이 뛰어나고 재주가 있으면 경기로 뽑혔다.

 

&gt;별순검3&lt; 조선 최초 포르노그라피 &gt;특패기생 진금홍&lt;에 &gt;가루지기&lt;김신아

경기 중에는 내의원 혜민서에 속해 있는 의녀가 있고,
공조상의원에 침선비가 있었다. 즉 내외법이 엄격해져
부녀들의 질병까지도 남자 의사에게 보일수 없게 되자
그 임무를 대신 맡게 된 것이 의녀이자 약방기생이었다.

침선비는 왕과 왕비의 의복을 짓는 일을 하는 기녀였다.
그러나 이들은 약방기생, 상방기생 또는 선상기도 겸했다.
의녀들은 주로 궁중에서 비빈, 나인들의 진료에 종사하였다.

 

이영애 젤 예뻤던 드라마는..

연산조에 들어와 일반 관기와 함께 연회에도 참석시켰다.
나중에 의녀들의 궁중 연회 참석을 금지 시키려 하였으나
잘 시행되지 않아 이들은 조선 말까지 진료와 가무를 병행.

민간에서는 조선 중엽까지 창가비라는 성비와 가비가 있었다.
기녀들은 젊고 아름다웠고 남성들의 접근이 허용되는 존재였다.


기녀는 관아에 소속된한 노예로서 세습되었고,
일단 기적에 오르면 평생 빠져나올 수 없었다.

기녀는 열다섯 살부터 쉰살까지 있었는데,
어린 기생은 동기, 나이가 든 기생을 노기.

열다섯 살이 되어 기생명부에 오르면
교방에서 음률을 익히면서부터 기녀의 길
일정 교습기간이 끝나면 행수기생이 엄한 제재.

기생 안배는 주로 호장이 맡아 했기에
아전과 기녀는 떼려야 땔 수가 없는 관계.

 

한지로 만드는 한복 인형

기녀 옷차림은 조선 여인들 복싱에 큰 영향을 끼쳤다. 
기녀들은 매우 사치하고 요란스런 복장을 즐겨 입었다.
비록, 창기라고 하더라도 능라비단 옷차림이 허용되었다.

즉, 기생의 능라비단 옷은

양반 여인과 동등한 옷차림.

그러나, 궁중연회에서 국빈을 대접할때는 흑색 옷만 허용.
대궐에서 가무를 맡은 정재의 옷은 붉은색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겹치마 사용은 금지되었으며 옷소매는 일자형이었다.

치마도 오른편으로 여미게 해서 양반 부녀와 구별했다.
단 약방기생쯤되면 예복으로 녹의홍삼에 큰머리를 하고,
고름에는 침통을 찰 수 있는 이례적인 대우를 하기도 했다.

기녀들은 일반 부녀자와 달리 속곳을 치마밑으로 노출
또 저고리 길이를 짧게해 치마 허리가 드러나게 입었고
이 치마 허리에는 갖가지 화려한 수를 놓아 멋을 내었다.

또한 남자의 눈길을 끌려고 속곳을 노출시켰지만
속곳을 겹겹이 껴입어 둔부를 부풀려 매력을 강조.
고쟁이 위에 속바지를 입고, 그 위에 단속곳을 입었다.

속곳을 겹겹이 껴입어 임신을 했어도 감추기에 적당.
겹겹이 껴입은 속곳은 남자를 애태우는데 매우 효과적.
사치노예 기생의 옷차림은 일반 부녀자에겐 부러움의 대상.

 

한국의 패션리더 - 기녀 : 기녀의 복식

즉, 기생들의 겨드랑이 살이 보일 만큼 짧은 저고리
평민 부녀자들에게까지 유행처럼 번져나가게 되었다

기녀들의 옷차림을 일반 부녀자들이 은근히 동경하여
본받으려는 일반 부녀자 때문에 사치가 날로 심해지자
조선 중기에는 사치를 금하는 여러 금제조항이 내려졌다.

장신구 역시 기녀들에게는 예외적으로 많이 허용되었다.
후덕함을 강조한 일반 부녀자들의 몸치장은 규제한 반면
마음껏 사치를 누린 기생은 일반 부녀자에게 선망의 대상. 

'말을 알아듣는 꽃'이란

뜻으로 '해어화(解語花)'

또는 '몸으로 말을 하는 꽃'

 

해어화 (한효주 출연작 영화)

 

태조가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할 때 많은 관기가 따라갔다.
조선시대 관기의 설치목적은 주로 여악(女樂)과 의침(醫針).
관기는 의녀(醫女) 약방기생, 상방(尙房)에서 바느질을 담당.

 
상방기생은 연회 때 노래 춤 거문고 가야금 등 악기도 능숙.
여악은 창기희(唱技戱)로 발전해 조선시대 들어와서 활성화.

고려 문종 때 팔관연등회 여악(女樂)이 관기(官妓)의 시초였다.

 
관기는 지방관아 지방관의 위락(慰樂) 대상
성종 수양대군 연산군 양녕대군 안평대군 등
역대 군주 및 왕족들은 기생을 즐겼던 인물들

이들 기녀들의 지방 가무(歌舞) 특색으로
안동기(安東妓)의 송대학지도(誦大學之道),
함흥기(咸興妓)의 송출사표(誦出師表),

관동기(關東妓)의 창관동별곡(唱關東別曲),
의주기(義州妓)의 치마무검(馳馬舞劍),
제주기(濟州妓)의 주마지기(走馬之技),

평양기(平壤妓)의 창관산융마시(唱關山戎馬詩),
북청기(北靑妓)의 치마지기(馳馬之技),
영흥기(永興妓)의 창용비어천가(唱龍飛御天敬)

중종 때 의녀(醫女) 창기(娼妓)의 연회 참여를 금지
1510년 중종은 연회 때 의녀 창기를 부르는 것을 엄금
그러나 이러한 왕명이 얼마나 잘 지켜졌는지는 의문이다.

기생을 관장하는 기관으로는 기생청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가무 행의 시 서화(書畵) 등을 가르쳐
그들이 대하는 상류층 교양과 걸맞게 연마시켰다.

기생청은 후에 권번(券番)으로 개칭되어
서울 평양 기생학교에 15~20세 처녀를 입학
가음곡 예의 서예를 가르쳐 예능과 교양을 겸비.

기생의 배출지로 이름났던 곳으로는 서울 ·평양 ·
성천(成川) 해주 강계(江界) 함흥 진주 전주 경주

시(詩) 문장으로 유명한 명기로는
황진이(黃眞伊) 매창(梅窓) 소백주(小柏舟)
의기(義妓)로 유명하기는 평양의 계월향(桂月香),
진주의 논개(論介), 가산(嘉山)의 홍련(紅蓮) 등.

기생제도는 조선시대에 발전해 자리를 굳히게 되어
신분상 천민이지만 교양인으로 대접받는 특이한 존재. 

조선시대 기생들은 어디서 어떠한 교육과정을 받았을까?

 

평양기생학교에 분 왜색의 바람

조선시대 혹독한 수련을 감래해야 했던 어린 기생들.
폭포수 아래로 잠수하기, 거꾸로 매달리기, 외줄타기.
춤사위, 시조, 노래, 악기, 예절, 등 기본적인 수련 과정.

경기 중앙 관청에 소속된 기생은
보통 15세가 되어 기적에 오른 뒤
장악원에 소속되어 기녀 소양을 학습.

교육과목은 가무, 서화, 대화법, 식사예절 등
타인을 대하거나 즐겁게 할 때 필요한 것이었다.
이들이 상대하는 부류가 왕족을 포함한 사대부들

예의범절은 물론 시문에도 능해야 했다.
기녀 중 창가에 속한 명기가 수없이 배출
송도 창기 황진이, 부안 창기 계랑이 그 예

기생은 천민임에도 불구하고 이조 시대 패션을 선도.
대중의 의복에 크게 영향력을 끼친 '유행의 선도자'.
금은 수식과 능라의 사치스럽고 화려한 기생의 의복

옷감은 중국제 비단을 비롯한 고급 소재를,
색상도 붉은색, 노랑색 등 화려한 색상과 수
신발도 가죽신에 수를 놓은 화려한 신을 착용.

금은으로 된 노리개와 일체의 장신구 등을 사용.
머리치장도 높이 얹어 화려하고 사치한 머리 장식
남성 눈을 끌기 위해 여성적 매력을 드러낸 차림새

저고리 길이는 가능한 짧게 입어
흰 치마에 허리 일부가 나오게 하고,
겨드랑이 살이 살짝 보일 정도로 입었다.

한편 아래로는 치마 밑에 많은 속곳을 입어
풍성하게 보이도록 하여 Erotic을 강조했다.

유교사회에서 남녀 내외법에 의해 썼던 쓰개
이들에게는 형식적이고 장식적인 쓰개로 사용.
신분 높은 사대부 및 풍류 묵객들을 사로잡았다.

 

개국과 함께 중앙 및 지방 관아에 기녀를 배치한 조선시대.
관청의 행사와 관리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필요했던 관기.
따라서, 관기가 기방을 차리고 손님을 받는 일은 조선시대 후기.

기녀는 한양에 거주하는 경기(京妓)
각 고을의 지방기(地方妓)로 나뉜다.
기녀의 수는 시기와 지역에 따라 차이.

연회를 자주 연 연산조때 기녀 수는 크게 증가
한때 한양에 머문 기녀 수가 만 여명에 달했다.

목(牧), 부(府), 군(郡), 현(縣) 등
행정구역에 따라 기녀 수가 정해졌고
평양과 같이 유명한 색향(色鄕)은 200명
규모가 작은 행정구역에는 20명 정도였다.

기녀제도는

조선의 유교관념과

사회 질서에 상반되었다.

'이를 폐지하자.'는 논의가 조선 초부터 활발.
그러나, 기녀제도가 관리들의 처신에 직접 관련
그 때문에 폐지는 그당시 현실로서는 불가능했다.

“전국 기녀제도가 폐지되면
관리들이 옳지 못한 방법으로
일반 가정의 여자들을 범하여
훌륭한 인재들이 벌 받게 될 것."

 

"그리하여,

기녀제도의

폐지는 안된다.”

오늘날, 윤락가를 묵시적으로 인정하려는 인식과 유사.
결국, 조선 통치이념과 상반되면서도 구한 말까지 유지.

관기란 여악(女樂), 의녀(醫女), 창기(娼妓), 등
이들은 천인으로 국가에 소속된 공노비와 같은 존재.
기적에 올려지면 천민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기녀.

양반과 혼인해도 그 아들은 노비, 딸은 기녀가 된다.
그뿐만 아니라 기녀의 신분은 관아에 예속된 채 세습.

늙거나 병들어 기녀 역할을 못할 때는
딸이나 조카를 대신 들여보내야 했으며
혹은 돈을 바치고 속량되는 경우가 아니면
평생 벗어날 수가 없어, 대부분 모녀가 세습.

그외 일반 백성이나 양반이 기녀가 되기도 했다.
흉년이 들면 흔히 여자아이는 기녀로 팔려갔으며,
역적 집안의 여자들이 강제로 기녀가 되기도 했다.

기녀의 활동기간은 15~50세인데 어린 기녀를 동기(童妓),
나이 든 기녀를 노기(老妓), 퇴역한 기녀를 퇴기라 불렀다.
체계적 교육을 받고 활동한 관기는 한양에 거주한 경기(京妓).

 

>공연리뷰< '서울교방 장고춤 콘서트 樂'

이들은 어린 나이에 기녀 교육을 시작하기도 하지만
보통 15세면 기적에 올라 장악원 소속으로 본격 수업.
글씨, 그림, 춤, 노래, 악기연주, 시, 책읽기, 대화법,
식사예절 등 타인을 대하거나 즐겁게 할 때 필요한 것.

이들이 상대한 부류는 왕족, 고관, 학덕 높은 유생
그러므로, 예의범절은 물론 문장에도 능해야 했다.

기녀 한명마다 담당선생이 지정되었고
악기 하나는 전문적으로 배우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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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내용에 대해 수시로 점검했고
실력이 향상되지 못하면 벌을 받았다.
하여, 한양 기녀는 뛰어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재주는 중앙에서 가르치면 충분
인물에 있어서는 지방 출신도 필요했다.
하여, 지방기 중 출중하면 한양으로 발탁.


옥 같이 흰살결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갖춘 정갈한 얼굴
이런 미인은 각 지에서 선발해야 수요를 채울 수 있었다.
교육을 마친 후 용모와 재주에 따라 1패, 2패, 3패 3등급.

1패는 왕과 고관이 도열한 어전에 나가는 최상급 기녀
2패는 관아와 고관집에 출입하는 기녀, 3패는 하급 기녀.

3패기생은 일제강점기 도입된 공창제도인 유곽으로도 전락. 

 

유곽·공창 도입한 이토 … ‘색계’로 한국을 타락시키다 

1895년 조선은 갑오개혁 때 관기(官妓) 제도를 혁파.

이로써 관기는 국가의 예속에서 해방되어 자유 신분.

 

그러나 한 해 전인 1894년의 청일전쟁 때

일본군 진주로 관기 혁파는 무의미해졌다.

 

근대 100景]>20<유곽의 탄생과 그늘

1894년 6월 해군 중장 이도(伊東祐亭)가

선발대를 이끌고 서울에 온 것을 필두로

일본군이 속속 진주하자 일본 거류민회는

묵정동에 대지 70평에 유곽(遊廓)을 만든다.

 

이것이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뿌리인 곳.

훗날, 일제강점기 충무로 신마치 유곽지대.

묵정동은 오늘날, 소피텔 엠버서더 호텔 일대.

 

러일전쟁으로 일본군이 대거 증파되면서

이 유곽은 8300여 평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이 유곽지대가 일종의 공창(公娼)지대였다.

 

공창 확산에 큰 공헌한 두 인물이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민비 학살 주역' 일진회.,송병준(宋秉畯).

 

일진회

송병준은 1900년 10월 일본인 첩 가쓰오(勝女)를 시켜서

청화정(淸華亭)을 열고 1906년 개진정(開進亭)으로 확대.

충무로 2가 개진정은 요릿집으로서 친일파 단골 회식장소.

 

일본의 게이샤들-----(들)


이토는 1906년 3월 초대 조선통감으로 부임할 때

육군 소장 무라다(村田淳)와 해군 소장 미야오카(宮岡直記),

통감부 외무총장 나베시마(鍋島桂次郞) 같은 공식 수행원을 동행.

 

아울러, 이토는 4명의 화류계 여성들도 동행.

도쿄 니혼바시(日本橋) 출신 여성.,오카네(お柳),

이토의 전용 간호사지만 실제로는 정부였던 오류우,

 

그외, 비파(琵琶)의 명인 요시다 다케코(吉田竹子),

'도쿄 신바시(新橋) 출신의 게이샤' 사다코(條子) 등.

 

사다코 1년간 출장 화대는 4500원.

당시 쌀 한 가마 값은 5원 정도였다.

그래서, 이토를 ‘풍류 통감’이라 불렀다.

 

일본의 게이샤들-----(들)

 

일제는 한 손에 대포와 한 손에 기생을 거느리고

조선에 건너왔다’고 말한 것에는 그 이유가 있었다.

일제 식민통치에 비판적인 역사학자.,야마베 겐타로.

 

"일본의 식민지 조선 병합은 그 경과로 보더라도

일본이 강대한 무력을 배경으로 조선 상층부를 매수

그 매수하는 방법이 연회를 열어 술과 여자를 제공한 것.

 

오대하자 노래와 일본기생사진

 

일제가 경의선 부설권을 얻기 위해

내부대신 이재완에게 거금 5만원 제공.

이런 행위도 술자리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일본이 사실 상, 조선에서 공창(公娼)을 허용하면서

기생을 일패(一牌), 이패(二牌), 삼패(三牌)로 나눈 것.

 

裏町人生 / 歌 ; 北島三郎

 

갑오개혁 때 관기 제도가 폐지되자 관에서 풀린 기생들이

자신들을 몸 파는 기생과 구분하기 위해 나눈 것인듯 하다.

일패는 과거 관기로 몸은 팔지 않고 가무를 선보였던 연예인.

 

이중 생활고에 시달려 은밀하게

매춘도 하는 기생들이 2패였다.

 

조선최고 기생으로 변신한 김옥빈

 

이패는 ‘숨어 있는 군자’ 은군자(隱君子),

또는 ‘은근짜(慇懃-)’라고도 불리웠는데

그만큼 몸 파는 것을 부끄러워했다는 뜻.

 

삼패는 돈만 있으면

아무나 안을 수 있는 창부.

즉, 가무를 못하는 ‘벙어리 기생’.

 

1906년는 미모에 서예도 잘했던.,진주기생 산홍

매천야록에는 산홍(山紅)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이지용(망국 후 백작)이 첩으로 삼으려 하자.,산홍

“세상 사람들이 대감을 5적의 우두머리라고 하는데,

비록 천한 기생일지라도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

 

근대 100景]>20<유곽의 탄생과 그늘

 

이지용은 1904년 러일전쟁 때 외무대신 임시서리로

대한제국의 영토를 일본군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허용하는 한일의정서 체결 댓가로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에게

1만원을 받았고, 이때 산홍에게 주려한 돈이 1만원이었다는 후문.

.

1919년 기생들이 3·1만세운동에 대거 동참한 것은

밤 문화까지 잠식한 일제에 대한 항거이기도 하였다.

일본인들이 조선에 진출해 전개한 고리대금업과 매춘업.

군산에 일제 강점기,시대에 유곽,(기생집)에 가본적이 있어요. 내가 갈적에는 중국,학교-였어요. 그-근처에 일본에 이층집도 가보았고요. 옆에 문을 열면 방이 있어요. 앞에 열어놓았네요. 2014년 12월 23일 오전 10시 29분에 작성 중인 글입니다.

일제때.,군산 유곽.

 

'사쿠란' 벚꽃과 금붕어 그리고 허무

 

유곽

유곽.

사쿠란

사쿠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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