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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전통정원 - 서해5도(西海五島) & NLL

작성자선경나라|작성시간17.01.08|조회수676 목록 댓글 0

중국 어선, 심각성 지적 

불법조업 중국 어선

쇠창살·강철판에 연환계까지..불법 중국어선의 진화 


EEZ에서.,중국 어선들의 무더기 무허가 불법 조업.

해경이 검문검색을 위해 중국 어선에 오르려고 해도

중국어선 양편에는 쇠창살 시설 및  쇠파이프로 항해

우리나라 해경은 중국 선원들과 격렬한 공방전을 벌린다.


중국 어선 1200척, 서귀포 해상 포위? 

                                    서귀포 해상을 포위한.,1200척 중국 어선.


[뉴스경북=울릉군] 울릉군, 대통령에게 중국어선 울릉도 피항에 따른 울릉도 어업인 피해대책 건의 서한문 전달 

                                                             울릉도 앞바다.,중국 어선.


중국 어선 침몰 사건 

중국어선 첫 퇴거작전 성공하다! 

도둑질에 수산자원피해, 가격상승까지! 중국어선의 불법조업 

서해 NLL 넘나들며 싹쓸이하는 중국어선.."속타는 어민들" 

위기의 남북 관계 


수십년 째 끊긴 철길 위에 녹슬어가는 열차 잔해.

철도 중단 지점에 적혀있던 “철마는 달리고 싶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과 동일한 의미로 이해된 외침.


남북 화물열차 

 

철길이 끊긴 자리에 뿌려졌던 수많은 지뢰를 제거하고

정기운행을 시작했던., 2007년 12월 11일 개통된 화물열차.

그냥 단순한 화물열차가 아니라 통일에 대한 희망으로 보였다. 


통일 철마의 꿈 실현 - 11일 남북화물열차 개통 

                                                                                 2008.6.1.


MB 정권이 집권 초기에 대북 정책을 추진한지 14개월,

경의선 철도가 개통한지 16개월 정도가 경과한 시점에서

돌아보는 남북 관계에 등장하는 단어는 금강산 관광 중단.

이산가족 상봉 중단, 개성관광 중단, 남북 철도 운행 중단.

개성 공단 폐쇄로 인한 남북 경협의 중단 기류 등 중단 뿐. 


애틋했던 남북 관계, 이혼 위기까지 간 이유는… 
            북한의 해안포 공격으로 폐허가 된.,연평도 민간인 거주 지역.

북미관계 개선 없이 남북관계 개선은 없다 

                                                                                2015.12.1.

개성공단 폐쇄는 평화 통일 포기를 의미 

                                                                                2016.2.10.


연평도 인근 NNL로 인한 대립, 북측의 대남 강경 발언 

최근 북측의 로켓 발사와 핵활동 재개, 개성공단 폐쇄 등.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방북 무산 ‘파행’거듭 남북관계 전망은? 

국방예산으로 들여다 본 아리송한 남북관계 

                                                                              2016.9.5

北 김정은, 2017 신년사 발표..남북관계 부분 전문 

북한, 한국 정부에 남북관계 입장 분명히 해 줄 것 요구 

[비교교육학] 남북 관계와 통일 

한,중,일,북한 여군들  

남북관계 탈북 작품목록

남북관계 속에서 '트럼프 변수' 

박근혜 탄핵 가결 234표 찬성!!! 

                                                                           2016.12.9

노무현 탄핵은 국민이 반대 박근혜탄핵은 국민이 원함 

2016 남북관계..되돌아본 10대 이슈  

                                                                           2016.12.31.

[한반도] 파산으로 치닫는 남북관계 

서해오도 백령도여행 / 강화여행 



서해5도(西海五島)&  NLL



서해 북방 5개 도서중 막내 섬 ‘우도’ 


대한민국 관할 아래 있는.,서해오도(西海五島).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다섯 섬.

북한 황해남도 남쪽 해안과 더 가까운 위치에 있다.


서해 5도 대부분 행정구역상., 인천광역시 옹진군.

'민간인 출입통제구역'인 우도는.,인천광역시 광화군.

하여, 우도 대신 소연평도를 넣어 '서해오도'라고도 한다.


서해 5도는 1945년 8.15 이전까지는

황해도 장연군(백령도·대청도·소청도)

황해도 벽성군(연평도)에 속해 있었다.


 1945년 9월 미국과 소련이 38선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점령.

황해도 옹진군경기도에 속하게 되면서, 38선 남쪽에 위치한

서해 5도는 경기도 옹진군에 편입되었고 6.25 한국 전쟁의 결과,

옹진군의 육지지역인 옹진반도군사분계선 이북 지역이 되었으나,

서해 5도는 섬 주민들과 해병대의 노력으로 군사분계선 이남에 남았다.


49). 서해오도엔 호국훈련 한다는 보도가 없다. 


서해 5도에는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격 등 유사시

섬 주민들에게도 화기를 지급하도록 되어 있다.


1953년 7월 27일, 오후 10시.

교전선을 군사분계선(MDL)으로

한국전쟁의 정전협정이 발효되었다.


그러나, 해상분계선에 관하여는

정전협정에 명확한 규정이 없었다.

 

"연해의 섬 및 해면에 관한 통제권은

1950년 6월 24일 이전을 기준으로 하되,

서해5도는 UN군 사령관 관할 아래 둔다"


1953. 8. 30,

UN군 총사령관.

마크 웨인 클라크


이 단서조항 정전협정의 취지에 따라

남북간의 군사적 충돌을 억제할 목적으로

서해 5도와 황해도 사이에 설정한.,북방한계선.


북방한계선을 수호하는.,서해오도

항공모함과도 같은 역활을 하고 있다.


현재 전투기를 탑재할 수 있는 항공모함 보유국은

미국(12척), 인도(3척),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2척)

브라질(2척), 러시아 태국 스페인(각 1척) 등 9개국.


한국도 헬기 7대를 실을 수 있는 대형수송함(LPH) 독도함.

태국은 비록 경량급이지만 동남아 유일의 항공모함 보유국.

영국은 국방유지비가 많이 들어 현재, 항공모함 운영을 중지. 


항공모함 & 군함 관련 사진들 (비지엠 有) 

항공모함.

항공모함의 후덜덜함 


항공모함 1척 건조 비용은 5조원 정도 소요.

그 유지 관리비는 그보다 더 추가비용이 소요.

항공모함 보호선단 및 전투기들이 동반하기 때문. 


영국의 빈자리를 대신 채우고 있는.,미국 항공모함. 

태평양전쟁 이전까지 태평양 항공모함 대국은.,일본.

현재, 미국 항공모함 군단이 사실 상, 세계평화 방위군.


왜 사람들이 항공모함 항공모함 하냐면.jpg 


'살아 움직이는 섬'.,항공모함 1척.

약소국의 국방력을 능가하는 위력.


6.25전쟁 당시 UN군 천연비행장으로 쓰인.,백령도 사곶 사빈.

이탈리아 나폴리에 있는 것과 더불어 전세계적으로 단 두곳 뿐.

현재, 인천공항 제3단계 '백령도 소형공항 활성화'가 국토부 구상.


현재, '인천 ~ 백령도' 교통편은 1일 2척 여객선이 전부.

편도운항 5시간이라 '백령도 관광'은 최소 1박2일이 소요.

편도운임 6만8천원은 김포∼제주 저가 항공료보다 비싸다.


백령도 신공항이 완공되면, 백령도는 서울과 일일생활권

군과 해양경찰 항공기 이착륙도 가능해져 서해 안보역량과

중국어선 불법조업 감시 역량이 강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현재, 50인승 규모 소형공항에서 100인승 이상

항공기가 이착륙할 수 있도록 확장할 계획이다.

 

백령도 신공항 건설로

백령도·대청도·소청도가

서울 수도권과 일일생활권.


서해5도 교통불편 해소.

서해5도 지역경제 활성화.

서해 최북단 안보 역량 강화.


ICC, 작년 보고서 "NLL, 남북간 실질적 해상경계선 


 NLL은 1973년 9월까지

남북 사이의 특별한 마찰 없이

남북간 해상 경계선으로서의 기능.


그러나, 1973년 10월과 11월에 북측 선박들이

수십차례 NLL을 침범하였고, 같은 해 12월 개최된

군사정전위원회에서 북측은 서해 5개 섬 주변수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관할이라고 주장하면서 충돌.


북측은 이 수역을 항행하려면

사전승인을 받으라 남측에 요구.


북방한계선 [北方限界線, NLL] 


또한, 북측은 제1연평해전 직후인 1999년 9월

조선 서해 해상 군사분계선을 일방적으로 선포.


서해 5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한민국을 침공하는 것을 막는 1차 방어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활동 범위를 좁혀

인천항인천공항이 안정적 기능을 유지하고

경기만 일대에서 조업하는 어민들이 평화롭게

생업을 도모할 수 있게 해주는 군사적인 요충지.


반면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입장에서는

이 지역이 첨단무기로 요새화(fortification)된다면

황해남북도는 물론 평양까지도 위협받을 수 있는 곳.


썰물때 北과 연결되는 '서해5도'의 섬, 우도 

썰물 때 북한과 연결되는.,우도(隅島).


...................우도(隅島)...........................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속하는 이다.

행정구역상 강화군 서도면 말도리에 속하지만,

말도(唜島)로부터 남서쪽으로 15km 떨어져 있다.


면적은 0.21 km², 독도(0.188 km²)와 비슷.

서해 5도 중 하나로, 연평도 동쪽으로 25 km.

인천국제공항과 가까운 곳이며, 해병대가 주둔.


우도는 서해 북방한계선(NLL)에서 6 km 남쪽


우도에서 8.5 km 북동쪽,

북방한계선에서 1.5 km 남쪽에는

면적이 우도의 10분의 1에 불과한 함박도.


강화군 서도면 말도리.,함박도.

썰물 때 우도와 갯벌로 이어진다.


우도에서 가장 가까운

북한 황해남도 연안군.

우도에서 19 km 북동쪽.

.................................

 

서해 NLL의 무인도“우도”장병들의 사진이야기 


NLL은 휴전 이후에,

남북한.,해상경계선.


휴전협상 의제 가운데 군사분계선 협상에서

유엔군 측과 공산 측은 38도선으로 할 것인지

당시 전선으로 할 것인지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유엔군의 군사적 압력 속에 공산 측이 38선 안을 철회.

1951년 11월 하순 양측은 대치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합의.

당시, 동서 해안 해상경계선에 대한 명시적 합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유엔군 측에서는 당시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영해 기준 3해리를 고려하고 연평도·백령도 등 5개 도서와

북한지역과 개략적인 중간선을 기준으로 북방한계선을 설정.


이에 대해 북한측은 북방한계선을

유엔군 측의 일방적 조치라며.,부인.

이러한 입장 때문에 해상 긴장이 계속.

1999년과 2002년 연평도 인근 전투 발생.


'연평해전' 세월호 참사에 제작 지연 


휴전 후, 북측은 북방한계선을 부인하면서

자주 침범했으나 남측은 사실상 묵인해 왔다.


하지만, 북측은 1973년 12월 제346차 & 제347차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에서 구 황해도와 경기도

도 경계선 이북 수역은 그들의 연해(沿海)라고 주장.


북측은 서해5도 출입선박 사전허가 요구.

1977년 7월 1일 ‘200해리 경제수역’을 설정.

8월에는 ‘해상경계선’으로 동해 영해 50마일을,

서해에서는 경제수역으로 한다고 일방적으로 선언.


남한의 일부 학자와 시민단체에서도

북방한계선이 대남 한계선이라기 보다는

한국 해군의 내부적 한계선이라고 주장하였다.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남과 북의 해상 불가침경계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한다. 해상 불가침구역은

해상 불가침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해 온 구역으로 한다” - 합의 -.


북방한계선 논쟁을 일단락 지은듯 했다.

그러나, 1999년 6월 연평해전이 일어났다.


영화 '연평해전' 배경, 제2연평해전은? 

 

북한은 그해 9월 새로운 군사분계선을 선포.

이어 2000년 3월 하순엔 기존 북방한계선 대신,

자신들이 설정한 ‘서해 5개섬 통항 질서’를 발표.


정부는 이를 인정할 수 없다고 즉각 반박

그 후로도 남북한의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정전협정 제2조 제13항 .....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

서해 5도 도서군은 UN 사령관 군사통제 하에,

기타 모든 섬들은 조선인민군 총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 군사통제 하에 둔다.”

..........................................................


그러나, 정전협정에는 합의한 육상군사분계선만 존재.

'해상군사분계선, 육상군사분계선' 해상 연장선은 없다.


그런데, 정전협정은 쌍방이

추가 합의할 경우 등을 예정.


............정전협정 부칙 제61항..............

“본 정전협정에 대한 수정과 증보는 반드시

적대 쌍방 사령관들의 호상 합의를 거쳐야 한다”


 “본 정전협정의 각 조항은 쌍방이 공동으로

접수하는 수정 및 증보 또는 쌍방 정치적 수준에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적당한 협정 중의 규정에 의하여

명확히 교체될 때까지는 계속 효력을 가진다.”

............................................................


따라서, 해상군사분계선 설정은

쌍방 사령관의 상호 합의를 거치는

'정전협정'에 대한 수정과 증보 또는

쌍방 평화적 해결을 위한 합의로 가능.


1992년 9월 '남북 화해 불가침 및 교류·협력 합의서'

'부속합의서'에서 “남과 북의 해상불가침 경계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한다”는 규정도 이를 반영한 셈이었다.


하지만 남북장성급 군사회담에서

서해상 우발적 무력충돌 방지.,의제.

아무런 진전도 없어 남북 쌍방 간 불신.


서해 북방한계선(NLL) 논란에 대한 잡문 


남과 북은 서로 자신들이 설정한

서해 해상군사분계선을 되풀이 주장.


2006년 3월 제3차 남북장성급 군사회담

북측은 서해 북방한계선 재설정 협의 주장.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에서는

서해 평화협력지대 개발 합의 절충안.

한달 뒤 제2차 남북 국방장관회담에서는

북방한계선 재설정 문제를 논의키로 합의했다.


&quot;노무현의 NLL 포기는 없었다.. 정문헌·국정원 지도 터무니없어&quot;   


북한 황해도 강령군 개머리진지에서

2010년 10월22~23일 연평도 포격사건.


연평도에 북한 해안포 수십 발 떨어져(3보) 


이명박 정부 들어

남북대화가 중단되면서

협의는 더 진행되지 못했다.


北 연평도 포격, 해병대 2명 사망ㆍ13명 부상…"암흑처럼 깜깜" 


남한에서는 북방한계선이 지난 반세기 이상

남북한 해상경계선의 효력이 있는 것으로 주장.

북한에서는 휴전 후 북방한계선을 침범하면서 부인.


특히 서해상에는 매년 6월 꽃게잡이 철을 맞아

남북 간 서해상 영해침범이라는 상호 엇갈린 주장.

군사적인 경고와 행동이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이에 따라 남북한 사이에

해상에서 무력충돌의 가능성.

이를 해결할 노력이 필요한 시점.


......................

......................


1999년 6월 7일부터 14일까지

북한 경비정이 어선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해상 북방한계선(NLL)을 무시.


침범 및 철수를 반복하였던 북한 경비정.

대한민국 해군은 참수리급 고속정을 이용.

북한 경비정의 선체 뒷부분을 부딪쳐 막는

일명 “밀어내기 작전”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1999년 6월 15일과 2002년 6월 29일,

2차례에 걸쳐 북방한계선(NLL) 남쪽의

연평도 인근 해역에서 대한민국 해군 함정과

북한 경비정 간에 발생한 해상 전투.,'연평해전.'


원래, 연평도 해역은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서해 꽃게잡이 어업구역.


북 꽃게 외화벌이 NLL 우리 어장도 중국에 팔았다 


2014년 5월 북한에서는 외화 벌이를 위해

백령도 북쪽과 동쪽, 등산곶과 연평도 사이.

NLL 이남 영해 일부 조업권을 중국에 넘긴 것.


그리하여, NLL 해역에서

중국 어선과 우리나라 해경 간

마찰 충돌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단속공무원 승선을 막으려고

선체 주변에는 쇠창살과 철망을,

조타실에 철문을 설치한 중국어선.


국가어업지도선 무궁화 24호는

대한민국 배타적경제수역 내에서

무허가조업, 집단행동 등의 혐의로

중국 무허가 어선들을 검거하고 있다.


북한이 중국에 제공한 어업구역은

백령도 북쪽과 동쪽, 연평도 북쪽 등

모두 3곳인 것으로 우리나라 정부는 파악.


NLL 서해5도는 절경이 즐비하다.

대한민국 관할 아래 있는 섬들 가운데

북한 황해남도의 남쪽 해안과 가까운 5섬.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우도. 

 

추석연휴 서해5도 여행, 소청도 분바위 

소청도.,분바위,


[강추 지역별 대표 피서지] 인천 '연평도'/빠삐용 바위 등 볼거리에 분단현장 체험도 

연평도.,가래칠기해변 빠삐용바위,


추석연휴 서해5도 여행, 소연평도 얼굴바위 

소연평도.,얼굴바위.


....................연평도..................

대연평도와 소연평도가 속한 연평면

인구는 1,536명(남 865명, 여 671명)이고

세대수는 754호(2007년 인구조사 통계 가준)


토지이용 현황 0.45㎢,

밭 0.66㎢, 임야 5.57㎢.


대부분 주민이 농업과 어업을 겸하고 있으며,

농산물 쌀· 콩· 고구마· 땅콩· 마늘· 고추 등 생산.

한때 조기파시(波市)로 우리나라 대표적 조기어장.


현재는 명맥이 끊어지고 꽃게잡이 조업과 굴,

바지락 채취가 연평도 주민의 주요 소득원이다.


대연평도 동쪽 방파제(856m).,연평도항(2종)

연평도는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등과 더불어

황해 어업중심이며 북서쪽으로 휴전선과 인접.


면사무소 뒷산에

임경업 장군을 기리는

충민사(忠愍祠) 사당이 있다.

.......................................


연평도 일출, 소연평얼굴바위 


연평도 빠삐용 절벽 해안가에서

저 멀리 보이는 섬과 육지는.,북한.

남북 분단의 현실을 볼 수 있는.,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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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에 연평도는

임경업(1594~1646) 장군.

설화(說話)가 전해오는 섬.


그에 관한 설화는 연평도에서 시작되었지만,

옹진군은 물론 충남 태안반도까지 퍼져 있다.
병자호란 패전 직후, 의주 부윤인.,임경업 장군.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구하려고 상인으로 위장해 중국에 잠입하기 위해

'조선 ~청나라' 뱃길 중간에 위치한 연평도에 정박.


식량과 식수 등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겁을 먹은 뱃사람들이 그 구출작전을

포기하게 하려 식량, 식수를 바다에 버렸단다.


어떤 이는 풍랑을 만나는 바람에

식량이 몽땅 떠내려갔다고도 한다.


식량이 필요했던 임경업 장군은

'안목'이라 불리우는 연평도 앞바다에

썰물 때 가시나무를 촘촘히 박게 했단다.


바닷물이 안목에 들어왔다가 나가자,

가시나무에는 조기가 주렁주렁 달린 것.

 
지금도 연평도 안목어장에는

그 방식대로 ‘어살’ 40개가 설치.

전통 방식의 조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후,  연평도 섬 주민들은 

임경업 장군의 사당을 지어서

풍어를 기원하는 신으로 모셨단다.

임경업 장군에 관련된 설화는

옹진군 다른 섬에도 남아있다.

 

자월도 포구.,‘팔선녀 뿌리’

임경업 장군.,'설화의 고향'.


1640년 4월 임경업 장군이 청의 요구로 전선 120척에

수군 6천여 명을 이끌고 명·청 전쟁에 참전하러 가는 중

자월도에 들렀는데, 섬 주민들이 어여쁜 여자 8명을 뽑아

포구에 나란히 서서 임 장군을 환영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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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아름다움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대청도 농여해변 


대청도에는 원나라 황제인

순제(1320~1370)가 유년시절

귀양살이 했던 전설이 전해온다.


대청도 농여해변 #페이지 #대청도여행 #농여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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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도에 무슨  일이?".. 인근 포성에 '주민 대피 준비령'·어선들은 귀항  


백령도는 장산곶 남쪽 38°선 바로 아래에 위치.

인천앞바다에서 서북쪽으로 191.4㎞ 떨어져 있다.

남한 서해 최북단에 위치해, 남한보다 북한에 가깝다.


북한 황해도 육지에서 약 10km 남짓 거리.

6.25 이전까지 황해도에 속했던.,38선 이북.

백령도 토박이 주민들은 황해도 억양의 방언.


우리나라에서 14번째로 큰 섬.

동경 124°53′, 북위 37°52′에 위치.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에 속한 섬.


면적 46.3㎢, 해안선 길이 52.4㎞.

2007년 말, 세대수는 2,173호이다.

인구 4,826명(남 2,558명, 여 2,268명).


백령도 


사곶천연비행장, 두무진·콩돌해안 등이 있는데,

백령도 두무진은 1997. 12. 30. 명승 제8호로 지정.

백령도사곶사빈(천연비행장)은 쳔연기념물 제391호.

옹진백령도남포리콩돌해안은 천연기념물 제392호로 지정.


백령도 콩돌해안과 대문바위 


"두무진"은 하늘로 쭉쭉 뻗은 바위들이 모여있는 해안가.

용맹한 장군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는 것 같은 모양.

파도가 깎아지른 병풍 해안가 절벽과 가지각색의 기암괴석.


백령도 안개낀 두무진 


마치, 금강산 만물상과 비견되어.,"서해의 해금강".

늙은 신의 마지막 선물이라고 평가받는 선돌바위.

물범 서식처.,물개바위, 장군바위, 코끼리 바위 등.


백령도(白翎島) 지명은

백학도(白鶴島)에서 유래.


[백령도 여행] 백령도 담수호에 철새들~ 


옛날 황해도 어느 고을에 한 선비가 사또의 딸을 사모.

둘이 장래를 약속하자 이를 안 사또가 딸을 외딴 섬으로

보내버리자 선비는 사또의 딸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애썼다.


어느날, 하얀 학이 흰 종이를 물어다주고 가는.,꿈.

선비는 꿈에서 깨어나 그녀가 백학도에 있음을 직감.

선비는 장산곶에서 배를 타고 꿈속의 섬까지 달려와

사또의 딸을 찾아 회포를 풀며 단란하게 살았다는 섬'


백령도여행 3  

 

선비의 꿈속에서 백학(白鶴)이

그곳을 알려주었다 하여.,'백학도'.


옹진군 섬 [ 백령도 & 연평도 & 대청도 & 소청도 & 장봉도 & 덕적도 & 자월도 & 영흥도 ] 관련 지도 모음 


인천 연안부두에서 쾌속선으로도 4시간 거리.

백령(白翎)이라는 지명은 '하얀 새의 날개' 뜻말.

한때, 수백만 마리 두루미 철새들의 보금자리.,백령도.


선비가 처녀를 만나기 위해 배를 탔다는.,장산곶.

백령도에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황해도 땅.

해무가 끼는 날에도 손에 잡힐 듯 가까운.,장산곶.


남쪽 백령도에서본 인당수가있는 남과북 


백령도 심청각에서 바라다보는 서해바다는

유독 검푸른 색을 띄고 유유히 흐르고 있다.

두무진 짙푸른 바다가 ‘인당수’라 불리는 곳.

 
심청이 맹인 아버지에게 광명을 선물하기 위해

두무진 인당수 몸을 던졌던 곳이 장산곶 앞바다.


백령도 연화마을 여행 1 


하늘도 감동한 효녀 심청은

용왕의 보살핌으로 연꽃을 타고

세상으로 돌아왔다는.,전설의 고향.


심청이가 몸던진 인당수가 보이는 섬 백령도로 가보실까요?  


....장산곶 앞바다.,두무진(명승 제8호)......

백령도 북서쪽 약 4㎞에 걸친 해안선에 따라

오랜 세월동안 파도와 비바람에 깎여 만들어진

높이 50여m 내외의 규암절벽을 일컫는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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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족한 바위들의 생김새가 머리털 같다.’.

하여, 두모진(頭毛鎭)이라 칭하였다가 뒤에

‘장군머리 형상을 이루고 있다’.,두무진(頭武鎭)


두무진에 솟아 있는 바위들은 그 모양에 따라

코끼리바위· 장군바위· 신선대· 선대암·팔각정 등.


1612년 광해군은 재위 4년에 선대바위를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 - 백령지(白翎誌) -


인신공희 설화(說話).,심청전.

인신공희 줄거리.,'거타지' 설화.


거대한 토목공사를 할 때에 사람을

물 속이나 흙 속, 혹은 그 재료 속에

파묻는 인주(人柱) 풍습도., 인신공여.

신라 성덕대왕신종 전설 (에밀레종 인주).


인신공희(人身供犧) 풍습은

사람을 신에게 제물로 바친다.

'인신공여'  '인신공양'이라고도 한다


개성.,지네산전설,

청주.,지네장터전설,

제주도., 금녕사굴전설 등


인신공희는 순장(殉葬)의 형태이지만

전 세계에 수렵시대,·유목시대를 거쳐

농경시대까지 존재한 것으로 여겨진다.


페루· 잉카· 고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팔레스타인· 이란· 인도· 그리스· 로마· 중국 등

고대 문명 발상지에서는 대부분 인신공희가 있었다.

.

특히, 멕시코 지역에 있는., 달의 피라미드.

사람의 심장과 피를 제물을 바쳤던 곳이었다.

16세기, 에스파냐 점령 후까지.,이 의식이 유지.


기독교 성서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메소포타미아 히브리 신화에서 아브라함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여호와 명에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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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해안가 섬을 다니다 보면,

특이한 도서지역 전통 풍습이 참 많다.

도깨비굿, 디딜방아 액막이,줄다리기 등.


지독한 가뭄으로 기우제를 드려도 효험 없고

염병까지 돌아 마을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일이

발생하면 집안에만 갖혀있었던.,여성들이 등장.

 

여인들은 월경서답(생리혈이 묻어있는 속고쟁이)을

장대에 매달고 양푼, 놋대야 등을 숫가락으로 두드리며

온 마을을 돌아다니는 것이 진도의 고유 풍습.,'도깨비굿.'


충청도 지방 '디딜방아 액막이'풍습 또한

계속되는 가뭄끝에 여성들이 나서는 행위로서

옆동네 디딜방아를 훔쳐와 길거리에 거꾸로 세우고

방아다리 갈라진 곳에 여성의 월경서답을 걸쳐놓는다.

 

'하늘이 보고 까무라칠 일'이지만,

믿거나 말거나 이런 행위들로 인하여

하늘도 놀라서 비를 내리고 만다는.,풍습.


성적인 주술의 힘으로

집단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마을공동체 액막이 풍습이다.

 

'줄다리기' 놀이 풍습도 성적인 주술의 힘으로

집단의 풍요가 오는 것을 바라는 풍습에서 유래.

줄다리기의 줄은 암줄과 수줄로 남녀를 구별한다.


암줄과 수줄 사이에 낀 

통나무로 비녀목 지르기.

영락 없는 남녀결합 모양새.

 

'암줄과 수줄' 줄다리기 놀이에서는

암줄이 이겨야만 풍년이 온다고 믿었다.

여성을 생산의 상징물로 간주하는 유감주술.


'닮은 것은 닮은 것을 낳는다.'는

유사(類似) 법칙에 기초한.,유감주술.

'남근신앙'도 풍요를 기원하는.,유감주술


 마을 공동체의 풍요를 위해 남근석에 제를 올리거나

부정한 사람의 접근을 막는 금줄을 쳐서.,남근석을 보호. 


조선후기 남성중심의 유교적 규범들이 더 철저해지면서

남아선호사상 여성들의 남근숭배 행위를 더욱 촉진시켰다. 

가부장적 남아선호사상이 남근석 민간신앙을 가져온 것이다. 


그 밖에 처녀귀신을 달래기 위해

나무로 깍은 '남근'을 바치는 풍습.

강원도 삼척 해랑당(海娘堂)이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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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서해와 남해 도서지역

해안가 민간신앙에 등장하는 인물들

최영, 관우 & 임경업(1594~1646) 장군.


임경업장군 영정 

부안 위도 치도리당집.,'임경업  장군' 영정.


최영은 고려왕조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기에

조선건국 후 개성 사람들이 신당에 모시고 제를 지냈고,

관우 관제묘는 '임진왜란 구원군' 명나라 은혜를 기리는 사당.


연평도 충민사(향토유적 제1호)는 조선중기 임경업 장군의 사당

병자호란 치욕을 당하고 청나라를 치기 위해 명나라로 가던 도중,

연평도 물고기잡이로 식량을 보충한 것이 조기잡이 시초라고 하며,

해마다 봄이면, 연평도 주민들이 풍어제를 지내는.,임경업 장군 사당.


임경업 장군은 조선시대 어떠한 인물이었을까?


....... 임경업 장군...................

임경업 장군은 1618년(광해군 10)

아우 사업(嗣業)과 함께 무과에 합격.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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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업은 충주 탄금대가 있는 달천강 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그가 태어날 때에는 영 보잘 것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활쏘기 · 말타기, 서당에 다니며 글을 익혔다.

임진왜란 때 신립이 배수진을 치고 전사한 탄금대.

임진왜란이 일어난지 2년 뒤에 임경업이 태어났으니,

그도 비극의 장군 신립에 관한 전설을 들었을 것이었다.


임경업은  기개가 있고 포부가 큰 청년이 되었고

1618년(광해군 10) 무과합격 관계에 발을 딛었다.

1624년(인조 2) 명장 정충신 지휘 아래에 들어갔다.


이해 이괄의 난 때 정충신은 전부(前部) 대장이 되어

질마재(현재 영천고개)에서 이괄의 군사와 맞붙었다.

이때 임경업은 선봉에 나서 이괄의 반란군을 무찔렀다.


이괄의 난이 평정되자, 임경업은 그 공을 인정받아

아랫장수로는 첫 서열에 올라 진무원종공신 1등에 책봉.

그뒤 계속 승진을 거듭해서 낙안군수에까지 올랐던 임경업.


광해군 때와는 달리, 나라 안은 온통 배금열(排金熱)

당시 후금(훗날 청나라)에 대한 반감이 가득 차 있었다.


조선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은의(事大恩義) 때문에

명나라와 적대관계인 후금에 대해 적대감을 보인 것.

1627년 후금군이 한꺼번에 침입해 왔다.

임경업은 좌영장이 되어 강화도로 갔지만

이미 삼전도 굴복 후라 분통을 터뜨린 임경업


“나에게 정병 4만을 준다면 오랑캐들을 무찌르고

압록강 물에 칼을 씻고 돌아올 것이다”라고 외쳤다.

그는 정승으로 있던 김육의 눈에 들어 북쪽 방어사를 맡아

산성을 수축하고 청천강 일대 방비시설을 갖추는 등 맹활약.

명나라가 후금에 투항한 명나라 장수 공유덕 등을 토벌할 때

조선에 원병을 청했는데, 임경업이 출전해 많은 성과를 올렸다.

명나라에서 그에게 총병관 직책을 주었고,

임경업 장군의 이름이 명나라에까지 퍼져

명나라에 대한 그의 충성심도 더욱 강해졌다.

이런 공으로 그는 국경도시 의주부윤이 되었다.


의주부윤으로 있는 동안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갈 때

온 정성을 다해 그 뒷바라지를 해 주었고,

포로로 잡은 명 군사를 남몰래 풀어주었다.


1636년 마침내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이제 그가 벼르던 기회가 온 것이었다.


의주에서 적을 막을 계책을 세운 임경업.

전쟁이 일어나 수하의 군사를 점검해 보니

모두 달아나 800여 명 군사 밖에 남지 않았다.


명장도 이런 형편에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허수아비 수천 개를 성 주위에 세우고 임전태세.

적군은 이를 보고 의주성을 돌아 서울로 진격했다.


그 바람에 적군은 약 10일을 허비했지만

그런데도 조정은 끝내 항복하고 말았던 것.

그뒤 청군은 서해 가도에 있는 명군을 치기 위해

조선에게 군사파병을 강요해 출전하게된.,임경업.


“조선 국법에 적진의 성지를 빼앗으면

그곳 재물을 마음대로 약탈할 수 있다.”

그 소문을 청군 쪽에 퍼뜨렸던.,임경업.

그 소문을 듣고 앞다투어 선봉에 나선 청군

조선 군사는 뒷전만 따라다녀 희생이 없었고

미리 명군 장수와 내통해 명군 피해를 줄였다.

그뒤 무장 최고위직 평안병사에 오른 임경업

이때 청에서 명 금주를 공략하면서 파병을 요구.

이때도 임경업이 그 소임을 맡아 바다길로 나갔다.


청군은 육로로 들어가고

조선군은 바다로 가기로 했는데,

임경업은 바람이 조금 강하게 불어도

배를 느리게 가 약속 날짜를 어겼다.- 중략 -


임경업은 친명반청 사회분위기 속에서

우국충정에 뛰어난 충신이요, 무장이었다.

그러나, 명성을 떨치면서도 한번도 청나라와

싸움다운 싸움을 해보지 못한 불운의 명장이었다.


그는 망해가는 명나라와 힘을 합쳐 청나라에 저항해

병자호란 굴욕을 씻으려 했지만 조국이 뒷받침하지 못해

1646년 임경업은 자기 나라를 배반하고 남의 나라에 들어가

국법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모진 매를 이기지 못해 53세에 운명.


명청 양다리 외교를 펼친.,광해군이

가장 믿고 총애했던 무장 임경업 장군.


인조 역시 임경업 장군을 신뢰하였지만

인조반정 공신들의 벽을 넘지 못했던.,인조.

결국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명장.,임경업장군.


1697년(숙종 23) 12월 숙종 특명으로 복관.

충주 충렬사(忠烈祠), 선천 충민사(忠愍祠),

백마산성 현충사(顯忠祠), 겸천(兼川) 충렬사

등에 제향되었고, 임경업 장군 시호는 충민(忠愍).


1594.11.02 조선 중기의 명장 임경업 장군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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