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기본 자료실

조선시대 - 의녀(醫女).

작성자선경나라|작성시간16.11.18|조회수2,002 목록 댓글 2

[펌] 의녀 퍼레이드  


조선시대에만 존재했던 특이한 직업 중 하나.,의녀(醫女).

남자의원이 여성치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고려시대.

1406년(태종6년) 조선건국 14년 만에 제생원에 설치된.,의녀제도.

 

"남자 의사가 여인의 살을 주므르니.," - 태종실록. 

 

1406년 제생원지사 허도(許衜)의 건의로 의녀제도를 실시.

관비를 대상으로 가르쳐 의술을 익힌 의녀는 부녀자를 치료.

조선 초기에는 의녀의 활동 무대가 한양에 국한되어 있었다.


의녀로 돌아온 이요원,'단아함 그 자체' 

 

1423년(세종 5) 각도 계수관의 관비를 뽑아 의술 교육.

의술을 배운 의녀는 본거지로 가 부녀를 치료하게 하여

차츰 의녀의 활동 무대가 한양에서 지방까지 확대되었다.

 

세종은 의녀의 치료 활동이 효과를 거두자

의료 혜택을 확대하기 위해 의녀 수를 늘렸다.

 

연산군대에 들어와 이들의 주 임무는 한양 각 관청에서

잔치가 있을 때마다 화장을 하고 기생으로 참가하는 것.

중종 때 의녀를 의기(醫妓)라 하여 조관들의 연회에 초청.


청금상련(廳琴賞蓮)/연당야유(蓮塘野遊) -혜원 신윤복

                                                                          연당야유도.

 

1510년(중종 5) 이후 의녀를 연회에 참가 못하게 했으나

지켜지지 않았고 의녀제도는 조선 후기 고종 때 약 80명.

고종 때 서양 양의사가 궁중에 들어오면서 점차 없어졌다.

 

...........................................

............................................

 

조선 <경국대전>에 의하면 3년에 한번 150명을 뽑았고
실력이 출중한 70명은 내의원, 나머지는 지방 의원에 소속

이런 의녀에 대한 논의가 처음 이뤄진 것은 태종 6년 3월16일.

 

 이날 제생원 지사로 있던 '허도'는 상소를 올렸다.

"부인이 병이 있는데, 남자 의원으로 하여금 진맥하면

부끄러워 그 병을 보여주지 않아 사망에 이르곤 합니다."

 

"원컨대 창고나 궁사의 어린 여자 아이 열 명을 골라

맥경과 침구의 법을 가르쳐 이들로 하여금 부인들을

치료하게 하면, 전하의 덕에 큰 보탬이 될 듯 합니다."

 

태종이 이 말을 옳게 여겨

어린 여자 아이 10명을 뽑아서

제생원에서 의술을 가르치게 했다.

 

.............................제생원.................................

백성의 질병 치료와 구호사업, 의녀 양성, 향약재 수납,

향약에 관한 의학서 편찬 등의 의료사업을 수행한 기관.

1397년(태조 6) 좌정승 조준, 우정승 김사형 건의로 설치.

 

혜민국과 같이 각 도에서 매년 올라오는 향약을 수납

고려말 향약방서 경험방을 모아 향약제생집성방 30권 편찬

1401년(태종 1) 환자의 존귀를 가리지 않고 왕진하여 치료했다.

 

1405년에는 병들어 오갈 데 없는 백성을 모아 보살폈다.

1406년에는 동녀 수십 명을 택해 맥경과 침구법을 가르쳐

부인의 질병을 전문으로 치료하도록 한것이 의녀 양성의 시초.

 

1409년에는 별좌를 두어 귀천을 가리지 않고 병자를 치료

1412년에는 한양 개천 작업에 동원된 역군들이 병이 있을 때

전의감· 혜민국과 함께 치료, 1460년(세조 6) 혜민국에 합쳐졌다.

.......................................................................................

 

이렇게 해서 조선시대 역사 상 최초로 의녀가 탄생했다.

여의(女醫)는 중국이나 서양 역사 상 찾아보기 힘든 직업.

이때 뽑은 10명 중에 여의로 성장한 사람은 모두 7명이었다.

 

7명 중 의녀 역활을 제대로 할 수 있었던 인원은 5명 뿐

제생원은 5명으로 부인병을 치료하는데 한계가 있었기에

또 다시 의녀를 뽑아줄 것을 요청한 때가 1418년 6월 21일.

 

당시 제생원의 요청을 받아 예조에서 올린 글.

"의녀는 모두 7명인데, 재예를 이룬 자가 5명,

이들을 여러 곳에 나눠 보내면 늘 부족합니다."

 

"바라건대, 각사 비자(婢子)들 중 나이가 13세

이하 10명을 더 정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태종은 그 요청을 받아들여 10명의 의녀 후보생을 선출

이렇듯 초기에는 부정기적으로 의녀를 뽑아 양성했지만,

의녀의 필요성이 더 생기면서 3년마다 정기적으로 뽑았다.

 

그후, 의녀는 관비들이 매우 선호하는 직업으로 정착

이들 의녀에 대한 교육은 초기에 모두 제생원에서 했었다.

세조 이후 제생원이 사라지며 전의감과 혜민서에서 의녀 교육

 

교육은 2명의 교수 중심으로 이뤄졌고,

교수 이외에 훈도들이 보조 기능을 했다.

2명의 교수는 문신이며, 그 아래 의원을 배치.

.

의녀는 총 3단계로 나뉘어 있는데,

첫단계는 초학의(初學醫)라고 하고,

3년간 기초적 학업에만 전념하는 시기.

 

3년 동안 천자문, 효경, 정속편(正俗篇) 등 글을 익히고,

인재직지맥, 동인침혈침구경, 가감십삼방, 태형혜민화제국방,

부인문산서 등 의서와 산서(算書 : 오늘날 수학)를 배워야 했다.

 

지방에서 중앙으로 올려보내는 의녀들은

글을 익히게 한 다음 중앙으로 올려보냈다.
의녀의 초학의 기간 동안 학습 진행은 이렇다.

 

제조가 매월 상순에 책을 강독하면,

중순에는 진맥과 약에 대해 교육하고,

하순에는 혈의 위치를 교육받아야 했다. 

 

연말에 제조가 방서(方書)와 진맥, 명약(名藥), 점혈(點穴) 등을

강의 후 1년 동안 강의에서 받은 점수를 계산해 성적에 따라 조치

 

첫해, 불통이 많아 낮은 성적이 나온 사람은 1명을 탈락시켰고.

둘째 해는 2명, 셋째 해 불통은 원래 신분인 관노로 돌려보냈다.

이때 관노로 돌아간 빈자리는 비자 중에 한 명을 선택해 채웠다.

 

초학의 3달 동안 세 번 불통을 받으면., 혜민서 다모(茶母)

다모 생활 중 성적이 좋지 않으면 관비 신분으로 돌아갔다.

초학의 3년 기간이 불통 점수 없이 끝나면., 간병의(看病醫).

간병의 기간에 의원을 보조하고 병에 대해 익힌다.

이 간병의 생활은 기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다.

특정 분야를 익혀 뛰어난 의술을 보이면 내의로 발탁

 

그렇지 않으면,

40살이 될 때까지

간병의로 남아야 했다.

 

40살이 지났는데도

전문 분야가 없으면

관노로 돌아가야 했다.

 

간병의 중 성적이 뛰어난 사람

네 명을 매달 뽑아 급료를 지급.

.

간병의 중 뛰어난 능력을 보인 2인을 내의녀(內醫女)로 임명

내의녀가 되면 비로소 월급이 나왔고, 녹전(綠田)은 없었지만

계절에 한번씩 녹봉을 받는 체아직(遞兒職)에 임명될 수 있었다.

 

체아직은 명실공히 관직을 얻게 되는 것이다.

내의녀 중 뛰어난 의녀는 왕을 보살피는 어의녀


장금 (중종의 어의녀) 

 

어의녀는 내의녀 중 최고 고참이 하게 되는데,

개중에는 60살이 넘도록 근무한 사람도 있었다.

어의녀 '대장금'은 약 30 년 동안 어의녀로 지냈다. 

 

8도 관비 중에서 동녀(10~15세)로 뽑힌.,대장금

한양 제생원에서 사서(四書), 의학서적까지 독파

'조선시대 가장 출중했다.'는 의녀.,대장금(大長今).

 

1515년(중종 10년) 대장금은 

사실 상 왕실 및 임금의 주치의.

 

의술은 물론이고

요리 솜씨도 뛰어나

중종의 총애를 받았다.

 

중종의 신임을 받았던 것은 분명하지만,

'요리사'였다거나 '어의'라는 기록은 없다.


'대장금2', 10월 목표로 제작 활기.."주연배우들 논의 중" 

 

대장금 드라마에서 그 어미는 궁녀였다가

궁을 나와 군관과 결혼해 낳은 딸이라는데

성은 ‘대’씨이고 이름은 ‘장금’인듯 여겨진다.

 

중종실록에 그녀의 이름이 10번 정도 등장.

기록상 1515년부터 1544년까지 의녀로 근무.

 

1522년 중풍과 감기를 앓던.,자순대비.

그 병이 호전되자 의녀 장금과 신비에게

쌀과 콩을 각각 10섬 씩 하사했다는 기록.

 

1524년 중종은 의술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하며

의녀 대장금에게 전체아(全遞兒)를 주라."는 어명.

대내(大內 : 왕과 왕비, 대비전)를 출입하며 상주 근무.

 

중종 19년 12월15일 대장금을 의녀 대표로 삼는다.
중종 28년 2월11일 왕의 오랜 병을 고친 공로로 포상.
중종 39년 1월29일과 2월9일에 각각 상을 받은 바 있다.

 
두번에 걸쳐 "은비"라는 의녀도 같이 상을 받았는데
장금(長今)의 보좌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중종실록 39년 10월25일 의녀 장금이 나와 말하기를.
"어제 저녁 상께서 삼경에 한번, 오경에 잠깐 잠드셨다.
소변은 잠시 통했으나 대변이 불통한지 이미 3일 되셨다."


박세거와 홍침이 들어가 진맥하니

왼손의 간신맥(肝腎脈)은 부(浮)하며

긴(緊)하고 오른손 맥은 가늘고 느렸다.


다시 약제를 의논하여..오령산(五쫢散)에
마황(麻黃)·방기(防己)·원지(遠地)·빈랑(檳○)·

회향(茴香)을 첨가한 탕약을 다섯 차례 드렸다."

 

 '박물관 100년 여민해락' 창경궁 환경전, 대한제국 제실박물관 전시실

                                                                       창경궁 환경전.


대장금이 중종을 치료한 창경궁 환경전.

환경전은 왕이나 세자가 기거했던 곳이다.

1544년 이곳에 머물며 중종을 돌본.,대장금.

 

"의녀 장금에게 쌀과 콩을 도합 5석

은비에게 쌀과 콩을 3석씩 하사하라."

 

중종의 병을 치료한 의녀 장금에게

상금을 내리는 기록이 자주 나온다.

 

"의녀 장금만 남기고

제조와 남자의원들은

해산해 돌아가라." 어명.

.
중종실록 39년 10월26일 기록에 최초로
장금을 언급하며 "여의"라는 단어가 나온다.

왕은 이때  나의 증세는 여의가 잘 안다고 했다.

 

 중종실록 39년 (1544년) 10월29일

왕을 완쾌시키는 일을 끝으로 더 이상

장금(長今)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의"라는 단어는 이후에도 종종 나타난다.
의녀 대장금(大長今)은 약 30여년간 왕실에 공헌했다.
다만, 그녀의 행적에 대해 더 이상 뚜렷한 자료는 없었다.

 

...........................

............................

 

대장금이 사실 상 중종의 주치의 였음을 방증하는 자료들.

특히, '내의원 총책임자' 제조 홍연필 등이 불만을 터뜨렸다.

의녀는 교대 근무하면서 근무 기간 만, 급료를 받는 체아직(職).

 

의녀 장금은 밤새도록 중종 곁을 지키며

왕의 병세를 체크했음을 알려주는.,기록들.

 

"의녀의 진맥이 어찌 의원의 진찰만 하겠읍니까?

천박한 의녀의 식견보다는 의원 진맥을 받으소서"

 

중종의 진료 책임자 '내의원 제조' 장순손과 김안로

장금을 시기하고 질투해 의술.,공로 다툼을 일삼았다.

그러나, 중종은 의녀 장금의 의술을 신뢰한듯 여겨진다.

 

왕세자빈 몸살 감기에는 세금, 소장이 등 2급 의녀가 배치.

중종은 늘 온갖 병에 시달려 장금은 항상 왕 옆에 대기상태.

중종39년 치통, 종기, 대변불통, 어깨 통증까지 겹쳤던.,중종.

 

총출동된 의녀 중 헌신적으로 봉사한

장금, 은비, 세금, 소장이, 계금 등 5명.

 

조선시대 역대 왕은 믿고 의지하는 의사가 있었다.

선조는 허준, 광해군은 허임, 인조는 이형익을 신뢰.

왕의 신체와 관련한 정보는 나라 극비 사항에 속했다.

 

그렇기에 왕의 건강을 챙기고 심기를 안정시키는

의약에 관한 총책임은 유학자인 사대부 몫이었다.

 

왕의 치료는 '내의원 제조'가 맡았지만

그 논리적 타당성과 검증은 유학자가 맡았다.

조선 유학자 이이교(李利敎)는 이렇게 설명했다.

 

 “일찍이 술수에 관한 책을 본 적이 있다.

점을 치거나 의술을 펴거나 관상을 보는 것,

풍수를 논하는 것은 각각 하나의 기능에 치우친 것.

 

그것들은 심신을 다 보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유학은 성현이 준행한 바이며

오직 의리로써 설하였기에 입문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세상의 중심은 유학이라 외친 것이다. "

 

조선시대 의학 이론은 주역, 음양오행, 구성궁법(九星宮法)

'소우주' 인체 자연철학 유학자가 임상 어의를 제치고 주류.

 

왕, 왕비, 대비가 중병에 걸리면

유학자 어의, 내시부 종3품 상약

협의체에서 조제 시약을 주관했다.

 

중종(재위 1506∼1544)이 가장 신뢰하고 의지한.,장금.

유학자 세상에서 내밀한 문제까지 치료를 맡긴.,여의(女醫).

'남성 위주 사회에서 그녀는 어떻게 중종의 신뢰를 얻었을까?'

 

중종 13년 어의 김순몽, 하종해, 유영정

내시부 종3품 상약 4인 진료 공로를 인정.

각각 쌀과 콩 20석(40가마)가 하사되었다.

 

중종 17년 의술 공로로 어의 하종해에게

준마 1필과 쌀 콩 각 10석(20가마)를 하사.

 

어의 김순몽과 막상막하 의술을 지닌.,하종해

내관(내시) 이숙춘, 유영정, 그리고 의녀.,장금.

'질병 백화점' 중종을 둘러싸고 벌린.,의술 각축전.

 

중종 25년 치과 병이 재발되어 대내가 떠들썩할때

'성종때 치과 의녀로 활약했던., 장덕'의 제자 장금이

중종의 치과 의사로서 크게 활약해 치료한 적이 있었다.

 

1515년 중종 10년 2월 25일 원자 인종을 살리는데 결정적 기여

‘조선왕조실록’에는 치료에 관한 세세한 부분은 밝히지 않았으나

대장금이 중종에게 총애를 받았다는 사실은 기록을 통해 전해온다.

 

중종 5년 관원의 연회에 의녀를 부르는 것을 엄금하는 법

중종 30년 의녀 희롱 사건으로 '대사헌 허항'을 체직(遞職).

혜민서 제조 허흡이 여의들을 술먹이고 희롱한 사건을 문책.

 

장금의 건의에 따라

중종이 처리한 사안들 .

 

중종시대에 이르러서 의녀들과의 향음을 금지하고

본업에 충실하도록 단속했는데 ,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 "약방기생"이라 불리울 만큼 연회에 동원된다.

 

..............................

..............................

 

의녀 활동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왕은 연산군.

궁중 여성, 사대부 여성 범죄에 대해 수색과 체포

혼인 혼수 사치여부를 감찰하는데 파견되기도 했다.

 

때에 따라서 죄인에게 사약을 가져다주는 역할.


연산군은 ‘채홍준사’ 관청을 두고 의녀를 기생화 했다.

연산군 때 의녀는 의약보다는.,‘약방기생’ 역이 주임무

조선 말까지 의녀가 되기 전까지는 약방기생이 기녀 역. 

 

의녀는 시가에 능하며 글에도 능했기 때문에 

사대부와 대적할 정도의 지적 수준을 겸비했다.
선조 때 내의녀 '애종'은 의술과 학문이 출중했다.

 

그러나, 애종은 끼와 바람기가 너무 심해 

의녀직을 박탈 당하고 궁궐에서 쫓겨났다.

또한 순조 때 편찬된 <진찬의궤>를 보면

각종 연회의 무희들은 경기와 향기로 구성

 

'경기는 내의원과 혜민서 의녀,

상의원의 침선비 중에서 뽑았고

향기는 각 도에서 선발했다’는 기록.

 

...........................................

...........................................

 

의녀는 일반 궁녀와 달리 결혼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의녀들은 관비 신분이었고

일반 관비보다 천시해 결혼 생활이 쉽지 않았다.

 

결혼 전 이미 정절을 잃은 경우가 허다했고

아비 없는 자식을 키우는 경우도 다반사였고,

세간에서는 관기 못지 않은 추잡한 여자로 취급,

 

결혼을 여러 차례 하기도 했으며

결혼해 구박받거나 버림받기도 했다. 

의녀에게 가장 괜찮은 결말은 양반의 첩.

 

의녀를 첩으로 삼을 때는

의녀 대신에 여종 한명을 바쳐서

관비로 넣으면, 의녀는 양인이 되었고

자녀는 '서출' 양인 신분으로 살 수 있었다.

 

.........................................

........................................

 

조선시대 신분 상 천인일 수밖에 없었지만 ,

체계적인 전문 교육을 받았던 최초의 여성들.

왕실 및 명문가 며느리 간택에도 동원된.,의녀.

 

반드시 배꼽 및 은밀한 부위까지 검사해 확인했다.

"남자 어깨, 여자 배는 건강한 아들을 낳을 수 있다."

"오목한 배꼽은 아이를 잘 낳고, 얕으면 잘못 낳는다."

 

"배꼽은 우리 몸의 중심이며

오장육부의 관문으로 재운과 건강,

운세까지 판단할 수 있다"고 여겼다.

 

TV, 사극을 보면 왕실에서 의원들이 진맥하는 모습

의원과 환자 사이에 발이 처지고, 실끝을 통해서 진맥

TV 연속극 대장금이나 허균을 보면 의녀들이 많이 등장.

 

태종14년 제생원에서 의녀를 처음 선발.

의녀의 교육은 제생원에서 담당하였지만,

제생원이 혜민국과 병합되며 혜민서 담당.

 

세조 이후 제생원이 사라지면서

전의감과 혜민서에서 의녀를 교육.

 

2명의 교수가 중심이 되어 가르쳤고,

교수 외에 훈도들이 보조 기능을 했다

 

혜민서는 의약을 전매하고

서민 질병을 치료하던 기관.

 

 '구암 허준' 김주혁, 혜민서 아비규환 목격, 충격받아

 

제생원에서는 의녀를 뽑아 맥경(脈經), 침구(鍼灸) 등을 가르쳤다.

중종 때 의기(醫妓)라는 이름으로 의녀를 조관(朝官)들 연회에 초청.

한편 혜민서 의녀는 약방기생(藥方妓生)이라 하여 관기 중에서 제1품.

 

의녀의 교육 과정은 3단계로 이뤄졌다.

책 읽는 기초를 공부하는.,초학 기간 3

의원 보조 환자 간병인으로 기술을 익혔다.

 

그 실력을 인정 받으면 내의녀로 뽑혔지만,

40살까지 뽑히지 못하면 관비로 되돌아갔다.

내의녀는 내의원에서 근무하며 월급이 나왔다.

 

세종 5년에는 지방에도 의녀를 두기로 하고,

충청,전라,경상도에서 12~13세 정도의 똑똑한

관비 2명씩 선발, 제생원 의녀들과 함께 가르쳤다.

 

이때 교육은 내의, 간병, 초학의 등 3등급

교육을 이수하면, 지방관서 의녀로서 배치.

의녀의 자식은 평민 신분을 가질 수 있었다.

 

의녀의 교육 과정은 경쟁이 치열하였다.

무능하면 탈락, 잘하면 장려금으로 보상

의녀 되기도 힘들고 의녀 생활도 어려웠다.

 

의녀는 진맥, 침과 뜸약의 조제 등 지식과

전공에 따라 맥의녀, 침의녀, 약의녀로 구분

이들의 역할은 어디까지 의원을 보조하는 것.

 

침의녀는 의원이 정해주는 곳에 침을 놓았고,

약의녀는 의원이 결정해주는 대로 약을 조제

 

의녀는 여성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생겨났지만,

이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환자를 돌보았다.

남녀유별이 적용되지 않는 천민 여종이기 때문이다.

 

다만, 왕실 여성이 아플 경우에

진맥은 의녀가 할 수 밖에 없었다.

 

의관 어의는 정3 당상관에 오르기도 했지만,

의녀는 왕실 기녀처럼 품계가 주어지지 않았다.

다만 능력과 지위에 따라 곡물 급여로 지급받았다.

 

환자가 임금인 경우에 그 침실에는 의녀만 출입 가능

그러한 경우에 의녀가 상대할 수 있는 남자는 임금뿐.


 

의녀 집안은 양인 천민에게 부과하는 조세나

요역의 부담으로부터 감면 받거나 면제 받았다.

, 그녀들은 공로에 따라 물질적 포상을 받았다.

 

포상 중 으뜸은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 양인이 되는 면천

기회는 드물었지만, 의녀는 신분상승 기회가 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의녀는

의료에 관한 일 만을 한걸까?

 

그녀들은 여성범죄 혐의자나,

여성 피해자에 대한 수색, 조사

수사관은 의녀들이 맡아서 했다

 

사치 여부를 단속할 때 규방까지 들어가 조사를 담당.

그러나, 그녀들이 맡았던 또 다른 역할은 기녀의 역할.

연산군이 잔치의 흥을 돋울때 기녀와 함께 의녀를 동원.

 

그후 의녀는 잔치나 연회 때마다 불려 갔다.

의녀들이 약방 기생이라 불리게 된 배경이다.

그후 국가 연회, 양반집 잔치에도 불려 다녔다.

 

사대부들이 교양을 갖춘 의녀들을 통해

잔치의 격을 뽐내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의녀는 내외법 시대적 요구에 의해 탄생

천민 여성이지만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유일한 집단.

의원을 보조하고, 본업 외 수사관기생 역할까지 했다.

.

연산군 시절부터는 기생 역활이 강화되었기에

접대 행사에 동원될때 긴치마, 색깔 옷을 입었다.

그당시 궁궐 기생은 3 등급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기생 최상위 등급은 한시에 능통해

중국 사신과 시로 문답할.,한문 실력.

갓 과거에 급제한 관리보다 출중했다.

 

그당시 중인 신분인 남자 의원보다

한문실력이 월등했던 의녀도 있었다.


'마의' 첫촬영 돌입…이병훈 감독 "궁녀 큐, 의녀도 액션!" 

 

의관은 중인 계급에서 출발했다가

어의가 되면, 양반으로 승격되었다.

 

조선시대 "약방기생"이라고도 불리웠던.,의녀.

내의원은 약방이고, 관비는 기생이라 붙여진 이름.

궁녀에게 침을 놓아 주거나, 비빈 해산에 조산원 노릇.

 

한편, 궁중의 크고 작은 잔치가 있을 때에는

기생이 되어 원삼을 입고, 머리에 화관을 쓰고,

손에 색동 한산을 끼고 춤추는 무희 역할도 수행.


그 시초는 태종 때 창고궁사(倉庫宮司) 어린 관비 중

수십 명을 뽑아 진맥과 침 놓는 법을 가르친데서 시작

그러나, 그 무렵에는  실제로 별 성과를 보지 못했었다.

 

연산군 대에 들어와서 이들의 주 임무는

한양 각관청 잔치에 기생으로 참가하는 것.

 

갑오개혁 이후 서양의학이 도입 되기 전까지,

간호사 역할을 맡았던 조선시대 전문직 여성.

의녀는 종아리 드러난 치마에 간편한 옷차림.

 

조선 말 고종 때 의녀 숫자는 80명에 달했다.

그후 양의가 궁궐에 들어오며 점차 없어졌다.

 

1882년 고종 19년에 혜민서, 의녀제도 폐지.

의술 외 궁중가무, 악기, 노래를 했던.,의녀들 .

조선시대 관비는 여악(女樂), 의녀, 창기(娼妓).

 

혜민서(惠民署)에 예속된.,약방기생(藥房妓生)

 

갑신정변을 전후 노비, 관비 제도가 폐지되고

서양의학에 의한 왕립병원(王立病院) 신설 직후

의녀에 대한 선입관 때문에 간호사 지원자가 없었다.

 

장악원(掌樂院)에 예속되어 있는 일반기생(一般妓生)

선조 때 장악원(명동 내무부청사 옛터)은 한말까지 있었다.

1895년 갑오개혁 때 궁내 장례원(掌禮院)으로 이속 후 소멸.

 

조선 중기 유의태 문하에서

동문수학한.,예진아씨와 허준.

 

허준의 사상의학 모델을 자처해 옷을 벗었던 예진아씨.

애틋한 정신 교감을 나누는 동문 사이는 드라마적 허구.

그러나, 의료인으로서 자존심과 긍지는 사실에 가까웠다.

 

 장금, 장덕 , 애종 , 송월 등

조선시대 이름을 떨친.,의녀들.

.

특히, 조선 5백년사에서

여자 의사로 평가 받았던

제주 의녀.,김만덕(金萬德)

 

치과, 이비인후과.,명의.

 

1739년 영조 15년~1812년 순조 13년)

조선시대 여자 상인이자 기녀이자.,의인.

기근이 닥치면 재산을 풀어.,민초를 구제.


신사임당, 허난설헌, 김만덕 

 

기생이면서도 의원이었던 김만덕은

약재가 부족하자 <본초강목>에 따라

약재 캐러 다니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약재가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자

약재상이 되고, 거상이 된.,김만덕.

 

여생은 제주도에서

의원으로 지냈는데

정조가 어의수반 임명.

 

의원 일을 하는 여자들의 총책임자

어의수반으로 가난한 제주도 도민들을

치료하고 돌보며 여생을 마쳤다고 전해온다.


제주도 김만덕 비 

모충사

제96주년 3.1절에 가본 사라봉 제주 모충사 

  

1907년 일제의 고종황제 강제 퇴위에 항거한 제주의병

그 혼이 담기고 넋을 기리는.,제주도 사라봉 기슭 모충사

조선시대 제주의 대표적인 의녀 김만덕 비도 그곳에 있다.


제주도 김만덕 비 

제주의 혼혈이 담겨진 모충사를 다녀오며~~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로방안 | 작성시간 16.11.18 대단하십니다..
    이런 자료를 어디서 발췌하셨나요...
    덕분에 궁중의 의료실록을 잘 알겠네요...
    이말산을 걷다보면 내시들의 비석들을 종종 볼수 있는데..
    그중에 약재를 담당했던 내시의 비석이 가끔 보이더군요...^-^
  • 작성자선경나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11.20 .
    조선왕조 519년 역사 상에서
    "조선왕실과 운명을 같이 했다."는
    중인 가문들의 묘역.,이말산(苡茉山).

    은평구 뉴타운 공사 때
    많이 훼손되었다고 합니다.
    그후 공원화 되며 원형 복원 중.

    잊혀진 역사, 묻혀진 사료 등
    개인적으로 수집한 자료들을
    기록으로 남겨.,알리려 합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