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필자는 영등포에 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영중 국민학교 시절에 놀이터가 한강 샛강 여의도 밤섬.
겨울에는 샛강에서 노량진 한강다리까지 썰매를 타고 왕복.
그때 그시절 여의도는 친구들과 샛강을 헤엄쳐 건너 땅콩서리 하던 곳.
땅콩철에는 신발주머니 가득 서리한 땅콩을 목에 걸고.,샛강을 건넜다.
그러다가 땅콩밭 주인에게 붙잡히면, 발가 벗기우고 혼난 적도 여러 차례.
그때 그 시절에 여름방학이 끝나고 나면
같은 반에 친구 한 두명은 익사할 정도였다.
샛강이나 한강에서 헤엄치다가 떠내려 간 때문.
밤섬에서 마포까지 한강은 강폭이 넓지는 않지만
물살이 빠르고 깊어 헤엄쳐 왕래하기 쉽지 않았다.
마포로 겨우 건넜어도 밤섬으로 돌아오기 힘든.,한강.
마포에서 한강 하류로 떠내려가면
한강의 강폭이 바다처럼 넓어지는 탓.
장마철에 한강물이 뚝을 넘칠듯 말듯 하면
밤섬에 사는 급우는 며칠씩 결석 하기도 일쑤.
영등포 저지대 지역은 무릎까지 침수되기도 일쑤.
장마철마다 뚝이 터질까 봐
영등포 사람들은 걱정이 태산.
갈수기(渴水期)엔 영등포에서 밤섬까지 길이 열렸다.
그 무렵에 밤섬은 봄가을이면 으례 소풍가는 곳이었다.
봄가을엔 영등포에서 모래섬 여의도 지나 걸어다닌 밤섬.
영등포에서 샛강을 건널때.,다리 하나,
여의섬에서 밤섬에 들어갈때.,다리 하나.
밤섬으로 소풍가는 길은 경치가 그림같았다.
그 무렵에도 밤섬은 배 만드는 목수들이 살던 곳이었다.
밤섬 주민들은 집도 잘지어 서울 장안에서는 알아주던 목수들.
1973년엔 매일 새벽 6~7명 친구들과 여의도 뚝을 한바퀴씩 뛰었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던 영등포 친구들은
일찌기 결혼해서 포목점 등 장사하며 독립했다.
어릴 때부터 한강에서 함께 벗고 놀던 부랄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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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때 군용비행장으로 쓰이며 공사가 시작된.,여의도.
1968년 2월 10일, 여의섬 개발 당시 그 옆에 있던 밤섬이 없어졌다.
밤섬을 그대로 두면 여의도와 영등포가 물에 잠길 것 같아 폭파한 것.
밤섬을 폭파해 부순 흙을 모두 여의도 뚝에 깔았으니,
밤섬은 사라졌지만 결국은 여의섬과 한 몸이 된 셈이다.
지금도 우리가 밟고다니는 '여의도 뚝' 윤중제가 밤섬의 흙.
모래, 자갈이 오랜 세월 굳어
바위도 제법 많이 있었던.,밤섬.
'여의도 뚝' 공사 골재로 씌여졌다.
수백년간 배짓는 사람들의 삶터.,밤섬.
'여의도를 애워싼 뚝' 윤중제가 되었고
여의도는 한강에 둥둥 떠있는 큰배 모양.
장마철에 뚝이 터지면, 한강 속에 가라안기 십상,
그리하여, 윤중재 밖 강변에 넓은 시민공원을 조성.
여의도에는 고층빌딩 숲도 들어설 수 있게 된 것이다.
밤섬은 서강(西江)에 가까웠던 탓으로
정조 13년(1789년)에 발간된 호구총수에
'한성부 서강방 율도계'란 이름으로 나와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밤섬은
여의도와 함께 고양군 용강면 여율리.
지금은 한국의 맨하탄으로 불리우는
정치경제의 중심이 된 여의도로 변모.
'너도 섬이다.' '너나 가져라' 했다던 섬,'
그래서 "여의섬"이라고 불리웠던.,모래섬.
옛 역사를 돌이켜보면 세상 참 모를 일이다.
지금은 율도계에 속한 여의섬이 주인이 되었고
주인이었던 밤섬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때문이다.
폭파된 후 흔적없이 사라졌다가 저절로 재생된 밤섬.
참매.
밤섬(율도)는 수십리 모래로 되어 있으며
거주민들은 부유하고 매우 번창한 편이었다.
경치가 아름다워 마포팔경 '율도명사(栗島明沙)'
밤섬(栗島)은 조선 초 뽕나무를 심어 잠업이 성행한 지역
도성에 뽕잎 값이 비쌌을 때 밤섬에서 뽕을 대기도 하였다.
밤섬에 관한 풍습은 명종실록 명종 11년 4월 조(條)에 기록.
밤섬 주민들의 생활방식이 문란한 것으로 비쳐져있는데,
이는 외부와 교통이 제한되어 남의 이목을 덜 의식한 탓.
고려 말, 귀양지 밤섬은 도선(渡船)장으로서
(여의도)백사장을 건너 인천으로 가는 간로(間路).
밤섬 옛주민들은 이곳 역사가 약 600년이었다고 한다.
1968년 2월 10일, 여의도 윤중제를 쌓기 위해
필요한 골재 채취를 목적으로 폭파되었던 밤섬.
매년 옛주민들이 이곳에서 '마포나루 용궁제' 개최.
이곳에서 거주하던 옛주민들은 마포로.,강제 이주.
마포 밤섬 옛주민들이 고향을 그리며 “마포밤섬사랑”
http://cafe.daum.net/bamsumsarang 카페도 운영.
오늘날 한강에는 유람선들도 떠다니고
홍콩에서 한강까지 외국 요트들도.,왕래.
수륙 양용 보트.
보트 피풀.
조선시대에는 동남아 저지대 국가들로부터
조선에 보트 피풀들이 망명한 기록들이 있다.
대표적 사례가 베트남 왕족 이용상(화산 이씨).
.
일제 강점기.,창경원 보트.
1950/60년대 청계천 풍경.
1960/70년대 한강 보트
구한 말
조선시대
국내 1위, 세계 7위였던 국적선사 한진해운의 몰락으로
2017년 국내 해운업계가 그 어느때보다 큰 위기를 맞게 됐다.
2월 4일 해운업계에 따르면, 한국 해운업은 3개월 만에 반 토막.
국내 유일 원양선사 현대상선이 장기침체로 6년 연속적자.
2016년 매출 4조5848억원, 영업손실 8334억원의 실적이다.
전세계 1위 해운업체 머스크에서., 현대상선 인수 '러브 콜.'
'대한민국 국적 해운업은., 이대로 무너질 것인가?'
조선업 또한 혹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경제불황 속에 구조 조정까지 겹쳐 조선업에서만
2만7천개 일자리가 없어지고 체불임금도 쌓이고 있다.
정유년 새해 들어서도 꽁꽁 얼어붙은 조선업계의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더니 2월 2일 한진해운이 파산신청.
한때 부동의 1위 한국 조선업이 중국에 그 자리를 내어주더니
일본에게마저 2위를 내어주고 생사를 걱정하는 처지가 되었다.
광흥창은 '고려 말~ 조선'시대
관리의 녹봉을 관장하던.,관청
고려 충렬왕 때 설치되어 조선시대까지 존속.
조선시대에는 전국 각지의 조선(漕船)이 집결하는
한양 서강연안 와우산(臥牛山) 기슭에 위치한 창고이다.
조운선.
관원으로 수(守)·주부(主簿)·봉사(奉事)·부봉사(副奉事)를
각 1인씩 두었으나 후에 영(令)·직장(直長) 각 1인씩을 증원.
창고 업무를 담당했는데 전라·충청도 세곡미가 대부분이었다.
녹봉은 매년 1월·4월·7월·10월 4회 지급
1701년(숙종 28)부터는 매월 지급하였다.
1721년(경종 1)에 개정된 월봉이 조선 말기까지 시행
정1품은 쌀 2섬8말과 콩 1섬5말부터 종9품은 쌀 10말과
콩 5말까지 차등을 두었으며, 문관은 이조, 무관은 병조에서
발급한 지급의뢰서를 가지고 관원이 직접 창고에서 받아갔다.
광흥창에서 매달 녹봉이 지급되면서
18세기에 경강상인 상권이 형성된 마포.
전국 각지의 조선(漕船)이 집결하는.,마포나루.
1890년 마포나루.
한양을 동서로 관통하여 서해로 이어지는.,한강.
한강 북쪽에 위치한 5 포구.,한수오강(漢水五江)
도성 상업기지.,뚝섬강 노량강 용산강 마포강 서강.
조선 후기에 한강에 퇴적물이 쌓이면서
조운선이 한강 하류에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갈 수 없게 되면서 한강은 윗강 아랫강.
1880년 노량진 나루터.
윗강에는 충청도 강원도 쌀과 목재 등이 모이고
아랫강에는 삼남지방 세곡과 해산물 등이 모였다.
그러면서, 차츰 집하량이 늘자 3강 5강 8강으로 발전.
이때 강은 배가 닻을 내리는 포구를 의미.
서강은 세곡과 선운으로 주로 업을 삼았고
망원 합정에서는 빙어선(氷漁船)으로.,주업.
.
노량강에서는 수어선(秀漁船),
마포강에서는 청석어선(靑石漁船)
각자 남의 업을 빼앗는 일이 없게 협약.
'도성 상업기지' 건운, 여객업 상인들이.,경강상인.
18세기 경강은 조선시대 세곡(稅穀)의 마지막 기착지.
세곡 30만석, 사대부 농장 소작료 20만석, 미곡상 40만석.
서강은 전라 서강 충청 지역과
경기, 경기 서북지역의 쌀을 하역.
(현재, 신정동 하중동 상수동 연안.)
신촌 부근 봉원사계곡에서 발원한
봉원천이 서강을 향해서 흐르는데
신정동 연안 쪽 서강과 만나는 곳이
옛 서강나루(서강진 : 西江津) 터였고
봉원천을 그당시 창천(滄川)이라 불렀다.
봉원천(奉元川) 또는 창천(滄川)의 지명은
'봉원사 또는 광흥창'의 지명과 관련이 깊다.
현재, 서울 복개 하천들 중 하나로 사라진 하천.
봉원천, 선통물천, 아현천, 만초천(욱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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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원사는 조선 개국 당시
하륜이 주창한 모악천도론
한양천도와 관련 깊은 사찰.
조선시대
태조 5년에
이성계 어진을
모신.,원당(願堂).
당시 모악(母岳)이 오늘날, 안산.
안산 자락에 위치한.,사찰 봉원사.
현재 봉원사는 1749년(영조25년) 신축.
그 이전까지 사찰 이름은 '반야사(般若寺)였고
현재, 연세대학교가 들어선 자리가.,반야사 옛터.
반야사는 봉원천계곡 아래 서강 물길 인근에 위치.
현재, 봉원사 중요한 유물로는 도선의 반야암 편액,
이광사(李匡師)의 대웅전 편액, 정도전의 명부전 편액,
김정희(金正喜)의 청련시경(靑蓮詩境)·산호벽루(珊瑚碧樓),
.
이완용의 지장대성위신력(地藏大聖威信力),
청나라 옹방강(翁方綱)의., 무량수각 편액
장승업(張承業)의 신선도 십폭병풍 등이 있다.
...................봉원사(奉元寺)......................
봉원사는 1392년 이색이 지은 보우의 비문을 본
태조 이성계가 그의 문도가 되길 자청했다 전하며
태조 어진을 모시는 진전이 있어 조선시대에도 번성.
또한 독서당이 있어 조선 시대 선비들이
과거 공부를 위해 용맹정진하는 장소였다.
봉원사는 889년(진성여왕 3)에 국사 도선(道詵)이
부유한 신도 집을 희사받아 창건한.,반야사(般若寺).
고려 공민왕 때에 우(普愚)의 중건으로 대사찰로 변모.
조선 개국 초기인 1396년(태조 5)에는
이 절에 왕의 초상화를 모신 원당(願堂)인
반야암을 지어 불교탄압 영향을 받지 않았다.
1749년(영조25년) 왕이 친필 현판을 내려
이때부터사찰의 이름을 '봉원사'라 하였다.
편액을 받은 후 새로 지은 절이라 하여.,"새절."
봉원사가 위치한 마을도 "새말(신촌 ; 新村)"
그 이전까지 사찰 이름은 반야사(般若寺)였다.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된 것을 지인(智仁)이 크게 중창.
1651년(효종 2) 법당과 동서에 있던 요사가 소실되었지만
극령(克齡)·휴암(休巖)·도암(道庵) 등이 다시 중건한.,반야사.
선조· 인조· 영조 때에는 반야암을 수호하라는 왕명이 있어
조정의 극진한 보호를 받았으며 1748년(영조 24)에는 왕이
하사한 부지로 찬즙(贊汁)·증암(增巖) 등이 현재 자리로 이건.
이듬해 영조는 봉원사 현판을 내려 이때부터 봉원사라 하였다
1788년(정조12년) 승려의 기강을 진작시키고
승풍을 규찰하는 8도승풍규정소가 설치되었다.
영조가 내린 현판은 6,25때 병화(兵火)로 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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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나루 앞 한강에 떠있는 밤섬은
18세기에는 조선 최대 조선소로 성장.
현재, 마포대교 아래 고립되어 있는.,밤섬.
2016년 5월 30일 특별고용지원업종으로 지정된.,조선업.
정부는 중견·중소 조선사 및 물량팀을 포함한 협력업체와
기자재 업체 등을 우선 지원대상으로 선정해 지원할 계획.
대규모 실업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업종에 대해 정부가 사전에 지원하는 제도.
한국은 1970년대 조선업을 시작.
세계 2위의 조선업 강국이 되었고,
중국에 1위를 내어주는 2012년까지
40년 이상 세계 1위 조선업 강국.,한국.
정부가 조선업을 특별고용지원업종으로 지정하면
사업주와 근로자에게 고용유지를 위한 휴업수당과
실업급여 연장지급, 체불임금 청산, 재취업훈련 지원
등 정부 예산을 투입하며 조선사들은 구조조정에 착수.
정부가 조선업을 특별고용지원업종으로 지정한 것은
산업·경제적인 영향이 크기 때문이며 조선업을 통해서
수십만 종사자 생계가 지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큰 탓.
조선업은 새롭게 도약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대표 제조업종
조선업의 구조조정이 이미 진행 중인 해운업이나
앞으로 진행해야 할 철강, 석유화학, 건설 등에 미치는
영향이 크므로 우리나라 산업의 재편과 국가 경쟁력을 좌우.
조선업 등 우리나라의 경제를 이끌어 온
산업의 구조 조정은 다소 늦은 감이 있다.
이미 수차례 경고등이 커졌고,
이를 애써 무시하며 지나왔던
관련 업계와 정부 책임이 크다.
분식회계와 각종 부정 의혹을 받고 있는
대우조선해양에 대한 구조 조정을 미뤄왔던
것 등이 지금과 같은 최악의 상황으로 이어졌다.
책임은 정부와 금융기관, 채권단, 업계 모두 져야 한다.
전 세계 제조업은 저성장의 늪에 빠져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시장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구조개편을 발 빠르게 한다.
중국 국영조선소인 중국선박중공업은
지난 5월 산하 조선소 6곳을 3곳으로 통폐합
고가 선박 제조로 방향을 틀었고 중국 5위 철강 업체인
바오산강철은 우한철강과 합병추진이 되면 세계 2위로 도약
일본 최대 철강사 신일철주금은 닛신제강과 합병해
덩치 키우기를 통한 국제 경쟁력 강화를 꾀하고 있다.
해운업 새판짜기 진행 중안 독일 하파그로이드는
중동 UASC를 합병해 세계 5위로 한 단계 올라섰고,
대형 해운사들은 해운동맹 재편을 통해 제 살길을 모색.
이렇게 전 세계 제조업체들이
어려운 시장 환경을 돌파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로 구조개편을 추진하고 있지만
우리는 내부 문제에 묶여 한 발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
현시점에서 더 미적이면
산업 전반의 경쟁력이 떨어진다.
이번 특별고용지원업종을 지정을 계기로
털어낼 것은 빠르게 털어 내고 합할 것은
합해, 국제 경쟁력을 확대해야 할 것이다.
지금부터 꼭 42년 전인 1974년 6월 28일
울산 현대조선소(현대중공업) 전용 부두.
그리스 리바노스사(社)로부터 수주한 26만 t급
대형 원유운반선(VLCC) 2척의 명명식이 열렸다.
오늘의 울산 조선업의 날이 있게 한 리바노스사
(현 선엔터프라이즈사) 사주 리바노스 명예회장(82)
최근 현대중공업을 찾았던 그는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1971년 영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도면과 울산
미포만 사진, 500원권 거북선 그림 지폐를 들고 만난 인물
"조선시대 1592년(선조 25)~1598년 임진왜란 때 거북선이
인류 역사 상 최초로 만든 잠수함으로서 공인 받고 있으며
거북선은 세계 역사 상 성능이 가장 우수한 전선." - 정주영 -
"우리나라는 영국보다 300년 앞서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소.
400년전 수백척 배로 처들어 온 일본군을 이 것으로 막아냈소.
쇄국정책으로 산업화가 늦어졌을뿐 잠재력은 그대로 남아있소."
"조선소를 세울 계획인데
돈 좀 빌려 주시오." - 정주영 -
그리고 모두들 불가능이라고 했던
세계 최고의 조선소를 만든.,정주영.
그가 난관 앞에서 입에 달고 다녔던 말.
그리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이들에게
그가 했던 말이 있다." 이봐! 해보기나 했어?"
"길은 찾으면 열리고
길을 찾아봐도 없으면,
길을 새로이 만들면 된다. "
리바노스 회장은 정 명예회장의 손자인
정기선 현대중공업 전무와 만나서 덕담.
“40여 년 전 나를 찾아와
‘반드시 좋은 배를 만들어내겠다’던
故 정 명예회장의 모습을 또렷이 기억한다.
몇 년 뒤 최고의 선박을 만들어 그 약속을 지켰다.”
그는 최근 한국 조선업계의 위기에 대해 언급.
“이 고비를 넘기면 반드시 좋은 날이 찾아올 것”
.........정주영(1915. 11. 25 ~ 2001 3. 21).......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며 현대그룹의 창업주이며
한국을 대표하는 자수성가한 기업인 중의 No 1.
1998년 6월 16일 판문점을 통해 통일소라고 불린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넘는 이벤트를 연출.
세계 언론이 주목한 그의 최종학력은 소학교 졸업.
가난해 중학교에 진학 못하고 아버지 농사를 돕다가
가난에서 벗어나려 소한마리 판 돈으로 고향을 떠나
원산 고원 철도 공사판에서 흙을 날랐는데 첫 번째 가출.
4번째 가출은 1933년으로 19살에 인천에서 부두하역과
막노동을 하다가 경성으로 상경하여 이듬해 복흥상회라는
쌀가게 배달원으로 취직해 3년이 지나 월급이 쌀 20가마였다.
1940년대 자동차 정비회사 아도 서비스(Art Service)를
인수하여 운영하였고 한때 홀동광산을 운영하기도 했다.
1946년 4월에 현대자동차공업사, 1947년 현대토건사를 설립.
현대그룹의 모체를 일으켜 지속적으로 성장해 성공을 거두었다.
1995년에 조사한 세계 부자 순위에서 9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1998년 이후 김대중 정부를 도와 대북사업 추진의 한 축을 담당.
정주영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영웅시대》가 제작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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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현대중공업에 가장 필요한 자세가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故 정주영 회장의
경영철학이라는 것을 정 전무에게 에둘러 말한듯 하다.
경강상인(京江商人)
조선 후기에 경강 지역을 근거로 하여 대동미.
운수업 및 각종 상업활동에 종사했던 상인집단을
"경강상인(京江商人)" 또는 "강상(江商)"이라고 불렀다.
한강을 끼고 경기·충청 일대에서 활약한.,한양 최대 상인집단.
18세기에 바닷길과 포구가 발달하면서
전국 각 지방에서 생산되는 물품이 한강을 통해
한양에 모였다가 다시 한강을 통해 전국으로 흩어졌다.
강원도에서 서해까지 흐르는 한강,
그 중에서도 한양을 돌아 광나루에서
양화진까지 흐르는 강을 경강이라 했는데,
이 경강 지역의 포구 상업 활동이 가장 활발했다.
경강에서도 '한강, 용산강, 서강'
3강이 경강상인의 상업활동 중심부.
남산 남쪽 일대에서 노량진까지를 한강,
노량진 서쪽에서 마포나루까지를 용산강,
마포나루 서쪽에서 양화나루까지를 서강.
경강상인은 자본을 공동으로 출자하여 배를 이용해
지방의 생산지에서 물건을 싸게 사서 서울 사람들에게
이문을 남기고 판매하는 등 적극 주도적으로 유통에 개입.
그동안 시전에서 어물을 떼다가 팔던 중간 도매상들도
강상대고와 직접 연결되어, 마포 경강변은 한양 최대시장.
어염전(생선 및 소금가게), 미전(쌀가게), 칠목전(옻칠가게),
잡물전(생필품가게), 간수전(두부를 만들때 쓰는 간수가게),
토정고초전(볏짚가게), 토정시목전(땔감가게) 등이 발달했다.
마포는 지리적인 여건이 유리했기에
18세기에 조선 경제 물류유통 중심지.
경강 주변에는 조선업도 발달해 밤섬에는
뛰어난 기술을 자랑하는 조선소들이 있었다.
이곳 경강 상인들은 해상 운송과 수로를 이용한 운송으로
전국 상권을 연결했던 조선 기술과 함께 항해술도 뛰어났다.
정조 재위때 경강상인들의 투자로 조선 최대 조선소로 급성장.
18세기 한양은 조선 최대의 '항구도시'였다.
조선을 찾는 외국인은 인천에서 배를 갈아타고
용산으로 들어와 한강 나루터가 여러 곳에서 발달.
특히, 마포 나루터에는 상선이 많이 드나들었다.
그 중에서도 새우젓과 젖갈을 파는 상인들이 많아
'마포새우젓장수'는 한양 도성에서도 명성을 떨쳤다.
오늘날, 마포구 합정동의 양화대교 북단에 있던
양화나루에선 경기· 충청· 전라· 경상도에서 올라오는
곡물을 주로 취급했고 경치가 아름다워 정자가 많았다.
조선 초 뱃길을 한양 도심까지 연결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1413년 조선 태종 때 좌의정 하륜은 마포~남대문 운하를 건의.
태종이 "운하 건설 후 토사가 쌓이면 이용이 어렵겠다" 하여 무산.
그당시에는 강원도 홍천의 구성포까지
한강을 따라 소금배가 오간 적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차츰 한강 수심이 낮아져
18세기 한강의 물길 중심은 마포나루가 된 것.
마포는 서해를 통해 유입되는 각종 물산이 모여드는 항구.
소금, 생선을 거래하는 경강상인(江商)들로 명성을 떨쳤다.
특히, 소금, 새우젖, 젖갈은 마포 경강상인들의 상징이었다.
염리(鹽里)’는 소금 파는 사람들이
많이 산다고 하여 유래한 동네 지명이며
염리동과 대흥동에는 큰 소금창고가 있었다.
서해로부터 들어오는 소금배는 마포항에서 부렸다.
새우젓에는 오지그릇, 독이 반드시 필요했다.
옹기마을 동막(東幕)도 마포항 근처에 있었다.
동막(東幕)은 오지 그릇, 독, 옹기 등을 굽는 곳.
밤섬에서 배를 짓는 배목수 솜씨는
국내외에서 알아주는 명장들이었다.
밤섬은 한때 1천여 주민들이 모여 살며
상인들이 제법 거대한 상권을 형성하였다.
1906년.,배 만들기.
서해에서 마포항을 지나 한강진까지
운항하는 배는 해운용 수하선(水下船).
수하선은 물에 잠기는 배 밑바닥이 뾰죽해
거센 파도나 밀물에도 잘 견디게 제작되었다.
서해에서 밀려드는 밀물은 한강진 부근까지 치고
들어가서 이 일대 한강에서는 수하선이 운행되었다.
도성 서쪽에 마포항이 있다면
도성 동쪽에서는 뚝섬이 제 몫.
한강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면서
뚝섬 지역을 감싸고 돌면서 지나간다.
중랑천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지나가면서
두뭇개 부근까지 역시 뚝섬을 감돌고 있다.
"그 모양이 마치 섬처럼 생겼다."고 하여.,뚝섬.
뗏목으로 실려오는 각종 목재류는
뚝섬과 두뭇개 일대에 널려 있었다.
뚝섬은 땔감과 미나리 등 채소가 유명.
미나리 장사꾼은 뚝섬 상인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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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나루는 마포구 마포동 한강 안.,나루터.
마포나루의 강 건너편 여의도는 백사장이었다.
이 백사장을 지나 시흥으로 가는 길이 연결되었다.
조선시대 마포는 용산강 하류에 있는 포구로서,
서울 남서쪽 운수교통량이 많은 5강 중 하나였으며
삼남지방의 곡식과 새우젓 등 젓갈류의 집산으로 유명.
또한, 이곳은 각지에 연결되어 있는 동막과 더불어
번성하였으나 육로 교통의 발달로 차츰 쇠퇴하였다.
이 부근에는 소금배가 자주 왕래하여
이를 매매하는 사람들이 집단거주하는
염리동이 생겨났으며 용강동 일대에는
옹리가 있어 젓갈류와 소금 등의 보관에
필요한 옹기를 구워 독막, 동막으로 불렸다.
염리동은.,서강대학교 앞 일대이며
용강동은., 마포음식 문화거리 일대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서강대학교 캠퍼스.
마포나루는 마포대교의 건설로 기능이 상실되었다.
동국여지비고에는 마포에서 도성 서쪽 15리 지점에 있는
서강까지를 물이 잔잔한 호수 같다고 하여 서호라고 하였다.
서호는 마호,삼호라고도 하였고
삼호는 ‘麻’자의 우리말 ‘삼’의 뜻이지만,
용산강과 양화진을 함께 "삼호" or "삼개나루".
그러다 보니 경강을 오가는 배가 많아져서
그 수가 작은 배를 포함해 2000척이 넘었다.
또한 배의 규모도 점점 커져서 쌀 1000석을
실을 수 있는 큰배들도 무려 120여 척 되었다.
이렇듯 해상 교통이 발달함에 따라
사고 파는 물건이 많아지고 장사하는
사람들도 8도에서 많이 모여들었기에
18세기 한양의 경강 지역은 그전에 비해
갑작스럽게 상업망이 커지게 되었던 것이다.
한강을 중심으로 한양 상업 도시로 성장하고,
점차 그 범위가 확대되면서 한양 주변에는 상품을
교환할 수 있는 새로운 장소가 차츰 생기기 시작했다.
삼남(충청, 경상, 전라) 지역
영동 지역으로 가는 길목 송파장
동북 지역으로 가는 양주의 누원점,
포천 송우점이 새로 생긴 물품 교환 장소.
그중에서도 한강의 상, 하류로 통하는 2개의 수로와
동, 남부 지방으로 가는 육로가 만나는 교통요지 송파는
경강상인들이 가장 주목할 만한 물류 유통의 거점이었다.
송파장 상인들은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놀이판을 벌였는데,그것이 바로 "송파 산대놀이".
한양 근교에 있는 또 다른 유통 거점 양주 누원점도
손님을 끌어모으기 위해 "양주 별산대놀이"를 벌였다.
상업의 발전은 그동안 조상 대대로 자기 땅을 떠나지 않고
살아온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 왔다.
시장에 나가면 신기한 것을 구경하며 이런저런 소식을 들었다.
18세기에는 양반도 장에 나가 흥정할 만큼 상거래 풍속이 달라졌다.
한양의 시전은 조선 왕조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국가가 지정해서 만들어 준 시장으로,
한양 도성 안에서의 상거래는 조선 초기부터
한성 내 종로 시전 상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시전에는 특별한 권리와 의무가 있었는데
나라에 물품을 바치는 의무와 함께 한양에서는
시전 상인이 아니면 상거래를 할 수 없는 특권을 가졌다.
한양에서 거래되는 모든 물건은
시전에서 한꺼번에 구입한 후 다시
시전을 통해 소매나 도매로 유통되었다.
이를 어길 경우에는 난전이라 하여 엄격하게 금지했다.
이것이 바로 시전이 난전을 규제하는 "금난전권"이었다.
한양의 경강 지역이나 송파장도 난전이라 하여 규제 대상.
그러나 예전의 시전만으로는
한양 사람들의 수요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만큼 거래 증가.
농산물의 거래량이 증가하면서
장터가 1000개로 늘어나게 되었고,
대동법 시행과 함께 땅이 없는 사람들도
한양에서 품을 팔아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한양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했기에 시전이 늘어난
한양 인구와 거래량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난전 상인,
즉, 자유 상인들은 시전 상인들을 제치고 직접 물건을 사다 파는
새로운 유통 체계를 만들면서 경강상인들은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다.
이렇듯 자유 상인의 힘이 커지자,
정조는 영조 대부터 수십 년 동안
논란이 되어 온 금난전권을 폐지했다.
결국 조정도 새롭게 성장한
자유 상인들이 가진 힘을 인정.
"가는 날이 장날이다.", "볼 장 다 봤다.",
"읍에서 매 맞고 장거리에서 눈 흘긴다",
"도떼기 시장" 상거래 말들이 이때 생겼다.
그중 요즘에도 자주 쓰는 말인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디 있나"
에누리란 부르는 값에서
흥정해 깎는다는 뜻이 아니라
상인이 원가에 더 붙인 값을 말한다.
즉, 시장을 돌아다니며 손님을 끌어들이고 흥정을 붙이는 여리꾼과,
점포 주인이 원래의 가격에 얼마씩 더 붙여 물건을 파는 것을 말한다.
원래 값이 17냥인 모시를 21냥에 팔면 3냥을 점포 주인이,
1냥을 흥정을 붙인 여리꾼이 에누리를 붙여 판 셈인 것이다.
조선 중기, 학자 이지함은
마포나루에서 이루어지는
경강상인들의 실상을 보며
조선의 미래를 예측하였다.
즉, 한강변의 활력은 상업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를 이끌어나가는 상인들의 힘에 주목한 것이다.
당시 이지함은 학자였지만 직접 상업에 참여함으로써,
조선이 천하게 여긴 상업이 가치있는 일임을 주장하고 설파.
- 이지함 선생.,상소문 -
“굶주린 백성을 구하는데 있어서는
왕실의 재산도 아깝지 않은 법이온데,
어찌하여 물속에 물고기를 못 잡게 하며
바다물로 소금 만드는 일을 못하게 합니까?
설령 그것이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하는 일이라도 못하게 해서는 안되며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고기를 잡아야 하고,
바다물로 소금을 구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조정은 그 일을 허락함으로써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이익을
거둘 수 있으며 그렇게만 된다면
한 섬의 곡식도 낭비하지 아니하고
누구 한사람도 번거롭게 하지 않으면서
조선8도의 만백성들을 살릴 수 있습니다.”
![[제12회]기인(奇人), 개혁을 꿈꾸다.- 토정 이지함 -](https://img1.daumcdn.net/relay/cafe/R400x0/?fname=http%3A%2F%2Fimg.kbs.co.kr%2Fcms%2FICSFiles%2Fartimage%2F2007%2F09%2F04%2Fc_1ts_hkuk01%2Fa0908.jpg)
소금은 조선시대 내내 귀한 대접을 받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17세기 이후에는
그 가치가 더욱 높아져 ‘화폐’ 처럼 취급될 정도였다.
당시 소금과 관련된 일을 하던 상인들을
"소금선상" 이라 불렀는데, 이들은 평안도나
황해도 등지에서 소금을 사서 경강으로 날랐다.
그들은 경강에 설치된 염전(소금가게)
마포어염에 일정량의 소금을 바치고
나머지는 자유롭게 판매했다.
그당시 소금은 상당한 고가품으로
마포나루 상인들의 전략적인 상품이었다.
소금은 콩, 팥, 쌀, 잡곡, 담배 등과 물물교환.
마포 소금은 경강상인들에 의해 전국으로 유통.
“용산에 거주하는 경강상인 한금과 구가금 등이
소금을 구입하기 위해 평안도 지방으로 가던 중
황해도 장산곳에서 태풍을 만나 중국까지 표류.
이들은 모두 신분이 노비였다.” - 『비변사등록』-
- 60책, 숙종36년(1710) 9월초 6일 -
마포나루에서 어물전을 하던.,경강상인 오세만
상인 중 최고의 장사 솜씨를 뽐내던 사람이었다.
오세만은 마포나루에서 어물전을 운영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짠돌이 곰보, 오 객주’라 불렀다.
항상 비린내를 풍기고 다녔지만,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이해하는 것은 웬만한 선비들 못지 않았다.
장사 솜씨는 경강상인 중 최고였고 자신의 외모도
사업적으로 활용할 줄 아는 그는 타고난 사업가였다.
그러한 곰보 객주 오세만에게 오랜 숙원이 하나 있었다.
오세만은 시전 상인의 횡포에 맞서서
경강상인 조직을 만드는 일을 꿈꿨는데,
왜냐하면 같은 상인들끼리 불평등한 조건에서
장사하며 서로 차별하는 일들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마포나루가 자유로운 난전으로써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간파한 오세만은
마포상인들을 설득하여, 조직을 꾸리기 시작.
“이보게, 동석이. 더는 이렇게 못살겠네.
우리끼리 힘을 뭉쳐 살 방도를 찾아야겠어.
시전상인들이 저희들만 살겠다고 우리더러
장사를 하라 마라 하니, 어디 하소연도 못 하고"
"정말 답답하네그려.시전상인들이
생선 납품 양을 마음대로 조절하고
그 시기도 막 바꾸는 바람에 그동안
썩혀버린 생선이., 기와집 너덧 채 값."
"게다가 납품하고 남은 물건이 아무리 많아도
다른 데에 팔 수 없도록 하니, 이게 말이 되는가"
"그동안 그러려니 하고 참았네만,
이제는 더 그냥 있을 수만은 없네.”
그렇게 모인 강경상인들이 오세만, 이동석, 차천재,
임번, 이세흥, 이차만, 강세주 등 모두 일곱이었다.
이들이 똘똘 뭉치니 시전에 대항할 자본도 충분했다.
이들은 지금까지의 자본력을 앞세워 시전에 대항하는 한편,
그동안 알아둔 관리들에게 자신들의 입장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오세만 등이 임금의 신뢰를 얻을 기회도 생겼던 것.
함께 세력을 규합하여
대신들에게 자신의 뜻을 알리고,
임금의 신뢰를 쌓는 일을 시도하였다.
정조가 아버지 무덤이 있는 수원 헌릉원을 오갈 때
배다리를 놓도록 하였는데, 경강상인의 배들이 이용.
이를 계기로 정조는 세곡운송의 독점권을 허락하였고,
경강상인 조직은 더욱 활발하게 상업 활동을 벌려나갔다.
원래, 그당시 모든 물품의 생산자나
지방에서부터 물품을 운반해 온 자가
한양에서 그 물품을 판매하고자 할 때에는
관아에서 인가된 시전에 가서만 팔 수 있었다.
다른 데서는 팔 수 없었으며 다른데 가서 처분하면
난전(亂廛)이라 하여 처벌한.,금난전권(禁難廛權) 행사.
이런 금난전권을 폐지한 정조15년(1791) 신해통공(辛亥通共).
그후 도성안 육의전 상인들의 특권이 없어지자
그들의 활동은 점차 약화되어 갔고 이에 비해서
오강(五江) 상인을 비롯한 강상들의 활동이 활성화.
경강은 한강 가운데에서도
한성부가 주관하는 광진(廣津)에서
양화진까지 한양 남부를 끼고 흐르는 부분.
용산· 마포· 뚝섬· 두모포 등지가
경강상인의 근거지로서 상업기지.
경강에는 조선 전기부터 경강의 나루터에서
화물을 건네주고 고기잡이· 행상을 한 선인(船人)들
이들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시기가 바로 조선 후기였다.
이들의 항해술과 선박제조 기술 발전,
자본 축적 등이 이들의 발전을 뒷받침.
자본 축적을 하게 되는 계기는 국가 조세곡과
양반들의 소작료를 운반해주는 곡물운반업을
벌이면서부터였고 정부는 조운제도를 정비하여
조세로 거두어들인 곡물을 서울까지 이들이 운반.
경강상인들은 처음에는 강제적으로 동원되었으나
나중에는 세곡운반이 생업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
이들의 항해술은 매우 뛰어나
위험한 항로로 손꼽히는 황해도
서해안 장산곶 일대, 충청도 서해안
안흥량 등 해역을 자유롭게 왕래하였다.
한편, 경강상인들이 배를 직접 만들기도 하였는데,
제조기술이 우수하여 운항능력과 적재능력이 높았다.
선박을 만들 때 정부의 사용기간이 지난 선박을 사서 개조.
또는 경강상인들이 직접 선재를 구입하여 제조하였다.
정조 때 한강 위에 주교(舟橋)를 설치하는데 배가 동원.
정조가 화성 현륭원에 행차 때마다, 한강에 배다리를 설치.
그 횟수가 10회를 넘었다.
정조 재위 9년에 경강(京江),
상인들 배를 각 창(倉)별로 분속.
정조14년 주교사(舟橋司)를 세워 그 배들을 이에 소속시켜
전라도 조세 운송권의 일부를 주면서 행차 때 배다리를 설치.
강상들은 주교에 적극 참여하면서 권력에 밀착할 계기를 마련.
정조가 선친인 장헌세자의 묘역인
현륭원 참배 때 이용하는 주교였다.
이들 경강상인들은 주교를 만드는데
자신들이 소유한 배를 아낌없이 제공.
정조가 봄가을로 화성을 내왕하는데
주교를 이용하고 그 행차가 끝나면 철수.
그일을 전담하는 관청이.,주교사(舟橋司).
주교사 당상관에 당대 최고의 실세들이 들어앉았다.
이들 경강상인들은 주교사를 통해 권력층에 쉽게 접근.
이들은 권력층과 결탁하여 새로운 상거래 수단을 개발.
..............주교사(舟橋司 ).................
조선 후기 임금이 거둥하여 강을 건널 때
경강에 배다리[舟橋]를 놓는 일과 호서·호남
양호의 조운(漕運) 등을 맡아보던 관청.,주교사.
임금이 매년 봄·가을 연2회 정기적으로 한강을 건너
온양온천과 산릉으로 가곤 했는데, 한강에 영구적인
교량을 가설할 기술· 능력· 자재들이 부족해 만든 관청.
왕의 산릉행사 때 각종 선박을 징수하고
이를 규모 있게 연결해 교량을 가설했는데,
이를 주교라 하며 연산군 이후부터 가끔 가설.
특히 정조가 온양온천과 선릉(宣陵)· 정릉(靖陵)·
장릉(章陵)으로 갈 때 노량진에, 헌릉·영릉(英陵)·
영릉(寧陵)으로 갈 때 광나루에 각각 주교를 놓았다.
훈국선과 경강의 사선(私船) 중
몸체가 큰 것 사이에 널빤지를
가로질러 다리를 만들게 했다.
1790년(정조 14)에 정조는 주교의 제도를 창설하여
전담기구로 주교사를 준천사(濬川司) 부설기관으로 설치
주교운영에 대한 세목(細目)으로 '주교지남'을 새로이 정했다.
주교사에 속한 관직은
도제조 3명, 제조 6명, 낭청 3명.
모두 준천사의 해당관직을 겸직했다.
유사당상(有司堂上:준천사 유사가 겸임) 1명을
전관(專官) 거행하게 하며, 임금이 강을 건널 때에는
유도장신(留都將臣) 중 주사대장(舟師大將) 1명을 차출.
영접하는 일을 맡게 했고, 1793년 주교사에 관한 내용을
44개의 절목(節目)을 모아 〈주교사절목〉을 편찬했다.
주교선은 교배선 38척, 좌우호위선 12척, 난간선 240척
1882년(고종 19)에 폐지되고 그 업무는 금위영이 담당.
........................................................................
정조 때는 경강상인들이 조선업에 동참,
노량진 배다리를 놓을 때 배를 제공하고
정부의 특혜를 받던 종로 시전상인을 누루고
전국의 상권을 장악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한다.
이렇게 마포 곰보 오 객주와 경강상인들이
보여준 단합된 모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도화동 상점가상인회’ ‘용강동 상가번영회’.
강상대고가 18세기 마포나루를 만들었다면,
21세기 마포나루는 두 상인회가 책임지고 있다.
과거 정신을 이어 오늘을 만들어가는 경강상인들
그들의 모습에서 미래 여명의 새벽을 발견하게 된다.
도화동은 복숭아나무가 많고 봄철이면
복사꽃이 피어 경치가 좋으므로 ‘복사골’
도화동은 조선 전기 한성부 성저십리에 속
도화동 산비탈의 복숭아꽃은 절경
쪽빛 한강물과 복숭아꽃이 어우러져
밤섬에서 바라보면 마치 무릉도원 같다.
현재, 삼성아파트와 우성아파트 일대.
.
도화동에는 크고 작은 고개가 많이 있었는데
조선시대 용산 새창으로 넘어가는 새창고개와
용산에서 마포로 넘어가는 용산고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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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란 이후 조선8도 각지에
사상(私商)이 일어나 상거래를 활발히 전개하였는데,
이들은 거래 무대와 지역에 따라 명칭을 각각 달리하였다.
개성상인은 송상(松商),
의주상인은 만상(灣商),
기타 행상이 부보상이다.
경강(京江) 연변에는 전국의 주요 산물이 조운을 통해 집적.
15세기 초부터 많은 상인이 집결해 하나의 경제권역을 형성했고,
그들의 주요 상업 활동은 정부의 세곡운반 & 양반층 소작료, 임운(賃運).
그러한 상업활동은 조선 전기에도 있었지만,
활기를 띠기 시작한 시기는 17세기 이후였다.
그 무렵 경강선(京江船)의 수와 규모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승정원일기에 보면 1702년(숙종 28)에 200∼1,000여 석까지
실을 수 있는 배가 300여 척, 1년에 받는 배싻의 가격은 1만석.
그러한 점들을 고려해 보면, 곡물 운반에 있어서
경강 상인이 차지하고 있던 비중과 그들이 가진
자본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경강 상인의 치부 수단에는 정당한 선임(船賃 : 배의 운임)
그에 못지 않게 곡물 운반과정에서 여러 가지 부정이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운반곡에 일정량의 물을 타서 곡물을 불려
그만한 양을 횡령하는 이른바 ‘화수(和水)’라는 것이 있었다.
또한, 운반곡 일부 또는 전부를 착복하는 ‘투식(偸食)’이라든가,
선박을 고의로 침몰시키는 ‘고패(故敗)’ 등도 자주 행해지던 부정.
그와 같은 각종 부정 행위는
결국 정부의 조세(租稅) 수입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게 하였다.
조정에서는 세곡 운반 방법의 개선책을 강구.
조운 제도의 재검토가 논의되어, 일부 제도를 실시
1789년(정조 13)의 주교사(舟橋司) 설치가 시책의 하나.
그들이 세곡 운반의 이권을
계속 차지할 수 있었던 요인.
정부에서 세곡 운반권을 일방적으로 박탈할 수 없을 만큼
상인으로서의 위치와 중앙 정부와의 관계가 확고했다는 점,
그들이 세곡 운반을 폐업할 경우
서울에 거주하는 지주들에게 소작료를
운반할 길이 끊어지게 된다는 점이 요인.
그 밖에도 조정에서 직접 조운 제도를 실시할 경우에,
조운선(漕運船)을 확보하기 어려웠다는 점도 지적된다.
.
아무튼 그들에 의한 곡물 운수업은 17, 18세기 무렵에 이르러
삼남 지방의 세곡 및 양반 계층의 소작료 운반의 대부분을 청부했고,
그들은 실질적으로 대규모 운수업자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밖에 자본 축적 수단으로
서울을 배경으로 하는 상업 활동
그들의 상업 활동 범위는 거의 전국적.
경강상인들의 상업활동 범위는
제주도 김만덕 객주까지 미쳤다.
.....................김만덕(金萬德).......................
1739년 영조 15년~1812년 순조 13년)은 여자 상인.
제주도에 대기근이 닥치자 육지에서 사온 쌀을 모두
진휼미로 기부하여 빈사상태의 제주도 백성들을 구제.
이 때문에 제주에서는 ‘의녀’(義女)로 불린다.
아버지인 김응열(金應悅)과 어머니 고씨(高氏)
김만석(金萬碩), 김만재(金萬才) 두 오빠가 있었다.
1790년(정조 14)부터 1794년(정조 18)까지 5년간
김만덕의 선행이 조정에 알려지자
그후 사람과 취급 물동량의 증가로 인해
숙소, 창고, 우마를 재울 마방(馬房)을 설치.
객주의 종류에는 물상객주(物商客主),
여상객주(旅商客主), 만상객주(灣商客主),
보상객주(褓商客主), 보행객주(步行客主) 등.
물상객주는 객주의 원래 유형으로 위탁매매, 숙박,
어음발행, 도매, 보관, 운반 등 상거래 업무를 담당.
따라서 일반적으로 객주라고 하면 물상객주를 말한다.
그외 객주는 취급하는 화물에 따라 청과객주,
수산물객주, 곡물객주, 약재객주, 직물객주 등.
객주는 매매주선, 각종 주선업무, 납세 등을 대행하고.
위탁판매에 따른 수수료와 인도 받은 물화를 매도, 매수
신용있는 객주가 발행한 어음은 원활한 상품유통의 밑거름.
경강상인이 취급한 상품은 미곡, 소금, 목재, 어물, 시탄 등
특히, 조선에서 가장 큰 미곡의 판매시장은 한양 일대 주민
상인들은 일단 지방에서 미곡을 구입하여 경강변 창고에 둔 뒤
한양의 쌀값이 오를 때를 맞추어 이를 출하하여 이윤을 얻었다.
조선후기로 갈수록 경강상인의 역할은 확대되어
세곡과 한양거주 지주의 소작료 운반도 담당하였다.
정부가 전국을 담당할 조운선을 완전히 확보하지 못했기에
관료와의 결탁이 세곡 운반 이권을 독점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들은 선박으로 미곡 1천석을 나를 수 있어서,
삼남지방의 세곡 및 양반지배층의 소작료 운반을
경강상인이 독점하게 되어 전국의 미곡을 장악했다.
정조 때 8도 상권을 장악힌 경강상인은
그들의 선박을 이용해 지방 생산지로 가서
상품을 구입하고 그것을 경강 연변으로 운반해,
시전 상인에게 매도하거나 직접 수요자에게 판매.
취급 상품은 곡물과 어염(魚鹽)·목재류· 얼음 등
특히, 미곡(米穀)은 그들의 주요 취급 물종이었다.
미곡으로 이익을 취하는 방법은 각 지방에서 운반해온
미곡을 경강에서 매점하여 서울의 쌀값을 조종하는 형태.
즉, 서울 양곡의 주공급원인 강상곡(江上穀)을 매점해
미가를 앙등시킨 뒤 매각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지방에
흉년이 들어 품귀 상태가 되면, 비축해 두었던 강상미(江上米)
혹은 공가미(貢價米) 등을 지방으로 운반, 판매해 이익을 얻었다.
그러한 매매 형태는 많은 미곡을 장기간 매점할 수 있는
자금의 여유가 없거나 각 지방간의 미가의 차이를 광범,
신속하게 파악하지 못하면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 그들의 자금 규모라든가
상업망의 확대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그들의 미곡 매점은
마침내 수요자층의 반발을 일으켰고,
그 반발은 점점 커져 1833년(순조 33)
서울에서 대규모 ‘쌀소동’이 반발 사례.
그때 ‘쌀소동’으로 한양의 곡물전들은
피해를 입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조정에서는 각 영의 교졸들을 보냈으나
진압하기 어려워 좌우포청 교졸들까지 동원해
주동자 여부를 가릴 것 없이 당일 안으로 효수(梟首).
그들의 작폐는 대단히 컸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 ‘쌀소동’의 직접적 계기가 미곡의 매점에 있었고,
미전인(米廛人)과 강상(江商)의 결탁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한 현상은 당시 상업계의 일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도고 상업(都賈商業)이 심화되던 모습을 잘 나타내준다.
또한, 그와 같은 도고 행위를 가능하게 하고
뒷받침해줄 상업 자본이 커졌음도 알 수 있다.
아울러 도고 상업에 반발하는 반도고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경강 상인은 활동의 근거가 선박을 이용한 운수업.
선박의 확보와 제조는 대단히 중요한 사항이었다.
그들이 선박을 보유하는 방법에는
구입하는 경우와 직접 건조하는 경우.
구입하는 경우는 주로 사용 기한이 경과한
퇴병선(退兵船)을 사들여 그것을 개조해 사용
혹은 지방에서 건조한 선박을 직접 사들이는 경우.
직접 건조하는 경우는 목재 상인들로부터,
혹은 직접 선재(船材)를 구입해 선박을 건조.
경강 연안의 주요 교통 수단인
진선(津船)의 개수(改修)와 신조(新造)를
경강의 선재 도고인(船材都賈人)들이 담당하였고,
조정에서 필요한 선박까지도 경강인들이 건조해 조달.
그들에 의한 조선 사업은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경강인들이 그들의 발달된 조선술과
축적된 자본을 바탕으로 조선업 분야에 진출.
단순한 독점·매점 상업에서 나아가 자본 재투자.
상업활동을 확대해 나가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
마포, 서강 지역은 17세기 후반부터 미곡 유통 중심지.
정조 20년(1796)에는 시장권을 둘러싸고 경강상인들과
시전상인들과의 분쟁이 일어났으며 마포에만 자생했던
여객주인은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서강, 용산, 망원, 합정,
밤섬, 뚝섬 등지에도 나타나 상업활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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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이중환의 <택리지>에 나오는 대목
"말은 수레보다 못하고 수레는 배보다 못하다."
조선시대 해상운송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말.
국가의 재정을 위해서 운송수단은 꼭 필요하다.
산이 많고 들이 적어서 도로가 발달하지 못하였기에
조선시대에는 대부분 수로를 통해 운반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초기에는 수로를 통한 세곡과 상품 운송을
정부의 관선이 담당했는데, 부패와 비효율이 문제.
그래서, 일반인들에게 위탁하는 민영화를 시행했다.
배를 만들고 운영하는 조직을 별도로 운영해야 했기 때문.
위탁업은 조선 상업에서 가장 큰 규모 사업일 수밖에 없었다.
숙종 재위 때는 운임으로 정부에서 상인들에게 1만 석이나 지불.
정부 재정의 5%가 넘는 예산이 들었지만
민영화하여 위탁하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이런 시장 형성으로 당시 한강변 경강상인들은
2천석 용량의 선박 등 300여 척의 배를 운영했다.
2천 석이면 160톤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의 물동량.
이들이 정박했던 곳은 서강, 용산강, 양화진 등 8곳.
당시 관료들의 녹봉은 마포에 있던 광흥창에서 지급.
전국의 관료들이 이곳(광흥창역)에서 봉급을 받아갔다.
이 배들은 단순히 정부의 세곡을 나르는데 그치지 않고
지주나 사대부들의 소작료도 운반했으며 상품도 운송했다.
당시 수만 명이 이런 일에 종사하며 한강변에서 살게 되었다.
한강변 경강상인 상업 지역이 발달하면서
밤섬마을에는 배를 만드는 조선소가 있었으며,
어음을 다루는 객주와 여각이 600여 개에 달했다.
따라서 한양은 상업도시로 변모하게 되는데 이에 따라
한잡지류(閑雜之類) 비생산인구가 수만에 이르게 되었다.
배에서 경강에 내린 조세 등짐 운반 하역 작업을 맡았는데,
이런 일에 종사하는 운부계, 마계, 역인계 등 조직까지 결성.
보다 더 일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경쟁이 치열했고
이들은 쌀 1천 석의 운임으로 11석7두를 받았는데,
이 이익은 상당하여 18세기에는 왕족까지 나섰기에
역인계 창설을 주도하다가 여론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당시 말, 수레를 몰거나
직접 운반하는 인부들이
받는 임금은 상당히 적었다.
완전한 자유경쟁이 아니었던 것이다.
정부 관리들이 상인 계주들 하고만 업무 처리
계주(契主)의 권한이 커 그들은 이윤을 많이 챙겼다.
마치, 요즘 화물운송의 지입제를 보는 듯하다.
당시, 인부들의 항의와 원성이 대단했다고 한다.
하지만, 관리들은 질서 유지 차원에서 인부들을 진압.
조세로 들어온 쌀이 운송 때문에 발이 묶여선 안되는 데다가,
부패 등으로 익숙한 시스템을 파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또 인부들이 유통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그들은 잡스런 일을 하는 잡스러운 대상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화물연대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물류대란’이 발생.
수레는 대형트럭으로 발전해서 엄청난 화물을 옮길 수 있는데
운전사들의 처지는 달라진 것이 없다면 분명히 문제가 발생한다.
국가의 재정을 위해서 위탁 운송수단은 꼭 필요.
따라서, 우선은 수로를 통해 운반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초 수로를 통한 세곡, 상품운송은 관선이 담당.
비효율이 문제되자 일반인에게 위탁하는 민영화 시행.
배를 만들고 운영하는 조직을 따로 운영해야 했기에
조선의 상업에서 가장 큰.,위탁 사업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숙종 때는 운임으로 상인들에게 1만 석이나 지불.
조선후기 최대 조선소.,밤섬.
조선시대 밤섬 백사장은 250만~300만평
이때 침수가 되지 않은 2개 섬이 있었는데
서강 쪽은 밤섬, 영등포 쪽은 여의섬(汝矣島).
밤섬마을에서는 배를 만들었고
여의섬에서는 그물을 제조 수선.
하중도(河中島) 밤섬은 밤처럼 생겨.,율도(栗島).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과 마포구 성수동 사이 섬.
오늘날, 서강대교가 관통하는 곳.,'철새 도래지' 밤섬
고려 말, '서강(西江)의 하중도' 여의도 곁 밤섬은 귀양지.
도선장은 백사장 건너 영등포~인천 行.,간로<동국여지비고>
'고려 말 귀양지' 밤섬의 출입 도선장 위치는 영등포 방향.,여의도.
도선장(渡船場)은 배를 탈 수 있는.,포구 & 나루터.
조선 초 배만드는 기술자들이 모여사는 강마을로 변모.
도둑이 없는 섬이었고, 주민들 간에 우애가 깊었던.,밤섬.
사방이 물과 백사장이라., 외부와 고립된 마을이기도 했었다.
한강 수위가 낮아지면, 여의도와 연결되는.,밤섬.
홍수 때마다 서강 한가운데 고립되는.,율도(栗島).
1960년대까지 78가구 443명이 거주하던 유인도였다.
'마포 ~ 밤섬 ~ 여의도 ~ 영등포'
나룻배가 한양 주민들의 교통수단.
'마포나루 남쪽 10리' 밤섬 길이는.,7리.
지금은 밤섬과 여의도가 분리된 섬이지만
조선시대 밤섬과 여의도는 거의.,하나의 섬.
조선시대 기록을 읽어보면
밤섬과 여의도 사이에 모래톱
물이 불어나면 모래톱이 잠기고
물이 빠지면, 모래톱이 드러났다.
조수 간만의 차이로
바닷물이 들락거리고
갈대밭이 우거졌던.,밤섬.
갈대밭에 불이 나면 타죽거나
홍수 때 마다 서강 가운데 고립되거나
간혹, 살인사건 시신이 버려진 치외법권 지대.
1421년 1월 22일 세종 때 예조 예빈시 보고서.
"양, 돼지, 닭, 오리, 당기러기 등 국영 말목장을
훙제원동 수연(水硯)과 잉화도에서 나누어 길렀다."
"마음을 써서 먹여 기르지 아니하므로
양과 돼지가 날로 파리하므로 수초 좋은 곳에
전구서 전례에 의하여 관청을 짓고 에빈시 관리를 두어
나누어 감독하여 기르게 하소서."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1472년 10월 15일 호조에서 (성종) 왕에게 아뢰기를
"이전에는 '전생서'의 염소를 반은 잉화도에 놓아 길렀으나
금년은 홍수로 섬 전체가 모래로 덮여 염소에게 먹일 풀이 없으니
무성할 때까지 본사(本司)에 합쳐 기르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506년 6월 25일 전교하기를
"잠령, 동룡단, 백석리, 흑석리, 와리 마포에서
멀리서나 가까이서나 훤히 바라다보이는.,밤섬 마을.
여화도(汝火島) 율도 마을을
'다류목'으로 철거를 시키고
다류목에 빙 둘러 담을 쌓으라."
이거(移居) 시킨 지역이 비좁으면
광흥창동 안에 담을 쌓고 살게 하며
창동에서 한성으로 들어오는 길을 막아
그 누구도 통행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1556년 4월 4일 간원이 아뢰기를
"잉화도는 양화진과 율도 사이에 있는
별도의 구역으로 조종조 때부터 돼지와 양을
방목해 가축을 기르는 목장으로 만들어 왔던.,섬.
"'전생서'와 '사축서' 관원으로 하여금 관장해 와
그 전복들이 관원에게 지공할 가축을 기르기 위하여
그 섬에 집을 짓고 살고 있는데 족친끼리 서로 혼인하고
홀아비와 과부가 있으면 마음내키는대로 같이 살고 있습니다."
잉화도 출입을 위해 샛강을 건널때 깊으면 예사로 벗고
얕은 곳에서도 벗은채 남자는 끌고 여자는 붙들고 가는데
그들의 추잡한 행실은 오로지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섬의 인가를 모두 철거 이주시키고
관원에게 제공하는 것과 가축을 기르는 일은
일체 남자가 하게하여 추잡한 폐단을 근절 시키소서."
1788년 10월 16일 한성부가 아뢰기를
"북부(北部) 아현계, 세교리 (1계, 2계)
연희궁계, 가좌동(1계 2계).성산리계, 수색리계
휴암리계, 여화도계를 하나의 방으로 만들었읍니다."
정조(1777~1800 재위) 때에는 조선 최대 조선소
밤섬의 배목수는 전국적으로 솜씨를 인정받았다.
정조는 효심이 깊어 父 (사도세자) 묘를 자주 찾았다.
정조가 '수원 화산' 헌륭원에 가려면
그때마다 노량진에 배다리를 놓아야 했다.
마포 경강상인들은 노량진배다리에 배를 제공.
각종 정부 특혜를 받으며 시전상인을 누루고
전국의 상권을 장악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한다.
밤섬은 한때 최고 천여 주민들이 살던 곳이었다.
조선 말 김정호는 '대동지지'에서 밤섬을 소개.
"밤섬 전체가 수십리 모래밭으로 이어져 있으며,
주민들은 부유하고 밤섬은 매우 번창한.,강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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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만드는 기술자들이 조선 초 정착한.,밤섬 마을.
조선시대 배를 만들고 수리하는 공장이 10 여 군데.
개성에서 한양 천도 할때 배만드는 기술자들도 이주.
인(印), 판(判), 마(馬), 석(石), 성(成)씨 등
8도 각지에서 서해와 한강을 내다보고 조선업을
일으킬 희망을 안고 모여든 희성들의 집단 씨족마을.
배를 만드는 기술이 뛰어나
한강 상류로는 단양 영월까지
한강 하류로는 서해 강화도까지
배를 주문하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조선 초 한강을 오고가는 배들은
거의 대부분 밤섬에서 만들어졌고
황해도에서도 찾아와 배를 주문했다.
조선시대 백성들에게는
유일한 대중교통수단.,나룻배.
양반에게 풍류의 대상.,뱃놀이 배
8도 세곡 소금을 걷어 나르는 조운선 등.
밤섬에는 조선 최대 조선소가 자리한.,활기찬 동네
밤섬 배목수는 전국적으로 솜씨를 인정받았다 한다.
특히 정조 때는 마포의 경강상인들이 조선업에 동참,
정조가 화성에 성묘갈 때마다 노량진 배다리에 배를 제공.
각종 정부특혜를 받아 시전상인을 누루고 전국 상권을 장악.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고 영세상인을 키워
조선시대 최초로 경제 민주화를 이룬.,정조.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향한 효심이 깊어
수원 화성에 있는 헌륭원에 자주 참배를 했다.
창덕궁을 지나 한강을 건너 노량진 -
남태령 고개 - 과천 행궁 - 인덕원사거리
헌륭원에 갈때마다 노량진 배다리가 필요했다.
정조 때 조선 최초 시장주의자.,채제공은
1799년 1월18일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1년5개월 후 1800년 6월22일 정조 운명.
11살 나이에 왕위를 오른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에 나선 대왕대비 정순왕후였다.
정조 재위 내내 숨죽이며 지낸 노론 벽파
권력의 전면으로 나서며 대대적인 숙청작업
정순왕후가 노론 벽파의 핵심 가문 출신인 때문.
권력에 복귀한 노론 벽파 세력은 1801년(순조 1년)
천주교 문제를 빌미삼아 정조시대 개혁 세력의 중심
남인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아 신유사옥(신유박해).
당시 수많은 남인의 핵심 인물들이 죽거나 유배형.
채제공의 뒤를 이어 남인의 리더 이가환(이익의 종손)은
모진 고문 끝에 옥사했고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는 유배형.
또한 정약용과 함께 촉망받는 관료였던
채제공의 아들 채홍원 역시 파직 유배길
남인들을 대숙청한 노론 벽파 세력은 그후
정조와 채제공의 개혁을 뒤집는 정치를 실시.
채제공의 후계자라 할 수 있는 남인들이
신유박해로 커다란 피해를 입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유배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 상황.
채제공이 물꼬를 튼 ‘시장과 상업의 자유화’ 정신은
조선의 시장과 상업의 역사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
이 때문에 훗날 정약용은 채제공의 업적을 논하면서
“모든 백성들이 처음에는 (금난전권을 혁파한) 법령이
불편하다고 말했으나 법을 시행한 지 1년이 지나면서부터
물품과 재화가 모여 하루가 다르게 일상생활품이 넉넉해지자
크게 기뻐했으며 비록 예전에 원망하고 저주하던 자들조차
채공(蔡公)이 훌륭하다고 했다”고 기록할 수 있었다.
.............체재공(1720년 ~ 1799년) ..............
'영조 후반~ 정조'시대.,남인 최후의 영수였고
조선 후기 어지러운 국정을 개선하기 위해 애썼다.
조선 5대 명재상., 황희 류성룡 이원익 김육 체재공.
'사도세자'의 스승이자
그 아들 '정조의 스승이자
정조의 문신이었던.,명 재상.
그는 자신이 사는 시기를 경장이 필요한 시기로 인식.
제도의 개혁보다는 운영의 개선을 강조하여 중간수탈과
부가세를 없애고, 부정부패 관리들의 폐단을 제거함으로써
국가재정의 충실을 기하고자 했다. 1764년부터 한성부좌윤·대사간
1769년 한성부판윤, 1770년 병조판서가 되어 군마의 관리에 노력했고,
같은 해 호조판서가 되어 국가재정 확충, 국제교역에 필요한 은과 삼의 확보
1788년 우의정, 1790년 좌의정이 되어 정사를 좌우했다.
이 시기에 이조전랑의 자대제(自代制) 및 당하관 통청권의
폐지, 신해통공책 등을 실시했다. 1793년에는 영의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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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1793년 3월10일
“도성 안에서 사는 사람과
도성 주변에서 사는 사람은
모두 똑같이 나라의 백성이다.
행상이든 점포를 갖추고 있는 상인이든 또
물품이 많든 적든 장사하는 일은 모두 떳떳하다.
그럼에도 시전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고 하여
자신의 물건을 가지고 매매하는 사람을 단속하고
내쫓아 도성 안에서 발을 붙일 수 없게 만든다.
참으로 사람으로서 할 도리가 아니다.
이 사람도 백성이고,
저 사람도 백성인데
어찌 차별을 둘 수 있겠는가!” - 채제공 -
시전을 누르고 조선 상권을 장악한 경강상인은
훗날, 지방 관리들과 결탁해 세곡을 운반하는 것을
관선, 병선(兵船) 대신 자신들의 배를 이용하게 하여.
부정축재, 운반 곡식 일부 빼내고 나머지에 물을 부어
곡식을 불어나게 하는 '화수(和水)'라는 방법도 사용했다.
또 대동미 등 세곡을 운반하다가
빼돌리고 행방을 감추는 '투식(偸食)'
그리고 질이 나쁜 부정축재로서는 세곡을
운반하는 도중에 곡식을 거의 다 빼돌리고
나머지 곡식을 실은 배를 얕은 물에 침몰시켜
횡령을 은폐하는 '고패(故敗)'라는 방법도 썼다.
정경유착 고리가 깊어질수록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성행했고
상인들의 부정한 상업 행위도 팽배.
19세기 말부터 이어진 서양열강과 일제 침략으로 인해
경강상인은 자유로운 상업활동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무엇보다 조선 경제건설 미명하에 전국에 철도가 깔렸고,
한강철교가 놓여 마포나루는 교역 중심지가 될 수 없었다.
상업으로 활발했던 마포나루는
한양에 주둔한 열강 주둔군에 눌려
일본군과 러시아군, 청나라군사들이
머물거나 지나다니는 곳이 되고 말았다.
일제강점기.,1930년 마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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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건국 후 최우선 착수한 경제정책이
토지제도의 개혁과 조운제도의 복구였다.
조운(漕運)은 세곡을 한양으로 운송하는 제도.
조운에는., 바닷길 해운과 물길 강운(江運),
육로를 이용한 육운(陸運) 3가지 길이 있었다.
하지만 17세기 들어 조운에 일대 변화가 일어난다.
도성인구가 늘어나 시장규모가 커지고
화폐가 통용되자 시장 미곡 유통이 활성화
이때부터 시장에 의한 민간 부문의 유통량이
관 주도 유통량을 앞지르며 미곡 유통을 지배하며
조선의 미곡 유통 시스템은 경쟁 체제를 갖추기 시작.
그러나 경쟁 체제는 미곡 유통이 발전되지 못한 채
이를 지배한 경강상인들에 의한 담합과 매점·매석으로
쌀값 조작이라는 역기능을 초래해 순환되지 못하기도 했다.
경강상인들은 그간 축적된 자금 동원력은 물론이고
선상을 통한 전국의 쌀값 정보를 보다 빠르게 얻었다.
또한 운송선박을 독점하고 대형 창고를 보유해 매점했다.
결국 쌀의 구입과 판매량, 판매시기, 판매지역 등을 조절해
독점 이익을 취해 끝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대표적인 사례가 1883년에 발생한 이른바 '쌀 폭동'이었다.
이 사건은 마포의 경강상인 김재순 등이 인위적으로
쌀값을 폭등시켜 분노한 빈민들이 폭동을 일으킨 사건.
이 같은 쌀 폭동은 20세기 들어서도 반복됐다.
일제 강점기인 1918년 여름, 경성의 종로소학교 앞에
쌀 판매소 앞에 줄선 주민과 왜경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몸싸움으로 끝나는가 싶던 충돌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험악해져 급기야
쌀값 폭등에 항의하는 조선인 폭동으로 확대.
폭동이 있기 한 달여 전쯤 일본 도야마현의 한 어촌에서
주부들이 쌀 도매상을 습격해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 이후에 이른바 '쌀 소동'이라 일컬은 소요 사태가
일본 전역으로 번져나가면서 한때 계엄선포를 준비할 정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는 시점에
조선과 일본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난
쌀 폭동은 가장 많은 생산품인 동시에
가장 중요한 식량 자원 쌀의 대규모 이동이
당시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준 사건.
쌀 폭동이 진정된 후
일본은 근본적인 식량 자원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한다.
그 결과 일본과 조선에서 수리사업,
품질 개량, 퇴비 활용, 농사 기법 등
대대적인 미곡 증산 정책추진을 시작.
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1차 세계대전 이후
투자 대상을 찾지 못하고있는 일본의 유휴 자본을 투입
조선을 장기적인 식량기지로 개발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증산된 조선의 쌀이
일본으로 대량 수출되기 시작하면서
또다시 문제가 불거졌는데 조선과 동시에
추진된 일본의 산미증식계획에 따라 미곡 생산량이
점차 증가하는 가운데 조선에서 쌀이 대거 유입되면서
그만 쌀값이 큰 폭으로 곤두박질치며 하락하고 만 것이다.
전국적인 쌀 폭동으로 이미 곤욕을 치뤘던 일본 정부는
부랴부랴 조선에서 유입되는 쌀에 관세를 부과하겠다며
대책 수립에 나섰으나 조선 쌀의 경쟁력을 당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다시금 대책이 수립됐다.
일본으로 들어오는 조선 쌀의 수량을
월별로 일정하게 조절하자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조선 쌀의 수출량을
차질 없이 보관 통제할 수 있는
별도의 수단이 마련돼야 했다.
그렇게 확정된 안이
'조선미곡창고계획'.
이어 창고 건설과 창고에 위탁된 쌀을 동양척식과
조선식산은행에서 저리자금을 대출한다는 계획 확정.
미곡 창고 건설이 빠르게 진척돼 1930년 한 해에만 전국
16개 지역에 17만석을 수용할 수 있는 미곡창고가 세워졌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쌀을 보관할 수 있는 상업창고 건설과
이를 관리할 전담 회사를 설립하는 문제였다.
곧바로 일본은 전담 회사의
운영 방안에 대한 윤곽을 제시했다.
설립 회사는 쌀 수출이 많은 5개 항구에
1만6529㎡(5000평) 규모의 창고를 신축 또는
임대 방식으로 확보해 건설비 운영비는 국고 보조.
계획안 발표후 조선은행과 식산은행, 동양척식,
조선정미회사 등 법인과 개인 주주를 포함한 28명의
발기인이 새 회사의 정관 작성을 비롯해 세부 운영 계획.
1930년 11월15일 경성의 남대문통에 자리한
경성전기 빌딩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자본금
100만원(지금 돈 1200억원) '조선미창'이 탄생.
오늘날 대한통운 전신 조선미창이
조선 물류업계의 원조를 이루면서
창립일을 '물류의 날'로 제정한 것.
조선 물류의 새벽을 열게 된 조선미창은
개항장이 들어선 인천항을 시작으로 부산과
진남포, 목포와 군산 지점을 개설하면서 물류영업.
당시 가장 많은 생산품이자 수출량 1위의 화물이었던
쌀의 매입, 운송, 입고, 보관, 출하, 선적에 이르는 전 과정을
일괄 관장하는 국책회사로 출범한 조선미창은 이후 일제 강점기
물류 전문회사로 도전을 거듭하며 전쟁의 포화 속에서 빠르게 팽창.
회사 설립 이듬해인 1931년 일본이 만주에서 전쟁을 일으켜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만주 국경을 넘나들면서 군량미의
수송 수요가 급증하는 가운데 미창은 당국과 정부 소유미 위탁계약을 체결.
정부미 일관 보관 및 이송 업무를 담당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군의 북방 진출이 날로 확대
군수물자의 보관과 수송을 위한 병참기지로서
조선이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1933년 조선군사령부 창고와 함께
현미 보관 및 운송에 관한 청부계약.
이를 계기로 대일 수출에 국한됐던
미창의 업무 영역은 압록강을 넘어
만주까지 이어지는 국제 간 물류확장.
1934년 2차 산미증식계획이 중단되며
미창의 업무 환경은 한층 복잡해졌다.
일본이 산미증식을 중단시킨 표면상의 이유는
국제 곡물 가격 하락으로 수리조합의 경영이 악화
그러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조선 쌀의 수출 증가로 일본 농촌 경제가
큰 타격을 입게 되면서 각계의 반발이 거세지자
일본 정부가 서둘러 조선에서의 산미증식계획을 중지.
그런데도 조선의 쌀 생산량은 한동안 계속 늘어만 갔다.
이런 상황에서 대일 수출이 큰 폭으로 줄어들자
전국 각지에선 생산된 미곡보관 창고수요가 증가.
1934년 미창이 보유한 창고는 이미 3배를 넘어섰다.
조선미창
회사 설립 당시
향후 5년간 필요한
창고 면적이 7000평을
약간 상회할 것으로 추정됐으나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보관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미창은 이듬해부터 각지에
지점을 신설하는 한편 창고 신축 및 증축과 함께
지방에 산재해 있는 농업창고를 적극 매입하고 나섰다.
이렇게 해서 미창은 1936년까지 마산과
여수, 강경, 원산, 해주에 새 지점을 개설
신축 창고 8만9256㎡와 임대 창고를 포함해
23만1404㎡에 이르는 보관 능력을 갖추게 됐다.
그러나 다시 이듬해 발발한 청일전쟁은
동북아 경제 환경에 큰 변화를 갖다줬다.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빠른 속도로
공업화가 진행된 일본에선 농촌 인구가 감소
농업 생산량이 눈에 띄게 저하되고 있었던 것.
이에 따라 쌀을 비롯한 곡물 소비가 크게 늘며
조선 쌀의 수입량도 다시금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라 조선미창의 업무 수행에도 많은 변화.
일본군의 전선이 중국 본토까지 확대되면서
군량미를 포함한 군수물자의 보관 및 배급 기관으로서
미창의 업무량이 예전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폭증한 것.
만주사변 후 일본의 대륙 지배가 확고해지자
조선의 주요 항구와 철도역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대륙으로 향하는 화물과 여객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미창이 1937년부터 항만에 들어오는 화차 운송에서
창고 보관을 거쳐 선적에 이르는 작업의 전 과정을 일괄
취급하기 시작한 것도 항만 적체가 시작된 이 무렵부터였다.
그러나 대부분 조선인에게 1939년은 악몽과도 같은 한 해였다.
최악의 가뭄으로 쌀 생산량이
전년도에 비해 절반가량인 무려
1000만석 가까이 줄어들자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각지의 쌀값이 급등하면서 매점매석.
조선의 대흉작으로 말미암아
일본의 궤도 수정 또한 불가피.
당장 일본 군부의 전시 식량 수급 계획에 큰 차질
일본 정부는 서둘러 3차 산미증식계획을 수립하고
그 이듬해부터 연산 3000만석을 목표로 증산에 총력.
증산 계획이 또다시 추진되면서
조선미창의 보관 업무 또한 증가.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
전선이 확대되자 조선을 경유해 만주와 중국 등
전장으로 수송되는 전시 물자의 물동량도 크게 증가.
이에 따라 조선미창의 영역 또한 전선을 따라
점차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1942년 한 해에만
함흥과 평양, 청진에 새 지점을 개설했다.
1943년이 되자 전쟁은 막바지로 치닫기 시작.
철도를 통해 수송되는 전시 물자가 급증하면서
조선미창은 같은 해 남한 13개 역과 북한 10개 역 등
23개 역에 차급화물(화차 1량 단위로 실리는 대량화물)에
대한 면허는 정부 관리 양곡의 효율적인 운송 취급을 위한 면허.
당시 취득한 면허는 조선미창이
소운송 분야에도 진출하는 출발점.
이처럼 전시 물자의 취급량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가운데 해방 직전인 1944년 조선미창의
보유 창고는 어느덧 사상 처음으로 33만0578㎡에 육박.
밤섬.
조선 말, 개화기를 맞이하여
세계 열강의 각축장이 된.,조선.
1876년 1월 15일 삼군부(三軍府)에서 아뢰기를
"'총융사'가 선발되어 올라온 포수들을 거느리고
양화진을 방어하는 일은 어제 품계하였읍니다."
"염창항은 양화진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니
'금위영(禁衛營)'의 중군(中軍) '신숙'으로 하여금
여의도로 이진(移陣)시켜 앞뒤에서 서로 호응하는
수단으로 삼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염창항 방어는 이미 계품하여 여의도로 옮겨 주둔
지금 듣자니, 용접(容接)하기가 불편하다고 하는데
가까운 영등포에 이정(移定)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1876년 1월 18일 삼군부에서
아뢰기를 하니 왕이 윤허했다.
그후, 이 섬에 재난이 닥치기는 두 번.
1925년 대홍수와 1950년 6.25 한국전쟁
,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인해
밤섬 주민들은 전 재산을 잃었다.
1950년 6.25때 폭격으로 집들이 산산조각.
그러나, 밤섬 주민들이 섬기는 부군신당은
"기와 한 장 깨지지 않았다."고 하는 옛주민들.
주민들은 해마다 가을이면 부군당에 모여
흰옷을 입고 “올해도 무사히 살았다”며 제사.
생선이며 돼지고기를 차려 놓고 제를 지냈다.
1955년 여의도 비행장.
1967년까지 62세대 443명이 거주한 밤섬.
대부분 고기잡이와 배 만드는 기술자였다.
일부는 뽕나무와 약초(감초) 재배, 염소 방목.
밤섬 주민 중 배 만드는 기술자가 52세대
한강변 조선업 중심의 대표적인 섬이었다.
일제 때 강제징용수첩을 받은 청년층 조선목수가 17명.
배 짓는 사업이 번성하던 시절에 돈벌이가 꽤 괜찮았다.
조선업의 형태는 지방에서 주문을 받아 적업하는 것과,
공임을 받고, 다른 지방에 출장 파견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가장 큰 배는 18m 정도로
사람을 싣거나 자갈 모래 등 운반
고깃배는 15m 정도였는데 배 모양은
앞이 뾰족하고 날씬한 것이 특징이었다.
<한겨레> 김규원 기자가 2005년 취재한 자료에 따르면,
“마포주민 이봉수(83)씨가 재현한 황포돛배는 12m 가량,
주로 충청도 서산 지방의 실치잡이 배로 쓰였다고 전한다.
보도. 사람, 소, 짐을 나르는 나룻배는 9m 정도
자갈·모래를 싣는 자갈배는 6~7m 정도였는데
자갈배는 나룻배보다 목재가 더 두꺼웠다 한다.
밤섬은 전기나 수도가 들어오지 않아
1968년 밤섬에서 주민들이 떠날 때까지
밤섬마을은 등잔불이나 남폿불을 사용했다.
물은 한강 물을 퍼다가 그대로 마셨다고
밤섬 배목수인 최창선(64)씨는 증언했다.
"우물이 있었지만 짠맛이 나서 먹을 수 없었다."
"한강 물을 떠다가 먼지만 가라앉혀서 마셨는데,
오래 두어도 신기하게 물에 벌레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배만들기는 쇠퇴.
밤섬 배목수들은 다른 직업을 찾아 전전해야 했다.
1967년 한강 강변도로 건설 및 잠실 개발,
공유수면 매립에 의한 택지개발.,여의도 도시화
밤섬 폭파 부산물 골재는 여의도 윤중제(섬둑) 자재.
밤섬 주민들을 폭파 전에 와우산 기슭으로 집단이주.
주민들은 아스라이 사라져가는 밤섬을 보며 통곡했다.
홍수 때마다 침수 고립되었지만 주민들에게는 삶의 터전.
섬을 떠난 이후에도 주민들은
조석으로 부군당에 올라가 합장.
“부근당을 떠나면 살 수가 없다”
하며 집단 이주를 서러워했었다.
1916년 일제 때 군용비행장이 들어선.,여의도
상습 수해지역으로 매년 극심한 수해를 입던 섬.
1968년 7,533m 윤중제(輪中堤)를 쌓고 택지 조성.
그 직전까지 78가구 6백여 명이 살았던.,밤섬.
행정지명은 마포구 서강동(西江洞) 15통, 6개 반
서울에 살면서도 문명의 혜택을 외면한채
대대손손 이어온 이곳 주민들은 5일 내 이주.
110일 후 사라질 밤섬을 보며 아쉬움을 달랬다.
도둑 없고 질병 없는.,20세기 한강 섬마을.
모든 은총은 부군신(府君神)때문이라 믿었다.
사실 이곳 주민들은 수돗물을 모르고 살아왔다.
"한강 물을 그대로 떠다 밥을 지어먹고 마셨지만
누구 한사람도 설사를 하지 않았다."는 옛 밤섬 주민들.
전기 대신에 집집마다 "부군등"이란 초롱불을 켜고 살았다.
그러나, 1968년 윤중제가 들어서기 직전에는
조선업 경기가 없어서 조그만 나룻배를 만들거나
도선공, 또는 물고기잡이로 생활을 이어오고 있었다
원래, 밤섬 옆 여의도는 쓸모 없던 모래밭.
조선시대 돼지 양 염소 등 가축들의 방목장.
"하잘 것 없는 섬이니 너나 갖어라." 뜻.,汝矣島.
조선시대 한강 나루터
배를 만들던 곳이.,밤섬.
풍류묵객 여름 피서지.,밤섬.
1556년(명조 11년)「명조실록」 4월4일.
"밤섬 주민 생활상을 보면, 한양에 있으면서도
한강물이 깨끗해 이주 전까지 식수로 직접 마셨다."
"외부 왕래가 뜸해 남의 이목을 덜 의식한
섬주민의 생활방식이 대체로 자유분망하여,
남녀가 서로 업고 업히고 정답게 강을 건넜다."
"동성동본이고 반상이고 따지지 않고
의논 맞춰 살길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고
마씨, 인씨, 석씨, 선씨 대가족 집단 거주지".
"은행나무 당산목과 부군당이 있어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였다."
"부근당 인근에 있는 샘물을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했다."
부근당은 조선 전기부터 한양의 각 관청에 설치하고 신을 모신 곳.
중종 때는 ‘付根’(부근)이라 하여 사방 벽에 남자 성기(性器) 모양의
나무로 깎은 것을 걸어놓고 한 번 비는 비용이.,수백 금이 드는 폐단.
그리하여, 이를 모두 없애 버렸으나, 그 후 다시 일어나
헌종 때도 성행하여 부군당은 서울에만 15개소가 있었다.
지금도 서빙고동 등., 당(堂)에서는 정초에 당제를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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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양 주요 간선도로 통과 길목.,한강 나룻터.
광나루(廣津), 삼밭나루(三田渡), 서빙고나루(西氷庫津),
동작나루(銅雀津), 노들나루(露梁津),삼개나루(麻浦津) 등.
오늘날 한강다리 역활을 했던.,조선시대 나루터들.
겨울철 한강 얼음을 톱으로 썰어 나르던.,서빙고나루
동빙고, 서빙고에 저장했다가 여름철에 팥빙수로도 사용.
서빙고동은 반포대교 북단의 한강변에 위치
조선시대 얼음 저장창고 8동이 있어 서빙고동.
1396년(태조5년)~ 1894년(고종31년).,예조 소속.
얼음은 궁중 수라간에 바치거나
정3품 이상 관리에게 제공되었다.
조선시대 세종대왕은
감옥에 갇힌 죄수에게도
무더운 여름철에 얼음을 하사.
한강은 한양을 감싸고 도는 허리띠 같아.,"대수(帶水)".
고려 현종 재위 당시에 거란족을 물리친.,강감찬 장군.
그 공을 치하하는 자리에서 기록 상, 처음 등장한.,한강.
광나루에서 양화진까지는 경강(京江)이라 불렀다.
한남동 한강진 부근의 강을 한강(마포강)이라 했다.
서호(서강) 마호(마포강) 용호(용산강).,옛부터 삼개.
3개의 포구(三浦)를 뜻하는.,삼개
여기서 마포가 유래하였다고 한다.
마포강에서 마포는 항구이다.
서해를 통하여 유입되는 각종
물산이 집중하는 상업도시였다.
소금 생선이 많이 거래되는
경강상인(江商)의 집단도시로
마포는 항구로서 명성을 떨쳤다.
새우젖 장사꾼은 마포상인의 상징이었다.
새우젖 장사꾼은 이마가 몹시 까맣게 탔다.
이른 아침 새우젖을 팔러가는 마포상인들은
해를 안고 도성으로 들어갔다가 물건을 다 팔고
도성을 떠날 때는 해를 안고 귀가했기 때문이었다.
소금은 마포항에서 많이 거래되는 대표적인 물건.
염리(鹽里)’는 소금을 파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
조선시대 염리동과 대흥동에는 큰 소금창고가 있었다.
서해로부터 들어오는 소금배는 마포항에서 부렸다.
소금(Salt)의 어원은 라틴어 'Sal'에서 유래 하였다.
한자인 소금 염(鹽)은 옛부터 국가의 권력을 의미한다.
봉급을 의미하는 샐러리(Salary) 어원은 소금(Salt)
로마시대 공무원의 급여를 소금으로 지급한데서 기원.
소금으로 봉급받던 군인을 뜻하는 라틴어 병사(Soldier).
샐러드(Salad)는 채소에 소금을 뿌린 음식.
새우젓에는 오지그릇 독이 반드시 필요했다.
오지그릇 옹기마을 동막(東幕)도 마포항 근처.
마포항 앞에 있는.,밤섬마을.
마포의 경강상인들이 투자하면서
밤섬은 조선 최대의 조선소로 급성장.
밤섬 배목수의 솜씨는 국내외에서 알아주는 명장들.
한때 1천여 주민들이 모여 살며, 거대한 상권을 형성.
정조 때 노들나루 배다리 공사에 배를 제공한 경강상인
시전상인을 누르고 조선 제일의 상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서해에서 마포항을 지나 한강진까지
운항하는 배는 해운용 수하선(水下船).
수하선은 물에 잠기는 배 밑바닥이 뾰죽
거센 파도나 밀물에 잘 견디게 제작되었다.
서해에서 밀려드는 밀물은 한강진 부근까지
치고 들어가 이 일대 한강에서는 수하선이 운행.
도성 서쪽에 마포항이 있다면
도성 동쪽에는 뚝섬이 자리했다.
뚝섬은 섬이 아니다.
한강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면서 이 지역을 감싸고 지난다.
중랑천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지나면서
두뭇개부근까지 역시 이 곳을 감돌고 있다.
그 모양이 마치 섬처럼 생겼다고 해서., 뚝섬.
뗏목으로 실려온.,각종 목재는
뚝섬과 두뭇개 일대에 널려 있었다.
뚝섬은 땔감과 미나리 등 채소가 유명했다.
미나리 장사꾼은 뚝섬 상인 그 자체였다.
뚝섬 상인들은 목덜미가 아주 까맣게 탔다.
이른 아침 도성으로 물건을 팔러갈 때 해를 등지고 갔다.
물건을 다 팔고 도성을 나올 때도 해를 등지고 귀가한 탓.
그래서 뚝섬 상인들은 목덜미가 까맣게 타서
이마가 까만 마포 새우젓 상인과 구별되었다.
뚝섬 한강공원에 설치한.,뚝섬 유래비.
뚝섬은 한강과 중랑천으로 둘러싸인
살곶이벌(箭串坪) 일대를 말한다.
사실은 독 또는 둑(纛)과
관련돼서 나온 지명이다.
둑(纛)이란 무신(武神)을 상징하는
치우천왕(蚩尤天王) 모습을 본뜬 것.
큰창에 소의 깃털을 꽂아 만들었다.
매년 봄 경칩과 가을 상강때
왕이 군대를 열무하거나 출병할 때
기(纛旗)를 세우고 둑제(纛祭)를 지낸 곳.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도
둑제를 지냈다고 난중일기에 기록.
뚝섬 이름에는., 두 가지 유래가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 때부터
임금의 사냥 장소였던 뚝섬.
태종에 얽힌 사연도 갖고 있다.
1차 왕자의 난 뒤 함흥에 칩거하던 태조가
서울로 돌아오자 태종은 뚝섬으로 맞으러 나갔다.
태조는 태종을 보자 화가 치밀어 화살을 쏘았으나,
태종이 피해 화살이 차일 기둥에 꽂혔다 하여.,살곶이.
‘화살이 꽂힌 곳’이란 뜻
살곶이벌(전관평).,지명.
태조∼성종 때까지 100여년간
역대 왕이 사냥한 것이 151 차례.
임금이 나오면 으레 그 상징인
독기(纛旗)를 꽂았다고 하여.,뚝섬
독기는 소꼬리나 꿩꽁지로 장식한 큰 깃발.
태조와 웃 광나루를 통해 도성으로 가거나
도성~ 광나루~ 여주 충주 부산으로 갈 경우
현재, 한양대 앞을 지나는 중랑천을 건너야 한다.
조선시대 중랑천에 놓인 살곶이 다리를 건너야 했다.
길이 78m, 너비 6m로 조선시대 가장 긴 돌다리였다.
또한, 창덕궁 금천교에 이어 조선에서 오래된 다리다.
뚝섬 일대는 국영 말목장으로
주변은 목장성 아차성으로 둘렀다.
살곶이벌은 국왕이 참관하는 군사훈련장.
뚝섬에는 1954년 우리나라 최초의 경마장도 들어섰다.
전국에서 돈푼깨나 만지는 이들이 몰려들어 성시를 이뤘다.
1989년 과천경마장이 건설되면서 뚝섬 경마장은 문을 닫았고,
그대신 뚝섬 골프장이 건설됐다가 2004년 4월 역시 문을 닫았다.
뚝섬나루는 강원도 충청도에서
한강을 타고 물산이 집결되는 곳.
뚝섬은 뗏목으로 싣고오는 목재와 땔감이 아주 유명했다.
이웃 두뭇개 앞 동호까지 운항하는 수상선(水上船)이 왕래.
.
수상선은 배 밑바닥이 뗏목처럼 평평.
물살이 거센 바다에서는 곧 전복된다.
밀물이 치고오는 한강진까지
서해에서 온 수하선(水下船)과
동호에서 서로 물산을 교환했다.
요즘 사라졌던 저자도(楮子島)가 되살아나고 있다.
서울 옥수동과 압구정동 사이 한강에 있었던 저자도.
조선시대 닥나무가 많아 저자도(楮子島)로 불렸던 섬.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인해 섬 등성이 상당 부분이 유실,
1930년대 동서 2㎞ 남북 885m(118만㎡ ; 35만4천평) 모래섬.
저자도는 선유도처럼 주변 경치가 절경인 왕족 양반들 놀이터.
<세종실록>에는 세종이 저자도에서 배를 띄우고
강변에서 군사들이 씨름하는 광경을 보며 즐겼다.
세종은 저자도까지 와서
대마도 정벌에 나선 이종무
장군을 전송하였다고 전한다.
조선 후기에는 철종이 그의 부마 박영효에게
이 섬과 함께 압구정(한강가 정자)을 하사했다.
1950~60년대 저자도는
여름이면 시민들이 나룻배로 건너와
삼복더위를 식히던 시민들의 휴양지였다.
1960년대 말 '개발'에 밀려 한강에서 '사라진 섬'
1969년 현대건설은 건설부로부터
공유수면 매립허가를 받은.,저자도.
저자도 모래 80만㎦를 파내 압구정지구
4만8천평을 매립하는데 이용해 72년 공사 후
저자도의 상당 부분은 한강 물속에 잠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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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 세종 때 밤섬은 뽕나무 8280주가 심어진 뽕밭.
조선 성종 때 뽕나무 묘목을 심고, 관아 노비가 지켰다.
조선시대 밤섬 모래밭 '율도명사'는 마포8경 중에서 제1경.
한자어로는 율도(栗島)로 표기되는 섬으로,
섬 형세가 마치 밤알을 까놓은 것처럼 생겼고
기반은 암반층이고, 섬 동서부는 하식애(河蝕崖)
하천 침식작용으로 인해 생긴 절벽.,"소금강"
풍광이 빼어나 "작은 해금강"이라고도 불렸으며,
풍류 묵객들이 마포 강변에서 밤섬 정취를 즐겼다.
1556년(명종11년) 4월 4일
'명종실록'을 좀 더 읽어보면,
성풍습이 개방적이었던.,여의도.
"<전생서> <사축서>에 딸린 종들이
집 짓고 살았는데 족친끼리 서로 혼인."
"사촌이나 오촌 간도 피하지 않는가 하면
홀아비, 과부가 있으면, 가까운 친척이라도
다른 곳으로 보내어 결혼을 시키지 않았으며
마음 내키는대로 같이 살면서도
조금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는 대개 섬들이 그러하듯 사방이 물이고
인접한 마을이 없어 이목이 미치지 않는 탓."
뽕나무 꽃이 피는 4~6월 경
조선시대 청춘남녀 밀회장소.
밤섬과 여의도는
강물 수위에 따라
붙었다 떨어졌다가
둘이 하나가 되는 섬.
둘이 될 때에는 밤섬, 여의도.
둘이 하나 될 때에는., 여율도.
1968년 폭파 직전.,밤섬(항공촬영).
밤섬은 한때 최고 천여 주민이 오손도손 살던 곳
밤낮 문을 열어놓고 지낼만큼, 평화의 마을이었다.
밤섬의 지명 유래는 마포 언덕에서 내려다 보면
마치, 밤알을 까놓은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전의감 약전(藥田), 뽕나무밭 밤섬(栗島)은
한강 서호(西湖)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혔다.
고려 말 귀양지였던, 밤섬의 역사는 조선 초부터 시작된다.
호조에서 아뢰기를 "밤섬 안에서는 백성이 개간하여
경작을 금하고, 오직 뽕나무만 심어서 그것이 자라거든
섬 안에 옮겨 심게 하소서" -문종실록 - 1451년 4월 21일.
조선시대 뽕나무를 관리하면서 배를 만들고
배를 수리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는.,밤섬.
마포나루에서 새우젓과 조기, 쌀 등을 부려놓은
지방 배들은 내려가기 전날 배를 수리하기 위해
섬에 배를 대고 주막에서 술마시며 허기를 달랬다.
밤섬 하면 생각나는 인물
실학자 서호수의 아버지이자
북학파 비조 보만재(保晩齋) 서명응.
'보만재란 호는 정조 임금이 내린 것이다.
일흔두 살 죽을 때까지 임금을 보필했다는 의미.
서명응은 영조와 정조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1761년 9월 24일, 영조는 사도세자가 비밀리에 관서 기행을
다녀왔다는 말을 듣고 세자의 빈객들을 모두 파직 조처를 내린다.
이에 서명응과 윤급, 이정보, 서지수 등이 파직됐다.
그러나 서명응은 영조에게 미리 알렸다는 이유로 복권.
하지만 죽은 사도세자나 그의 아들 정조에겐 불쾌한 기록.
평양을 몰래 다녀온 아들을 영조는 이미 세자가 아니라
역적을 대하듯이 했고, 사도세자를 미워하던 정적들은
영조와 세자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갖가지 말로 이간질.
결국 1762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자
서명응은 도성에 들어가지 않고 밤섬 근처
농암(籠巖)에서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몬 실마리를
제공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영조는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4년 동안 불렀으나
서명응의 고집도 완강해
결국 산수갑산으로 유배를 간다.
산수갑산은 조선의 최북단으로
악명높은 유배지라 다른 사람 같으면
깊은 시름에 잠겼을 테지만 그는 달랐다.
나는 살면서 세 가지 소원이 있다.
하나는 백두산을 등정하는 일이고,
둘째는 금강산을 한 번 가는 일이고,
다음으로 주역에 관한 책을 쓰는 일이다.
절망의 길을 가면서도 평생 하고 싶었던
소원 가운데 하나를 이룬다며 꿈에 부풀었으니,
세상일이란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가에 따라 희망이
절망이 되기도 하고, 때론 절망이 희망이 되기도 하나 보다
.
1766년 서명응은 백두산에 올라가 주변 봉우리를
실물처럼 그리게 하고 봉우리의 높이를 실측했다.
그가 실학사상의 태두(泰斗)로 불리는 이유다.
감상에 젖기만 하면 후세에 무슨 도움이 되리오.
일 하나를 하면 좋은 일이 서너 개는 있어야 하리.
서명응의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은
박지원과 그의 동료들에게도 전수된다.
서명응은 북학파 인물들 가운데 박제가를 특히 아껴
그의 책 《북학의(北學議)》 서문도 기술해주었다.
또 서명응의 동생 서명선은 정조의 충신이기도 했다.
서명선은 홍인한 등 세손의 등극을 막는
노론 세력에 맞서 1775년 11월 영조에게
세손의 대리청정을 시행해야 한다고 직간.
그의 용감한 행동으로
정조는 영조 후계자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서명응의
아들은 서호수,
손자는 서유구다.
서명응이 도성 생활에 염증을 내고
한강으로 물러나 살던 농암은
밤섬 근처에 있었다.
그 앞의 물가를 용주(蓉洲, '溶洲'로도 적는다)라 하고
그 일대 한강을 부용강(芙蓉江: 용산강)이라 이름을 붙였다.
서유구는 조부를 모시고 함께 용주에 살면서
자신의 호를 용주자(蓉洲子)라 하고
집 이름은 용주정사(蓉洲精舍)라 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농사에 관한 백과사전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비롯한
주요 저술들을 탄생시켰다.
그리하여, 밤섬에 뿌리내린
서명응 가문의 실사구시 정신.
'사도세자와 정조의 스승이었던.,서명응.'
조선 최초로.,서양 천문학과 기하학을 연구.
농부의 수고를 헤아려, 떨어진 밥알도 버리지 않고
조상 대대로 씻어서 먹는 가풍(家風)에서 성장한 실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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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여의도동 1번지.,국회의사당
조선초기 양과 말을 키우던.,양말산.
조선 '중기 ~말'.,궁녀들의 공동묘지.
양말산은 궁녀들의 화장터 또는 공동묘지.
궁녀가 죽으면, 그 시신은 궁궐에도 남지 못했고
또 출가외인이라 하여 친정으로도 가지 못했기에
여의도 양말산에 묻히거나, 화장을 했던.,조선 후기.
양말산 샛강 영등포 쪽 연못가에
갑오경장으로 내시제도 폐지 전까지
용추(龍湫)라는 내시 시술소가 있었다.
고종 34년(1897)
대한제국 성립 전까지
음경은 남겨놓고 고환만 제거했는데
그 비명소리가 멀리 새어 나가지 않도록
천둥 번개 치는 비오는 날에만 내시 시술.
시술 도중에 죽는 경우도 잦았고
시술 후유증으로 인해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경우도 잦았다 한다.
이곳에서 시술 받은 내시들에게는
용추가 새 생명을 부여받은 곳이기에
"시술한 의녀를 어머니라 불렀다." 한다.
여의도 양말산 궁녀공동묘지는
조선시대 궁녀들의 묘터 중에서도
한맺힌 혼이 많이 묻힌 곳인듯 하다.
18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국사의사당 뒤편에
거대한 남근석을 세워 여인들의 한을 달랬던 곳.
원래, 명당은 기맥이 흐르고 모여서 진혈터를 형성.
그러나, 양말산 터는 기맥이 거의 없어
생기 없는 죽은 땅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
화장터나 공동묘지는 음기 넘치는 곳을 골라
일부러 맥이 꽉 뭉친 곳에 터를 쓰기 때문이다.
"망자가 사는 음기 가득한 곳에서는
산 사람이 제대로 살 수 있을 리 만무."
“나쁜 기운이 가득한 곳에 사람이 계속 머물면
몸 안에 균형이 무너져서 분란이 일어나기 마련.”
이 일대에는 내시의 한이 서려있어
오늘날 국회가 늘 시끄러운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지관들의 이야기도 있다.
여의도는 강물에 떠 내려와 쌓인 모래섬이어서
풍수지리 상 백두대간 정기가 전달되지 않는 곳.
살아서도 죽어서도 오직 왕만 사모해야하는.,운명.
오늘날, 밤섬은 웃섬, 아랫섬으로 나누어졌다.
나무와 풀이 우거져 동식물들이 찾아들고있다.
버드나무 씨앗들이 스스로 싹을 틔워 자라고있다.
겨울철새 민물가마우지.,'도래지' 밤섬.
1999년 8월10일 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
갯버들, 억새 등 식물 190종, 멸종 위기종 흰꼬리수리
천연기념물 원앙 등 9700 조류, 황쏘가리등 어류 30 종.
세계적인 물새 서식지로서 지정이 된., '람사르 습지' 밤섬.
밤섬은 우여곡절 끝에 자연으로 되돌아갔지만,
한강의 많은 섬들은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잠실은 1971년 공유수면매립 이후 빌딩과 아파트촌
옥수동과 금호동 사이 모래섬.,'저자도'
1960년대 한강 개발로 매립되어 사라졌다.
현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가 들어선.,저자도.
양화대교 중간에 위치한 선유도는
원래 풍경이 빼어나 뱃놀이 하던 섬
현재 정수장 시설을 재활용한 생태공원
'한강변 모래언덕' 노들섬은 일제때 강제로 만들어진 섬
반포대교와 동작대교 중간 서래섬은 올림픽대로 인공섬.
반포대교 남단 세빛둥둥섬은 1000억원대 세계최대 인공섬.
2011년 완공됐지만
2년째 난항을 겪다가
내년에야 전면 개장된다.
한강의 장구한 세월 속에서 생겨난 많은 섬들
불과 최근 50년 사이에 만들어지고 사라졌고,
잠실, 뚝섬, 여의도, 난지도 섬은 육지가 되었다.
'여의도 뚝' 윤중제 공사를 할 때
1968년 밤섬은 폭파되어 사라진다.
인간에 의해 파괴되고,
버려지다시피 한 무인도가
자연의 힘으로 되살아난., 밤섬.
18세기에는 경강상인들이 기술 및 자본 투자로
조선 최대 규모의 조선소들이 10여군데 있었으며
조선시대 위탁 운송업 시발점이자 원동력이던.,밤섬.
上 현재., 밤섬
下 50/60년 전.,밤섬.
1950년대 말, 영등포에 살았던 필자는
초등학교 1학년때 밤섬으로 소풍 갔다.
영등포 영중국민학교에서 샛강을 건너
드넓은 백사장 땅콩밭 여의도를 가로질러
샛강을 징검다리로 건너 밤섬으로 들어갔다.
그무렵에 밤섬은 경치가 아름다웠고
오늘날, 되살아난 밤섬과 모양새가 비슷.
면적은 60년 전보다 훨씬 더 넓어진 것 같다.
밤섬의 옛 모습은 사라졌지만
밤섬의 옛풍습은 아직 살아있다.
서울시 무형문화제
35호 밤섬 부근당제
후원 : 서울특별시.
주최 : 마포문화원.
......................부근당.................................
부군당(附君堂) 부근당(付根堂) 부강당(富降堂)
‘부군’이란 본래 한(漢)나라 태수의 칭호였다고 하나,
부군당이란 옛날 관청 내 두던 사당의 이름인듯 하다.
.
'증보문헌비고'에 “본조 풍속에 도하 관부들에는
으레 수호신을 모신 한 작은 숲을 두고 그 사당에
지전(紙錢 : 종이돈)을 걸고 부군이라 일컫는다.”
현재 부군당이라는 명칭은 다른 데서는 보이지 않고
당산동· 동,서빙고동· 보광동· 수유동· 창전동·이태원동
등 부군당에 봉안된 부군신은 마을을 보호하는 무신(武臣)
부군신을 놀리는 ‘부군거리’에서 무당이 입는 무복이
장군 복식인 구군복(具軍服)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다.
부군당의 제의는 봄·가을에 마을에서 공동으로 지내는데
규모가 큰 당에서는 3년마다 한 번씩 대규모 당굿을 올린다.
서울·경기지역의 대표적인 부군당으로는
용산구 이태원 1동에 있는 부군당을이태원꼽는다.
이태원부근당역사공원(이태원역.,세계 문화의 거리 인근)
이태원 1,000여 호에서 제의 비용을 모아
3년마다 당굿을 하고 마을회의에서 뽑힌
제관 12명이 당제를 주관하는데 당제 15일 전에
대동우물을 퍼내고 왼새끼에 백지술을 끼운 금줄을 쳐서
잡인을 금하고, 새로 괸 우물물을 길어 ‘조라’를 담가 제를 올린다.
당제는 유교식으로 하며
당굿은 일반 당굿과 다른 점은
부군신을 위한 ‘부군거리’가 추가되며,
끝에 ‘황제풀이’를 하고 나서 ‘뒷전’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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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근당 제물.
밤섬 부근당.
1968년 밤섬을 폭파할때
마포구 창천동으로 이주한
밤섬 60여 가구 옛 주민들은
그후에도 고향인 밤섬이 그리워
2년에 한번씩 찾아와., 제사 지낸다.
한강 서강대교 아래 있는 밤섬은
1968년에 62가구 443명이 살았던 섬.
조상 대대로 17대를 이어 살았던 주민들.
당시 부군당은 와우산 기슭으로 이전.
"밤섬은 고려시대 유배지였다."고 한다.
"밤섬 부근당의 역사는 약 600여년 남짓"
밤섬 여기 저기에는 오디 열매 달콤한
뽕나무가 여기 저기에서 자라나고 있다.
'조선왕실의 뽕나무 재배단지' 흔적 같다.
밤섬의 옛 주민들은
고향을 기억하기 위해서
심어달라 부탁했다고 하지만
자연적으로 살아난듯 여겨진다.
.....남성의 성기를 바치던.,부근당 풍습.....
마을의 수호신은 대개 남녀를 함께 모신다.
수탑과 암탑, 남근과 여근,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여사낭과 남서낭, 용왕과 용궁 부인 등 음양 조화를 이룬다.
음양조화는 '할머니 & 할아버지' 여신 남신에서 압권을 이룬다.
당산 '할머니 & 할아버지, 골매기 '할머니 & 할아버지'가 그것이다.
'서해 조기잡이 신' 임경업 장군 옆에는 '임장군 마누라'
개성 덕물산 최영 장군 옆에는 '최영 장군 마누라'가 있다.
신의 세계에서 부부관계는 음양의 상생조화에서 유래한듯.
부부신이 같이 있게 된 것은 일부일처제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일부일처제는 남성 우위에 기초한 제도에서 귀착.
조선시대 여신보다 남신이 먼저 제상을 받는 것은 남성 우위.
당할아버지에게 제상을 먼저 올리고 난 다음에
당할머니에게 차리는 제의는 남성우월사회를 반증.
서울.경기지역에는 부군당 신앙이 널리 분포되어 있다.
부군당은 남자의 성기를 깎아 여신에게 바쳤던 곳.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 서울의 음사 중 각사에 신사가 있어 부근당이라 한다.
한 번 제사에 드는 돈은 수백금에 이른다.
<증보문헌비고>에서는 "도하 각 관부에 으례
작은 사우를 두고 지전등을 걸고 부군이라 하여
제사를 지낸다" 고 하는데 관아에서 모시던 부군당은
민간 성신앙으로서의 부근 신앙을 포섭하여 모시던 것.
최근까지 서울에 만도 동빙고동, 서빙고동, 당산동 등
한강가 부군당이 있었고, 가장 대표적인.,원효로 부근당.
"부근은 송각씨가 실려 있고 사방 벽에
목경물을 달아 지나치게 음설하였다"
2010.12.7 교동도 읍내리., 부근당 503주기 연산제.
현재, 이태원 부근당 역사공원.
교동도에 있는 '연산군 사당' 부근당.
신길역 뒤 여의도 방향.,방아곳지 부근당.
조선 전기부터 한양 각 관청에 설치하고 신을 모신 부근당.
중종 때는 ‘付根’이라 하여 사방 벽에 남자 성기(性器) 모양의
나무로 깎은 것을 걸어놓고 한번 비는 비용이 수백 금이 드는 폐단.
하여, 이를 모두 없애버렸으나, 그 후 다시 일어나 헌종 때에도 성행.
부근당은 서울에만 15개소가 있었다.
지금도 서빙고동(西氷庫洞) 등에 있는
당(堂)에서는 대개 정초에 당제를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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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근당 풍습은 해신당(海神堂) 풍습과 유사하다.
삼척시 신남리 해신당은 익사한 처녀신을 모시는데
3년에 1번씩 당굿을 하고 해마다 목제 남근을 바친다.
해신당은 우리나라 해안 도서지역 어촌의 수호신 사당.
동해안 일대에서는 나무로 깎은 남근을 당에 봉납하여
정월 대보름 당제 때 주술적 풍요를 기원(삼척시 신남리).
또 서해 부안군 변산반도에는 수성당할미 또는 개양할미.
거신이 나막신을 신고 서해를 거닐며 어부들을 보호한다는
수성당(水城堂)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어로신앙의부대상'
부안 수성당.
거신(巨神)설화의 주인공이 당신이 되어 있는 점에서도 특이.
그 핵심은 어부들의 '용신신앙'으로 도서지역에서 볼 수 있다.
밤섬 부근당은 조선시대 한강을 중심으로 활동한 경강상인 흔적.
밤섬 한가운데 암수 은행나무 2주가 있었다.
고려 말 충신 김주(金澍)가 귀양와서 심었다는데
공양왕4년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압록강에 이르러
이성계가 역성(易姓)혁명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던 김주.
"충신은 두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이옷과 신발을 묻어 내무덤으로 삼고
내가 명나라로 돌아가는 날을 忌日로 삼으라."
그래서, 밤섬 은행나무를
충신목(忠臣木)으로 불렸다가
조선시대 이르러 금슬목으로 변신.
고려 말~ 조선시대 은행나무는 청렴을 상징.
유교 창시자 공자는 서당에서 제자를 가르칠 때
은행나무 단위에 올라가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 단을 은행나무로 만들어서 "행단"이라 부른다.
행단의 사전적 의미는 학문을 배워 익히는 곳이며
은행나무는 벌레가 타지 않아 청렴 의미가 더해진 것.
조선시대 서당에는 으례 은행나무를 심었는데,
서당에서 수학하고나서 나중에 공직에 나갔을 때
벌레가 타지 않는 은행나무처럼, 부정부패가 없는
청렴한 관리가 되라는 의미가 더해졌다고 전해온다.
밤섬마을 가운데 거대한 암수 은행나무는
밤섬 선착장 배댈 곳을 알려주는.,랜드 마크.
아울러, 밤섬마을 부근당 당산목이자 수호목.
조선 초, 마씨, 인씨, 석씨, 선씨 등
희귀성씨 대가족들이 대거 이주하면서
당산목 은행나무를 심었고 부군당을 설치.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했다고도 전한다.
조선 후기 강물로 사방이 격리된 밤섬은
자유분방한 연인들의 은밀한., 밀회 장소.
사랑하는 남녀가 이곳에서 미래를 악속
사이가 흔들리는 부부가 은행나무 믿에서
금술을 다지는 풍습이 있었다 전하는 금슬목.
현재, 밤섬은 물새들의 낙원.
밤섬에는 천연기념물 원앙 1종.
번식조류인 흰빰검둥오리, 개개비,
해오라기, 꼬마물떼새 등이 살고 있다.
또한. 철새 5,000여 마리도 매년 찾아온다.
식물은 버드나무, 갯버들, 용버들, 물억새 등 108종.
어류는 붕어, 잉어, 뱀장어, 누치, 쏘가리 등 28종 서식.
1988년 4월 LG그룹에서 2,970만원을 들여 갈대,
갯버들,버들강아지, 찔레 등 5만 8천 포기를 식재.
1999년 8월 10일에는 자연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
이에 따라 섬 출입이 전면 통제
여의도 순복음교회 앞 한강변에
철새 조망을 위한 한강조망대 설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