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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 '광해의 여자' 김개시(?∼1623 : 인조 1).

작성자선경나라|작성시간17.02.07|조회수1,692 목록 댓글 0

선조 . 김개시 박선영 누나 



조선시대 - '광해의 여자' 김개시.



김개시 . 광해군 


'남자는 천하를 다스리지만

그 천하를 다스리는 남자의 곁에는

그 남자를 다스리는 여자가 반드시 있다.' - 격언 -


'조선시대 김개시는 광해의 여자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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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장 18절 ~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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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흙으로 들의 온갖 짐승과

하늘의 온갖 새를 빚으신 다음,

사람에게 데려가시어 그가 그것들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셨다. 사람이 생물

하나 하나를 부르는 그대로 그 이름이 되었다.


이렇게 사람은

모든 집짐승과 하늘의 새와

모든 들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인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게 하시어 그를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사람과 그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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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1575~1641, 재위 1608~23) 부부의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낮은 산비탈에 있다.


광해군묘 (光海君墓) 

인조반정으로 폐위 당한 폐주 광해군 묘 

천마산 봉인사~광해군묘~관음봉 

 

왕릉답지 않게 규모가 초라하기 짝이 없고 비석에는

총탄 자국도 군데군데 있어 보는 이들을 서글프게 한다.

그 언저리에 있는 단종의 왕비 송씨의 사릉과 대조가 된다.


남양주 사릉 (南楊州 思陵) 

                                                    정순왕후(定順王后).,사릉(思陵)


조선조에서는 폭군으로 흔히 연산군과 광해군을 꼽는다.

분명 연산군은 폭군 범주에 들지만 광해군은 사뭇 다르다.


광해군 폐위 죄목은, 선조를 독살하고 형과 아우를 죽이고

인목대비 유폐 및 토목공사를 벌여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고

정치를 혼탁하게 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광해군 폐위 주된 구실은.,친명배금 사대주의

반정 세력은 광해군이 명나라에만 대해 사대하지 않고

그당시 신흥 강대국 청나라에도 곁붙었다는 구실이었다.


이것이야말로 광해군을 오늘날 재평가하는 초점이 된다.

다시 말해서 자주실리 외교추구 때문에 사대파에 밀렸던 것.

광해군(光海君)은 시대가 거부한 폭군 아닌 폭군 아니었을까?


임진왜란 이후

난세를 이끌다가
패륜의 멍에를 지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조선의 군주.,광해군(光海君)

역사 상 무릇 한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하면
그 백성들은 현명한 지도자와 충신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역사는 짓궂게 우매한 암군과 간신을 등장시켜
현군과 충신을 핍박해 격동의 시대상을 엮어낸내곤 한다.

선조에서 인조까지 이어진 조선 중엽의 위기상황
그렇듯하게 아이러니컬한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다

광해군(光海君)은 폭군이었을까? 현군(賢君)이었을까?


인조반정군에 의해 참수된.,김개시.

상궁 김개시는 악녀이고 요부였을까?

아니면, 광해군의 충직한 심복이었을까?


광해군과 마찬가지로

김개시에 관련된 기록들은

상당 부분 멸실되고 변질된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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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시(?∼1623(인조 1)는 미모가 아니었지만,

민첩하고 꾀가 많아., 광해군의 깊은 총애를 받아

이를 배경으로 국정 깊숙히 관여했던.,상궁이었다.

 

그당시 권신인 대북(大北)의 영수 이이첨(李爾瞻)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권력을 휘둘러 국정을 문란시켰고
이에 윤선도(尹善道)·이회 등이 여러 차례 상소하여 논핵.

 

도리어 그들이 유배되는 등 광해군 재위 때 권세를 누렸으나
1623년(광해군 15)인조반정 반정군에 잡혀 참수당했던.,김개시.

광해군 재위 시절에 "왕에 못지 않은 권력을 누렸다."고도 전한다.


'조야집요'에 따르면, 그녀의 권력은 중전 유씨를 능가해

광해군이 어느 후궁 처소에 드는 것까지 직접 정해줬단다.


이후 반정의 조짐을 알게 된 후 이를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자, 광해군을 배신하고 반정의

주력인물 김자점에게서 뇌물을 받고 반정 후에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반정을 묵인해, 여러 차례 광해군을 안심시켰단다.


화정 김개시는 과연 광해군 시대의 악녀일까? 선조와 광해군 김개시에 얽힌 진실은 무었인지 실제 역사기록을 통해 알아보자. 


광해군은 구체적인 반정자 명단이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

김개시의 말을 듣고 이를 묵살해버렸고, 인조반정 하루 전까지

상소가 계속 올라왔지만 김개시는 광해군의 마음을 돌리는데 성공.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와 대립관계였는데,

인목왕후가 정명공주 회임 때 도깨비소동으로

유산을 시키려 했다는 이야기가 계축일기에 기록.


선조 재위 때 처소나인이자

광해군 재위 때 상궁.,김개시.

"두 왕의 성은을 받았다." 전한다.

 

조선시대 역사 상, 전무후무한.,사례.

아울러, 킹 메이커 역활을 했던.,상궁.

광해군 재위 때, 왕권에 버금가는 실권자. 


1623년(광해군 15년) 3월 13일 서인들이 주도한 인조 반정.

인조 측근 반정군에 의해 요부로 지목된 후 처형된.,김개시.

인조반정 후, 김개시에 관련된 역사 기록들은 과연 사실일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판단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김개시가 광해군 때 실권자 였음은 사실인듯. 

'일개 상궁의 신분으로 왕의 국정 파트너가 가능한걸까?'


광해군 재위 때에는 '3 여인' 국정 파트너가 있었다.

궁녀 김개시, 정소용(소용 정씨), 임소용(소용 임씨)

3 여인은 광해군의 '국정 파트너'였지만 자식은 없었다.

.

소용정씨는 인조반정 당시에 자결하였다.

일에 익숙하여 왕에게 출입하는.,문서 관리.

왕을 대신해 계하(啓下)할 만큼.,광해가 신뢰.


임소용은 임몽정(任夢正)의 서녀(庶女)지만

자색(姿色)이 있어.,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다.

인조반정 당시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왕비 세자 세자빈이 모두 죽고난 이후에도

유배지에 혼자 남은 광해군을 곁에서 지켰다.


그녀에 대해 폐주의 후궁이라 하여 사사가 논의되었으나,

광해군 재위때 이귀김자점이 고변당할 때 두 사람을 옹호.

죽음을 면하고 계속 해서 광해군 곁에서 그 시중을 들 수 있었다.

1628년에 유배지에서 광해군을 모시다가 잡혀 와 사형에 처해졌다.


1628년 '허유의 역모사건' 때 사형당했다 하며

또는 이 사건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한다,


광해군은 국정 파트너 셋 중에서

김개시를 곱절로 신뢰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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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 중 가장 우두머리는 '제조상궁'(提調尙宮)이다.

그 때문에 권세나 권위가 대단해 역사 상 정치의 이면에서

왕을 대신해 눈에 보이지 않는 주역을 맡는 경우도 허다했다.


제조상궁마마님의 결례식 ㅡ 

 

궁녀 중 가장 고참인 제조상궁은.,오직 한사람

학식과 영도력은 물론 외모까지 뛰어나야 한다.

제조상궁은 대전 어명을 받들고, 내전 일을 주관.

 

재상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고 어려운 청원이 있으면

먼저 이 제조상궁에게 부탁하는 일이 많았다고도 한다.

심지어 재상과 제조상궁이 의남매를 맺는 경우도 있었다. 


[공유] 궁녀의 품계(직급)? [제조상궁<부제조상궁<대령상궁<보모상궁]

제조상궁 바로 밑에는 부제조상궁이 있다.

왕의 사유재산 목록에 드는 귀중품이 들어 있는

내전 곳간을 관장해 일명 '아랫고'라 부르기도 했다.


왕의 아침 

                                                                                   지밀상궁.

왕의 어명을 받을 자세로 항상 대기하는 '특명상궁'(지밀상궁)

왕의 자녀에 대한 양육을 맡은 나인들의 총책임자.,'보모상궁',

서적 등을 관장하고 글을 낭독하는 일 등을 수행하는.,'시녀상궁',

궁녀들의 근태나 소행 등을 감시해 평가하는 임무를 맡는 '감찰상궁'


궁녀 (2007) 

                                                                                  감찰상궁.

 

그들이야말로 왕권의 그늘에서 소리없이

피고 지고 간.,권력의 핵심자 임에 틀림없다.

 

아무 직함도 붙지 않은채 그 아래 나인을 총괄하고

책임지는 일반상궁도 각 처소마다 7~8명씩 있었다.

김개시는 광해군때 아무런 직함도 붙지 않았던.,상궁.

 

그러나, 그 권세는 제조상궁을 능가했던.,김개시.

선조 때, 처소나인이자, 광해군때 상궁이기도 하다.

궁중 안살림을 나눠 맡아, 육처소에서 일하던 지밀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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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녀의 꽃' 지밀나인은 왕을 측근에서 모셔

왕의 후궁이 될 가능성이., 가장 많은.,엘리트.

 

하여, 4~5세 어린 나이에 궁으로 데려와 7~8세 무렵부터

'동몽선습, 소학, 내훈, 열녀전서'는 물론 궁체연습까지 공부.

김개시는 생각시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엘리트가 아니었을까?

 

동궁전 광해군 지밀나인으로 있다가

선조의 눈에 띄어 성은을 받게 되었고

그후, 즉위한 광해군 총애를 받은.,상궁.

 

궁녀 중에서 '생각시'라고 불리는.,소녀 나인.

'머리를 생머리로 빗는다.' 하여 생각시라 하는데

4~5세 지밀, 6~7세 침방, 수방 소녀 나인이.,생각시.


[공유] 궁녀들간의 호칭 (생각시, 마마님, 항아님, 애기항아님) 

 

기타 처소 나인은 12, 13세에 들어와

그로부터 15년 후에야.,정식 나인 행세

 

궁궐의 하녀들은 생각시를 부를 때 "생항아님"

혹은 "애기 항아님"이라고 높여 존대해 불렀다.

 

특히, 지밀 생각시들은 왕이 부리는 생각시라 하여

어른 상궁도 "해라" 못하고 "이러우, 저러우" 존대말.

생각시는 훗날, 왕의 성은을 받게 될지도 모를 귀한 몸.


궁녀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남녀의 정욕은 음양의 이치에서 받은 것이므로

귀천을 막론하고, 사람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지만

한번 궁궐에 갇히면 외로운 몸이 될 수 밖에 없는 상궁."

 

"꽃을 봐도 눈물이 눈을 가리고

휘영청 보름달을 바라만 봐도 넋을 잃어,

매화나무 꾀꼬리처럼 짝지어 날지 못하는 새"

 

엄상궁에서 '순헌황귀비' 가 된 그녀. 

 

궁녀라 해도 왕의 성은을 받기란.,'하늘의 별따기'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 보다 어려웠다.'전한다.

"님을 봐야 뽕을 딴다."지만, 늘 지켜보며 애태우는 신세.

 

김개시가 광해군에게 절대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미모는 아니었지만 성적기교라 할 비방을 써서였다. -연려실기술-

"나이가 들어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지만 성적 비방이.," - 광해군 일기 -

 

'광해군 일기'는 사실 상, 조선왕조실록이지만

인조반정으로 폐위돠어.,"광해군 일기"라 칭한다.

그러므로, 사관이 남긴 기록이라 해도 믿기 어렵다.

 

인조반정 사관의 기록은.,승자(勝者) 측 역사관.

사관이 목숨을 걸고 사실을 기록하기란 어려웠을듯.

연산군일기는 중종반정 후, 몇 대를 이은.,승자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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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1000만 관객 영화를 통해 재조명 받는.,광해군. 

1608년(광해군1년) 대동법 실시로 농민 세금 부담을  경감.

오늘날, '토지과다 보유세'에 해당하는 획기적인 세법을 실시.

.

'청년시절 광해군에게 처녀의 문을 열었다.'는.,궁녀 김개시.

 "역대 왕들은 나름대로 나라를 위해 정치를 했다고는 하지만

왕실 번창만 도모했을뿐 진정 백성을 위해 헌신한 바가 없어요."

 

"왕도 신이 아닌 이상 백성들의 빈곤을 다 구제할 수 없는 것. 

 백성들도 군왕 만 원망할게 아니라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 지금 주상( 선조 )께서는 중간 정도의 인격이시지만

명재상 유성룡의 보좌로 임진왜란 국난을 극복하셨지요.

주상께서 세종대왕만큼 성군이셨다면 국난을 예방했을 것."

"..............."

 

주상은 그저 군수 정도 능력 밖에 안되시는데

왕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국왕이 되셨을뿐

자신의 역량으로 군주가 되신 것은 아니잖아요?"

 

"어허 어찌 그리 망발이냐?"

 

 "사실이 그렇지 않사옵니까?

 주상께서는 이미 늙으셨습니다

 세자 저하께서 등극하셔야 개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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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으로 인해 실추된, 조선왕조의 권위를 회복.

경복궁을 제외한 조선왕조 궁궐 대부분 광해군 때.,복원.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쳐.,백성들이 적극 호응.

 

임진왜란 전란 중 각지를 돌며 민심을 수습한.,광해군.
삼남지역으로 내려가 군량을 모우고 의병을 소집하는 등

선조를 대신해 분조 정권을 이끌고.,임란 극복 및 국정 수습.

 

백성들의 신망과  신하들의 지지를 얻어 즉위.

이항복, 이덕형 등 집권당 아닌 인재도 두루 중용.

임란으로 피폐된 조선을 재건하고 왕도정치를 강화.

 

오늘날, 재평가된 광해군에 대한.,기록.

그러나, 이미 기록 속에서는 지워진.,역사.

심증은 충분하지만 물증이 없는 점이 아쉽다.

 

하지만, 측근 비리가 끊이지 않았던.,광해군 시대

그당시 '권력 핵심'  상궁 김개시는 천민 출신이었다.

광해군 즉위를 도운 공으로 15년간 무소불위 집권 실세.

 

"상궁 김개시 전횡이 하늘을 찌르자

광해군의 왕권의 기반조차 흔들렸다."


[영화감상.광해군.]광해,왕이된남자.이병헌 

 

광해군의 무리한 궁궐 복원공사로 민심을 잃을 무렵

김개시는 1623년 인조반정 역모 움직임을 알고 있었지만,

"김개시 조언에 왕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광해군 일기 -.

 

광해군이 폐왕이 되어 '실록'이 아닌.,'광해군일기'.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겼다'고 씌여있는.,인조반정.

 '광해군을 좌지우지(左之右之) 했다.'는.,상궁 김개시.

 

"나이가 들어서도 용모는 피지 않았지만

색공 비방으로.,두 군왕의 총애를 받았다."

"이이첨을 능가할만큼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

'조선시대 3대 악녀 중 하나'.,"김 개시."

김개시(金介屎) 끼일 介.,똥 屎.,"개똥이"

"한창일때 조선 최고 권력자와 맞먹는 권세."

 

'광해군일기'는 사관의 기록을 토대로

인조반정 승자(勝者) 측면에서의.,기록.

 

김개시는 선조때부터 궁궐에 들어왔지만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다고 표현하기보다는

정치적인 동반자였다는 입장이 맞을 것 같다.

 

만첩하고 꾀가 많아

정치에 깊숙히 관여하며

매관매직 등 악행도 행한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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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광해가 동궁전에 있을 때

선조의 눈에 들어 성은을 받았고

"선조가 지어준 이름.,김가희(金佳姬).

 

'아름다울 佳, 아가씨 姬'.,김가희.'

 

임란때 선조 몽진길에 의주까지 동행.

광해군이 함께 한  5 후궁 중에서.,No 1

광해에게 가장 큰 총애를 받았던.,김개시.

 

“후궁의 첩지를 내려주겠다."

“대신들의 원성을 살 것입니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 족하옵니다.”

 

인조반정때 붙잡혀 고문을 당하며

"반정 세력에게 배신을 당했다." 절규.

인조반정 다음날, 반정세력에 의해 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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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궁녀가 왕의 성은을 받으려면

'얼굴과 외모가 뛰어나야 했다.'고 하는데

김개시는 자신이 잘하는 것으로 총애 받은듯.

 

조선왕조 역사 상에서

두 왕의 총애를 받은 상궁.

김개시는 어떤 일을 잘한걸까?

 

김개시(金介屎) 끼일 介.,똥 屎.,"개똥이"

"개똥이"는 왕이 지밀나인을 부를 때.,호칭. 

항상 왕의 곁에서 대기해야만 하는.,지밀나인.


조선시대 - 김개시(金介屎) 

 

조선시대 왕의 얼굴은 용안(龍顔)이라 했고

대,소변을 매화(梅花), 매우(梅雨)라고 했다.

왕은 하루 일정을 소화해 내느라고.,불철주야.

 

'용의 얼굴' 만큼이나

배알하기 힘든.,용안(龍顔).

 

매우(梅雨)는 '매화나무에 내리는 비' 소변.

'매우틀'은 왕이 소변볼 때 사용하는 이동 변기.

매우는 겨울 눈을 녹이고 매화를 꽃피게 하는 봄비.

 

매우가 매우틀 밖으로 튀지 않게

변기에 대추나 매회를 뿌려 준비 후

왕에게 달려가는 일은 지밀나인의 몫.

 

매화(梅花)는 '매화나무의 꽃'.,대변이고

'매화틀'은 왕이 대변볼 때 사용하는 이동 변기.

매화는 겨울 흰눈 속에서 제일 먼저 봄을 알리는 꽃.

 

매화틀 관리자는 지밀나인.

똥을 닦아주는 일은 상궁 몫.

 

 왕이 "용변을 보고 싶다." 하면

매화그릇에다가 대추나 매회를 뿌려

매화틀을 들고 가는 일은.,지밀나인 몫

 

그리고 난 이후에, 왕이 용변을 다 보고 나면

나인보다 높은 상궁이 명주수건으로 닦아낸다.

왕이 소변을 다 본 이후에도 뒷처리는 상궁의 몫.

 

어찌보면, 상궁이 지밀나인보다 허드렛일을 하는 것 같지만

'옥체를 만질 수 있느냐? 못 만지느냐?' 차이에 따라 신분 차이.

 

상궁이 밑씻고 나면, 지밀나인은 용변 위에 대추나 매회를 뿌려

내의원에 보내면, 어의는 맛과 색깔을 보며 왕의 건강 상태를 체크.

대전 좌우에서 왕의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고 시중을 드는.,지밀상궁.

 

왕이 어떤 궁녀에게 승은을 내리고자 할때에도

아무 때나 마음대로 관계를 할 수 없었던 조선왕실.

왕의 곁에는 항상 지밀상궁이 24시간 대기하고 있었다.

 

왕의 일거수 일투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왕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왕의 마음을 읽어내는 위치에 있는 지밀상궁.

 

오늘 어떤 궁녀가 마음에 들었는데

그 궁녀와 하룻밤 같이 자고싶다 하면

왕이 먼저 지밀상궁에게 그뜻을 전한다.

 

아울러, 지밀상궁은

그 궁녀에게 먼저 가서

합방을 위한 심사를 한다.

 

혹시, 월경 중은 아닌가?

혹시, 부정한 날은 아닌가?

나쁜 병에 걸려있지 않은가?

 

지밀상궁이 먼저 궁녀의 몸을 검사

합격이 되어야만  합방이 가능하다.

왕과 합방을 하기 전에.,마지막 관문.

 

목욕을 시켜주고 손톱을 깎아주며

왕의 옥체에 상처를 내면 안되니까

은밀한 주의사항을 미리 교육시킨다.

 

만약, 궁녀가 생리 중이라면

먼저 지밀상궁이 알게 되므로

합방은 다음 기회로 미루어진다.

 

지밀상궁이 불합격 판정을 내리게 된다면

그 이유는 낱낱이 왕에게 설명을 할 것이고

왕은 지밀상궁의 말을 대부분 수긍하게 된다.

 

지밀상궁은 왕의 잠자리를 옆방에서 밤새도록

눈뜨고 지켜야하기에 나이가 지긋해야 적격이다.

궁녀가 왕의 눈에 들어 승은 받기는 하늘의 별따기.


조선시대 궁궐 목욕 엿보기 

 

용모가 빼어나 궁녀가 운좋게 왕의 눈에 들었어도

지밀상궁의 눈에 합격되어야만, 마지막 관문을 통과.

궁녀가 왕의 성은을 입고나면, 많은 것들이 좋아진다.

 

궁녀로서의 고된 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

눈치보며 굽신거렸던 상궁들에게까지도 하대.

왕자를 낳으면, 숙원이 되어 부와 명예를 얻는다.

 

지밀상궁은 왕, 세자, 세자빈에게도 다 있다.

그들의 일을 돕고, 신변의 잡다한 일까지 처리.

특명상궁은 왕명의 출납, 왕의 잡다한 일을 처리.

 

왕비가 거처하는 모든 곳이.,중궁전(中宮殿)이다.

교태전은 "큰 것을 가르치다" 뜻이 담긴 왕비의 침실.

'만인의 본보기가 된다.'는 뜻이 담긴.,교태전(交泰殿)

 

왕과 왕비가 함께 침실로 드는 곳은.,대조전(大造殿)

'큰 것을 만든다.' 즉, '왕자를 생산하는 침소'라는 뜻말.

각 전각은 무수리들이 청소하고, 빨래는 침방이 도맡는다.

 

침방나인 중에서 가장 힘든 일을 하는.,무수리.

물을 길어나르고 빨래하고 바느질까지도 도맡는다.

무수리 중에서도 가장 힘든 일을 하는 막일꾼이.,"동이~"

 

아무리 힘이 세고 체격이 좋아도

물동이를 나르는 일은 쉽지가 않아

궁궐에서는 무수리 "동이~"의 몫이다.

 

숙종의 후궁 숙빈 김씨.,"동이~"

'영조'의 생모이지만.,무수리 출신.

 

"동이~"는  침방나인 무수리 중 가장 하급자 신분.

중궁전(中宮殿)나인은 무수리 중에서 중급자 신분.

"김 개똥~"은 궐내 지밀나인 중에서도 최상급 신분.

 

왕의 성은을 받지 못하면

신분 상승의 한계선이 상궁. 

 

김개시는 정5품 지밀상궁(至密尙宮)으로

왕비를 인도하며, 상기와 전언을 통솔 상의.

전빈과 전찬을 통솔하고 의복과 채장을 공급.

 

사실 상, 전의와 전식을 통솔.

궁녀의 일상생활의 모든 예의와

절차를 맡는 지위에 있는.,실권자.

 

광해군이 직접 하사한.,백당의.

매화틀 관리 총책임자.,'매화의 상징'.

즉, 조선왕실에서 상궁 중 실세.,김개시

 

........................상궁(尙宮...........................

상궁(정 5 품) : 왕비를 인도하며, 상기와 전언을 통솔
상의(정 5 품) : 일상생활의 모든 예의와 절차를 맡았으며, 전빈과 전찬을 통솔
상복(종 5 품) : 의복과 수로 무늬놓은 채장을 공급하고, 전의와 전식을 통솔
상식(종 5 품) : 음식과 반찬을 준비하였으며, 사선과 전약을 통솔
상침(정 6 품) : 왕이 옷을 입고 먹는 일을 진행하는 순서를 맡으며, 사설과 전등을 통솔
상공(정 6 품) : 여공의 과정을 맡았고, 사제와 전채를 통솔
상정(정 6 품) : 궁녀의 품행과 직무단속 및 죄를 다스림
상기(종 6 품) : 궁내의 문서와 장부의 출입을 담당
수규(종 6 품) → 세자궁 소속
수칙(종 6 품) → 세자궁 소속
전빈(정 7 품) : 손님 접대, 신하가 왕을 뵐 때 접대, 잔치 관장, 왕이 상을 주는 일 등을 맡음
전의(정 7 품) : 의복과 머리에 꽂는 장식품의 수식을 맡음
전선(정 7 품) : 음식을 삶고 졸여 간에 맞는 반찬을 만듦
전설(종 7 품) : 장막을 치고 돗자리를 준비하며 청소하는 일과 물건을 베풀어 놓은 일을 담당
전제(종 7 품) : 의복 제작
전언(종 7 품) : 백성에게 널리 알리고 왕에게 아뢰는 중계구실 담당
장찬(종 7 품) → 세자궁 소속
장정(종 7 품) → 세자궁 소속
전찬(정 8 품) : 전빈과 같음
전식(정 8 품) : 머리를 감고 화장하는 일과 세수하고 머리빗는 일을 담당
전약(정 8 품) : 처방에 따라 약을 달임
전등(종 8 품) : 등불과 촛불을 맡음
전채(종 8 품) : 비단과 모시 등 직물을 맡음
전정(종 8 품) : 궁관의 질서를 바르게 하는 일을 도움
장서(종 8 품) → 세자궁 소속
장봉(종 8 품) → 세자궁 소속
주궁(정 9 품) :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음
주상(정 9 품) :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음
주각(정 9 품) :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음
주변치(정 9 품) :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음
주치(종 9 품) :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음
주우(종 9 품) :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음
주변궁(종 9 품) :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음
장장(종 9 품) → 세자궁 소속
장식(종 9 품) → 세자궁 소속
장의(종 9 품) → 세자궁 소속

.......................................


김개시 심신 수양 하는 박선영 사모님  

 

선조 때 동궁전 궁녀로 들어가

청년 시절의 광해를 만난 김개시.

"그때 처녀의 문을 열었다." 전한다.

 

그후, 선조와 광해 사이를 잘 중재.

 

"오직, 그녀는 광해군을 위해 헌신했다."고도 하며

말년의 선조가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하자

광해군을 돕기 위해 '선조를 독살했다.'고도 전해온다.

 

선조 운명 후, 광해군이 보위에 오르게 되자

김개시는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다." 전해온다.

두뇌, 판단력이 우수하고 국정개입 능력이 탁월.

 

광해군 재위때 국정 영향력은 '이이첨'과 쌍벽.

그러나, 김개시는 오직, 상궁 지위에만 머물렀다.

 

'남명 조식의 제자 '., 정인홍.

그를 주축으로 하는 대북파 상소.

.

광해군 때 역모 기미를 고한 상소가 몇번 올랐지만

그때마다 김개시가 '광해군을 안심시켰다."는 기록

'김개시가 반정세력에게 뇌물 받고 내통했다.'는 추측

 

.................................

.................................

  

광해군은 아버지 선조가 24세때

'궁중음식을 만드는 수라간 나인'

공빈 김씨 차남으로 1575년에 출생.

 

공빈김씨 둘째 아들로 태어나 3살에 모친을 잃은 광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즉각, 광해를 세자로 책봉.

광해군은 세자 책봉식도 올릴 겨를없이 피난길에 오른다.

 

이때 선조는 국사를 세자와 분담하는 분조(分朝)를 단행

 

선조는 의주 방향으로 피난길  몽진에 올랐고

광해는 강원도와 삼남지방을 돌며 의병을 규합

만백성과 사대부들에게 조선의 건재함을 알렸다.

 

분조 27개월간 광해의 활약상은 명나라까지 알려져

명은 선조에게 광해의 분조활동을 본받도록 권고했다.

이로 인해 선조는 광해를 경쟁자로 여겨 멀리하게 된다.

 

마침, 광해군보다 9살이나 어린.,'선조의 왕비' 인목왕후. 

그녀가 영창대군을 낳자., 세자로 책봉하려고 했던.,선조.

선조는 왕위를 영창대군에게 물려주려고 할때 독살 당한다.

 

선조의 갑작스러운 운명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광해군.

3살에 생모를 잃은 광해에게 "처녀의 문을 열었다."는 그녀.

일설에는 연상인 김개시를 광해가 "어미처럼 따랐다."고 한다.

 

그후, 김개시는 광해 동궁전에서

선조 어전의 지밀상궁으로 옮겨가

광해의 왕위계승에 큰 도움을 주었다.

 

김개시는 광해군의 즉위에 도움을 주었지만

권력에 맛이 들어 매관매직을 일삼고 국정을 농단.

조정의 대소사가 이이첨 & 김개시를 통해야 이뤄졌다.

 

이때 지방에서 일어난 사소한., 살인사건.

범인은 모반을 꾸몄다고 자백한.,은상 살인사건.

이이첨 & 김개시가  배후에서 조작한.,모반 음모사건.  

 

광해는 모반의 배후 인물로

영창대군 외할아버지를 지목.

 

김계남에게 사약을 내리고

영창대군을 위리안치 유배 후, 사살.

그 모친 인목대비를 10년동안 서궁에 유폐.

 

한편, 광해는 임란때 소실된 창덕궁 복원을 선조에 이어 추진

계속 강행하여 완공 후., 경덕궁, 인덕궁, 자수궁을 연이어  신축.

궁궐 공사에 소요되는 자금을 세금으로 징수하느라 민심을 잃었다.

 

그당시 궁궐 신축자금을 거둘 목적으로

지방에 파견된 관리들조차도., 그들 자신을

스스로 도적이라고 한탄할 정도였다고 전한다.

 

그로 인해 반정 분위기가 무르익는데

그 서인의 중심인물이 이귀 & 김자점.

인조반정 계획은 사전에 미리 알려졌다.  

 

창덕궁 연회루 연회에 이미

정인홍의 상소가 올라왔지만

광해는 바로 열어보지 않았다.

 

"김자점은 충성스러운 신하입니다."

광해는 연회에서 김개시 말을 믿은 탓.

광해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1623년 3월 12일에 일어난 인조반정 구데타.

창덕궁은 불타고 광해는 뒷문으로 탈출 후, 은신 중

붙잡혀 서궁에 유폐되었던 인목대비 앞으로 끌려간다.

 

광해에 의해 10년간 유폐생활을 했던., 인목대비.

그녀의 '사사된 아들' 영창대군의 원수인.,광해군.

'그녀는 무릎을 꿇은 광해군을 죽이고 싶었으리라.'

 

인조반정으로 인해 대북파는 서인들에게 숙청되고

김개시는 반정군에 의해 인조반정 다음날 살해된다.

중종반정 때 연산군의 후궁 장록수와 비견되는 김개시

 

장녹수는 백성들이 던진 돌과 기왓장에 맞아 죽었고

김개시는 광해군 배후에서 왕노릇 하다가 인조반정때

나라가 엉망이 되게 했던 이유로 망나니에 의해 죽었다.

 

.............................김개시...............................

김개시(金介屎, ? ~ 1623년)는 광해군 때의 상궁이다.

원래, 광해가 세자 책봉 후, 동궁전에 있을때.,처소나인.

그무렵, 선조의 눈에 든., 김개시는 선조의 승은을 입는다.

 

그후, 선조가 새 이름을 지어 준., 그 이름은 김가희

그녀는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와 대립관계가 되었다.

 

'선조의 왕비'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회임하자

도깨비소동을 일으켜 유산을 시키려 했던.,김개시.

 

선조 때부터의 상궁으로,

미모는 아니라지만 민첩하고

꾀가 많아 광해군 총애를 받았다.

 

이를 배경으로 국정에 관여해,

권신 이이첨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권력을 휘둘러 매관매직을 일삼는 등 .

 

그 해독이 컸으므로., 윤선도. ·이회(李洄) 등

여러차례 상소, 논핵했으나, 도리어 그들이 유배.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반정군에 잡혀 인목대비 앞에 끌려가 심문 중.

궁형을 받고, 그날로 반정군에 의해 참수되었다. 

..................................................................

 

조선시대 대표적인 개혁 군주.,광해군.

소수 세력인 대북파를 이끌고 변혁을 주도.

그러나, 변혁을 추진하기에는 동지가 부족했다.

 

광해군 신하 중에서 최측근이었던.,김개시.

후궁의 첩지를 내리려해도 사양한.,승은상궁.

광해군 일기 기록 상에서, 아끼던 3 후궁 중 No.1.

 

1624년(광해군5년) 2월 8일.

궁녀 김개시, 소용 정씨, 소용 임씨.

이 세명이 후궁 중에서도 최측근이었다.

 

'소용'이란 종3품에게 주어지는 작위. 

 

문서 처리에 능한.,소용 정씨.

"더구나, 미모에 애교가 많았다."

'미모가 특출하였다.'는.,소용 임씨.

 

'소용 정씨는 행정능력이 탁월했다.

광해군 대신 문서를 읽을 뿐만 아니라

왕을 대신해 수결 결재까지 처리하였다. '

 

1613년 9월 24일 광해군 일기에서

김개시에 관한 기록이 눈길을 끈다.

 

'나이가 들어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으며

꾀가 많고 계략이 많았다.'

 

'사람들과 접촉하기 위해

궐밖에 자주 외출을 했다.'

 

'광해군에게 핵심적인 국가 현안을 조언했고

자유로운 정치활동을 위해서 후궁 자리를 사양했다.

반대파 신하들은 그녀가 남자들을 만나러 다닌다고.,비난.'

 

광해군 일기에 적혀있는 기록을 살펴보면

'그것들은 근거가 불충분한 중상모략에 불과.'

광해군은 폐위되는 순간까지도 김개시를 믿는다.

 

"이이첨 인가?"

 

광해군이 반정군에게 물었던.,첫마디.

광해군 재위시 대북파의 영수.,이이첨.

공식 상, 광해군 때 정국을 주도한., 권신.

 

광해군은 폐위 순간까지 그를 믿지 않았다는 증거.

'그렇다면, 광해군은 재위 때 누구를 믿었던 것일까?'

'아울러, 광해군의 국정운영 파트너는 누구였던 것일까?'

 

..............................

..............................

 

행정능력과 문서처리 능력이 출중해

왕의 가장 무거운 부담 중에 하나였던

공문처리를 왕 대신 결재한.,소용 정씨.

 

광해군을 위해 정책 전략을 수립하고

배후에서 조직활동을 벌렸던., 김개시.

광해군이 국정 동반자로 삼은.,두 여인.

 

두 여인을 정치적인 파트너로 삼은.,광해군.

왕으로서 그가 얼마나 외로운 처지에 있었는지

그 고독한 입장을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는 서자 출신이고 소수파 정권의 수장이라 

왕이 되었어도 주변에는 믿을만한 신하가 없었고

반정 세력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늘 불안에 떨었다.

 

광해군의 계모이자 정적인.,인목대비.

'인목대비'의 입장에서 기록된.,계측일기

김개시를 광해군 정권의 원흉으로서.,지목.

 

광해군 정권의 몸통은.,김개시

그러한 사실을 입증하는.,계측일기.

그녀가 사실 상, '조선의 왕'이었던 셈.

 

그리하여, 인조반정군은 김개시를

제일 먼저 인목대비 앞으로 끌고가

심문을 하고, 그 다음날 참수를 결행.

 

망나니의 칼날 아래로

굴러 떨어진.,그녀의 머리.

광해군의 몸통이었던.,김개시.

 

...................

...................

 

김개시에 대한 평가절하 기록은

대부분, 인목대비 입장의 계측일기.

하여, 기록 그대로 믿을 바가 못된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 상에서

반정으로 폐위된 두 왕.,연산군 & 광해군.

두 왕에 관한 오점 기록은.,사실 상, 승자의 기록.

 

김개시는 조선시대., 3대 요부.

장록수, 장희빈 그리고, 김개시.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들에게 반정공신들이 압력을 넣어

사실과 다르게 조작한 오점들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김개시(金介屎, ? ~ 1623년)는 출생(?) 기록이  지워진 흔적.

 

조선시대 사관들은

왕이 압력을 넣어도

굴하지 않을 만큼.,충직.

 

반정 세력이 아무리 압력을 가해도

사실과 다른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관들의 기록을 부분 삭제.

 

오늘날, 광해군은 재평가의 대상이 되는.,왕.

그러므로, 김개시에 관한 기록 또한 관심의 대상.

김개시는 '조선시대 3대 요부'라 할만큼 악녀였을까?

 

유교관념이 국정철학이었던 조선왕조에서

'두 왕의 성은을 받았다.'는 설이 사실일까?

선조와 광해군은 부자지간이라.,믿기 어렵다.

 

'그렇다면, 광해군을 폐위시키기 위한

반정세력에 의해 조작된 오점이 아닐까?'

 

.........................

.........................

 

1616년(광해군 8) 큰 영향을 미쳤던.,풍수지리설.

"인왕산 밑 옥인동 일대에 왕기(王氣)가 서려 있다."

광해군은 그곳에 궁궐을 지었으나 폐위되어 쫓겨났다.

 

'광해군9년부터 1623년 광해군 15년에 완공된.,경덕궁.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선조 때부터 복원이 시작된.,궁궐.

'원종' 시호와 같아.,1760년(영조36년)에 개명된.,경희궁.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에 위치한., 이궁.

 

일제때 경성 중학교, 광복후 서울고등학교가 들어선 궐터.

인조 이후 철종까지 10대에 걸쳐 왕들이 사용했던.,경희궁.

원래, 법궁은 경복궁이고 경덕궁은 조선 개국 초부터., 별궁.

 

경복궁은 조선 개국 초부터의., 법궁

 

광해군은 경복궁부터 복원하지 않았고

그대신 경덕궁을 심혈을 기울여 확장해 복원 완공.

그러나, 정작 본인은 한번도 사용해 보지도 못하고 폐위.

 

경덕궁을 법궁으로 사용함으로서

조선왕조 제 2 의 창업을 꿈꿨던.,광해군.

그 꿈은 꽃을 피우기 직전에 좌절되고 말았다.

 

..........................................

..........................................

 

광해군은 경복궁을 제외한 궁궐을 모두 복원.

임진왜란으로 실추된 조선 왕실의 권위를 세웠고

왕도정치를 시도했지만, 민심은 왕실을 떠나 있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이후 270년 동안이나)

(폐허상태로 있다가 1865년부터 1868년까지)

고종 2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고종 5년에 완공.)

 

(1868년 고종이 경복궁으로 들어와 재위하던 중)

(1876년 대규모 화재로 또 다시 창덕궁으로 이전했다.)

(1888년 재차 경복궁으로 들어가는 등 피혜와 복구.,거듭)

 

(1904년 경복궁에 통감부가 들어섰다가)

(1917년 11월 창덕궁에서 대규모 화재가 발생)

(1918~1920  창덕궁 복원 건축자재를 위해 경복궁 해체)

(1996년 12월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후, 경복궁의 일부는 복원.)

 

'광해군은 왜 경복궁을 복원하지 않았던걸까?'

풍수지리설에 깊이 빠졌기 때문이라고.,전한다.

 

창덕궁은 광해군 때부터 약 300 년간

조선의 법궁이자 정궁으로 사용되었다.

사실 상, 조선 역대 왕들이 선호한.,창덕궁.

 

조선중기 역사 상, 결과적으로

조선왕조 제 2 창업자는.,광해군.

 

광해군.,빛 光, 바다 海, 임금 君.

1575년(선조 8)~ 1641년(인조 19).

조선 제15대 왕(1608년~1623년 재위).

 

김개시(金介屎, ? ~ 1623년)

광해군이 꿈꾼 제2 조선 창업

그 꿈의 초석이 되었던.,김개시.

 

독(毒)이 된걸까? 약(藥)이 된걸까?

"개똥도 약에 쓰려면, 귀하다." - 속담.

그 말이 실감날 때마다 떠오르는.,김개시.

 

상궁이 백당의를 입는 것은 법에 어긋나지만

광해군의 허락을 얻어, 대궐에서 죽을 때까지

백당의를 입고 지내다가 참살을 당했던.,김개시.

 

김개시는 인조반정 당일에

자수원에서 불공을 올리다가

반정군에게 붙잡혀, 다음날 참수.

 

광해군때 복원된 자수궁은

퇴임 궁녀들을 위한 안식처.

 

.......................자수궁(慈壽宮).............................

1616(광해군 8) 풍수지리설 따라 인왕산()

왕기() 누르기 위해 지은 궁궐로 1623(인조 1) 헐렸다.

오늘날, 서울 종로 옥인동 있었던 으로 짐작되는 궁궐이다.

 

'인수궁(仁壽宮)', '인수원'이라고도 불리웠던.,정업원.

 

원래, 1451년(문종 원년) 3월 1일 인왕산 아래 누각동,옥인동에 

무안군(撫安君)의 옛집을 광해군 때 수리해 "자수궁"이라 불렀고 

불교에 귀의한 선왕의 후궁들의 거처로 여생을 보내게 한.,정업원

 

자수궁은 1623년(인조 1) 헐렸으며 그 자리에 

후궁들이 노후에 니승(尼僧)이 되어 사는 자수원

즉, 비구니원( 한때 5,000여 명의 여승(女僧)을 수용)

 

국내 최대 비구니원(比丘尼院)이 되었는데 

폐단이 심해 1661년(현종 2) 2월 폐지되었다

............................................................


김개시는 광해군 시대의 국정 파트너였을까?

아니면, 역사가 만들어낸 조선 4대 요부였을까?

아니면, 오직 광해군 만을 사랑했던 여인이었을까?


조선시대 - 김개시(金介屎)  

 

광해군은 김개시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보냄으로써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하였고, 실제로 김개시는
오직 광해군의 왕권 강화를 위해 온갖 악역을 떠맡은 궁녀
 
그무렵 광해군의 왕권을

배후에서 호시탐탐 위협한

최대의 인물은.,인목대비 김씨.
 
김개시는 인목대비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인목대비의 궁녀들을 회유하여 첩자로 활용.
사건을 조작해 인목대비에게 덮어씌우기도 했다.
 
광해군 5년(1613)에 계축옥(癸丑獄)으로
인목대비의 친정을 멸문시킨 후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저주했다는 사건을 제기해 인목대비까지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간 음모술수 주동자가., 김개시. 
 
온갖 술수와 모함을 일삼는 정치꾼으로 변한.,김개시
끈질긴 공작으로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게 만든다.
 
그러나, 광해군이 저지른 반인륜적 처사를
바로잡겠다는 명분으로 일어났던., 인조반정


반정군 세력은 광해군을 반인륜적인 인물로 몰았고

상궁 김개시를 만행의 중심인물로 몰아 참형에 처한다.
 
광해군의 앞날을 가로막는 걸림돌을 자발적으로 없애고자
충성을 다한 김개시는 광해군에게는 훌륭했을런지 모르지만
"도덕적인 측면에서는., 스스로 비극을 자초했다."고 여겨진다.


결국, 인조반정 구데타로 광해군은 왕권을 잃고.,폐위

과거, 역모에 연루된 혐의로 대비에서 폐출된.,인목 대비

1623년 3월 13일, 인조 반정을 일으킨 무리들에게 말한다.


김개시 미워하는 광해군 노려보는 인목대비 

                                                                                 인목대비.

 
"먼저 이흔(광해군) 부자 머리를 가져와서
내가 살점을 씹은 뒤에야 책명을 내리겠다."
 
그러자,  인조반정 반정군 신하들은 인목대비를 진정시켰다.
"예로부터 왕을 내쫓고 가둔 일은 있어도., 죽이지는 않았다"  

반정공신들은 인목대비를 진정 시키려 김개시부터 친국하게 한듯.


조선시대 - 여기소 & 해어화(解語花). 

.

인조대비는 광해군에게 성은을 받은 궁녀들을 직접 친국.
김개시(개똥이)는 사지를 찢고 궁형을 가했다고도 전한다.

궁형(宮刑)은 사형(死刑)보다 치욕스런 것으로 최고의 형벌.

 

 

사랑 밖에 난 몰라.

 

1.


그대 내곁에 선 순간
그 눈빛이 너무 좋아~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은 당신 땜에
내일은 행복할꺼야

얼굴도 아니 멋도 아니 아니
부드러운 사랑 만이 필요했어요
지나간 세월 모두 잊어 버리게~

당신 없인 아무 것도
이젠 할 수 없어
사랑밖엔 난 몰라


2.


무심히 버려진 날 위해
울어주던 단 한사람~.

커다란 어깨 위에
개대고 싶은 꿈을
당신은 깨지 말아요

이날을 언제나 기다렸어요
서러운 세월 만큼 안아 주세요
그리운 바람처럼 사라질까봐


사랑하다 헤어지면
다시 보고 싶고
당신이 너무 좋아

 

심수봉 - 작곡/ 노래.

 

심수봉 (심민경) '그때 그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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