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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 세종대왕의 업적.

작성자선경나라|작성시간16.11.20|조회수1,020 목록 댓글 2

세종대왕 명언  


"내가 꿈꾸는 태평성대는

백성들이 하고자 하는 일들을

원만하게 할 수 있도록 하는 세상."


"백성들이 나를 비판하는 내용이 옳다면,

그것은 나의 잘못이니 처벌해서 안되는 것."


"설령 오해와 그릇된 판단으로 나를 비판했다고 해도

그런 마음을 아예 품지 못하도록 만들지 못한.,나의 잘못.

나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니 어찌 백성들을 탓할 수 있겠는가?"


백성을 지극히 사랑한 애민정신에서 비롯된 정치.

세종은 백성을 자식같이 아내같이 사랑한 어진 성군.

훈민정음 창제도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에서 비롯되었다.

 

세종은 백성들에게

자주 은전을 베풀었고,

사면령을 빈번히 내렸으며,

국가적 사업에 징발된 군사들은

되도록 기한 전에 돌려보내려 애썼다.


노비의 처우를 개선해주기도 했고

주인이 혹형을 가하지 못하도록 했고,

실수로라도 노비를 죽인 주인을 처벌했다.


세종 이전에는 7일에 불과하던

관비의 출산휴가를 100일로 늘렸고,

임산부의 남편에게도 휴가를 주었으며

출산 1개월 전에도 쉴 수 있도록 배려했다.


18남 4녀 자녀의 출산을 지켜본 왕이었기에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래서, 노비에게도 산전 산후 육아휴직을 준 것.

 

당시 노비는 사람이기보다 재산으로 여긴 시대.

노비에 대해 이렇게 관대한 규례를 만든 세종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인본주의 정책을 펼친 통치자.


세종(1397년 음력 4월 10일~1450년 음력 2월 17일)

재위기간(1418년 ~ 1450년)은 조선의 제4대 왕이다.

그의 업적을 탐구하면, 국정운영의 '리더쉽'이 보인다.


세종대왕은 태종의 셋째 아들.

원래, 양녕대군이 왕세자였으나

양녕대군 폐립으로 왕위에 오른 왕.


"나는 이 세상에 잔재한 모든 악몽과 슬픔을

모두 뒤집어쓰고 갈 것이니 너는 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하고도 어진 성군이 되어라."  -태종 -


조선의 개국은 태조 이성계에 의해 이뤄졌지만

조선왕조의 국가적인 틀이 잡았던 태종 이방원.


왕자의 난을 2번이나 일으켜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을 모조리 숙청한후 왕위에 올랐던 태종이

학문이 뛰어나고 성품이 훌륭한 3남 충녕대군에게

양위함으로써 조선은 황금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태종은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자신의 외척세력까지 정치권에서 몰아내고

세종의 치세에 걸림돌이 될 인물들은 모두 제거.


양녕대군 폐립(廢立)에 반대한 이조판서 황희

1413년 초 태종의 노여움을 사 좌천(左遷)되었다가,

1418년(태종 18년) 충녕대군(세종) 세자 책봉을 반대.


결국, 황희는 폐서인되어, 교하(파주)에 유배.

이 해에 태종은 세자에게 양위하고 물러나는데,

이때 교하가 가깝다는 이유로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남원으로  유배지가 옮겨져서 5년을 더 머물러야 했다.


그러나, 상왕 태종의 진노가 풀려 1422년(세종 4년) 태종

그를 소환하도록 권고, 세종에게 부탁하여 곧 등용토록 했다.


세종은 황희가 자신이 세자에 책봉되는 것을 반대했고

외숙부들을 죽음으로 몰았지만, 그의 사람됨이 바른 것을 알고

즉시 유배지에서 불러들여 중용했다. 황희는 세종에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정치가였고, 국가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세종은 그의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중용.

1423년 예조판서를 거쳐 강원도관찰사로 나가 구휼을 잘 하고

민심까지 얻었기에 황희는 더욱 더 세종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황희는 크고 작은 잘못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세종의 비호를 받아 가벼운 처벌을 받거나 복직.


"목수가 큰집을 지을때 가장 필요한 것은 큰나무.

목수는 흠집 있는 부분만 짤라내 대들보로 사용한다.

썩지 않고 고른 크기 작은 나무들은  모두 석가래 용도.

경들은 흠집 없는 대들보 용도 고목을 보았는가?" - 세종 -


............................황희......................

고려 말, 조선 개국에 반대해 두문동에 은둔.

태조가 삼고초려 심정으로 두문동을 찾았을때

그곳에 은둔한 72현 고려의 석학들이 천거한 인물.


그들 중 가장 젊고 명석한 인재.,황희.


사리가 깊고 청렴하며, 충효가 지극.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침착하였다.

학문에 힘써 높은 학덕을 쌓았던 황희.


"공신은 아니지만 나는 공신으로서 대우했고,

하루라도 접견 못하면 반드시 불러 접견했으며,

하루라도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 태종-.


황희는 농사개량에 유의해 곡식 종자를 배급하고,

각 도에 뽕나무를 심어 의생활을 풍족하게 하였다.

한편, 북방 야인과 남방 왜에 대한 국방방비책을 강구.


인권에 유의해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을 면제.

태종 재위 시대의 국가기반을 확립하는데 공헌하였다.

세종대에는 의정부 최고관직 영의정부사로 중용되었다.


중앙정부와 지방의 백성들의 마음을 진정(鎭定)시키면서,

4군6진의 개척,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세종 말기에 세종의 숭불과 연관해 궐내 내불당(內佛堂)을 두고

일어난 세종과 유학자 중신 간의 마찰을 중화시키는데 공헌했다.


이처럼 그는 왕을 보좌해 세종 성세를 이룩하는데 기여.

이로써 조선왕조에서 가장 명망 있는 재상으로 칭송되었다.

1452년(문종 2) 세종묘에 배향되고, 파주의 반구정에 영정 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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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는 태종보다 4살 연상이었지만

태종은 친구처럼 아끼고 배려한 인물.


세종의 부름을 받고 조정에 들어온 황희는 당시 60세.

은퇴를 앞둔 나이이지만 무려 20년 넘게 재상으로 활약.

그중 18년을 영의정으로 재임하고 세종 재위때, 87세에 은퇴.


세종은 은퇴하는 청백리 황희에게

노후 대책을 위해 땅 5000평을 하사. 


황희는 파주에 반구정이란 정자를 짓고

말년을 보내면서 후대에 큰 덕을 남겼다.


흔히 조선시대 청백리를 언급할 때 황희정승을 첫째로 꼽는다.

황희는 태조, 정종, 태종, 세종 4대 임금에 걸쳐 74년간 관직 생활.

90세에 타계한 조선 제일의 재상으로 오늘날까지 추앙 받는 명상(名相). 


세종은 자신의 즉위를 반대한 황희를 나라를 위해 중용.

나라를 위해 중용한 인재를 신뢰하며 감싸며 보호했던 것.

그의 포용력 있는 인사관리는 그가 성군 임을 알게 해준다.


어느 날 세종이 밤늦게까지 글을 읽고 있었는데

멀리 집현전에 불이 켜져 있어 궁금하게 여긴 세종은

내관에게 어떤 학사가 공부를 하고 있는지 알아오게 하였다.


 "집현전 학사 신숙주가 공부하고 있사옵니다."

이에 감격한 세종은 자신도 계속 글을 읽었다.

닭이 두 홰를 운 뒤에야 집현전의 불이 꺼졌다.

 

세종이 거동하여 보니 책상에 엎드려 잠든 신숙주.

세종은 자신의 곤룡포를 신숙주 등에 덮어 주었다.

이토록, 집현전 학자들을 자신의 몸처럼 보살핀 성군.


신숙주와 청의동자 


세종의 선친 태종에게는 4 아들이 있었다.

1 양녕대군, 2효령대군 3충령대군, 4성령대군.

태종이 왜 3남 충령에게 양위했는지 알 것 같다.


삼복 더위에는 옥사에 갇힌 죄수에게도

동빙고 얼음을 나눠주게 했던 성군 통치자.

추수기 벼농사 형편을 돌아보던 모습도 달랐다.


일산(日傘)과 부채를 쓰지 않았고, 들판을 지나다가

벼가 잘되지 못한 곳에선 말을 멈추고 농부에게 까닭을 묻고

마음 아파 점심을 들지 않고, 돌아오던 백성을 진정 사랑한 성군.


 하지만, 겨울 강무 때는 백성들의  군사훈련을 강행했다.

 “강무란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이며, 이를 행하지 않는다면

 무비(武備)가 쇠퇴할 뿐, 유비무환 왕도에도 위배된다.”-세종 -

 

조선왕조 519년 역사 상에서

가장 위대한 성군 통치자.,세종.

오늘날까지 지도자로서는.,롤 모델.


선친 태종이 피흘려 닦아놓은 국가 기틀 위에

민생을 위한 정치로서 국정을 안정시켰던 세종.


상왕인 태종의 10년간 섭정과

세자(훗날 문종)의 대리청정이

세종의 치적을 더욱 빛나게 했다.


특히, 세종이 건강할때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겨

말년에 세종이 와병 중에도 국정의 공백을 없앤 것은

훗날, 조선의 역대 왕들이 감히 따를 수 없던 치세였다.


1418년부터 145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418년부터 1422년까지 태종이 대리청정.

부왕 태종이 훙서한 후 '1422년~1442년' 친정.


1442년부터 1450년 승하할 때까지

문종왕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


세종 재위 때 4군6진 설치 및

훈민정음, 천문과학 조선 입국은

아들(문종)의 대리청정 때 이뤄진 것.


.................문종(재위 1450년 ~ 1452년)..............

는 향(珦), 는 휘지(輝之)이고 문종은 묘호(廟號)

조선의 왕 중에서 적장자로 왕위에 오른 최초의 왕이다.

1421년에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왕세자로 책봉된 다음해인 1422년에 조부 태종이 운명한다.


1450년 세종이 죽자 문종은 8년의 섭정을 끝내고

조선 5대 왕으로 등극한 문종은 학문에 뛰어났고

세자 때 이미 천문, 산술, 서예 등도 뛰어났던 인재.


세계 최초 정량적 강우량 측정기 측우기를 발명.

특히, 천문학과 산술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던 천재.

1421년부터 1450년까지 29년간 왕세자로 지내는 동안

문신과 무신을 고루 등용하고, 언론을 활성화해 민심 파악.


아버지 세종의 정치를 곁에서 대리청정으로 보필했다.

1442년 세종이 병상에 누워 국정을 다스릴 수 없게 되자

세종을 대신하여 8년간의 대리청정 기간 동안 국사를 처리.


1450년 음력 2월 세종이 승하 후

그 뒤를 이어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리하여, 국정공백이 전혀 없었다.


이미 세종 재위 때 대리청정을 하였기에

즉위 직후에도 정사처리에 문제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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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자주 국방력을 토대로 하여
천문기기 과학, 문화, 예술, 농업 등
모든 민생 분야를 고루 발전시킨.,세종.


재위 동안에 찬란한 업적을 많이 남겨

위대한 성군(聖君)으로 존경 받는 인물.


휘(諱)는 도(祹), 본관전주(全州),

자(字)는 원정(元正), 아명은 막동(莫同).

태종의 셋째 아들,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이다.

비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소헌왕후.


한성 준수방(종로구 통인동) 출생.

1408년(태종 8) 충녕군에 봉해지고,

1412년 충녕대군에 진봉(進封)되었다.


1418년 첫째 형 이제(李 褆)가 세자에서 폐위되면서

세자로 책봉되었고 얼마 후 부왕의 선위(禪位)로 즉위.


즉위 초 4년간 태종대리청정 하며 국정과 정무를 주관.

이때 장인 심온(沈溫)과 그의 측근들이 사형에 처해졌다.


이후 주변의 소헌왕후 폐출 주장을 일축했고,

건강이 좋지 않아 김종서, 맹사성 등을 등용하여

정무를 주관하였는데 이 통치체제는 내각 중심 정치제도.


즉, 의정부서사제의 효시가 된.,정치체제.


그후, 의정부 권한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태종 때 실시된., 6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이어 받아

국정을 직접 관장했고 왕권이 안정되자 6조직계제 폐지.


1436년,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를 부활.

이는 세종 집권 후 집현전에서 성장한 많은 학자들이

의정부의 지나친 권력행사를 견제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와 아울러 승정원(承政院) 기능을 강화.

실제적으로는 이를 통해 모든 정무를 통괄했다.

1420년 설치된 집현전은 젊고 유능한 학자들을 육성.


집현전은 왕과 세자에게 학문적 자문·교육과

각종 학술연구·서적편찬을 담당하는 기구였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신숙주· 정인지 등

집현전을 통해 배출된 학자들은 유교이념에

입각한 정치와 문화를 확립하는데 주역이 된다.


한편 세종은 태조 이래의 억불숭유정책을 계승해

정치이념 제도뿐만 아니라 사회윤리 측면에까지 확대,

효행록, 삼강행실도, 주자가례 등을 간행하여 보급했다.


유교적인 의례(儀禮)를 확립하기 위해

예조·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집현전에서

국가의례인 오례(五禮), 사서(士庶)의 관혼상제.

사례(四禮) 등에 대한 중국 제도를 연구하게 해 정리.


이와 함께 1419년 사사노비(寺社奴婢)의 정리를 시작으로,

1424년 오교(五敎 : 慈恩敎·華嚴敎·始興敎·中道敎·南山宗)와

양종(兩宗 : 曹溪宗·天台宗)을 선교(禪敎) 양종으로 정비하여

각각 18 사찰 만 인정했고 이에 소속된 7,760결의 토지 외에는

모두 몰수하는 등 불교를 억압했으나 왕실의 불교행사에는 참석.


세종도 유신들의 극단적 불교전폐론(佛敎全廢論)에는 반대.

말년에 두 아들과 왕비를 잇달아 잃고 건강이 크게 악화되면서,

유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불당(內佛堂)을 짓고 불경을 간행했다.


그러나, 숭유정책(崇儒政策)

방향을 바꾼다는 뜻은 아니었다.


재위 동안 유교정치 기틀을 확립하고,

공법을 시행하는 등 각종 제도를 정비해

조선왕조의 기반을 굳건히 다졌던 세종대왕.


한글 창제를 비롯하여 문화의 융성에 이바지하고

과학기술을 크게 발전시키는 한편, 국토를 넓혔다.


원래, 왕세자는 형님 양녕대군이었으나,

태종은 충녕이 왕위에 적합하다고 판단해

1418년 6월 세자로 책봉되어 같은해 8월 즉위.


세종은 부친 태종이 이룩한 왕권강화를 바탕으로

유교정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시행.

특히, 훈민정음 완성과 반포는 조선 문화유산의 결정.


세종이 재위한 15세기 전반기는 유교를 치국이념으로 채택

중앙집권적 지방통치체제, 즉 군현제가 정비·확립되는 시기였다.

따라서 그의 치세 동안 태종이 이룩해 놓은 지방통치체제 기반을 계승.


토호적 향리를 제거하고 수령의 권한을 강화해

행정력을 중앙에 집중시킨 수령육기법(守令六期法)과

부민고소금지법(府民告訴禁止法)을 실시해 행정구역을 개편.


도 군현 구획을 부분적 개편, 임내(任內)의 정비,

양계(兩界) 신설주진(新設州鎭)의 개척에 따른 구획.

사민입거(徙民入居) 및 유향소 복설, 경재소(京在所) 운용 등.


지방통치면에서 획기적인 치적을 남겼으며.

이와 더불어 관리의 등용·녹봉 체계를 고치고,

언로(言路)를 보장하는 등 관료제도를 정비했다.


관리등용제도로는 과거제도 이외에

취재제도(取才制度)를 실시해 지방의 수령(守令)·

이서(吏胥)·문음(門蔭) 출신자 등에 대한 선발기준을 마련.


아울러, 실직품관(實職品官)으로 흡수하기 어려운

종친·공로자· 연로자 등에게 관직 없이 관계(官階)만 주는

산관제도(散官制度)와, 잡직관인(雜職官人)·품외관인(品外官人)에게

교대로 녹봉을 받게 하는 체아제도(遞兒制度)를 실시해 관직 과다수요를 조절.


이외에도 백관(百官)이 교대로

왕과 정사를 논의하는 윤대법(輪對法)을 실시.

언론의 활성화를 꾀했으며 한편 법제적인 면에서는

1422년 육전수찬색(六典修撰色) 설치, 속육전(續六典) 편찬.

재위기간 동안 여러 차례 개수를 거쳐 1435년에는 완성을 보았다.


또한 형벌제도를 개혁하여 가혹한 고문으로

피심문자(被審問者)가 죽는 일이 없도록 했으며,

죽을 죄인도 삼심(三審)을 받는 삼복법(三覆法)을 시행.


1444년에는 노비를 노주(奴主)가 마음대로

벌주지 못하도록 하고 위반한 자는 처벌했다.


세종은 국가수입을 증대하고

민산(民産)을 안정시키기 위해

농업기술 발전 및 조세제도를 개혁.


삼남지방 농업 관행을 기초로

풍토에 맞는 농법을 보급했다.


농업 생산력 보존과 사회안정책 일환으로

진휼정책을 가장 빈번하게 시행하기도 했다.


한편 토지분급제도도 일대 개혁이 단행되어

1431년 급전법(級田法) 4등순급법을 마련.

과전(科田)의 지급량을 축소하도록 했다.


또한 공신전(功臣田) 지급을 대폭 감축하는 등

개인에게 지급하는 과전의 총량을 크게 줄이고

나머지는 국가기구로 돌려 전체 국가재정을 증대.


조세제도 개혁에서 가장 큰 업적은 공법(貢法)의 제정.

과전법(科田法) 체제 조세규정은 지역마다 차이가 나는

토지비옥도를 고려하지 않아서 공평 조세징수가 어려웠다.


하여, 1436년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

1443년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세우고

이의 개선을 연구하게 하여, 1444년 공법을 시행.


풍흉과 토지비옥도 차이에 따라

각각 9등급과 6등급으로 나누어

세액의 차이를 두는 제도를 실시.


이때의 세율은 과전법에서의 1/10에서 1/20로 감소되었지만,

토지가 비옥한 삼남지방이 대부분 높은 등급으로 책정되었기에

국고수입은 크게 증가했고 전주나 관리의 중간수탈이 배제되었다.


세종의 대외정책은 태조 이래의 명에 대한 사대(事大)와

왜·여진 등에 대한 교린(交隣)이라는 틀 속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정치적·경제적인 안정과 국력의 축적을 바탕으로

대명외교 처녀진헌(處女進獻)과 금은조공(金銀朝貢)을 폐지.

태종때까지의 불합리하고 무리한 명나라의 요구를 거절하였고

한편 고려말 이래 골칫거리였던 여진과 왜에 대해서는 정벌을 단행.


여진에 대해서는 김종서·최윤덕으로 하여금

두만강· 압록강 유역의 여진을 몰아내게 하였고

6진(六鎭)·4군(四郡)을 설치해 백성을 이주시켰다.


이때 3남지방의 백성들을

대거 북방으로 이주 시켰다.


(아울러, 6진4군에서 조선에 귀화한 여진인들은)

(한강 이남, 3남지방으로 대거 이주시켜 정착시킨듯.)

(하여, 지리산 일대에는 여진인들의 풍습, 지명이 많다.)


왜에 대해서도 1419년 대마도 정벌.

1423년 삼포(三浦) 개항으로 회유책 병행.


그러나 왜인의 출입이 증가하자 이를 통제할 목적으로

1443년 계해조약을 맺어 세견선(歲遣船)과 세사미(歲賜米) 양을

각각 50척과 200섬으로 제한하여 정치적·경제적 안정으로 문화가 융성.


집현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학문연구와

각종 편찬사업 및 음악·미술  예술활동 활발. 


한편 유교의례가 정리되면서 이에 필요한 음악이 크게 발달.

이러한 음악의 발달은 뛰어난 음악가 박연(朴堧)이 있어 가능.


1443년 완성되어 1446년 반포된 훈민정음은

종래 말과 글이 일치하지 않는 문자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훈민정음의 반포는 쉽게 배울 수 있는 문자를 보급시켜

유교윤리에 바탕을 둔 교화(敎化)를 원활하게 하려는 목적.

춘추관· 충주· 전주· 성주 등에 실록 보관 사고(史庫)도 설치했다.


세종대에는 과학기술도 크게 발달했다.

1434년 천체관측시설 간의대가 준공되었다.

가장 괄목할 만한 것으로 해시계·물시계·측우기 발명.


해시계로는 정초·장영실 등이 발명한

앙부일구(仰釜日晷)·현주일구(懸珠日晷)·

천평일구(天平日晷)·정남일구(定南日晷) 등.


물시계는 흐린 날이나

밤에도 쓸 수 있는 점에서

공식적인 표준시계로 쓰였다.


이밖에도 역서(曆書)를 편찬하고

중국·이슬람 천문학 역법 계산방법을 흡수해

처음으로 우리나라 독자적 역법계산이 가능해졌다.


세종대 과학기술 발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인쇄술의 발달

즉위 초부터 새로운 금속활자 인쇄기술 발전에 관심을 기울였고

경자자(庚子字 : 1420)·갑인자·병진자(丙辰字 : 1436) 등을 주조했다.


한편 1431, 1446년에는 도량형 제도가 확립되었다.

도량형 제도는 그뒤 경국대전에서도 그대로 채택되었다.

세종때,화포의 주조기술과 화약 제조기술도 크게 발전했다.


천자화포(天字火砲)·지자화포(地字火砲) 등 새로운 화포를 개발

총통등록(銃筒謄錄)을 편찬하여 화포의 주조법과 화약사용법 기록.

능은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에 있는 영릉(英陵)이며, 시호는 장헌(莊憲).


*** 참고문헌 : Daum 백과사전***


조선의 제4대 왕인 세종과 소현왕후 심 씨의 무덤인 영릉(英陵)

제17대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무덤 영릉(寧陵)이 좌우로 위치.

두 능의 한글 이름이 같아 효종의 능은 세종의 능에 가려지곤 한다.


세종의 능과 효종의 능이 함께 있는.,영녕릉.

세종대왕은 부연할 필요가 없는 조선 최고의 왕.

영릉은 왕실 능제의 전형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영녕릉에서는 한글날을 전후하여 큰 잔치를 열어

해마다 세종의 뜻을 기리고 지역민 단결을 꾀한다.


매표소 입구를 지나면 우측에 세종 동상이 있고

좌측에는 세종의 업적을 기념하는 세종전이 있다.

기념관 앞뜰에 왕실의 과학 기구들이 복원되어 있다.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

세계 유일의 오목 해시계인 앙부일구,

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와 수표 등

그당시 과학 기술의 발전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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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미친 척도 했던 양녕대군.

'유부녀 어리(於里)와의 사랑 때문.'이라는 설이 있고

부왕 태종의 눈밖에 나서 폐세자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1394(태조3년) 이방원의 맏아들로 태어난.,양녕대군.

이방원 나이 스물여덟, 부인 민씨 나이 서른 살이었다.

이방원 부부 사이에 딸이 둘 있었지만 당시 늦게 본 아들.


아들 셋을 연거푸 잃고서 얻은 사내아이였던지라

태어나자마자 바로 민씨 부인의 친정집으로 보냈다.

행여, 탈이라도 날새라 지극정성 양녕대군을 돌본 외가.


이후, 양녕대군은 왕위 후계자로서 수업을 받았다.

1403년 성균관에 정식으로 입학해 본격적으로 왕재교육.

 양녕이 11세인 1404년 드디어 세자로 책봉되기에 이르렀다.


온 세상 사람의 선망과 축복을 한 몸에 받으며

조선의 세자가 된 양녕대군에게 이제 남은 일이란

훗날, 만인지상 자리에 오르는 일밖에 없는듯 보였다.


태종 때, 성석린, 하륜, 권근, 유창, 이래, 조용.

당대 명성이 자자하던 고관대신들이 세자의 사부.

왕위 후계자 왕재교육을 감내하기가 숨벅찼던걸까?


세자로 책봉된 뒤부터 10년 넘게 지속된.,왕재교육.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만큼 감옥 같은 감금 상황.

언제쯤 되어야 끝이 날지 기약조차 없는 왕세자 수업.


태종은 자신이 어려서부터 글공부에 두각을 나타내어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까지 했다는 자부심이 있었기에

세자에게 조선왕조 최초로 체계적이고 엄격한 교육를 실시.


.....................세자시강원................................

고려 말부터 확립된 세자관속을 개칭하며 성립되었고

1418년(태종 18) 세자시강원과 세자익위사로 독립되어

왕세자의 교육을 전담하는 세자교육기관으로 정립되었다.


세자시강원 관원 사(師 : 1명, 좌의정겸),

부(傅 : 1명, 우의정겸), 이사(1명, 찬성겸),

좌·우 빈객(정2품겸), 좌·우 부빈객( 종2품겸),


좌·우 보덕(종3품), 좌·우 필선(정4품), 좌·우 문학(정5품),

좌·우 사경(정6품), 좌·우 정자(각 1명, 정7품) 등이 있었다.


그후, 1431년(세종 13), 1456년(세조 2), 1466년,

1469년(예종 1), 1646년(인조 24), 1746년(영조 22) 이전.

1784년(정조 8), 1894년(고종 31), 1895년, 1896년에 걸쳐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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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은 동궁전의 담벼락을 더 높게 하고 엄히 출입통제

그날의 서연, 수업진도를 정해놓고 제대로 따라했는지

태종에게 일일이 보고하게 할 정도로 왕재교육을 강행.


심지어 태종이 업무를 보는 대전 옆에

세자궁을 짓자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활달하고 자유분방한 성격인 세자 양녕대군.

고분고분 태종의 구속에 따르기 힘들었던걸까?

아니면, 이미 세자위를 충녕에게 양위하려한걸까?


어느날 부왕 태종과 모후 원경왕후의 대화를 들은 양녕.

"삼남 충녕대군의 재질이 뛰어나나 셋째 아들이라 아쉽다."

그후 양녕대군은 일부러 미친 척 가장하기도 하였다는 양녕.


양녕대군은 14세 때 김한로 딸을 세자빈으로 맞았지만

몰래 궐을 빠져나가 사냥과 주색으로 세월을 보내기 일쑤.

시중 건달패와 기생들까지 궐로 끌어들여 술판을 벌리기 일쑤,


왕위 후계자.,왕재교육.

새벽3시부터 밤 11시까지

하루의 일과를 감안한다면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탈선.

 

1410년 궁궐기생 '봉지련'과의 첫사랑.

1414년 1월 2일 기생들과 동궁에서 상간.

1416년 기생 '초궁장(楚宮粧)'과의 스캔들.

1416년 1월 곽선(郭璇)의 첩 어리(於里)와 동거,

1416년 3월 매형 이백강 첩 칠점생(七點生)과 염문.


그러나, 초궁장은 태종의 친형이자

상왕이었던 정종이 애지중지한 기생.

양녕대군은 그러한 사실을 몰랐던걸까?


당시 곽선은 왕명을 받들던.,정2품 중추부사.

세자 양녕대군이 부왕과 중신들의 눈 밖으로 벗어나자

둘째 효령대군은 더욱 근신한 채 하루 종일 글공부에 열심.

형이 폐출되면 세자 자리는 자신의 몫이라 여겼기 때문일까?


양녕대군은 효령대군의 속셈을 간파하고 여러 차례 면박. 

자신은 이미 동생 충녕에게 세자위를 넘기려 작정한 때문.

형님의 뜻을 알아챈 효령대군도 형 뒤를 따라 세자위를 포기.


그렇지만 효령도 인간인지라 속으로 울화가 치민듯.

그래서, 절로 가서 북가죽이 찢어질 정도로 북을 쳐서

‘효령대군이 북치듯 한다.’는 속담이 생겼다고 전해온다.

 

양녕대군이 사랑한 어리는 중추부사 곽선 대감의 첩.

어리가 한양 친척집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선물을 보내자

자신은 유부녀인 몸이라 받을 수 없다면서 돌려보냈던.,어리.

 

몸과 마음이 달아오른 양녕대군은 말을 달려

그녀가 머물고 있는 집으로 찾아가 다짜고짜로

말에 태워 동궁으로 데리고 와 태종이 노발대발.


세자의 측근은 모조리 엄벌에 처하는 한편,

어리도 문초했지만 그녀에게는 죄가 없었기에 

돌려 보냈지만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어리에 대한 사랑으로 미칠 지경이 된 양녕대군은

그뒤에도 몰래 어리를 만나 마침내 아이까지 낳은 것.


이 사실을 알고 대노한 태종은 양녕대군의 장인을 나주로,

세자를 두둔하던 영의정 황희(黃喜)는 남원으로 귀양 보내고,

세자빈은 친정으로 내쫓고, 동궁 문지기와 내시들의 목을 쳤다. 


모두 다 세자의 비행을 알고도 묵인하였고

그 비행 사실을 은폐하려 한 죄를 물어 단죄.


이어, 태종은 중신들을 불러 세자 폐출을 결의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했으니 1418년 6월 일이었다.

 

양녕대군은 세자위에서 쫓겨난 것으로 그치지 않고

죄인이 되어 경기도 광주로, 다시 이천으로 유배 중에도

지키는 군사들 몰래 담을 넘어 도망쳐 어리를 만나러 갔다.

 

그해 8월에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앉은 태종과

왕위에 즉위한 아우 세종은 걱정이 태산 같았다.

하여, "양녕을 찾아오면 많은 상을 주겠다." 포고.


군졸들이 어리의 집을 샅샅이 뒤졌으나 찾지 못했고,

그 사이에 어리는 자신의 신세를 비관해 목매 죽었다.

양녕은 아차산 바위틈에서 발견되어 대궐로 끌려왔다.

 

태종과 양녕대군 부자 간의 갈등은

세종 4년(1422) 태종이 64세로 운명하며

막을 내렸고 그때 양녕대군의 나이 29세였다.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되어 유배를 떠날때

여자 종 13인과 남자 종 10여 인이 동행했다.

태종은 양녕 대군이 살기 부족함이 없게 배려.


양녕이 대궐을 떠나던 날 광나루 포구에서

"앞으로 이 땅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겠구나!"

'탄식하며 눈물을 지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그뒤 그는 조선 팔도 각지를 유랑하며

사대부, 풍류객, 기녀들과 일생을 마쳤다.

1418년 세종은 이천군에 유배된 양녕을 석방.


양녕대군 4형제의 우애는 두터워

죽을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고 한다.


양녕대군은 당대의 명필이요, 문장가였다.

학문이 깊은 천재였으나 그런 사실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았기에 부왕인 태종도 잘 몰랐을 뿐. 

 

양녕대군은 자유와 왕좌를 맞바꾼  풍류 호걸.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해 왕위를 두고 부자 간,

형제 간 피비린내 진동하는 골육상쟁은 비일비재.

그러나, 왕위가 거추장스럽다고 하여 내팽개친 사람.


양녕대군의 허물을 들춰 참소하는 자가 많았으나

그때마다 세종은 그들의 입방아에 쐐기를 박았다.

 

“원래 이 자리는 양녕대군이 앉을 자리가 아닌가?

한갓 필부라도 형제 간 잘못은 감싸안는 것이 도리,

한나라 임금으로서 어찌 동생이 형님을 벌할 것인가?"


한편, 효령대군은 불교에 귀의하여 살아가고 있었는데

하루는 사냥에서 돌아오던 양녕대군이 꿩·노루·토끼를 잡아

효령대군이 머문 양주 회암사에서 떠들썩하게 술판을 벌였다.

 

“형님! 살생을 금하는 불전에서.,심하지 않습니까?”
“나는 살아서는 임금의 형이요, 죽어서는 부처의 형.

이 사람아! 나에게 무엇이 두렵단 말인가? 허허허허!”


'산허리에 둘린 안개로 아침밥을 지어먹고
밤에는 댕댕이덩굴에 걸린 달빛으로 등불을 삼네
외로이 바위에 누워 잠자니 마치 한층 탑과 같구나.'

 

1450년 세종 32년 54세로 운명할때 양녕대군 나이는 57세.

1453년 10월 수양대군이 단종을 밀어내고 즉위한 이가.,세조.

이때 양녕대군은 62세로 왕실 종친 가운데 가장 높은 어른이었다.

 

자유를 위해 미련 없이 왕좌를 버렸던 풍류호걸 양녕대군.

세조 8년(1462)음력 9월 6일에 69세를 일기로 천수를 마쳤다.

그는 정실에게서 3남 4녀, 후실에게서 7남 11녀의 자손을 두었다.


초대대통령  이승만 박사도 양녕대군의 후손.

숭례문(남대문) 현판 글씨도 양녕대군이 쓴 것.


“내가 죽으면 호화로운 장례를 치르지 말고

묘비도 상석도 만들지 말라” - 양녕대군 유언 -  


그는 평소 시를 잘 짓고, 그림을 잘 그렸으나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인멸되거나 실전되었다.


왕세자 자리를 양보한 것은 그의 본심이었다는 설

그의 본심이 아니었다는 설이 오늘날까지 양립한다.


양냥대군의 아우.,효령대군(孝寧大君)

왕자, 왕족, 서예가, 불교 승려이며, 정치가.

1396년 음력 9월 16일 ~ 1486년 음력 5월 11일.


세종대왕의 형이자 세조의 숙부로 왕실의 원로,

조선 숭유 억불 정책으로부터 불교를 옹호, 보호.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6대에 걸쳐 장수.


임사홍은 그의 손녀 사위,

 이량은 그의 5대손이었으며,

인순왕후, 심의겸, 심충겸은 외6대손. 


생전에 손자 33인, 증손자 109인으로 후손이 번성하였다.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파종회' 중에서는 자손이 가장 번창.

서울특별시1984년 11월 7일 청권사 앞길을 '효령로'로 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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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재위 31년 7개월간 세종실록 163권 154책.

조선시대 역대 왕의 실록과 함께 일괄 국보 제151호.

조선 역사 상 가장 화려한 정치와 문화가 펼쳐졌던 시대.


이 시기에는 정치·경제·군사·외교·제도·예·악,

각종 문화면에서 획기적인 사업이 진행되어

조선 왕조 정치와 문화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


세종실록은 이러한 모습들을 풍부하게 포괄하고 있어

세종대를 연구하는 기본이 되는 사료가 될 뿐만 아니라,

그 시대 각 방면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가 된다.


1427년(세종 9) 세종실록에 의하면,

여인들이 우는 소리가 궐밖까지 나왔다.

실록은 전별연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조선 왕조는 양가집 처녀를 명나라에 진헌해왔는데,

이날 저녁 중전의 주재로 경회루에서 중국으로 떠나는

처녀 7명의 전별연에 처녀의 어머니와 친족들도 참여했다.


"밤에 날씨가 맑고 고요한데

슬피 우는 소리가 밖까지 들리니,

이를 듣는 사람은 슬퍼하지 않는 이 없었다"


세종 7년 (1425) : 동전 가치가 떨어져 백성들이 잘 쓰지 않다 
세종 9년 (1427) : 중전이 경회루에서 7처녀 전별연을 베풀었다.


세종 11년 (1429) : 동궁 시녀 호초를 옥에 가두고

동궁(문종) 부인 휘빈이 동성애  때문에 쫓겨났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1436년(세종 재위 18년) 궐내

시녀들 간 동성애가 성행해 동침하는 일이 잦았다.


그러나 들키는 경우에는 엄한 처벌을 받았다는데,

곤장 70대를 맞고도 계속하면 곤장 100대를 더 집행.

세종의 맏며느리인 세자빈 봉씨 또한 동성애를 즐겼다.


성격이 활달하고 술을 좋아했던.,세자빈 봉씨.

밤마다 자신의 시녀 소쌍을 처소로 불러들였기에

궐내에 이미 소문이 떠돌아, 세종의 문초를 받았다.


‘소쌍’은 세자빈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동침했다고.,실토.

 
이 사실을 안 세종은 봉씨를 폐빈하기로 결심.

문제는 폐빈하는 이유를 밝혀야 하는 것이었다.

차마 며느리의 동성애 사실을 밝힐 수 없었던 것.


결국, 세종은 "봉씨를 투기가 많고, 대를 이을 자식이 없고,

시녀들에게 남자를 사모하는 노래를 부르게 해서 폐빈한다."며

그 일을 마무리했지만 봉씨의 동성애는 세자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세자 향(문종)이 학문을 지나치게 좋아한데다

병약해서 세자빈을 자주 찾지 않은게 화근이었다.


그래서, 첫번째 세자빈이던 휘빈 김씨는

세자의 관심을 얻기 위해 여자의 신발을 태워

그 재를 먹이면 남자 마음을 돌린다는 비방책을 써

그 사실이 들통나 폐빈되었고, 두 번째 세자빈 봉씨마저

시녀 소쌍과의 동성애로 세자와 부부의 연을 끊어야 했다.


실록에 의하면 봉씨는 거짓말로 임신과 낙태를 번갈아 하고,

술에 만취한 일이잦았으나 세자를 멀리했다는 이야기는 없고,

오히려 남성인 세자에게 세자빈 봉씨는 적극적이었다고 전한다.


그것이 두려워 세자(문종)는

 더욱 부부 잠자리를 멀리 했고
결국 세자빈 봉씨는 폐빈이 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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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세자(훗날 문종)이 동궁에 있을 때

김오문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은 이가 휘빈.

 
휘빈 김씨는 나이가 세자보다 많았기에

시집 온 이후부터 남성에 눈을 뜬데 반해 
동궁은 아직 여성에 대해 눈이 뜨지 않았다.


세종이 첫아들 향(문종)을 8살때 세자로 책정.

세자가 14살때  18살 휘빈김씨를 세자비로 간택
당시 최고의 미인 휘빈 김씨는 한창나이 18세였다.


조선시대 역대 세자비들이 다 그랬듯이

휘빈 김씨도 빨리 세자를 낳아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고  밤마다 세자를 성의 세계로 이끌었다.

그 덕분에 세자는 일찌기 성에 눈을 뜨게 되었고

세자빈에게 곧 실증을 느껴 다른 궁녀들을 찾았다.
1432년 휘빈김씨가 독수공방으로 3년 정도 지낼 만큼.

"아아.. 세자마마 어찌 저를 그리 잊으실 수가 있습니까?

제가 다 가르쳐 드렸는데, 어찌 다른 궁녀들에게 은혜를..."


하지만, 그 푸념은 이미 성에 눈뜬 세자에게 들리지 않았고

점점 휘빈김씨 처소에는 들지 않자, 밤마다 외로움에 몸서리.

그 모습을 보다못한 휘빈 김씨의 궁녀 중 이상궁이 한마디 조언.

"세자 저하가 자주 출입하시는 궁녀의 신을 훔쳐다가

그 신을 태워 세자가 잡수시는 술이나 차 그릇에 섞어

마시게 하면, 다시는 그 궁녀의 처소에 들지 않을꺼예요.


 "정말이야? 이상궁. 어여 그 궁녀의 신을 가져오너라." 


그러나, 그 민간요법이 효험이 없자

또 다른 민간요법을 권유한.,이상궁.


 "세자빈마마! 교미하고 있는 뱀을 잡아 가루로 만들어서

그것을  저하에게 직접 먹이면 세자마마는 세자빈 마마에게

무한한 사랑을 느끼실 것입니다요. 한번 해보셔요. 세자빈마마."

"그 가루가 그러니까 춘약이라는 것이냐?" 


교미중인 뱀을 몰래 들어오다가 수위무사에게 걸렸고..

수위무사는 이상궁과 평소 알고 지내는 사이라 그때는

무사히 지나갔지만, 뱀가루를 먹인 것이 그만 들통났다.


최상궁이 이상궁과 수위무사 사이를 질투

세종에게 고자질했을 것이란 야사가 전해온다. 

머리 끝까지 화나 세자빈을 그대로 둘수 없던 세종.

 
"세자에게 신을 태운 재와 뱀을 갈아 먹이다니?" 


황희 정승과 맹사성은 끝까지 세자빈의 편을 들었지만,

세종의 분노를 막을수 없어 휘빈 김씨는 폐빈이 될 운명.

세종의 소헌왕후가 휘빈 김씨를 조용히 자기 처소로 불렀다.

"안다.. 내 니마음 잘 안다. 나도 다 해본 것이다.

하지만 걸리지 말았어야지. 조용히 집에 가있거라.

일이 진정 되면, 내가 너를 위해 힘을 한번 써보마."

희빈 김씨가 친정으로 돌아오자 집안은 청천벽력 분위기.

아버지 김오문은 당장 부인과 딸을 뒷마당으로 불러 냈다.

딸인 희빈 김씨에게 세자비 옷을 입히면서 침통하게 말했다.

"조금 있으면 대궐에서 폐빈 첩지와 나에 대한 파직 교구가 올것.

그러니 어서 서두르자! 지금 죽으면 넌 세자비인체 죽는 거구,

우리도 세자의 장인, 장모 신분으로 죽을 수 있다."

김오문은 준비한 비상을 세자비와 부인 이씨에게 주었다.

세자빈 희빈김씨가 조용히 친정 부모님에게 한마디 했다.

"아버님, 어머님, 이 불효막심한 딸자식 하나로 인하여

집안이 망하게 되었으니 이 죄와 한을  어디가서 푸오리까?

소헌왕후께서 저를 다시 부르신다고 했지만 그것은 위로 말씀."

딸이 먼저 약을 먹는 것을 볼수 없었던 부인 이씨가

먼저 비상을 먹었고, 희빈 김씨도 약을 곧 따라 먹었다.

부인과 딸의 죽음을 지켜본 김오문은 무관답게 자결.

희빈 김씨 사건으로 문종이 관계를 맺었던 궁녀들은 쫒겨나

몇몇은 참형 당했고, 문종은 어쩔 수없이 다른 궁녀들을 찾기 시작.

세자는 새 궁녀를 물색 중에 중전시녀 순임이와 눈이 맞았다.
그때 '순임이'의 나이는 15살이었고  문종의 나이는 19세였다.

세자는 신중하게 순임이와 정을 통해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이 사실도 모르는채 세종은 세자비 간택에 나섰고

곧, 종부 소윤 봉려 딸인 봉씨를 세자비로 간택했다.

 
봉씨는 세자와 동갑이었고 몸집도 작고 유약했지만

겉보기와 아주 달리, 보기 드문 색광이고 음탕한 여자.     

봉씨는 세자에게서 욕구를 충족 못하여 항상 욕구불만.

  

세자는 그것이 부담스러워 세자빈 봉씨를 멀리 한 것.
그런데 이때 세자빈 봉씨가 상상임신으로 잉태한 사건.

세자빈 봉씨는 시녀 소쌍과 밤마다 동성애를 나눴던 시기.


소쌍이 세자의 세째부인의 몸종인 단지를 좋아해

이따금 함께 동침하자, 봉씨가 자신의 개인 노비인

석가이를 시켜 늘 감시하며 단지와 놀지 못하게 했다.


예전에는 세자빈 봉씨가 새벽에 일어나면

여종들이 이불과 베개를 거두게 하였었는데,

소쌍과 동침한 날에는  자신이 직접 그 일을 했고

또 몰래 자신의 심복 여종에게 그 이불을 세탁하게 했다.


세자빈 봉씨는 소쌍이 잠시라도 자신의 곁을 떠나기만 하면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너는 그다지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때론 화를 내며 질투하고, 때론 원망하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소쌍은 주위 궁인들에게 '빈께서 나를 사랑하기를

보통 이상으로 하기에 너무 무섭다고 늘 토로했다.


이러한 일들이 궁중에서 자못 떠들썩한 까닭에,

세종이 소쌍을 불러 진상을 묻자 소쌍이 말하기를,


“지난해 동짓날 빈께서 저를 내전으로 불렀는데,

다른 여종들은 모두 지게문 밖에서 서 있었습니다.


저에게 같이 자기를 요구하므로 저는 이를 극구 사양했으나,

빈께서 윽박지르므로 옷을 반쯤 벗고 병풍 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빈께서 저의 나머지 옷을 다 빼앗고 강제로 눕게 해,

남자와 교합하는 형상과 같이 서로 함께 희롱했습니다” - 소쌍 -


이에 세종이 세자빈을 직접 불러

이 사실을 물으니 빈이 대답하기를,


“소쌍이 단지와 함께 늘 사랑하고 좋아해,

밤에만 같이 잘 뿐 아니라 낮에도 목을 맞대고

혓바닥을 빨았는데 이것은 저희들이 하는 짓이오며

저는 처음부터 소쌍과 동침한 일이 없습니다” -세자빈 봉씨 -


"네가 그러한 사실을 어찌 아느냐?" - 세종 -


세자빈 봉씨는 소쌍과 단지의 동침을 목격했을뿐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고 처음에는 잡아 떼었으나

세종이 재차 봉씨를 추궁하자 사실을 모두 다 실토.

    

궁녀 간의 동성애 행위가 발각되면,

그 궁녀는 회초리를 맞고 궁궐에서 추방.

장차 국모가 될.,세자빈 봉씨의 동성애 사건.


그것도 세자빈이 천한 몸종 시녀와

그와 같은 행위는 기절초풍 할 사건.  
세자빈의 동성애는 도를 지나칠 정도.


몸종 소쌍이 다른 시녀들과도

동성애를 한다며 세자빈이 투기.  

 
세자빈을 불러 사실 여부를 문초하였더니

부끄러움도 없이 자신의 소행이 당연한듯,

거침없이 속시원하다는듯 털어놓아 버린 것.

 

그것도 시아버지인 세종 앞에서 토로.
그 일로 세종은 조정 대신들과 의논 후,

세자빈 봉씨의 죄목 다섯가지를 들어 폐출.


1. 세자빈 신분으로 자신의 시비와 동성애를 한 죄
2.시비로 하여금 음탕한 남자들의 노래를 부르게 한 죄
3.궁중에서 함부로 술을 마시고 만취하길 일삼았던 죄.
4.중전이 내린 '효경' 및 '열녀전' 서적을 내팽개친 죄
5.시기, 질투를 하여 내명부 궁녀들에게 매질을 한 죄.

 
그 이후 폐빈 봉씨는 친정으로 와서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기색이 없었다.


 "저토록 회개할줄 모르니 멸문지화를 당함이 마땅하구나.

이미 폐빈의 첩지까지 받고 돌아왔으니 먼저번 폐빈 김씨 처럼

세자빈 신분으로 죽는 복도 없구나. 이젠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아버지 봉려는 폐빈 봉씨에게 자살을 하라며

비상을 주었지만 그것을 던져버리고 도망쳤고

곧 아버지 봉려에게 붙잡혀 안방으로 끌려 들어가

폐비 봉씨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목이 졸려 죽었다.


폐비 봉씨는 죽기 전까지 필사적으로 반항하자

아버지 봉려는 눈물을 흘리며 딸에게 중얼거렸다. 
"다음 세상에서눈 남자로 태어나서 행복하게 살아라."

딸의 죽음을 확인한 후,

아버지 봉려도 북향사배 후

스스로 자결해 목숨을 끊었다. 


폐빈 봉씨는 고려 성풍속에 물든 시골 여성.

원래, 궁녀가 되기 전까지 평범한 가문의 여성.

세자빈이 되고나서도 궐내 법도와 거리가 먼.,행각.


자신의 행각이 잘못된 점을 이해할 수 없었고

오히려, 자신을 밤마다 외롭게 만든 세자를 원망.

그래서, 외로움을 못참고 동성애에 빠진 것이라 생각.

 
이를 못마땅하게 지켜보던 아버지 봉려는

딸에게 자결을 권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아
딸을 목졸라 죽이고 자신도 스스로 자결한 것.


1441년(세종 23)에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서

외아들이 출생했고 훗날 단종인 그 이름은 홍위(弘暐).

권씨는 문종이 세자 때 소실로 두 세자빈이 폐출된 후에

왕비가 되었지만, 단종을 낳고 사흘 만에 죽어 후에 추존.


세자 시절에 더 이상 세자빈을 들이지 않은 탓에

단종은 모후 없이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가 키웠다.

단종은 동복누나 경혜공주와 이복동생 경숙옹주가 있다.


세자 시절에 문종은 자식 사랑이 남달라

공주, 옹주와 왕자들이 문안 인사를 오면,

눈물을 흘리며 버선발로 뛰어 나갔다 한다.

   

그후, 세자는 왕위에 오른지 2년 만에 승하했고 
그로 인해 조선 역사 상, 쓰라린 비극.,단종 애사.

세종 재위 때 궐내 성풍속은 문란했던듯 여겨진다.


당시 궐내 동성애가 만연한 것은 고려의 풍속.

고려시대 개방적인 성풍속이 조선 초까지 만연했고

국법이 준엄해도 여성의 성적 욕구불만을 막을 수 없었다.


여성의 정절 만 강요하는 남존여비 유교관에

왕실은 물론 사대부 가문에서도 여성들이 반발.


세자빈 봉씨 사건 이후에도 궐내 궁녀 간 동성애는

뿌리뽑을 수 없어 궁녀들의 동성애를 형벌로서 단죄.

남존여비 유교관으로 여성의 개방적인 성풍속을 억압. 


봉씨 사건은 세종 9년(1427년) 유감동 사건 이후

세종 재위 때 조선 최대의 성스캔들 중 하나이다.


세종은 조선의 역대 왕들 중에서

가장 백성을 사랑했던 군주였지만

궁녀들의 사랑은 참형으로 다스렸다.


세종 재위 때,궁녀 내은이 & 내시 손생.

두 사람의 사랑을 참형으로 다스렸던 사례이다.

그후 조선시대 궁녀들의 사랑은 엄하게 통제되었다.


자나 깨나

죽으나 사나

오직 왕만 사랑.

그것이 궁녀의 운명.


세종의 왕비 소현왕후는 국모로서 최고의 작위를 누렸다.

그러나, 멸문지화를 당한 친정 때문에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그나마, 시아버지 태종이 운명한 후에야 관비에서 풀린 친정어머니.


스무살 장성한 아들 둘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소헌왕후.

결국 1446년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헌릉에 장사지냈다.

뒤에 세종의 능인 영릉으로 합장되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보존.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 심씨(1395.~ 1446)

청천부원군 안효공 심온의 장녀이며,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외척의 발호를 경계한 태종에 의해 멸문당한 시어머니.,원경왕후.

소헌왕후 또한 시아버지 태종에 의해 같은 이유로 아버지 심온을 잃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 세종을 이해하고 내조를 했다.

소헌왕후는 조선역사 상 내명부를 가장 안정적으로 다스렸고

세종의 업적에 좋은 영향력을 끼쳤다고 평가받는 조선 최고의 국모.


세종은 소헌왕후가 들어오고 나갈 때 반드시 일어나서 맞이.

1422년, 소헌왕후가 병이 나자 세종은 신하들에게 불공을 명.

병에 차도가 보이자 의원과 의녀들에게 상을 내리기한 애처가.


1426년, 세종은 직첩이 복원된 장모와 소헌왕후를 배려,

소헌왕후가 모친 안씨와 만나 연회를 베풀 수 있게 한다.

1446년 3월, 소헌왕후가 병이 들자 세종이 수시로 찾았다.


세종은 소헌왕후가 죽자, 자신이 직접 합장릉을 명.

자신이 죽기 전까지 다른 왕비를 맞이하지 않았다.


소헌왕후는 총애받는 후궁은 오히려 더 대접하였고

그들을 신뢰해 자녀들의 양육을 후궁들에게 맡겼다.


8남 2녀 중 막내 영응대군 양육은 신빈에게,

6남 금성대군의 양육은 태종 후궁 의빈에게,

문종의 자녀 경혜공주와 단종의 양육은 혜빈.


본인의 속마음은 어떠했을지 잘 모르지만,

질투를 드러내지 않아 태종과 세종이 신뢰.


심씨가 금성대군을 임신 중일 때였다.

세종이 외지로 나간 사이 궐에 불이 나

소현왕후가 화재 진압을 직접 주도하였다.


소헌왕후는 부드러우면서 강단있는 성품도 있었다.

세종 21년(1439) 임영대군이 궁녀들과 사통을 하여

세종이 관련자 처벌후 임영대군의 직첩까지 박탈했다.


이 일을 임금이 알게 된 것은 소헌왕후를 통해서였다.

평소 후궁과 왕의 자녀들의 동태에 늘 귀를 기울였기에

소헌왕후는 임영대군 유모를 통해 그 일들을 전달받은 것.


이로 인해, 임영대군은 세종에게 벌을 받게 되었고

소헌왕후는 친자식의 비행도 눈감아주지 않는 성품.

또한 문종의 세자빈, 휘빈과 순빈의 만행들까지 엄벌.


평소 소헌왕후의 내명부에 대한 통솔력에 인한 결과.

이렇게 강단있는 성품과 통솔력 있는 소헌왕후가 있어

조선 역사상 가장 안정된 내명부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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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소현왕후는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존경한 부부.

세종은 처가의 몰락에도 왕비의 내침을 적극적으로 막았고

두 아들의 죽음에 못 이긴 왕비마저 운명하자 세종은 망연했다.


친정의 수난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한 많은 왕비.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반포한 지가 얼마되지 않았다.

세종은 아내의 극락장생을 위해 아들 수양을 불렀다.


“네 모후를 위해 석가모니 일대기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라.”

아내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종이 왕명으로 편찬을 지시한 책.

1447년(세종 29)에 완성된 것을 1449년(세종 31)에 간행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종은 육식을 좋아했다.

아버지 태종이 "주상이 고기가 아니면 식사를 못하니

내가 죽은 후 상 중에도 고기를 들게 하라." 유교를 내릴 정도.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세종은 체구가 비중했기에

혈류순환 장애는 물론 혈탁이 심했을듯 추측된다.

혈탁은 피가 탁해지는 것을 한방적으로 지칭하는 것.


세종은 안질, 종기, 부종, 설사 등의 질병을 앓았다는 기록.

30세부터 말년까지 소갈(당뇨) 합병증으로 고생했던듯 하다.

그래서, 안질, 부종 등을 치료하기 위해 부지런히 온천을 즐겼다.


세종은 42세에 임질을 앓아 그 통증으로 인해

말도 타지 못할 만큼 성병으로 고생했다고 한다.

세종은  소현왕후와 후궁 사이에 18남 4녀를 두었다.


세종의 사인은 성병이라는 설도 전해져오지만

실제 사인은 당뇨 합병증이었을 것으로도 추정된다.

또한 정사에 전념해 누적된 과로가 사인이란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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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신데레라.,신빈 김씨.

내자사(內資寺) 사찰의 노비 신분에서

세종의 후궁이 된(신빈 김씨 1406~1464).


본관은 청주이며 김원(金元)의 딸이다.

원래, 내자시(內資寺)에서 노비로 일하다가

1418년(세종 즉위년)에 원경왕후의 발탁으로

13세에 소헌왕후의 몸종이며 궁인이 된 여인이다.


훗날, 세종의 승은을 입고 후궁이 되었고,

1427년(세종 9년) 첫 아들인 계양군을 출산하여

소의(昭儀)를 거쳐 세종 21년 귀인(貴人)에 진봉되었다.


당시 세종이 도승지 김돈에게 "김씨의 출신이 천하지만

13세부터 궁중에 들어와 행실이 바르기에 빈이나 귀인으로

삼고자 하는데 어떠하냐?" 하여  정1품 신빈(愼嬪)에까지 책봉.


그녀는 천성이 부드럽고 매사에 조심스러워

소헌왕후에게도 사랑을 받았으며, 소헌왕후는

막내아들인 영응대군의 유모(乳母)를 맡기었다.


그녀는 평소에 불교를 신봉했었는데,

세종 사후에는 비구니가 되어 살았다.


1450년(문종 즉위년)에 사망한 막내아들 담양군을 위한

경문 인쇄 비용으로 조정에서 쌀 500석을 하사받았으며,

1452년(단종 즉위년) 그녀의 아들 의창군의 청원에 의해

그녀에게 머리를 기르도록 명하였지만 이를 거절하였다.


1464년(세조 10년) 음력 9월 4일 59세에 운명.

세조는 쌀, 콩등 모두 70석(石)을 부의로 내렸다.


그녀의 묘는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에 있으며,

1994년 경기도 기념물 제153호로 지정되었다.

매년 음력 9월 7일 묘역에서 그 후손들이 제사.


......................신빈김씨 후손....................

남편 세종대왕과의 사이에서 6남2녀를 출산했다. 

1남 : 계양군 증 (1427~1464) - 한확의 딸(소혜왕후 언니)과 결혼

2남 : 의창군 공 (義昌君 玒, 1428년 ~ 1460년) - 김수의 딸과 결혼

3남 : 밀성군 침 (密城君 琛, 1430년 ~ 1479년) - 민승서의 딸과 결혼

4남 : 익현군 연 (翼峴君 璭, 1431년 ~ 1463년) - 조철산의 딸과 결혼

5남 : 영해군 당 (寧海君 瑭, 1435년 ~ 1477년) - 신윤동의 딸과 결혼

6남 : 담양군 거 (1439 ~1450) - 요절하여 계양군 차남이 후사를 이음.

 

딸이 2명 있었으나

둘 다 일찍 죽었다.

..........................


세종과 사둔을 맺은.,한 확(1400 ~ 1456

문신이자 외교관이며 명나라의 문신이다.


덕종의 비이자 월산대군· 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

세종의 서자 계양군의 부인 정선군부인의 친정아버지.

명나라 영락제 후궁으로 간택된 누이 여비를 호송하였다.


1417년(태종 17년) 명나라 초청을 받고 진헌부사로

명나라에 건너가서 광록시 소경의 벼슬을 지냈으며,

귀국후 판한성부사, 판병조사, 판이조사, 의정부좌의정.


세조 찬위를 도운 공로로 좌익공신 1등에 녹훈되었으며,

서성부원군에 봉작되었다가 서원부원군으로 개봉되었다.


명 영락제 후궁 여비 한씨는 그의 넷째 누이.

명 선종의 후궁 공신부인은 그의 다섯째 누이.

한명회, 신숙주 등과 함께 세조의 즉위를 도왔다.


그는 누이들이 황제의 후궁인 점을 활용하여, 외교관으로 활동.

1418년 세종의 책봉 고명과 1455년 세조의 책봉 고명을 받아왔다. 


그의 둘째 딸은 세종의 서자 계양군 증에게 출가했고,

여섯째 딸은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의 비 인수대비로서

세종, 세조 2대에 걸쳐 사돈이 된 그는 한명회 일족이다.


소혜왕후는 조선 초기의 세자빈이며

덕종(추존왕)의 왕비이자 성종의 생모.

인수대비(소혜왕후)는 세조의 맏며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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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세종마을이라고도 불리우는.,서촌.

조선 초, 세종대왕이 태어나 성장한 곳.,서촌.


조선시대 북촌은 사대부 집권세력의 거주지였고

서촌은 의관, 역관, 화가, 내시 등 중인들의 거주지.

그래서, 서촌의 조선시대 옛 기와집들은 올망졸망하다.


서촌을 아시나요? 


서촌은 청계천 발원지가 되는 수성동계곡이 있고

인왕산 기슭 아래 조선시대 중앙 관서에서 일하던

하급관리들을 중심으로 중인계층이 모여살았던 지역.


중인(中人)은 양반과 양인의 중간 계층을 말하며

예컨대, 서얼, 향리, 서리, 기술직(잡과 합격자) 등.


18세기 유수한 중인 가문이 등장하며,

혼인 역시 이들 내부에서 이루어 졌다.


이들은 인왕산 기슭을 본거지로 하여

필운대, 세심대, 수성동, 옥류동, 삼청동,

탕춘대(蕩春臺) 등 경치 좋은 곳에 집단거주.


오늘날, 효자동 사거리에서 사직동 입구까지

종로구, 사직동 통인동 옥인동 등 포함한 지역.

조선시대 겸재 등 화가들의 이곳 그림이 전해온다.


겸재 그림 


사역원 역관, 중앙관서의 하급관리들 거주지.

경복궁 앞 육조거리와 가까워서 출퇴근이 용이.

이 지역 아래쪽은 하급관리. 군인들의 집단거주지.


나만의 서촌 맛집(상촌, 세종마을 맛집) - 통인시장 기름떡볶기, 서촌 계단집


세종마을.,웃대 통인시장.

하여, 그 위쪽 중인거주지는

"웃대"라고 불리웠다는.,서촌.


제569돌 한글날 기념 세종마을 세종주간 축제  

[종로구-서촌]한글날 기념-세종마을 세종축제/10.9(목)~10.12(일)13:00~16:00 

매년, 한글날 기념행사가 열리는 세종마을.

"인왕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는.,세종. 

하여, 오늘날 "세종마을"이라 불리우는걸까?.


치킨과 넉넉한 감자튀김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곳 - 세종마을 치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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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로방안 | 작성시간 16.11.22 세종대왕 같은 성군이 계셨으니...우리나라가 이렇게 크게 성장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씀이 가슴에 와 닿네요...좋은 글 감사합니다^-^
  • 작성자선경나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11.22 .
    "옥에 갇힌 죄인은
    그 저지른 잘못이 밉지
    사람이 미운 것이 아니다."

    무더운 여름에는 옥에 갇힌 죄인들에게
    얼음을 하사할만큼 백성을 사랑한 세종대왕.
    그 애민정신은 오늘날 지도자가 본받아야 할듯.

    덧글도 감사하고요.
    덕담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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