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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전통문화 - 세계문화유산.,봉원사 영산재.

작성자선경나라|작성시간17.02.09|조회수807 목록 댓글 0

한국불교 태고종 봉원사 영산재 보존회, 현충일 맞아 ‘영산재’ 봉행 



봉원사 영산재(靈山齋).



봉원사 .영산재 


대한민국중요무형문화재 제 50호

(大韓民國重要無形文化財 第 50號)

봉원사(奉元寺)영산재보존회(靈山齋保存會)

태고종봉원사영신재보존회 `호국영령 위한 영산재`


'문화재청 후원' 봉원사 영산재.


영산재(靈山齋)는 죽은이 명복을 빌기 위해 불보살에게 재를 올려

그 넋이 정토나 천계에서 태어나도록 기원하는 천도재의 일종이다.


불교에서의 천도재는 보통 49재로 불리우는데,

전문적인 범패승이 하는 경우는 그 규모에 따라

상주권공재·시왕각배재·영산재(靈山齋)로 나뉜다.


범패승이 아닌 일반 승려가 49재를 지낼 경우 삼보통청.

상주권공재는 보통 1일, 시왕각배재는 2일, 영산재는 3일.

영산재는 석가모니불이 설법하던 영산회상을 상징적으로 설정.


즉, 의식을 행하는 장소가 일시적으로 영산회상이 되는 것.

영혼은 이곳에서 석가모니 설법을 듣고 극락왕생하게 되는 것.


영산재는 절 마당 등에 불보살을 모시는 상단, 신중을 모시는 중단,

영가를 모시는 하단 등 삼단을 차리고, 야외에 불화를 거는 괘불이운으로

시작하여 괘불 앞에서 찬불의식을 갖으며 해마다 봉원사에서 연행되고 있다.

 

봉원사는 안산 서남쪽 끝자락에 위치.

풍수지리 상으로, 서대문 밖은.,망자(亡子)의 길.

조선시대 봉원사는 망자(亡子)의 혼을 달래주던.,사찰.


일꾼관(14) - 후천 선경낙원의 중심지, 대한민국 태전 


우리나라 풍수지리설은  단군 시대부터 사용되어

삼국시대 민간인들까지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산신숭배사상과 함께 좌청룡 우백호 풍수지리설.

 

전세계에서 우리나라에 가장 많은 고인돌을 살펴보면

대부분 산의 정상에서 평지로 연결되는 능선 위에 위치

배산임수 고인돌의 입지기준은 왕릉에도 동일하게 적용.

 

또한 단군이 신시를 건설하게 된 과정 기록을 보면

그 당시 이미 풍수지리가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좌청룡 동쪽은 산자의 길이요, 우백호 서쪽은 망자의 길.


[당일코스]서울여행~신라천년 전통고찰 "봉원사"의 삼천불전,명부전,극락전,한글학회100년기념비 사진들

                               한양 도성에서 우백호 위치에 있는.,신촌 봉원사

봉원사(8.25) 27  


영산재는 2500년 전 중인도 왕국 '마갈타국'에 있는

영취산에서 석가모니가 벌인 설법을 재현하는 제사로,

'영혼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의식.' 의미도 담고 있다.


인왕산 해골바위, 북악산 백사실 계곡

                                     인왕산 서쪽에 위치한., 해골바위 & 선바위.

인왕산 선바위(禪岩) 


봉원사 영산재는

망자(亡者)와의 이별.

살아남은 자들의 평화.

예술로 승화된 제례의식.


인도에서 5000km 떨어져, 2500년 세월이 지나

아득한 시간과 공간을 넘어 꽃핀.,봉원사 영산재.

2009년 지정된, 유네스코 세계인류 무형 문화유산.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사 삼천불전 설경  


봉원사는 한국불교 태고종 총본산.

서울 서대문구 봉원동 안산에 위치.

우리 나라 불교 18개 종단 중의 하나.


1970년 1월 15일 박대륜(朴大輪)을 종정(宗正)으로 추대.

총무원은 성북구 성북동 292-1 태고사(太古寺)에 별도 설치.

'1954년~1963' 비구(比丘)와 대처(帶妻:아내 있는 승려)의 분규는

1970년 이후, 양측이 상대종단을 인정한다는 공적인 표명과 함께 종식.


봉원사(태고종의 총본산) 


그후 한국불교 태고종의 총 본산.

봉원사(奉元寺)와 선암사(仙巖寺).


봉원사 (삼천불전, 대웅전 내부) 


..............봉원사 관음보살...................

『법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에 따르면

마음속으로 관음보살을 간절하게 염원하면

불구덩이가 연못으로 변하고 성난 파도가 잠잠

높은 산에서 떨어져도 공중에서 멈추게 된다 한다.


또한 참수형을 받게 되었을 때에도

목을 치는 칼날이 부러지게 된다고 하는 등

관음보살은 온갖 재앙으로부터 중생을 구원하는 보살.


우리나라에는 관음보살을 모신 관음기도 도량이 많다.

강화도 보문사. 남해 보리암(菩提庵), 양양 낙산사 등.


적산법화원은 일본 천태종의 효시인 엔닌대사가 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를 토대로 건립.

839년 6월 7일 배를 타고, 적산으로 가 적산 법화원을 소개.

이 날의 일기에서 이 절은 장보고가 처음으로 세운 것이라 소개.


또한 당나라 때 신라인 장보고가 창립을 기념하여

한중일 승려들을 모아놓고 법화경을 읽었다는 기록.


엔닌대사는 장보고가 건립한 법화원을 기행문에 담아

일본으로 귀국한 후에도 교토적산선원을 세웠는데

원래, 우리나라 관음보살은 백제불교에서 유래되었다. 

.......................................................................


889년 도선국사가

진성여왕 3년에

창건한 봉원사.


도선국사([827~898)는 김천 지역의 청암사를 창건한 승려.

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 화엄사(華嚴寺)에서 승려가 되었고

846년(문성왕 8) 곡성 동리산(桐裏山)의 혜철(惠徹)을 찾아가

무설설(無說說) 무법법(無法法) 법문을 듣고 이치를 깨달았다.


850년 천도사(穿道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운봉산(雲峯山)에서 굴을 파고 수도하기도 하였으며,

태백산에서 움막을 치고 여름 한철을 보내기도 하였다.


859년(헌안왕 3)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청암사를 창건.

37세가 되던 863년 전남 광양 옥룡사(玉龍寺)에 자리를 잡고

898년(효공왕 2) 세수 72세로 입적할 때까지 제자들을 양성했다.


승려로서보다는 음양풍수설의 대가로 알려진.,도선국사.

우리나라 풍수지리학의 역사는 도선국사 생존 연대에서 시작.

도선국사가 역사적으로 유명해진 계기는 고려 태조에 의해서였다.


 “지금부터 2년 뒤에 반드시 고귀한 사람이 태어날 것이다.”

875년(헌강왕 1) 도선국사의 예언대로 송악에서 태어난 태조.

이 예언 때문에 태조 이후의 고려 왕들은 도선국사를 극진히 존경.


태조도선국사 설법을 직접 들은 일은 없으나

사상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도선국사 저술로는.,도선비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진성여왕(재위 887∼897)은

신라시대 3인의 여왕 중 하나.

신라의 마지막 여왕이기도 하다.


'음녀로 몰린 성군' 진성여왕 


진성여왕은 즉위 직후 주(州)·군(郡)에 1년의 조세를 면제.

황룡사(皇龍寺) 백좌강경(百座講經)을 설치하며 민심 수습.

887년 2월 숙부이자 남편이던 상대등(上大等) 위홍(魏弘)이 죽자

정치기강이 문란해져, 888년 세금이 들어오지 않아 국고가 빌 정도.


관리를 각지에 보내 세금 독촉하자 

전국에서 도적이 봉기하기 시작했다.


신라사 - 진성 여왕 


이때 원종(元宗)과 애노(哀奴)가 사벌주(경북 상주)에서

난을 일으켰으나 이를 토벌하지 못하였고 이 난을 계기로

계속해서 난이 일어나 891년 북원(원주)의 적수 양길(梁吉)이

부하 궁예를 동쪽으로 원정시켜 명주(강릉)까지 함락시켰다.


그 다음해 완산주(전주)에서 견훤이 후백제 건국

무주(광주) 동남쪽 군현이 모두 그에게 항복하였다.

이로 인해 신라의 실질적인 통치영역은 경주를 중심으로

한 주변지역에 그치고, 전 국토 대부분 호족 휘하에 들어갔다.


896년 수도의 안위조차 불안해졌을때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최치원(崔致遠)은

894년에 시무10조(時務十條)를 제시하였다.


이 개혁안이 시대적 한계로 인해 시행되지 못해

신라의 붕괴를 막을 수 없었고 후삼국이 정립된다.

897년 6월 조카에게 양위하고 그 해 12월에 죽었다.

 

황산에 장사 지냈는데

거타지 설화가 유명하다.


관음예문(觀音禮文)/능인스님 나무관세음보살 


거타지 설화는 고려태조 왕건

할아버지인 작제건이 용녀(龍女)를

아내로 맞는 설화와 비슷하다 전한다.


관음보살 


진성여왕은 상당한 미녀였으며

관음보살 또는 용녀(龍女) 로서 상징.


도선국사가 부유한 신도의 집을 희사받아

절을 창건하고 반야사(般若寺)라 하였으며

고려 공민왕 때 보우(普愚)의 중건으로 대찰.


1396년(태조 5) 왕의 초상화를 모신 원당(願堂).

반야암을 지어 조선시대 불교탄압을 받지 않았고

오늘날, 한국불교 태고종 총 본산.,봉원사(奉元寺)


[문화재답사/문경] 문경 대승사 금동관음보살좌상 - 보물 제991호 


태고종은 대처승 종단으로 석가세존(釋迦世尊)이 종조(宗祖).

고려 말의 고승 태고화상(太古和尙)의 종풍(宗風)을 선양하여

전법(傳法)하는 것을 종지로 하며 소의경전은 금강경(金剛經) 등.


기타 경전의 지송(持誦)이나 연구는 제한하지 않는다.

대한불교조계종을 제외한 최대의 교세를 가지고 있다.


봉원사 연꽃 


.....................주요 행사......................

음력 1월 23일 성도기념법회(成道紀念法會),

2월 15일 열반절(涅槃節),

4월 교도회대의원대회(敎徒會大議員代會),

4월 8일 석가세존탄생기념식,

8월 23일 우란분절(盂蘭盆節),

9월 1일∼10월 20일 범음강습회(梵音講習會),

10월 27일 종조탄생기념법회(宗祖誕生紀念法會).

.................................................................


종단의 종정(宗政) 전반을 통괄 처리하는 총무원(總務院)

사정원(司正院), 최고의결기관으로 중앙종회(中央宗會),

종승위원회(宗乘委員會)·고시위원회(考試委員會)·

법규위원회(法規委員會)·선거관리위원회 등.


총무원은 성북구 성북동 292-1

태고사(太古寺)에 별도로.,설치. 


총무원 밑에 총무부·교무부·재무부·사회부·규찰부,

총무원 산하에 각 도 종무원(宗務院)과 사찰이 있다.

종무원장은 해당 종회의 선거를 통해 승인을 얻는다.


사찰 주지는 사찰 재적 승니의 선거에 의하여 종정이 임명한다.

재적 승니 10명 미만 주지는 종무원장 품신(稟申)에 의하여 임명.

1997년 현재 사찰 2,878개, 승려 5,289명, 신도 수 430만5366명이다.


관련 기관으로는 사단법인 한국불교교도회.

경영사업은 정기간행물 ≪월간불교≫ 발간.

불교병원 운영 등이며 산하단체 영산재보존회는

한국 불교음악 전통을 가장 활발하게 계승하고 있다.


선암사에 설치되어 있는 승가대학은

태고종 승려 배출 교육기관으로 유명.


정조가 태자의 출생을 석왕사와 선암사에서 기원.

순조가 탄생하자 정조는 석왕사에 공덕비를 세웠고,

순조는 선암사가 큰 복의 밭이라 하여 금자(金字)를 하사.


선암사 원통전,대복전 


대복전 친필 금자(金字)를 하사한 순조는 또 다시

'천, 인' 한 자씩을 써주어 대복전 현판 양쪽에 걸어

 ‘人天大福田(인천대복전)’이 되게 하였다고 전한다.


인과 천 두 글자의 편액은 

대복전과 다른 장소에 보관.


조계산 선암사  

순천.,선암사

선암사 해우소 / 최병무 


선암사 - 정호승.

.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정호승 시인의 ‘그 곳’ 선암사 해우소서 삶을 깨닫다. 


봉원사 영산재는 죽은 이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보살에게 재를 올려 그 넋이 정토나 천계에서

태어나도록 기원하는 천도의식(49재 : 四十九齋.)


서울 서대문구 봉원사 삼천불전 


봉원사 삼천불전 문살의 아름다움 

봉원사 영산재 


.........................천도(薦度)...................

'죽은 이' 영혼을 좋은 세계로 보내는 의식.

불교에서는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법회·독경·시식(施食)·불공(佛供) 등을 베풀어

죽은 영혼들이 극락정토에 태어나도록 기원한다.


이 천도의식은 사람이 죽은 지 1주일마다 한 번씩

7·7재를 가지며, 7주째에 행하는 천도의식이.,49재.


천도의식은 일곱 번을 하는 경우도 있고,

여섯 번은 생략하고 49일째만 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천도라 하면 일곱 번 행하는 49재.


49재가 지난 뒤에도 100일 만에 하는 백재(百齋),

1주년과 2주년에 지내는 소상과 대상재가 있다.

이렇게 천재의식은 사람이 죽은 후 열 번을 한다.


이 열 번의 근거는 사람이 죽으면

명부시왕(冥府十王)으로부터 각각 한 번씩

심판을 받게 되는데 심판받을 때마다 재를

행하게 된다는 명부시왕신앙에 의거한다.


열 번의 천도의식 중 49재가 가장 대표적인 천도의식

명부 시왕 중에서도 염라대왕(閻羅大王)이 명부의 왕.

염라대왕의 심판을 받는 날이 49일째 되는 날이기 때문.


이상 7·7재와 백일재·소상재·대상재 등

열 번에 걸친 의식은 정기적인 천도의식.

그와 같은 날 수와는 관계없이 비정기적으로

죽은 사람을 위하여 행하는 천도의식도 있는데

수륙재(水陸齋)는 그 대표적인 천도의식인 것이다.


수륙재는 주인 없는 고혼(孤魂)들을 위하여

많은 신도들이 공동으로 행하는 천도의식이다.

그 의식절차에 따라서 상주권공재(常住勸供齋)·

각배재(各拜齋)·영산재(靈山齋) 등 몇 가지 유형.

49재 때 행하는 세 유형의 천도의식 절차와 내용은

범패(梵唄)와 의식무용(儀式舞踊) 등을 많이 포함된다.


세 유형 중 영산재가 음악적·무용적 요소를 많이 지닌다.

범패· 불교의식무용 등은 무형문화재로서 지정되어 있다.


불교의 천도의식은

재래 민간신앙적 요소를

우리나라에서는 많이 지녔다.

.......................................


사시불공(삼보통정 영인스님 독경)

 삼보통청(사시불공).

 

불교에서의 천도재는 보통 49재로 불리는데,

전문적인 범패승이 하는 경우는 그 규모에 따라

상주권공재·시왕각배재· 영산재로 나뉘는데 범패승이

아닌 일반 승려가 49재를 지낼 경우에는 삼보통청으로 한다.


상주권공재 

상주권공재.


상주권공재는 1일,

시왕각배재는 2일,

영산재는 3일 걸린다.

 
영산재는 법화사상에 따라 석가모니불이 설법하던

영산회상을 상징적으로 설정하고 지내는 의식이다.


즉 의식을 행하는 장소가 일시적으로 영산회상이 되는 것으로

영혼은 이곳에서 석가모니의 설법을 듣고 극락왕생하게 되는 것.


봉원사 대웅전 앞 

 
영산재는 절 마당 등에

불보살을 모시는 상단,

신중을 모시는 중단,

영가를 모시는 하단 등

삼단을 차리고,

야외에 불화를 거는

괘불이운으로 시작하여

괘불 앞에서 찬불의식을 갖는다.


봉원사 영산재


영산재는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어

해마다 서울 봉원사에서 연행되고 있다.


봉원사 연꽃축제 (대웅전, 대방 주변) 


서대문구 안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봉원사.

대한불교 태고종 본찰인데, 다른 데는 연못이나 

연밭에 연꽃이지만, 여기는 많은 대형 함지박에

물을 담고 연꽃을 심고 가꾸어 연꽃 피운 것이다.


봉원사 대웅전 앞 


그대 꽃처럼 - 원경스님.


저 혼의 크기 만큼만 피어서

그 빛깔과 향기는

땅이 되고 하늘이 되나니

 

나도 저처럼

내 혼 만큼만 피어나서

땅이 되고 하늘이 되리

 

피어나는 때를 아는 꽃처럼

지는 때를 아는 꽃처럼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채

영겁을 노래하는 꽃처럼 살으리

 

나도 저처럼

내 혼 만큼만 피어나서

땅이 되고 하늘이 되리



봉원사 대웅전 앞

                                                                             대웅전 


범종각에서 바라본 대웅전은 봉원사 중심.

천년사찰에 여 스님 60, 신도 10만이 넘는다.


사찰의 개인 소유 인정과 승려의 결혼 문제를

자율에 맡기고 있으며, 출가하지 않더라도 사찰을

유지· 운영할 수 있는 재가교역자제도(교임제도) 실시. 


봉원사범종각의 문이 열리고 종이 울리다.

                                                                   범종각.


봉원사 가는 길에는 원룸으로 지은 집들이 많다.

연세대, 이화여대생들이 많이 사는 동네이기도 하고

한글학회가 창립된 봉원사 인근에는 옛날 집들이 많다.


아내와 가정을 갖고 있는

봉원사 스님들이 사는 동네.

일반 사찰과 다른 범종각 풍경.


대중교통 버스가 도착한 봉원사 주차장 주변에는

소박하고 단출한 민가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어 정겹다.

이런 마을을 사하촌(절 寺, 아래 下, 마을 村)이라 한다.


보통 사하촌의 경우 절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거주라는 마을.

봉원사의 사하촌은 특이하게도 승려들이 가족들과 함께 산다.

이는 봉원사가 승려 혼인을 허용하는 태고종의 중심지라 가능.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조계종파를 제외하고는

승려에게 혼인(혼인 후 출가 포함)을 당연시 해 왔는데

이들은 왜진왜란, 병자호란, 항일운동과 독립운동에 헌신.


6/6일 서울 서대문구 한국불교 태고종 총 본산 봉원사(삼천불전/석탑/칠성각)-11 


봉원사는 요사와 선방 등 승려의 숙식공간은 적고

그 대신에 경내 밑까지 승려들의 집이 들어와 있어

절과 마을의 경계가 모호하고 다른 절과는 다른 느낌.


 그러다 보니 봉원사 승려는 대부분 출퇴근.

이른 아침에 출근해 일몰 직후 보통 퇴근한다.

밤에는 경비 아저씨가 절을 지키며 대처제가 있어

누구나 공원처럼 중생이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사찰.


서울 도심에서 연(蓮)꽃을 실컷 구경하다.. 봉원사(奉元寺) 연꽃축제 

                                                                     미륵전.


또한 사찰에서 눈에 띄는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미륵전이다.

이곳은 국어연구학회(한글학회)가 창립된 장소이기도 하다.

1908년 국어연구학회 창립 100주년을 맞아 기념하는 표지석.


봉원사 칠성각 주련(奉元寺 七星閣 柱聯) 

                                                                       

미륵전 내부에는 미륵불 입상이 봉안돼 있다.

이 외에도 극락전, 칠성각이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만월전 등은 색이 많이 바래 세월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서울 서대문구 봉원사 미륵전, 극락전, 만월전 

                                                                          만월전 


연꽃축제 기간 동안에 연꽃사진전, 연(蓮)음식 체험,

사진전 묵화전, 연꽃으로 만든 도자기 전시, 연꽃차 시음.

산사 음악회에서는 국립무용단, 국립국악단도 나와 경기민요,

승무, 판소리 외에 불교의 성악인 범패(梵唄)를 들려준다고 한다.

범패는 절에서 재를 올릴 때 부르는 소리로

영산재 의식에서도 작법과 함께 연행되고 있다.


범패에는 크게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우리가 염불이라고 부르는

안채비소리(혹은 홋소리)와 전문범패승들만이

부를 수 있는 바깥채비소리(혹은 짓소리), 그리고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쉽게 만들어진 화청이나 회심곡.


................우리나라 범패(불교음악)........................

우리나라의 범패는 신라의 진감선사에서 비롯된듯 하다.

하동 쌍계사의 진감선사대공탑비문(眞鑑禪師大空塔碑文).

804년(애장왕 5) 재공사(才貢使)로 당나라에 갔다가 830년

(흥덕왕 5) 귀국후, 옥천사(쌍계사)에서 범패를 가르친 기록.


그러나 범패가 그 전에도 우리 나라에 있었다는 것은

삼국유사 월명사 도솔가조(兜率歌條)에서도 볼 수 있다.

즉, 760년(경덕왕 19)에 해가 둘이 떠서 지지 않는.,괴변.


이때 일관이 말하되 “범패승을 데려다가

산화공덕(散花功德)을 부르면 괜찮을 것.”

하여, 왕이 단을 쌓고 범패승을 기다렸다.


이로 보어 진감선사 이전에도 범패를 아는

승려가 따로이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진감선사 범패는 장보고가 세운.,'적산원' 당풍.


당풍 범패 이전에

서역에서 들어온 범패도

신라에 있었던 듯 여겨진다.


고려는 불교가 국교였기 때문에 범패가 성행한듯.

그러나, 짐작은 되나 기록이 없기에 잘 알기 어렵다.

고려의 역대왕들이 연등회(燃燈會)를 성대히 행했으며,

백좌도량(百座道場)을 왕궁에 설하고 대규모 도량을 설하.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범패도 성행하였으리라고 추측된다.


조선시대 범패는 1748년 대휘화상(大輝和尙)이 쓴

범음종보(梵音宗譜))에 의해 계보를 찾아볼 수 있다.

국융(國融)-응준(應俊)-혜운(惠雲)-천휘(天輝)-연청(演淸)

-상환(尙還)-설호(雪湖)-운계당법민(雲溪堂法敏)-혜감(慧鑑)

-순영(絢暎) 등 범패승 이름과 신간산보범음집(新刊刪補梵音集) 등.


1911년 6월 사찰령이 반포되고 그 취지에 따라

이듬해에 각본말사법(各本末寺法)이 제정되자

조선 승려의 범패와 작법(作法)이 금지되었다.


경만 읽고 범패를 부르지 않는 사찰에서는

재가 들어오지 않아, 재가 있는 한 범패는 존속


다카하시(高橋亨)의 1929년 이조불교(李朝佛敎) 기록.

“근년까지 경성 교외 백련사(白蓮寺)에 만월(滿月)이라는

노승이 있어 범패로 유명하였다. 원래 경성의 동서산(東西山)에

각각 만월이 있어 선성(善聲)이 서로 백중하였다.

이만월은 즉 서만월(西滿月)이라고 한다.”


 백련사 이만월(李滿月)의 제자로는 백련사의 이범호(李梵湖),

봉원사(奉元寺) 이월하(李月河), 진관사(津寬寺) 김운제(金雲濟)


동교(東郊)의 이만월의 제자로는 경국사(慶國寺, 靑庵寺) 대원(大圓).

영도사(永度寺, 開雲寺) 전우운(田雨雲), 신흥사(新興寺)의 완담(完潭),

화계사(華溪寺) 동화(東華), 흥국사(興國寺) 표금운(表錦雲) 등이 있었다.


범패 음악은 주로

5가지 재에 쓰인다.


1.상주권공재(常住勸供齋)·

2.시왕각배재(十王各拜齋)·

3.생전예수재(生前豫修齋)·

4.수륙재(水陸齋)·

5.영산재(靈山齋)


1. 죽은 자를 위하여 행하며 보통 하루가 걸리며

49재나 소상(小祥)·대상(大祥) 때 이 재를 행한다.

'상주권공재'는 무속에서 '진오귀굿'에 해당한다.

범패승이 소리를 배울 때 기본이 되는 상주권공재.


2. 시왕각배재는 일명 대례왕공문(大禮王供文)

상주권공재보다는 약간 규모가 크며 재수를 위한

의식으로 저승 10대왕(十大王)에게 자비를 비는 것.


진광대왕(秦廣大王)·초강대왕(初江大王)·

송제대왕(宋帝大王)·오관대왕(五官大王)·

염라대왕(閻羅大王)·변성대왕(變成大王)·

태산대왕(泰山大王)·평등대왕(平等大王)·

도시대왕(都市大王)·오도전륜대왕(五道轉輪大王)


3. 생전예수재는 죽어서 극락왕생하게 해 달라고

생전에 지내는 재이며 무속의 생(生)오귀굿에 해당.


4. 수륙재는 수중고혼을 위한 재로서 무속의 용왕굿에 해당.

수륙재 원래 의미는 반드시 수중고혼 만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규모 큰 수륙재는 절에서 영산재 후

강이나 바다로 나가 수륙재를 행한다. 


수륙재의 절차는 서찬편·상단(上壇)·사자단(使者壇)·

오로단(五路壇)·상단(上壇)·중단(中壇)·하단(下壇)·회향단

방생재(放生齋)는 하단의 끝부분에 속하는 절차로 강이나 바다에

배를 띄워 놓고 방생재를 행하고 나면 회향단을 생략하고 끝마친다.


5. 영산재는 가장 규모가 큰 재로 3일 걸린다.

국가의 안녕과 군인들의 무운장구(武運長久) 또는

큰 단체를 위해서, 또는 죽은 자를 위해서도 행한다.


범패승들은 상주권공을 처음 배우고

각배(各拜)를 배운 다음에 마지막으로

영산재를 배울 만큼  절차도 상당히 복잡.


1968년 5월 13일부터 5월 16일까지

봉원사 영산재는 142곡이나 불렸다.


범패에는  음악적 형식으로 보아

안차비들이 부르는 안차비소리와

겉차비(바깥차비)들이 부르는 홋소리·

짓소리, 축원을 하는 화청(和淸) 등 4가지.


안차비소리란 재를 올리는 절 안의

유식한 병법(秉法) 또는 법주(法主)가

'유치'· '청사' 같은 축원문을 요령(搖鈴)을

흔들며 낭송하는 것으로 흔히 염불이라 한다.


한편, 바깥차비란 범패를 전문으로 하는 승려로

주로 다른 절에 초청을 받고 가서 소리하는데,

범패는 주로 이 겉차비들의 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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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원사는 절 뒤로 안산이 이어져 

안산자락길로 산행을 하기에 좋다. 


서울에서 손꼽히는 걷기 좋은 숲길이다.

봉원사에서 안산 정상까지는 20분 도보거리.

사찰 뒤편으로 안산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다.


봉원사 ~ 안산 ~ 인왕사 ~ 치마바위 ~ 경복궁.

조선시대부터 옛 성현들이 즐겨 걸었던.,옛 산길.

오늘날까지, 서울 시민들이 즐겨 찾고있는 등산로.


윤동주 서시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던., 윤동주 시인의 길.

1936년에는 가톨릭소년지 동시 '병아리' 발표

1917년 12월 30일 ~ 1945년 2월 16일 (향년 27세)


'창의문 곁 하숙집에서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며

윤동주 시인의 썼던.,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길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시인 윤동주.


그 생애는 짧았지만 음울하고 가혹한 시대상황에서

반드시 여명은 오리라 믿고 써내려간 주옥같은 시어들.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민족에게 해맑은 영혼의 징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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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소당 봉원사 큰 염불당으로 


奉元寺(봉원사)라는 편액이 붙어있는 대방(大房)은

염불수행을 전통으로 해온., 봉원사의 염불당 건물은

흥선대원군 별장이었던 아소정 본채를 옮겨 지은 건물.


아소당 봉원사 큰 염불당으로  


안산 자락에 위치한 봉원사(奉元寺)는 천년고찰.

한국불교태고종(韓國佛敎太古宗)의 총본산으로

889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했다고 알려졌다.


봉원사는 조선 개국 초,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보관.

이성계가 경복궁 수호도량으로 창건한 인왕사와 함께

승유억불 조선시대 내내 탄압을 크게 받지 않은 사찰이다.


인왕사(仁旺寺)는 무악동 인왕산 자락 전통사찰이며

서울 중심에서 가장 가깝고 쉽게 오를 수 있는 인왕산.

'기자신앙과 토속신앙' 상징 선바위와 호국도량 인왕사. 


1396년(태조 5) 왕의 초상화를 모신 원당(願堂) 반야암.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된 것을 지인(智仁)이 크게 중창.

1651년(효종 2)에 다시 법당과 동서에 있던 요사가 소실 후

극령(克齡)·휴암(休巖)·도암(道庵) 등이 중건하였고 또, 선조·

인조·영조 때에는 반야암을 수호하라는 왕명이 있어 극진한 보호.


특히, 1748년(영조 24) 왕이 절을 지을 부지를 하사.

찬즙(贊汁)·증암(增巖) 등이 현재의 자리로 이건하였고,

이듬해 영조는 봉원사라는 현판을 내려 이때부터.,봉원사.


1788년(정조 12) 팔도승풍규정소(八道僧風糾正所)를 설치.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의 주동인물이었던 김옥균(金玉均)·

서광범(徐光範)·박영효(朴泳孝) 등이 이동인(李東仁)의 지도 아래

개화파의 젊은이들을 깨우쳐 정변을 일으키게 하기도 하였던 진원지


1894년에는 주지 성곡(性谷)이 약사전을 신축하였으며,

1911년 이보담(李寶潭)이 중수하였으나 6·25때 일부 소실.


유물로는 도선의 반야암 편액,

이광사(李匡師)의 대웅전 편액,

정도전(鄭道傳)의 명부전 편액,

추사 청련시경(靑蓮詩境)·산호벽루,

이완용 지장대성위신력(地藏大聖威信力),

청나라 옹방강(翁方綱)의 무량수각 편액 등과

장승업의 신선도 십폭병풍 등이 소장되어 있다.


봉원사는 조선 개국 초부터 조선시대 말까지

유학자 문인 명사들의 왕래가 잦았던 호국도량.


봉원사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20살 때

윤영(尹映)을 만나 소설 '허생전' 소재를 얻은 곳.


허생은 10년 계획으로 남산골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가난을 못이긴 부인의 성화에 어느 날 공부를 중단하고
장안 갑부 변씨를 찾아가 10만금을 빌려 지방으로 내려간다.


그는 이 돈을 밑천으로 장사를 벌여(매점매석 경제구조 비판)
크게 돈을 벌고 좋은 일을 많이 한후 20만 금을 변씨에게 갚는다.
놀란 변씨가 뒤를 밟아보니 남산 밑 오두막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후 두 사람은 깊이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하루는 변씨가 이완(李浣)을 허생에게 소개.
이완은 시사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오히려 허생에게 비웃음만 사고 돌아간다.


허생의 비범한 인품을 알게 된 이완은

그를 기용하고자 다시 찾아갔지만,
이미 허생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허생전.................

'열하일기'의 <옥갑야화>에 수록.

박지원은 기존 야담을 소재로 하면서

자신의 입장과 시각을 반영해 작품을 썼다.


작품은 크게 2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반부는 허생이 비범함을 보이는 부분으로

후반부를 예비하는 내용이고, 후반부는 허생을 통해

당대의 사회와 정치현실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작자의 실학사상을 보여준다.

선비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가두지 말고

가정, 사회, 국가 경영에 사용할 것을 제안.


사회적으로 천시하던 상업에 관심을 가져

상품의 유통과 물물교환의 가치를 인식할 것,

 관심을 국외로 확장할 것 등을 제시하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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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원사에는 독서당이 있어 조선 시대 선비들이

과거 공부를 위한 용맹정진 장소가 되기도 했다.


Re:경교명승첩 이미지 28점 


기묘년 동짓달 16일 유자범(兪子範)의

처인서옥(處仁書屋)에서 술을 마셨다.


김명원(金明遠), 조군소(趙君素), 이숙가(李叔嘉),

조사현(趙士顯), 이사소(李士昭 ), 이문오(李文吾),

김사정(金士精)은 모두 우리 모임에 속한 사람들이다.


막 술을 마시려 할 때 산에서 불어온 바람이

사립문을 흔들고 싸락눈이 막 날리기 시작하였다.


얼마 지나서 이윽고 술기운이 거나해지고

밤이 깊어지자 맑은 달빛이 뜰에 비치었다.


 갑자기 자범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 밤이 참으로 즐겁소. 그러나 우리들은 답답하게

도회지에 갇혀 지내는 것을 늘 한스러워 하였으니,

다음에는 성곽 바깥으로 나들이하는 것이 어떻겠소?


“이 논의는 매우 묘하오.

성 서쪽 봉원사(奉元寺)는

나와 명원이 여름휴가 보내던 곳,

한 번 떠나온 이후 40년이나 되었소.

매양 다시 들르겠노라 생각해왔지요.

한번 가보도록 하지요.” 자범이 말하였다.


“좋지요. 사소의 집이 그곳에서 가까우니 주관하도록 해야겠소.

또 좋은 일이니 열흘 후로 약속을 잡는 것이 좋겠지요. 해가 뜰 무렵

사소의 집에 모여 옷소매 나란히 가도록 하지요. 약속을 어기지 마시오.

따로 기별하지 않겠습니다.” 기일이 되자 모두 사전에 약속한 대로 모였다.

 

전날 저녁에

사소가 사람을 시켜

행장을 꾸리게 하였다.


봉원사 중이 와서 인도하였다.

둥그내고개[圓峴] 서쪽에서부터

승전봉(勝戰峰)을 걸어서 넘었다.


이중예(李仲睿)가 소식을 듣고

술을 가지고 여기까지 뒤따라 왔다.

정말 일을 벌이기 좋아하는 사람이다.


승전봉 뒤는 얼음과 눈이 덮여 있어

발걸음을 뗄 때마다 맑은 소리가 울렸다.


발을 잠깐이라도 멈칫 하면

넘어지게 되니 정말 고생스러웠다.


절에 이르니 풍광은

예전과 똑 같았지만

황량하여 마음 쓰였다.


예전의 중들은

한 명도 남아 있는

이가 없었다.


두 명의 주지는 삭발한 머리가 싸락눈이

소복하게 쌓인듯 하얗게 세었다. 우습다,

인생이 이렇게 허망함이. 저 변함이 없는

갠지즈 강물과 같지 못하여 안타깝다.


함께 불전을 배회하면서

한참동안 감회에 젖었다.


함께 따라온 사람 중에 바둑은 한흥(漢興),

노래는 군빈(君賓), 거문고는 익대(益大)가

잘하는데 모두 솜씨가 제일이다.


또 새 사냥을 하는 이가 있는데

백발을 쏘아 한 발도 놓치지 않으니

그 또한 빼어난 기술이다. 각기 잘하는 바를

발휘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즐거움을 더하게 하였다.


식사에는 매운 양념을 쓰지 않았으니 승려들의 법을 따른 것.

밥을 먹을 때는 한 줄로 앉고 승려를 시켜 종을 울리게 하였다.

나도 들고 다니는 소쿠리에서 나무로 만든 발우를 꺼내어

여러차례 밥을 받았다.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한밤이 되자 두 명의 승려가 소리를 나란히 하여 불경을 외웠다.

그 소리가 청아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성찰하는 마음이 들게 하였다.

한 젊은 승려가 제법 의리를 담론할 줄 알고 자태 단정하여 사랑스러웠다.


술을 마시다 새벽이 되어서야

베개를 나란히 하여 잠을 잤다.

방이 호젓한데다 따뜻하여 매우

추운 밤이지만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다음날 나와 명원은 각기 시 몇 편을 지었다.

식후 함께 돌아가는 길에 다시 승전봉에 올랐다.

이때 구름과 햇살이 맑고 고왔다. 가슴속이 탁 트였다.


동으로 한양성을 내려다보았다.

성 안팎의 누각과 골목길이

손금처럼 보였다.


북으로 삼각산과 도봉산 쌓인 눈이 빛을 뿜어

휘황찬란, 번쩍번쩍하여 무어라 형용할 수 없었다.

서남쪽으로 큰 한강이 깡깡 언 채 구불구불 뻗어 있다.

수십 리에 걸쳐 파란 유리를 강물 위에 갈아놓은 듯하다.

긴 바람이 모래와 눈을 불어 마치 안개가 낀 듯 흐릿하였다.


서로 돌아보며 매우 즐거워하였다.

바위에 걸터앉아 술을 데우고 거문고 타는

이를 시켜 노래에 맞추어 연주하게 하였다


거문고가 얼어서 더욱 운치가 있고 노랫가락은 높고 또 기운찼다.

소리가 처음에는 맑게 울려 퍼지다가 나중에는 애원조로 바뀌었다.

여음이 허공을 흔들어 솔바람 소리와 어우러져 절절하자 모두 탄복.


“반평생 노래와 거문고 소리를 들었지만 오늘 같은 날이 없었던 듯하오.”


내가 다시 입으로 긴 율시를 읊고,

앞서 지은 시와 함께 내어놓고

여러 벗들에게 답하라 하였다.


다시 사소의 집으로 돌아왔다. 각기 술 한 잔씩을 마시고 헤어졌다.

아, 이번 유람은 날이 따스하지 않고 추웠으니 그 고통이 막심하였다.

길을 나서 말을 타지 않고 걸어갔으니 그 수고로움이 막심하였다.

절에 빼어난 물이나 바위가 없어 감상할 만 하지도 못하였고

식사를 할 때 큰 상에 맛난 음식을 차려놓은 일도 없었다.


모두가 다 형편없는 일이라 하겠다. 남들이 보면

즐거울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 맞겠지만 이상하게도

놀이에 함께 하였던 3-40인은 모두들 질탕하게 즐기며

기뻐 펄쩍 뛰기까지 하였다. 이는 무슨 까닭인가?


내심 마음 맞고 밖으로 좋은 경지를 만났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마음이 맞으면 좋은 경지를 만나고 좋은 경지를 만나면 즐거운 법.

즐거움이라는 것은 어떤 사물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법이다.


그저 그 경지에 들어가지도 못하여 이를

얻지 못하는 자들에게 가르쳐 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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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년 음력 11월 16일

김조순 봉원사 유람.,해설. 


조선 후기 안동 김씨 세도 정치를 이끌었던

김조순은 벗 김려 등과 함께 봉원사를 찾은 것.

그들은 눈 내린 달밤에 즐거운 마음으로 시를 짓고

출간한 시집의 이름은 상심낙사(賞心樂事)라고 붙였다.


인생이란 고통스러운 순간도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되는 법.

김조순 벗 김려는 이곳 봉원사에서의 만남이 더욱 각별했다.

파란만장했던 지난 삶을 반추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김려는 노론시파로 분류되던 김재칠 장남으로 출생.

15세에 성균관에 들어가 27세에 진사시에 급제했는데

그때 평생 친구인 이옥과 김조순, 강이천 등을 만난다.


그런데, 서른두 살 무렵

강이천의 죄목에 연루되어

함께 유배형을 받게 된 것이다.


죄인 강이천을 제주목에,

김이백을 흑산도에,

김려를 경원부에 유배.


1797년 11월 12일 《정조실록》의 기록이다.

정조의 치세기간에 이해하기 어려운 중형이었다.

 "강이천이 바야흐로 천안에 있으면서 해랑적(해적)들의

소설(騷屑)스러운 말로 시골 사람을 속여 의혹시키고 있다."


(김려(1766∼1822)는 전도유망한 선비였는데 )

(32세때 1797년에 벗 강이천의 옥사에 연루된 것.)

(‘함께 모여서 서학(천주교)을 이야기하고, 서해에 )

(진인(眞人: 서양인)이 나타나 새로운 세상을 준비한다는 )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것이 유배형을 받게 된 죄목이다.}


쉽게 말하면, 혹세무민하고 다닌다는 말이다.

문체반정운동 사회 풍조에 위기감을 느껴온 정조

젊은 선비들의 자유분방한 운동을 용납하지 않았다.


한때 전도유망한 선비였던 김려는 이 사건으로

유배지 두 곳에서 10년간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함경도 부령에 유배된 김려는 주민과 허물없이 사귀어

인정에 힘입어 유배 생활의 고통을 극복해갈 수 있었다.

현지 주민을 통해 그들이 처한 현실을 이해하게 되었고

유교적 질서에서 벗어난 본연의 인간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부령 관아의 관기인

연희와 다시 오지 않을 뜨거운 사랑을 나눈다.


몸으로 노래하는 기생, 마음으로 노래하는 기생 


4년 뒤 김려는 천주교도와 교분을 맺은 혐의로 다시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1801년 진해로 유배지를 옮긴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강행된 유배 길에 폐병이 악화한 김려는

하루에서 서너 차례 피를 토할 정도로 건강이 나빠지기도 한다.


살을 에는 북풍보다 따뜻한 남쪽으로 옮겼지만

김려의 마음 속에서는 북풍 서리가 내리고 있었다.

부령에서 사귄 기생 연희가 너무 그리워 몸살 날 지경.

하지만 유형에 처한 신분으로는 연희를 만날 길이 없었다.


'작은 우산에 치마 끌며 술병 들고서

연희는 벌써 다리 건너 이쪽으로 오고 있네.

찢어진 창으로 벌써 들리네. 또각또각 발걸음 소리.' 

   

이제 그는 거의 환청을 들을 지경이다.

.,만날 수 없는 연인을 그리워하며, 그토록

애태우며 지은 연시 사유악부(思牖樂府) 290수.


김려(金鑢 ),사유악부(思有樂府)유객이 부르는 그리운 노래. 


그리운 저 북쪽 바닷가
연못에 붉게 핀 연꽃 천만 송이
연희 생각에 더욱 사랑스럽구나


마음도 같고 생각도 같고 사랑 또한 같았으니
한 줄기 나란히 난 연꽃을 어찌 부러워했으랴?


평생 살면 즐거운 이가

원망스러운 이가 되고
좋은 인연이 나쁜 인연이 되는 건지?


하늘 끝과 땅끝이 산하에 막혀서
죽도록 부질없이 이별가만 불러대네.
전생에 지은 죄로 이생에서 이렇게 고생하는지


연희야! 연희야! 너를 어찌하랴!

죽도록 부질없이 이별가만 불러대네.

'전생에 지은 죄로 이생에서 이렇게 고생하는지'

라며 절규하는 그의 한 맺힌 음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담정유고 / 사유악부 


1811년 김려의 유배 생활이 모두 끝났다.

그리고 친구 김조순의 도움으로 1812년

정릉참봉으로 다시 관직 생활도 시작한다.


마흔일곱 나이에 꼬인 인생이 풀리기 시작한 그.

그 무렵 봉원사에서 친구들과 같이 밥을 먹은 뒤

승전봉에 오른 김려에게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그날 일을 친구들 중에서 가장

잘나가던 김조순이 이렇게 썼다.


'가슴이 탁 트였다.

북쪽 삼각산과 도봉산

쌓인 눈이 빛을 뿜고 휘황찬란.

서남쪽 한강은 꽁꽁 언 채 구불구불,

수십리 파란 유리를 강물 위에 깔아놓은 듯.

긴 바람이 모래와 눈을 불어 마치 안개가 낀듯 흐릿.


간송미술관 소장, >>양천십경첩<< 정선에 의한 원본과 복본, 그리고 장첩  

                                                              설평기려(雪坪騎驢)


바위에 걸터 둘러앉아 술을 데우고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르게 하였는데

거문고 가락은 얼어서 그런지 더욱 운치 있고

노랫소리는 솔바람 소리와 어우러져 절절하였다.   


'봉원사 유람을 기록하며(記奉元寺遊)'

그날, 봉원사에서 김조순이 쓴 산문이다.

김려는 친구들 사이에서 거문고 가락을 들으며

부령에서 사랑을 나눴던 연희를 또 그리워했을까?


조선후기 봉원사 독서당 일대는

과거시험 준비를 하던 젊은이들이

청운의 뜻을 품은 벗들과 교우하던 곳.


오늘날, 이 일대에 들어선 대학들은

봉원사 독서당과 무관하지는 않은듯.


서울 봉원사 연꽃축제


서울 서대문구 안산 자락에 자리 잡은 봉원사.

"무악 남쪽은 땅이 좁아 도읍을 옮길 수 없습니다."

 이 논리 때문에 안산은 도성 후보에서 탈락한 궁궐터


그러나, 당시 하륜은 끝까지 안산을 궁궐터로 주장.

"무악이 다른 명당에 비해 좁은 듯하지만 송도 강안전과

평양 장락궁과 비교한다면 좁은 것도 아니고 넓은 편입니다."


 하륜은 집요했다. 고민에 빠진 이성계는

도읍지를 결정하기 위해 여러 관원들을 데리고

안산을 올라 친히 살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


그런데 10년 후 1404년 다시 안산이 도읍지로 부상.

경복궁에서 왕자의 난을 벌려 이복형제들을 죽이고

정도전을 참살한 태종은 경복궁으로 다시 들어가기 싫어

궁궐을 옮기려 할때 안산이 유력한 후보지로 재거론된 것.


의견이 너무 팽팽해서

결론을 도출할 수 없자

태종은 조준에게 물었다.


"옛날 중국에서는 이렇게 도읍지 선정으로

의견이 팽팽하면 어찌하는가?" 그러자 조준은

"동전으로 정했습니다"라고 대답했는데 이렇게

동전을 던져 점을 치는 것을 척전(擲錢)이라 했다.


척전 결과 북악산은 2길(吉) 1흉(凶),

안산은 송도와 함께 2흉 1길이었다.


논의 후, 태종이 향교동 동쪽 가를 살펴보고

 길흉을 판단하여 이궁(離宮)을 짓도록 명했다.

그리고 어가를 돌이켜 광탄에 머물면서 말했다.


"나는 무악에 도읍하지 아니하였지만,

후세에 반드시 도읍하는 자가 있을 것."


1404년 10월 6일 태종의 탄식이었다.

나중에 태종은 서쪽에 궁궐이 없으니

별궁을 짓자 해서 안산 아래 지은.,별궁.

 

100칸 남짓 규모의 별궁이었는데

처음에 서이궁(西離宮)이라 불렀다가

훗날 연희궁(延禧宮)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세종은 연희궁 언덕에 소나무를 심어 경관을 조성.

궁 주변에는 과일나무와 뽕나무를 심으라고 명했다.

그래서 한때 서잠실(西蠶室)이라고 불리기도 했었다.


연산군은 연희궁을 연회장으로 삼았는데,

연산군이 흥청들과 어찌나 질탕하게 놀았던지

'연희궁 까마귀골 수박 파먹듯 한다' 속담이 유래.


여름철 먹다 남은 수박과 참외를 산더미처럼 내다 버려

까마귀 떼가 몰려와 쪼아 먹었다는데서 유래한 속담이다.

이 일대에 소나무가 무성하고 고개가 매우 험해.,한달고개.


1445년(세종 27년) 1월 16일에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 태어난

막내아들인 평원대군이 죽었다.


세종실록에는 이에 충격을 받은 세종이 한양을 떠나

이곳 연희궁에 꽤 오랫동안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그해 가을 세종이 주민들과 음식을 나눠 먹었다는 기록.


 연희궁 자리는 좀 논란이 있다.

연희동에는 연희동 삼거리에서

서대문구청으로 넘어가는 대궐재.


"도성 밖 서쪽 15리 양주에 연희궁이 있는데

정종이 왕위를 선양하고 머물렀다" - 궁궐지 -

宮闕誌 옛 기록이 있지만 궁터는 찾을 수 없다.


훗날, 연희궁(延禧宮)으로 한자가 바뀌어  

오늘날, 연희동(延禧洞)의 동명이 되었는데

원래, 연희궁(衍禧宮) 이란 한자를 썼다고 하는데

대체로 연희입체교차로 부근이었을 것으로 추측하며

서울시에서 공인하는 위치는 연세대 캠퍼스 정문 오른편.

.

연세대 정문에 들어서면

오른쪽 이한열 열사 추모비 옆에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묘., 수경원(綏慶園) 옛터.


서울시 문화재를 찾아서⑫수경원 터 광혜원  

수경원 옛터 & 광혜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영빈이씨.

어려서 궁중에 들어가 귀인이 되었으며,

1730년(영조 6) 영빈으로 봉해졌던.,후궁.


영조의 깊은 총애를 받았으며, 4명의 옹주를 낳은 뒤

1735년 원자를 출산하여, 영조를 크게 기쁘게 하였는데

1762년 사도세자가 폐위당하는 와중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1764년에 죽자 영조는 애통해하면서

후궁 제일의 예(禮)로 장례하게 하였고,

이듬해 시호로 의열(義烈)을 추증하면서

친히 선시지례(宣諡之禮)를 행하기도 하였다.

소생으로 사도세자 외에 5명의 옹주가 있었다.


현재, 수경원(사적 제198호)는

서오릉 내 명릉과 익릉 사이에 있다.

원래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내 있었다.


연세대학교에서 봉원사로 넘어가는.,버리고개.

수경원(綏慶園)의 주룡이 되므로 이 고개로 다니는

사람은 불경죄로 벌을 주었기에., "벌고개", "버리고개".

 

1968년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였는데

1899년(고종 36) 정자각과 비각을 신축.

비석도 새로 세웠는데 정자각과 비각은

아직도 연세대학교 내에 그대로 남아 있다.

광혜원과 제중원 그리고 서울대병원과 세브란스병원 그들의 뿌리찾기 

                                                       1987년 복원 완공된.,광혜원.

.........................광혜원.............................

1985년 연대 창립 100주년때 복원.

1885년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병원

갑신정변때 선교사이며 의사인 알렌이 설립.


2주 후에 제중원으로 이름이 바뀌고.

1894년 운영권이 미국 선교부로 이관하여

사립병원으로 되었으나 1904년 재정난으로

미국 사업가인<세브란스>가 현 서울역 앞에

세브란스 빌딩으로 이전하면서 이름이 바뀌었다.


연세학원의 연원이 되는 기관으로

의술 발전을 꽃피우는 산실이 된 곳이다.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


(윤동주시인과 대성중학교) 별의시인 윤동주시비와 대성중학옛터에서 

윤동주 시비 & 연희궁 표지석.

연세 역사의 뜰: 수경원 터와 광혜원 

그리고 그 앞에는 연희궁 자리였다는 표석이 보이는데

연세대 캠퍼스가 옛날에는 연희궁 자리였음을 알 수 있다.


만약, 태종이 안산 앞을 궁궐터로 추진했다면

오늘날, 연세대 자리에는 궁궐이 들어섰을 것.


안산(鞍山)의 '안(鞍)'은 말안장이란 뜻이다.

'鞍'이란 글자는 두 글자가 합쳐져 만들어졌는데

'가죽 혁(革)' 또는 '고칠 혁'과 '편안할 안(安)'이다.


도성 서쪽 산인 안산은 서인들이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잡아야 편안하다 해서 안산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글자 뜻을 살펴보면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인조반정 혁명을 일으킨 서인 세력은 정권을 잡은 후

노론으로 이어져 조선 후기까지 정권을 놓치지 않았다.

반면, 동인 세력들의 근거지인 낙산(駱山)은 어떠한가?


'낙(駱)'이란 글자는 낙타를 뜻한다.

'말 마(馬)'와 '각각 각(各)'이 합쳐진

글자로 각각 말을 타고 간다는 의미다.


이는 곧 동인 세력의 분열을 뜻한다.

실제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갈렸으며

그 때문에 이들은 한때 정권을 쟁취하기도 하나

분열을 거듭하다 결국 탄압받는 정치 세력으로 남는다.

.

오늘날 보수 정권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놓치지 않는 반면 진보는 잠시 정권을 잡았다가도

분열을 반복하다 재야로 남는 현실과 어찌 그리 같을까?


안산은 생김새가 말이나 소의 등에 짐을 실을 때

사용한 길마와 같이 생겼다 하여 길마재라고 하며

모래재, 추모련, 봉수대가 있어 봉우재라고도 한다.


역사적으로는 조선시대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전투를 벌인 곳으로 유명.

또 안산은 무악산(毋岳山)이라 불리기도 한다.


무악이라는 명칭은 한양 천도를 위해

지금의 청와대 뒤에 있는 북악산, 인왕산

등과 함께 도읍의 주산을 다투는 과정에서

태조 이성계가 안산을 무악산이라 부른데서 유래.


또 실학자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芝峰類說)》에는

'아이가 어머니 등에 업힌 형세라 한성의 부아암(負兒岩)

북한산 인수봉이 마치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듯한 형상이므로

이를 막기 위해 안산을 어미 산, 즉 모악(母岳)"이라고 한데서 유래.


오늘날 지명에는

조선시대 역사가

담겨있는 곳이 많다.

.

만석동은 만석군 부자가 살던 동네.

돈암동은 병자호란 되놈이 넘어온 곳.
되너미고개 - 되너미 - 돈암 - 돈암동
 
응암동은 왕이 매로 사냥하던 동네.
부암동은 아들 낳는 바위가 있는 곳.
즉, 인왕산 백사실계곡 인근 부침바위.
 
공양왕이 도망치며 오금 저린 오금동.
폭삭 낡고 삭은 절이 있다고 해서 사근동.
말고기를 먹는 모진 년이 있다 하여 모진동

염리동은 상인들이 배로 소금 나르던 곳.
도화동은 옛부터 복숭아 꽃이 많았던 곳.
압구정동은 한명회 한강변 정자가 있던 곳.

마포구 영화나루 합정동은 조개가 많던 곳.
조선시대 마포는 항구였고, 합정동은 해안가.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천주교도의 머리를 벤
망나니들이 칼에 묻은 피를 씻었던 우물가 동네.

절두산 성지와 관련 깊은 곳.,합정동.

원래, "조개 우물"이 있어 합정동(蛤井洞)인데
오늘날, 합정동(合井洞)으로 지명이 변한 곳이다.
합정(合井)은 강변도로가 건설되며 사라진 우물 터.

조선시대 봉원사와 관련 깊은.,'망나니마을' 합정동.
원래, 사형수인 망나니가 죄를 감형받기 위한 행위.,참수.
죽은자 영혼을 달래고 산자의 평안을 비는., 봉원사 영산재. 

...........................

...........................

 

조선시대 한양의 지형은

현재, 서울과 많이 다르다.


하늘 사이에 걸린 고개.

인왕산과 안산 사이

하늘이 만든 관문.


무악재 도로 확장 공사(1961) 

                                                                  1961년 무악재.


1488년 명 사신 동월(董越)이

 한양에 당도해 한탄했다고 전한다.

 

"홍제에서 동쪽으로 가다가 5리가 못 되어

하늘이 만든 관문이 있으니 북으로 삼각산을

잇대고 그 가운데 말 한 필 겨우 통할 수 있구나"


1903 무악재 

                                                                 1903년 무악재.


지금은 상상이 가지 않지만 무악재는

하늘로 올라가는 길목이라 불릴 정도로

참 높은 고개였다고 하는데. 그러던 곳이

'서대문~영천시장' 전차 노선 때문에 깎이고,

1960년 도로가 넓어지며 또 한 번 크게 깎였다.


[모르고 지나치기 쉬운 감성공간 이야기 02] - 조선시대 임금님의 응접실, 모화관과 영은문 


이 고개는 한양에서 북쪽으로 넘어가는

가장 중요한 길목으로 빈번히 이용되었다.

그뿐 아니라 중국 사신이 한양으로 오는 길목


사신이 무악재를 넘으면 바로

영빈관인 모화루(慕華樓)에 당도.


니콘 D750과 24-70mm f2.8G 


《태종실록》

 1408년 5월 7일


새로 모화루를 서문 밖에 지었다.

송도 영빈관을 모방해서 만들었다.

신하들에게 명하여 각각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 바치게 하니, 성석린이

'모화(慕華)'란 이름을 지어 올렸는데

그것으로 정했다. 그리고 누각에 액자

(額字)를 쓰라고 명하였다. - 태종실록 -


1408년 4월 22일, 태종은 모화루 남쪽에

서지(西池) 또는 천연지(天然池).,연못 공사.

서대문구 천연동이 아직도 동네 이름으로 있다.


이 연못가엔 큰 소나무가

세월의 풍상을 이고 펀펀하게

드리워져 있었는데, 고려의 왕들이

남경(한성의 고려 때 이름)으로 순행하다

비가 오면 이곳에서 비를 피하곤 했다. 그래서


쟁반 같은 소나무라 하여

이름을 반송(盤松)이라 하고

반송정(盤松亭)이란 정자를 지었다.


《태종실록》에는 연못 공사를 담당한

박자청이 탄핵당했다는 기록도 있다.


열흘 넘게 공사를 하고도 완성을 보지 못해

백성의 원성이 자자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태종은

"내가 명한 것인데 자청에게 무슨 잘못이 있느냐?"며

상소를 올린 사헌부 지평(持平) 최자해를 집에 감금하라 지시.


태종실록에는 연못의 위치와 규모까지 기록.

연못은 모화루에서 150보 떨어져 있었으며

길이는 380척, 깊이는 두세 길이었다.


한 길이면 어른 키 높이에 해당

서호 연못은 꽤 깊었던 모양이다.


1408년 5월 19일에 개성 숭교사에 있던

연꽃을 배로 실어 이곳에 옮겼다고 한다.

태종이 연못에 들인 공이 컸음을 알 수 있다.


1413년 6월에는 예빈시(禮賓寺)에서  

군량미로 이곳 연못의 물고기를 기른다는

말을 들은 태종이 해당 관리를 불러 물었다.


"이 물고기들이 쌀을 얼마나 소비하는가?"

"예, 한 달에 족히 열 말은 소비합니다."


그 말을 들은 태종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가 즉시 그만두도록 명했다.


"사람도 굶어 죽는 판에 어찌 물고기에게

그렇게나 많은 쌀을 허비하느냐?"고 질책.


그런데, 한 달에 쌀 열말을 소비할 만큼

연못에 고기들이 많았다는 말이기도 하니

연못 규모가 제법 꽤 컸을 것이라 짐작된다.


세조 때 강희맹이 반송정에서 쓴 시가 있는데

그 사치스러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게 한다.


'수레 일산(日傘) 구름처럼

모여 먼 길을 전송하는데,

술잔 소반 흩어지고

황금 술병 곁들였네.


버들 푸른 큰길가에

술은 이제 다한 것이,

가고 남는 그 일을

한탄한들 어이하리.


슬픈 노래 한 곡조에

맑은 음률 울려나니,

애는 노랫소리

간장을 에이누나.


잠시 후 서로 떠나면

천 리 길 멀어지는데,

외로운 연기 저문 날이

창장(蒼莊)하기만 하구나. '  


조선 전기에 사신을 접대하는 명소로 이름을 날리던 곳.

한양을 떠나는 여행객을 전별하는 장소였던.,서지(西池).

임진왜란 이후에 자취를 감추는데 커다란 연꽃을 피워내던

넓은 연못은 훈련장과 과시(科試) 장소로 쓰기 위해 메워졌다.

.

서지 부근에는 경기중군영이 있었다.

오늘날 동명여자중학교 자리에 해당한다.

그러나, 1876년 체결된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즉, 강화도조약으로 일제의 침략 기지가 되는 아픔을 겪는다.


일본의 초대 주한공사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가

경기중군영을 1880년 12월부터 주한 일본공사관으로 사용.


당시 청수관(淸水館)이라 불리던 일본공사관은

그렇게 우리나라 최초 상주외교공관으로 기록된다.


경기감영도 


경기감영도 12곡병 증 5~12폭 부분에는

모화관과 경기중군영, 서지 일대가 보인다.


반접관 홍우창이 일본 대리공사(代理公使)

하나부사 요시타다가 수행원 15인, 호위병 15인,

종자 4인과 함께 오늘 신시(申時)에 관소(館所) 청수관으로

들어왔다고 보고하였다. - 《고종실록》, 1879년 4월 24일 -

  

청수관이란 이름이 붙은 이유는

정문에서 청명수가 솟아나와 부근 주민의

식수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청수관 주변에

다시 천연지라는 연못도 생겼다. 그러니까 조선 개국 이후

태종이 만든 연못이 임진왜란 이후 메워졌다가 다시 생긴 것.

그러나 이 역시 오래가지 못하고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진다.


동명여자중학교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향상회관(向上會館)의 흔적 

        

동명여자중학교 자리는 1876년 조일수호조규에 따라

1880년 최초 상주외교공관으로 설치된 일본공사관 터.


원래 경기중군영 터로 구내에는

청수관 천연정(天然亭)이 있었다.


안산(무악산), 이괄의 난의 현장을 가보다 2부 

                                                                  

1882년 6월 9일, 무위영 소속인 옛 훈련도감 군병들은

신식군대와의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임오군란


군란에 합세한 난민들도 일본공사관에 난입하여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를 비롯한 일본인을 살해했는데

이때 청수관도 소실되고 천연지는 1929년 일본공사였던

다케조에 신이치로 이름을 따 세운 죽첨공립보통학교가

천연지 터로 옮겨오면서 전면 매립되었는데 이 학교는

해방 후 금화초등학교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른다.


답변: 금화초등학교지도입니다~~~~ 


한양에는 서지 외에도

동대문 밖에는 동지(東池),

남대문 밖에는 남지(南池)가 있었다.


세 연못 모두 연꽃이 피었는데,

연밥은 궁궐에서 식용으로 사용.


서지 규모가 가장 크고 무성하여

도성 사람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속설에는


"세 연못 가운데

서지 연꽃이 많이 피면

서인 세력이 권력을 잡고,

동지의 연꽃이 성하면 동인이 우세하며,

남지의 연꽃이 잘 피면 남인이 힘을 얻는다."

그러나 성문 가까이 있던 세 연못은 안타깝게도

일제의 도심 근대화 개발 정책으로 모두 사라졌다.


....................우리나라.,유네스코 인류 무형 문화유산......................

1.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 2001년 유네스코 등재,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2. 판소리(2003년 유네스코 등재,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3. 강릉단오제(江陵端午祭, 2005년 유네스코 등재,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
4. 강강술래(2009년 유네스코 등재, 중요무형문화재 제8호)
5. 남사당놀이(2009년 유네스코 등재,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
6. 영산재(靈山齋, 2009년 유네스코 등재,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
7. 제주칠머리당영등굿(2009년 등재, 중요무형문화재 제71호)
8. 처용무(處容舞, 2009년 유네스코 등재,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9. 가곡(歌曲, 2010년 유네스코 등재,

10. 아리랑( 2012년 유네스코 등재.

................................................


봉원사 영산재(靈山齋)는 어떠한 연유가 있기에


유네스코 인류 무형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일까?


20070810 신촌 봉원사 연꽃._()_ 

                                                                     봉원사 연꽃축제.

봉원사 2016 연꽃축제


신촌 부근 봉원사계곡에서 발원한

봉원천이 서강을 향해서 흐르는데

신정동 연안 쪽 서강과 만나는 곳이

옛 서강나루(서강진 : 西江津) 터였고

봉원천을 옛부터 창천(滄川)이라 불렀다.


서울시의 복개하천들 - 봉원천, 아현천, 만초천, 선통물천 


봉원천(奉元川) 또는 창천(滄川)의 지명은

'봉원사 또는 광흥창'의 지명과 관련이 깊다.

현재, 서울 복개 하천들 중 하나로 사라진 하천.


봉원천, 선통물천, 아현천, 만초천(욱천) 등.

조선시대 '서강~봉원사계곡'으로 이어진 봉원천.

봉원천은 '서강~광흥창' 세곡 운반 물길 아니었을까?


.....................

.....................


봉원사는 조선 개국 당시

하륜이 주창한 모악천도론

한양천도와 관련 깊은 사찰.


조선시대

태조 5년에

이성계 어진을

모신.,원당(願堂).


당시 모악(母岳)이 오늘날, 안산.

안산 자락에 위치한.,사찰 봉원사.

현재 봉원사는 1749년(영조25년) 신축.


그 이전까지 사찰 이름은 '반야사(般若寺)였고

현재, 연세대학교가 들어선 자리가.,반야사 옛터.

반야사는 봉원천계곡 아래 서강 물길 인근에 위치.


즉, 현재 연세대학교는

조선 초기 연희궁 터였고

889년 창건된 반야사 터였다.


현재, 봉원사 중요한 유물로는 도선의 반야암 편액,

이광사(李匡師)의 대웅전 편액, 정도전의 명부전 편액,

김정희(金正喜)의 청련시경(靑蓮詩境)·산호벽루(珊瑚碧樓),

.

이완용의 지장대성위신력(地藏大聖威信力),

청나라 옹방강(翁方綱)의., 무량수각 편액 

장승업(張承業)의 신선도 십폭병풍 등이 있다.


...................봉원사(奉元寺)......................

봉원사는 1392년 이색이 지은 보우의 비문을 본

태조 이성계가 그의 문도가 되길 자청했다 전하며

태조 어진을 모시는 진전이 있어 조선시대에도 번성.


또한 독서당이 있어 조선 시대 선비들이

과거 공부를 위해 용맹정진하는 장소였다.


봉원사는 889년(진성여왕 3)에 국사 도선(道詵)이

부유한 신도 집을 희사받아 창건한.,반야사(般若寺).

고려 공민왕 때에 우(普愚)의 중건으로 대사찰로 변모.


조선 개국 초기인 1396년(태조 5)에는

이 절에 왕의 초상화를 모신 원당(願堂)인

반야암을 지어 불교탄압 영향을 받지 않았다.


1749년(영조25년) 왕이 친필 현판을 내려

이때부터사찰의 이름을 '봉원사'라 하였다.

편액을 받은 후 새로 지은 절이라 하여.,"새절."


봉원사가 위치한 마을도 "새말(신촌 ; 新村)"

그 이전까지 사찰 이름은 반야사(般若寺)였다.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된 것을 지인(智仁)이 크게 중창.

1651년(효종 2) 법당과 동서에 있던 요사가 소실되었지만

극령(克齡)·휴암(休巖)·도암(道庵) 등이 다시 중건한.,반야사.

 

선조· 인조· 영조 때에는 반야암을 수호하라는 왕명이 있어

조정의 극진한 보호를 받았으며 1748년(영조 24)에는 왕이

하사한 부지로 찬즙(贊汁)·증암(增巖) 등이 현재 자리로 이건.

이듬해 영조는 봉원사 현판을 내려 이때부터 봉원사라 하였다


1788년(정조12년) 승려의 기강을 진작시키고

승풍을 규찰하는 8도승풍규정소가 설치되었다.

영조가 내린 현판은 6,25때 병화(兵火)로 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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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와우산,와우공원,무드스튜디오,카페메이비 


와우산(臥牛山)은 서울 마포구 서강동.

뒷산으로 서교동까지 걸쳐 있는 산이다.

소가 누운 듯 생긴 산이라고 하여.,와우산.


와우산 서쪽은 마포구 상수동,

동쪽으로는 마포구 창전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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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우산은 홍익대학교 뒷쪽에 위치해 있으며,

약수터와 근린(체육)공원이 있는 야트막한 산.


와우산자락의 와우산길은

마포구 동교동 183-1번지(양화로)에서

홍익대학교를 거쳐 상수동 349-18번지에

이르는 폭 25m, 길이 1,830m의 4차선 도로.


서울의 중서부 한강연안에 위치하여

안산에서 갈라진 와우산 구릉산맥과

노고산 구릉산맥, 용산 구릉산맥이

한강으로 뻗어 세 산맥 연안에 한강.

 

호수처럼 발달한 서호, 마포, 용호

한강 3호수가 삼개(三浦·3개의 포구).

3호수 중 마포가.,"마포강" 또는 "마포항"

등으로 불러, 여기서 마포 지명이 유래된다.


또한 옛날 이곳에는 굴레방다리가 있었는데

서대문구 북아현동 163번지 남쪽 사거리에 다리.


풍수설에 의하면 큰소가 길마는 무악에 벗어 놓고,

굴레는 이곳에 벗어 놓고, 서강을 향하여 내려가다가

와우산에 가서 누웠다고 하여 붙은 지명이 굴레방다리.

굴레방다리는 한자 지명으로는 늑교(勒橋)라고 하였다.


아현동 굴레방다리 니나노 집을 아시나요? 


굴레방다리는 하천이 복개되면서 없어졌다.

그리고 서강대교 쪽으로 바위 이름이.,"통바우".

마포구 하수동 152번지 부근 강가에 있는 바위로,

와우산을 소에 비유하면 이 바위는 "죽통"이란 의미.


잔다리길은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363-2번지

와우산길~ 마포구 성산동 242-1번지 망원동길

길이 1,350m, 너비 20m의 보조간선급 도로이다.


6호선 합정역 - 망원정에서 잠두봉까지, 길은 길 아래에 있었다. 

망원정(희우정 : 喜雨亭)

한강이 한눈에.. 합정동 망원정 개장 


..........................망원정..................................

조선시대 망원정이 있던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망원정은 망원동 137, 207-1번지 일대인 양화나루 서쪽

1991년에 복원되었는데 태종의 둘째 아들이며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 별장으로 1424년에 건립되었으며. 1425년에 세종이

가뭄때 농사 형편을 살피러 거둥하였다가 새 정자에 올랐을 때,

때마침 비가 내려 왕이 기뻐하여 정자 이름을 喜雨亭이라 하였다.


1484년에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 소유로 바뀌게 되자,

정자를 보수하여 ‘먼 경치도 잘 볼 수 있다’는 뜻으로

망원정으로 하였고 망원정동・월사동이라고도 하였다.

........................................................................


망원정에서 멀지 않은

합정동 한강변.,절두산.

조선시대 사형장이었다.


절두산성지의 겨울풍경  

                             한국 천주교 순교 사적지.,절두산 성지.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한강변 일대.,절두산(切頭山).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략하고

물러난 후, 대원군이 전국의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여서

양화진 한강변에서 참수했는데, 그 수가 1만명에 이르렀다.


망원동 잔다리길 이름은 이 길가 서교동 일대의

옛 이름이 잔다리(세교동)인 것에서 비롯되었다.

잔다리길은 1993년 7월 23일에 지명이 붙여졌다.


한편, 애고개 혹은 아현은 서소문(西小門) 밖에 있었는데,

사람이 죽으면 서소문을 통해 시신을 성 밖에 버렸으므로

서소문을 시구문(屍口門)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하였다.


서소문 밖 네거리 성지 

                                                      서소문 밖.

황광현 취재수첩●서소문 천주교 순교성지와 약현성당  

서소문 성지, 중림동 성당 

약현성당, 서소문 순교자기념관 (서울 중구 중림동) 

악현성당 서소문 순교자 기념관.

약현성당, 서소문 순교자기념관 (서울 중구 중림동) 

약현성당, 서소문 순교자기념관 (서울 중구 중림동) 

자유와 평등을 외친 자들의 처형터 ‘서소문밖’ 


매장지로는 만리재, 애고개, 와우산 등이 이용되었는데,

애고개는 특히 아이들 시체를 많이 묻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진.,'애오개 본산대놀이'.


'애오개본산대놀이' 전국대회 참가 논란 


와우산 자락에 아파트가 건설되었는데

1970년 4월 8일 새벽 6시 30분에 무너졌다.


서울시가 마포구 창전동에 추진했던 지상 5층,

15개동 규모의 와우아파트 한 동이 주저 앉았다.

이는 준공된 지 석달 만에 일어난 아파트 붕괴사고.

건물은 무너지면서 경사 밑에 었던 판잣집을 덮쳤다.


아파트에서 잠자던 주민 33명 사망, 38명 부상.

아파트 아래 판잣집 주민 1명 사망 주민 2명 부상.


"몰미산"이라고도

불리우는.,와우산.

산자락 남쪽에 위치한

고려 공민왕(恭愍王) 사당.


서울 기도터-서울시 마포구 창전동 공민왕 사당 기도터 


조선 개국 초 마포나루 근처의
곡식창고를 지키던 창고지기 꿈에
공민왕이 나타나 '이곳에 내 사당을
지어달라' 하여 잠이 깬후 땅을 파보니

그곳에서 공민왕의 영정이 나왔다고 한다.


이곳은 고려 말, 관리의 녹봉을 관장하던

'광흥창'의 곡식창고 중 한 곳이 아니었을까?


......................광흥창 곡식창고..............

고려 충렬왕 때~조선 말까지 존속한.,광흥창.

조선시대에는 전국 각지의 조선(漕船)이 집결하는

한양 서강연안 와우산(臥牛山) 기슭에 위치한 곡식창고.

 

관원으로 수(守)·주부(主簿)·봉사(奉事)·부봉사(副奉事)를

각 1인씩 두었으나 후에 영(令)·직장(直長) 각 1인씩을 증원.

창고 업무를 담당했는데 전라·충청도 세곡미가 대부분이었다.


녹봉은 매년 1월·4월·7월·10월 4회 지급

1701년(숙종 28)부터는 매월 지급하였다.

.......................................................


창전동 공민왕 사당 


그러한 연유로 공민왕의 사당이

건축된 시기는 조선 개국 초였다.

(조선 개국 초, 광흥창이 이전한 증거)


그러나, 조선에서 고려왕을 섬기면

역모라 베일에 가려졌던.,공민왕 사당.


(조선 개국 초, )

(광흥창 고려 관리가 )

(지은듯 추정되는.,사당.) 


창전동 공민왕 사당 


공민왕 사당 안에 

걸려있는.,무속화.


창전동 공민왕 사당 


중앙에 공민왕과 노국공주, 왼쪽에는 최영장군.

'공민왕 사당'의 관리를 맡고 있는 마포문화원은

매년 10월 21일 주민들과 공민왕사당제례를 지낸다.


[공민왕사당] 신의 속 은수가 봤다는 공민왕 사당은 어디?? 


공민왕의 후손인 개성 왕씨 종친회에서도 참여,

서울에서는 유일한 공민왕 사당에서의 제례의식.

고려의 수도는 개성이었으므로 고려왕 사당도 유일.


창전동 공민왕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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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마지막왕., 공양왕.

불과 2년 8개월 동안.,재위. 

꼭두각시 왕 노릇을 하다가

나이 쉬흔에 살해당한 공양왕.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원주로 방치되었다가

간성군으로 추방되면서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

1394년 삼척부(三陟府)로 옮겨졌다가 그곳에서 살해.


그의 무덤은 두 곳에 있다.

하나는 원당 왕릉골에 있고

또 하나는 강원도 삼척에 있다.


능은 고릉(高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원당읍에 있는 것과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에도 공양왕릉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말과 조선 초 고려 왕실의 불안하였던 모습을 대변한다.


조선 태종 16년

공양왕으로 추봉.

.

1345(충목왕 1)∼1394(태조 3).

고려 제34대 공양왕(재위 1389∼1392.

고려의 마지막 왕으로 이성계 등에 의해

왕으로 옹립된 후 신진사대부의 세력확장에

이용되는 등 불운하게 생을 마쳤던.,고려 공양왕.


1389년 이성계, 심덕부 등에 의해

창왕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라 즉위 후에,

이성계 일파의 압력으로 우왕과 창왕을 죽였다.


사회 전반에 걸친 제도 개편을 단행했으나, 

이는 신진사대부 세력기반 확립을 위한 개혁.


유학의 진흥을 위하여 유학교수관을 두었으며,

과거에 무과 신설. 배불숭유론 주자가례를 시행.

신흥세력 경제 기반을 다지기 위해 과전법을 실시.

남은 등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면서 1392년 폐위.  


1392년 이성계는 개성 수창궁에서 조선 태조로 즉위한다.

1393년 새도읍 후보지 계룡산에 도착하지만, 물류의 한계.

1394년 태조는 한양천도를 위해 무학대사와 왕십리에 도착.

다시 10리를 더 가서 경복궁 터를 잡았다 전하는.,한양천도설.


계룡산 신도안 천도론은 사실이지만

무학대사의 왕십리 천도론은 설화일뿐.


사실, 태조 이성계가 개성에서 천도(遷都)를 단행할 때

도읍지로 추천된 계룡산(鷄龍山), 북악(北岳), 안산(鞍山).

경기도 관찰사 하륜(河崙)은 안산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즉, 모악천도론이

조선 개국 전후에

'한양천도론' 근간.


계룡산은 정감록(鄭鑑錄)에도 나와 있는 길지로서

제일 먼저 천도 후보지로 올라 도성 축성을 일부 진행.

그 위치가 나라 전체에 비추어볼 때 남서쪽에 치우쳐 있고

도참사상(圖讖思想)에 의하면 계룡산 일대는 정씨(鄭氏)가

도읍을 세우는 곳이라는 주장 때문에 축성공사가 중단되었다.


그래서, 도읍을 건설하려던

이곳 지명이 신도안(新都案).


다음으로 하륜이 주장한 안산 주산론(主山論)은

안산 지형이 앞이 확 터여 한강으로 접근하기 쉽고

한강은 바로 서해와 맞닿아 있어 해양진출이 용이하여

도성으로서 적합하다는 생각이었는데 풍수 지리적으로는

내룡(來龍)한 기운이 어느 정도 막혀야 기운을 받을 수 있는데

이곳 지형이 막힘이 없고 맺힘도 없어 길지(吉地)가 되지 못한 것.


성리학(性理學)에 기초하여 나라를 세운 조선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을 분명히 나누었는데

해상무역(海上貿易)은 가장 낮은 상(商)에 해당하여

그 직업을 천하게 여겨 '안산천도론'은 신하들이 반대.


역사적으로 신라와 고려는 동아시아 해상왕국.

성리학의 이념이 그 전통을 잇지 못하게 한 것.


안산을 주산으로 삼으면 궁궐터는 연희동 사거리

좌청룡은 서강대 뒷산인 노고산(老姑山), 우백호는

서대문 구청 건너편 백련산(白蓮山) 등으로 여겨진다.


조선 초기에는 태조(太祖) 때 계획을 세워

세종(世宗) 때 준공을 본 이궁(離宮)이 세 곳


동쪽에는 진접면에 있었던 풍양궁(豊壤宮),

서쪽에는 연세대학교 부근에 연희궁(衍禧宮)

남쪽에는 살곶이다리 인근 대산이궁(臺山離宮).

'대산이궁'은 낙천정(樂天亭)이라고도 불리웠다.


아파트 뒷편에 자리해 찾기가 쉽지 않은 낙천정의 모습


북쪽에 이궁이 없는 이유는 3곳 이궁이 설치되기 전부터

창의문(彰義門) 부근 장의동(藏義洞)에 왕세자 잠저(潛邸)로

사용한 장의동본궁(藏義洞本宮)이 있었기 때문인듯 여겨진다.


건국초기에 이렇듯 도성주변에 이궁을 설치한 까닭은

왕가(王家)에 횡액(橫厄)이 생기던지, 왕자의 난과 같은

변고가 생기면 왕이 이를 피하기 위해서인데 후기로 가면서

왕이 쉬어가는 단순한 휴양지(休養地)로 그 용도가 바뀌었다.


연희궁은 세종 때에는 세종이 이어(移御)하여

그곳에서 정사를 보기도 한 이어소(移御所)였고

이후에는 잠실(蠶室)로 또는 관렵(觀獵)을 위한

주가소(駐駕所)로 이용되었다가 성종 때 장녀인

신숙공주(愼淑公主)의 묘를 이곳에다가 두었고

영조 때에는 후궁 영빈이씨 묘를 안장하였다.

영빈이씨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

그의 묘를 수경원(綬慶園)이라 불렀으며

묘는 서오릉(西五陵)으로 이장되고 지금은

정자각(丁字閣)과 비각(碑閣)만이 남아 있다.


수경원 터에는 세브란스병원의 전신이며

우리나라 최초 병원 광혜원(廣惠院) 건물이

오늘날에는, 한옥으로 다시금 복원되어 있다.


갑신정변 때 다쳤던 민영익을 치료한 선교사이며 의사.,알랜

고종에게 병원을 설립하자고 제안하여 만든 것이 광혜원이다.


고종(高宗)의 윤허로 병원의 설립은 빠르게 진행

1885년4월10일 재동 홍영식 집(헌법재판소 자리)에

광혜원이 설립되고 2주 후 제중원(濟衆院)으로 개명.

그러므로 광혜원과 제중원은 한 몸의 다른 이름일 뿐.

광혜원 및 제중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다.


1887년 제중원은 구리개(을지로~ 명동성당)로 확장 이전.

1894년에는 제중원의 모든 운영권이 미국 선교부로 이관되어

사립 병원이 되었지만 설비와 기록들은 그대로 이어받아 보존.


1904년 재정난에 허덕이던 제중원은

미국인 사업가 세브란스씨의 15,000달러

기부 등으로 남대문 밖 복숭아골(서울역 앞)로

새 병원을 지으면서 이전 이때 많은 돈을 기부한

세브란스씨를 기념하여 병원 이름이 세브란스기념병원.


1905년 의사 숙소 등으로 사용되던 구리개의

옛 제중원 대지와 건물들은 조선 정부로 반환.

그 후에도, 세브란스 병원은 제중원이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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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5년 한양천도 전, 종묘를 조성.

자기 집을 지을 때는 개인 사당을,

나라를 만들 때 나라의 근간이 되는

사당 종묘(宗廟)를 먼저 만드는 것이

'선비나라' 조선의 자존심인 것이었다.


군주는 국가에 의존하고, 국가는 백성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백성은 국가의 근본인 동시에 군주의 하늘. 

- 정도전 조선경국전- 


종묘는 경복궁 좌측에 사직단은 우측에

대칭으로 배치하는 것이 도시계획의 기본.


따뜻한 우물이 있다 하여 훈정(薰井)동.

1394년 이 동네에 민가를 전부 쫒아 내고

5만 6천 평에 공사 시작한  다음해 1차 완공.

 

태조 이성계의 4대조 선조들의 위패(位牌)를 모신다.

위패는 관례 상으로, 깊은 산속에서 자란 밤나무를 사용. 


고조부 목조,

증조부 익조,

조부 탁조,

부친 환조. 


전부 왕으로 추존(追尊)

왕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4대조를 선왕으로 모신 것.

 

정문은 검박(儉朴 : 검소하고 소박). 

여기서부터는 왕도 걸어서 들어간다.

 

종묘의 정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4각 연못 위에 동그란 섬이 떠 있다. 

연못은 땅이고, 섬은 하늘이라 사각과 원.

"땅은 네모나고 하늘은 둥글다." - 천원사상 -.

.

망묘루(望廟樓)에서 잠시 대기한다

망묘루는 왕이 종묘의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과 종묘사직을 잠시 생각하는 정자이다.


그리고나서 종묘제례가 시작된다. 

왕이 몸소 제사를 올리는 친제(親祭)때는 

왕이 맨 처음 헌작(獻爵 술잔을 올림)하는 초헌관, 


왕세자는 두 번째 잔을 올리는.,아헌관, 

영의정이 마지막으로 잔을 올리는.,종헌관.

 

제관인 왕과 왕세자는 어숙실에서.,재계(齋戒)

즉, 심신을 깨끗이 하고 금기를 범하지 않도록 목욕.

.

그리고나서, 어숙실에서 정전과 영녕전 동문 어로를 따라

묘정에 들어와 각각 정해진 자리인 전하판위(殿下版位)와

세자판위(世子版位)에 이르러 제사를 올릴 예(禮)를 갖춘다.

 

남문에서 정전까지

까만 돌로 길을 낸 신로.

즉, 신(紳) 만이 다니는 길.

 

왕은 동문으로 입장한다. 

정전 길이는 앞의 1 & 뒤의 1


정전은 대칭이 되어야 한다.

가로101m 세로 69m.,소우주. 

2,300평 정전공간은 위대한 공간.


신성하고, 끝도 없고, 시작도 없는 곳. 

구름이 둥둥 떠 있고, 아무렇게나 깔려 있는

박석(薄石 : 얇고 넓적한 돌)은 무한하게 펼쳐지고,

파도치듯 다듬지 않은 박석은 손댈수록 망가진다는 생각


투박한 자연미가 담겨있는.,박석.

정전 앞 박석은 좀 더 올려진.,월대.

 

그러므로, 정전은 달(月)이 되는 곳이고,

그위로 구름도 떠다니고, 해(日)가 있는 것. 

정전은 그냥 배흘림기둥을 세우고 지붕 얹었다.

  

왕이 바뀌거나 말거나

설계자가 죽거나 말거나

종묘 공사는 152년간 지속.

 

정전의 부족한 공간을 채운 서쪽 영녕전

영녕전(永寧殿)은 길이 길이 평안한 집. 

정전에는 19실에 정전 좌측부터 


제  1실 태조, 

제  2실 태종, 

제  3실 세종, 

제  4실 세조, 

제  5실 성종, 

제  6실 중종, 

제  7실 선조, 

제  8실 인조, 

제  9실 효종, 

제 10실 현종, 

제 11실 숙종, 

제 12실 영조, 

제 13실 정조, 

제 14실 순조, 

제 15실 문조, 

제 16실 헌종, 

제 17실 철종, 

제 18실 고종, 

제 19실 순종과 왕후들 49위, 

영녕전에는 16실에 34위를 모신다. 


1546년 완공된 종묘의.,정전. 

기둥과 기둥 사이 한 칸이 1실.

 

정전은 국보 227호.

영녕전은 보물 제 821호.  


1592년 임진왜란 때 

조선 제 14대 왕 선조는

종묘 위패를 챙겨 의주로 피난.


이때 성난 백성들이 불태운 경복궁.

임진왜란 후, 선조가 한양에 도착했을때.  

몸 담을 궁조차 없어  월성대군의 고택 입주.

그리하여, 월성대군의 고택은 덕수궁이 된 것. 


1608년 종묘를 중건하여

선왕들의 위패 다시 모신다. 


조선의 선비들이 나서서 종묘에 선비를 앉힌다.

위계를 낮추려고 정전 앞 박석 걷어 내고 잔디를 깔고

공신당(功臣: 나라를 위해 특별한 공을 세운 신하)을 건립. 


16칸 건물에 83위의 신위를 모셨다.  

서얼 출신으로 한양을 완성한 위대한

건축가 정도전은  1398년 이방원의 칼 맞고

473년만에 1895년 천재 건축가 삼봉 정도전 신원되고

1912년 삼봉사당인 문헌사 건립하고 고종이 현판을 내렸다. 


30년 긴 세월 온갖 고난 겪으면서 쉬지 않고 이룩한 공업, 

송현방 정자에서 한 잔 술 나누는 새 다 허사가 되었구나.


유종공종(儒宗功宗)

'유학(儒學)도 으뜸이요,

조선 건국의 공도 으뜸이라.'


1910년 나라 망하면서 폭동 일어날까 없애지는 못하고

창덕궁 정문에서 동대문 쪽으로 도로가 뚫린.,종묘(宗廟). 

'창덕궁~종묘' 길이 끊겨 종묘와 창경궁을 잇는 육교를 가설.

 

원서동 이름도 창경원의 서쪽

또는 비원의 서쪽이라 하기도 하고. 

1995년 종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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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구 봉원동 안산(鞍山)자락에 위치한 봉원사(奉元寺)는

신라 진성여왕 3년에 도선선사가 세운 반야사(般若寺)에서 유래

889년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다 타버린 절을 지인이 중창하였고

영조 24년(1748년) 찬즙, 증암 두 대사가 현 위치로 절을 이전 중건.


이때 영조가 친필 편액을 내려

반야사가 봉원사(奉元寺)로 개명.


신촌 봉원사 


봉원사는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 박영효 등이

그들의 사승(師僧)인 이동인과 갑신정변을 모의한 진원지.

1950년 6.25 전쟁 당시 많은 유물과 가람 일부가 소실되었고

1966년 복원된 염불당은 마포 대원군 별장 아소정을 옮겨온 것.


봉원사 염불당으로 변한 마포 공덕리 아소정(我笑亭; 아소당)이 옮겨진 때는 1965년 아닌 1962년(?) 


유교 왕실의 건물이

불교 사찰의 건물로

쓰이고 있는.,염불당.

 

봉원사 영산재는 유네스코 세계무형 문화유산

영산재(靈山齋)는 불교의식으로.,사십구(49)재.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하는.,천도재(薦度齋)이다.


봉원사에서는 매년 현충일을 맞이하여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천도재를 봉행.


세계무형문화유산 영산재(봉원사) 

서울 봉원사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중요무형문화재 50호 영산재 보존회 거제 장승포 수륙대재 

세계무형문화유산 영산재(봉원사) 

봉원사 영산재(奉元寺靈山齋)엄숙하게 개최해 유네스코무형문화재 2009년 지정, 송암 이원택

세계무형문화유산 영산재(봉원사) 

봉원사 영산재(奉元寺靈山齋)엄숙하게 개최해 유네스코무형문화재 2009년 지정, 송암 이원택 

매년 현충일 신촌봉원사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재 영산재 봉행 

세계무형문화유산 영산재(봉원사) 

세계무형문화유산 영산재(봉원사) 

서울 봉원사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중요무형문화재 50호 영산재 보존회 거제 장승포 수륙대재 

서울 봉원사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중요무형문화재 50호 영산재 보존회 거제 장승포 수륙대재 

서울 봉원사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중요무형문화재 50호 영산재 보존회 거제 장승포 수륙대재 

서울 봉원사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중요무형문화재 50호 영산재 보존회 거제 장승포 수륙대재 

서울 봉원사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중요무형문화재 50호 영산재 보존회 거제 장승포 수륙대재 

영산재 중요무형문화재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영산재 [ Yeongsanjae , 靈山齋 ] 

봉원사 영산재 

영산재를 참가 하면서 / 태고종 봉원사 6월6일 

서울 서대문구 한국불교 태고종 총 본산 봉원사(영산재)-8 

영산재 중요무형문화재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영산재 [ Yeongsanjae , 靈山齋 ] 

봉원사 영산재 2010년 6월6일 행사, 무형문화재 50호,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등재

무형문화재.유네스코 등재된 영산재 시연 촬영 

영산재 중요무형문화재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영산재 [ Yeongsanjae , 靈山齋 ] 

신촌 봉원사 영산재 식당작법 

한국불교 태고종 봉원사 영산재 보존회, 현충일 맞아 ‘영산재’ 봉행 

영산재를 참가 하면서 / 태고종 봉원사 6월6일 

한국불교 태고종 봉원사 영산재 보존회, 독도서 ‘위령대재’ 봉행 

쇳소리에 담긴, 깨달음에 염원 영산재 바라춤 

영산재를 참가 하면서 / 태고종 봉원사 6월6일 

영산재를 참가 하면서 / 태고종 봉원사 6월6일 

영산재를 참가 하면서 / 태고종 봉원사 6월6일 

영산재를 참가 하면서 / 태고종 봉원사 6월6일 

영산재를 참가 하면서 / 태고종 봉원사 6월6일 

영산재를 참가 하면서 / 태고종 봉원사 6월6일 


 2009. 9월 30일 아랍 아부다비에서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

1973년 11월 5일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 보존을 위해 봉원사에서 만든 영산재보존회.

'괘불 앞 참배의식' 괘불이운(掛佛移運)으로 부터 시작.

괘불은 정면 한가운데 걸고 그 앞에 불단을 세운 다음에

영혼이 생전에 지은 죄를 씻어내는 《관욕 의식》을 진행.


이 의식이 끝나면, 부처에게 《공양》을 드리고,

이후 구체적인 소원을 아뢰는《축원문》을 낭독.


보통 매년 6월의 첫째주에

연간 정기 공연이 시작되며,

2010년 6월 6일에 정기 공연.


49재는 사람이 죽은지 49일째 되는 날.,제사.

영혼이 불교에 의지해 극락왕생하게 하는 의식.

석가가 영취산에서 행한 설법인 영산회상을 재현.


불교 천도의례 중 대표적인 제사로 일명 ‘영산작법’

'조선불교통사'에 의하면 조선 전기에 이미 행해졌다.


영산재는 제단이 만들어지는 곳을 상징해

야외에 영산회상도를 내다 거는 것으로 시작.


신앙의 대상을 절 밖에서 모셔오는 행렬의식을 하는데,

이때 부처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해 해금, 북, 장구, 거문고

등의 각종 악기가 연주되고, 바라춤·나비춤·법고춤 등을 춘다.


신앙의 대상을 옮긴 후 여러 예를 갖추어

소망을 기원하며 영혼에게 제사를 지낸다.


마지막으로 신앙의 대상을 돌려보내는 봉송의례

제단이 세워진 곳에서 대중이 열을 지어 돌며 독경.


예전에는 사흘 낮과 밤에 걸쳐 이루어졌으나

근래에는 규모가 축소되어 하루동안 이뤄진다.


영산재는 전통문화의 하나로,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 모두

부처님의 참진리를 깨달아 번뇌와

괴로움에서 벗어날 경지에 이르게 하고

공연이 아니고, 대중이 참여하는 불교의식.


의식을 진행하며 범패(梵唄), 화청(和唱) 등 연주,

바라춤, 나비춤, 법고춤을 추는데 이러한 요소들은

우리 전통민속음악과 민속무용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산재는 주로 태고종에서 전해 내려오며

매년 서울 봉원사에서 영산재를 거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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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마갈타국 영취산(靈鷲山에서 석가모니가

법화경을 설하자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석가모니는 꽃을 하나 집어들어 사람들에게 보여줬다.


성스러운 소리들이 울려퍼지고

영취산 대중은 춤추기 시작했다.

오늘날 '영산회상'이라 불리는 장면.

2500년 시간과 5000km 공간을 넘어

영취산 설법이 열리는.,봉원사 영산재.

봉원사 대웅전 앞마당에 펼쳐진 '법석'.

불법을 펴는 자리가 야단법석 펼쳐지고

그 위에는 대형 영산회상도가 내걸렸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긴 제례

영산재는 석가모니의 설법을 재현한다는 의미.

영혼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의식이기도 하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어 이승을 떠나면 곧바로

다음 세상으로 가지 못하고 49일을 떠돈다는데,

이 마지막 날에 지내는 '49제'를 올리는 방식 중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한 제례의식이 바로 영산재.

제단 정면에 내걸린 영산회상도 양쪽에는

오방색 화려한 꽃들이 꽃비 대신 자리했다.


불자들은 끊임없이 제단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으고 무언가를 기원했다.


1년에 한번 현충일에 정기적으로 열리는 영산재는

문화재청의 후원을 받아 치르는 국가무형문화재다.

올해 28회째. 누군가의 49제는 아니나 영산재를 찾은

시민들은 누군가의 극락행을 기원하는 것처럼 경건했다.

 
의식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신앙의 대상을 절 밖에서 모셔오는 의식

'시련'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소리와 음악,

그리고 춤이 어우러지는 영산재가 시작됐다.


범패(梵唄) 


가곡·판소리와 함께 3대 성악.,'범패'

노승의 목소리로 울려퍼지자 악사들이

태징을 치고 태평소를 불며 분위기를 연출.

범패는 '인도(梵)의 소리(唄)'다.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는 노래로

불교 이전인 브라만교에서 비롯됐다.


범패 


우리나라에는 830년 당나라에서 돌아온

진감선사가 제자들에게 범패를 가르친 기록


'삼국유사' 권5 월명사도솔가조(月明師兜率歌條)

760년(경덕왕 19) 범패를 언급하는 내용이 나온다.

현재, 유일한 영산재 인간문화재

구해스님(74) 소리에 맞춰 작법(作法).

작법이란 불교 의식에 사용되는 무용으로,

영산재에서는 나비춤, 바라춤, 법고춤 등이다.


몸짓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외적인 춤이라기보다는

 심적 상태를 표현하는 내적인 춤에 가까운 만큼 정적.

일반적으로 불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불가의 춤이라 하면 '승무'를 떠올리기 마련.

승무는 불가의 전통 춤이 아닌, 1930년대 민속춤.


범패(梵唄) 


우리 민속춤의 정수를 담고 있는 춤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 춤의 고운 자태의 기원에도

'영산재'는 빠지지 않고 언급되며 거대한 괘불,

꽃 장식 등 시각적 예술부터 범패에 담긴 문학과

악기 소리가 만들어내는 음악, 그리고 승려들이

선보이는 이승을 초월한 듯한 무용까지 영산재는

다른 민속문화재가 따라오기 힘든 종합문화예술.


그런 가치를 인정해 2009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


범패(梵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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