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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혜초(704~787년) 기행기.,'왕오천축국전'

작성자선경나라|작성시간17.05.23|조회수1,925 목록 댓글 0

실크로드 지도 

덩나라 시대.,실크로드.

실크로드 지도  

중국 실크로드 여행(1) 


한 무제 시대의 정치가.,장자문(張子文), 장건( 張騫)
BC 139년 장안을 출발하여 두 차례 서역행을 추진하여

실크로드 개척후 한나라에 서역의 각종 문물이 전파되고,

동서양 문물 교류가 활성화된다. 장건은., BC 114년 사망.  


................................실크로드..............................

중국의 장안(오늘날 시안)에서 로마까지의 동서양 교역로.

.

주로 비단을 교역하였다 하여 ‘비단길’이라는 뜻의 실크로드.

도자기, 향료, 차, 황금, 보석, 거울, 약재 등 셀 수 없이 많은

물품들이 낙타나 말의 등에 실려 이 기나긴 모랫길을 오갔다.


물품만 오간 것이 아니었다. 사람이 오가고, 문화가 오갔다.

불교, 기독교, 이슬람 교, 조로아스터 교도 이 길을 건너왔다.

천문학, 지리학, 수학, 나침반, 인쇄술, 화약이 유럽으로 건너갔다.


실크로드는 동서 간 문명 교류의 대동맥이었다.

1877년 독일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이 처음 사용한

이 길의 역사는 이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장구하다.


처음으로 실크로드를 개척한 이는 한 무제.,신하 장건(張騫).

한 전성기 무제의 큰 업적은 중원을 넘보던 흉노를 정벌한 것.

이 정복과정에서 기대 밖으로 서역과의 교역로를 확보하게된 것.

.

한 무제는 흉노원정 원군을 얻으려

중앙아시아로 사신 장건을 보냈던 것.


장건은 중간에 흉노 족에 붙들려 10년간 포로 생활.

우여곡절 끝에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에 해당하는

대월지국(박트리아)까지 다녀왔다. BC 138년경 일.


 장건은 이후에도 대완국(우즈베키스탄) 가는 길을 개척.

4차례 서역탐사를 했고 그가 처음 연 교통로가  실크로드.

이 길이 본격 활용된 시기는 500년이 지나 당나라 태종 때.


당 태종은 북방과 서방 이민족 복속과정에서

중앙아시아 파미르 고원까지 영토를 넓혔고,

자연스럽게 서역 국가들과 교역을 하게 되었다.


당나라 수도 장안은 당시 세계최대 국제 도시.

색목인(色目人)이라고 불리는 서역인들이 붐볐고,

거리에서는 세계 여러 나라의 언어를 들을 수 있었다.


대부분 실크로드를 지나온 이들이었다.

손오공이 등장하는 고전 《서유기》는

당시 승려 현장(삼장법사라고도 한다)이

서역에서 불경을 얻어 온 일을 엮어낸 것.

.......................................................


실크로드, 서안 

 실크로드, 서안

                                                                                                      실크로드.,서안

실크로드, 서안 

The Silk Road – 실크로드, 세계의 연결 

[공유] > 실크로드 지도 < 

 

신라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활약한 밀교 승려.

(704~787년) 경 인물인 것으로 추정되는 혜초

그가 쓴 인도 기행기.,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


우리 조상이 ‘초원길’로 왔다는 조덕영 교수의 주장은 허구 

 

1300년전 실크로드 육로 및 항로를 건넜던., 혜초

2013년 세계문명의 집합장 터키 이스탄불에서 부활. 

세계적인 실크로드 연구가들이 동서교류 역사를 재조명

 

 비록 혜초에 대한 논의가 빠져 있기는 하나

아라비아 고대문서에 '신라가 세계의 끝'으로

간주되어 실크로드 연구 새지평이 마련될 전망.

그당시 신라 경주는 세계 2 대 문명 길인

초원길과 비단길 출발점이자 종착점인 셈

 

따라서 '계림(신라)이 실크로드 하늘 끝 북쪽'

(왕오천축국전에 실린 혜초 시).,당시 신라인 세계관

1300년 만에 국제적으로 공인된 것으로 해석할 만 하다. 

 

 "아라비아어 고대문서에서 '신라를 세계의 끝'으로 간주

'유럽~중국~신라'로 이어지는 육로와 초원길., 해상 무역로

그당시 실크로드는 모두 신라의 경주로 이어졌다"고 밝혀졌다.

 

동서양 해상을 잇는.,신라의 항해술과 조선술.

 

 '이탈리아 로마 고대문화와 동서양 문화교류 흔적.'

 "5세기 초, 경주 신라 왕족무덤에서 발견된 부장품 중

시리아 등지에서 생산된 유리 그릇만 보아도 사실을 입증.

 

동서양 육로를 잇는.,신라의 외교술과 무역 상품.

 

실크로드를 통해 동서양과 교역한.,신라.

하여, 혜초의 여행기를 재조명해볼 만하다.

동서양 문명 교류 역사에 큰획을 그은.,혜초.


둔황에서 꿈을 꾸다 

 

신라 고승 혜초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 세계인.

(704~787년) 16살 때 첫번째 중국 유학을 떠난다.

 

그리고 다시 19 나이에 신라에서 중국 광저우를 출발,

파라사국(인도네시아)~ 천축(인도) 석가모니 성지순례

그당시 천축으로 가는 길은 바닷길이나 육로 모두 험난했다.

 

당시 여러 문헌에는 중도 탈락자,

사망자가 속출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충렬왕 때 보각국사., 일연스님


'일연(一然)은 "천축의 머나먼 길 만첩산인데,

가련하구나. 힘써 올라가는 유사들이여. 몇 번이나

저 달은 외로운 배를 보냈는가. 한 사람도 구름 따라

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삼국유사 -

 

혜초를 전후로 수많은 신라 유학승들이 천축 행에 도전

그러나 혜초를 제외하고 귀환한 사람에 대한 기록은 없다.
 
혜초는 석가모니 성지 순례 4년간 천축국과 서역을 5회 여행

 

20살 혜초는 고국 귀환을 목적으로 4년간.,기나긴 여정

다섯 천축국을 비롯 이란, 이라크, 시리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러시아, 동로마제국 등 40 여 나라를 여행했다.

인도~러시아~중국 장안 귀환길은 총 1만5000㎞.

비단길, 초원길과도 연결되며 눈 덮힌 파미르고원,

타클라마칸과 고비사막, 천산 산맥 등을 통과했다.

 

추위와 굶주림, 호랑이나 늑대같은 맹수들,

끝없는 평원, 거친 산맥을 혼자 넘어야 했다.

그당시 혜초에게는 지도도 나침반도 없었고,

오로지 정신력 만으로 길을 찾는 여정이었다.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 구름만 너울너울 고향으로 돌아가네.

 

나는 편지를 봉하여 구름 편에 보내려 하나

바람은 빨라 내 말을 들으려 돌아보지도 않네

 

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고

다른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

 

해가 뜨거운 남쪽에는 기러기가 없으니

누가 내 고향 계림으로 나를 위해 소식 전하리." -혜초 -

그당시 신라인 혜초의 세계관이

신라 경주가 동서문명의 시작점이자

종착점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신라 무덤 속 유리그릇과 유럽인 형상의 석상.

경주에 서양인들이 살았던 동서양 교류의 흔적.

 

로마 및 아랍문명이 신라에 도달했고,

또한 신라문명이 서역으로 전해진 증거

혜초가 간 초원길, 비단길, 동방해상로 등

 

그가 인도를 비롯한 해외를 다녀온 것도

이미 신라인들이 세계 경로를 파악한 증거.

혜초는 홀로 수만리를 걸어 인류 문명과 조우,

세계 국경과 사상, 인간, 종교의 경계를 넘었다.

그리고 기행문을 객관적인 필체로 담담히 적었다.

 
 
'왕오천축국전'은

오늘날 '동방견문록',

'이븐바투타 여행기',

'동유기'등 기록과 함께

세계 4대 여행기로 불린다.

 

1908년 2월. 프랑스 동양학자 폴 펠리오(1862~1943년)

 

중국 둔황 석굴에서 책 제목도, 저자 이름도 알 수 없는

두루마리 형태의 필사본 한 권을 발견, 파리로 가져간다.

파리로 귀환한 폴은 신라 승려 혜초가 지은 여행기로 확신. 


 1938년 독일 동양학자 발터 폭스(1902~1979년)가 번역

 비로소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은 세상에 드러아게 되었다.

'마르코 폴로' 보다 500년 앞서 비단길을 개척한 인물.,혜초.

 

혜초의 순례길은 전세계 역사상 그 유례가 없다.
여행기에는 출발점에서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시간,

방향, 머문 지역의 지배자와 언어, 관습, 풍토, 등을 기록.

왕이 소유한 코끼리, 각국의 종교 등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마르코 폴로는 동행할 지원부대, 낙타가 있었지만

혜초는 누구의 조력도 받지 않고 혼자 탐험과 고행.
19살 혜초가 여행했던 '중국~인도네시아~인도' 뱃길

 

훗날 중국 명나라 정화의 원정대가 이동한 동방 해상로

 혜초는 동서양 문명 이동로이자 해상로.,'정화의 항로'와

'비단길', '초원길'을 동시에 건넌 역사 상 유일무이한 사람.

여행 중 혜초는 결코 서두르지 않고,

느린 걸음으로 일관되게 걸어 나갔다.

 

또한 말이 통하는 사람과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 모두

만나서 대화하며 기록해 나갔다.

 

혜초는 이미 외국어에 능통한 증거.

중국어, 인도, 등 여러 나라의 외국어.

그당시 신라의 해외 역관들도 있었던듯. 
 

혜초가 먼길을 우회한데는

당시 살아서 돌아올 가능성이

가장 높은 길을 선택한듯 추정된다.

 

첫번째는 애초에 서역으로 갔던 해상길이다.

그러나 풍랑과 당시의 항해술로는 다시 살아서

귀환할 보장이 없고 계절풍이 있어야 갈 수 있는 길.

해상길 이동시 혜초가 일년간 인도네시아에 머문 이유

인도로 갈 수 있는 계절풍을 기다려야 했을 것이라는 분석

거꾸로 귀환할 때는 태풍을 만날 것으로 우려했을 수도 있다.


 
둘째, 방글라데시~ 태국 

인도차이나반도를 지나는

남방을 돌아오는.,여행계획.

 

그당시 길이 열려 있지 않았다.

열대우림 통과 또한 불가능한 일

 

세번째, 고준 영봉이 즐비한 히말라야 산맥과

티베트, 타클라마칸 사막 한복판을 건너는 길.

 

도상 거리 상으로는 가깝지만

7000m 고봉 산맥을 넘는다 해도

그 다음은 만년설 지대 파미르 고원

 

그 다음은 타클라마칸 사막.

동서 1000㎞, 남북 400㎞.,사막.

사막 한복판은 섭씨 50도 넘는 폭염

 

 
맨 마지막 이동로는

인도 ~아프가니스탄

비단길~초원길 루트

 

한나라 때부터 중동, 로마제국까지 연결

문명 교류가 폐쇄 개방이 반복되었던 곳

 

초원길은 우리 민족이 유라시아를 건너

동방에 이른 길이므로 알 수 있는 여행길.

어느 길로 가더라도 서쪽으로 이동

북방으로 향하면 살 가능성이 있다.

비록 길게 우회하는 길이 문제였다.

 

물론 피해갈 수 없는 히말라야 산맥이나

파미르 고원,고비 사막, 타클라마칸 사막

사람이 사는 곳을 이어 길을 열어냈던.,혜초.

 

 

1300 년전 혜초 作.,왕오천축국전
1908년 3월 프랑스 탐험가 펠리오 
둔황 천불동 석굴.,막고굴에서 발견.

 

부다가야에 있는 마하보디 大塔


 

 인도를 순례하고 있는 慧超(디지털 복원 상상도).

 
 
............................혜초.........................
신라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활약한 밀교 승려.
서기 700년 전후 출생, 중국 광저우[廣州]에서
인도 승려 금강지(金剛智)에게서 밀교를 배웠다.

그후 인도의 불교 유적을 순례하고 카슈미르,
아프가니스탄, 중앙 아시아 일대까지 답사했다.
그가 다시 장안(長安)으로 돌아온 것은 30세 전후

733년 장안의 천복사(薦福寺)에서 금강지와 함께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연구.
740년 금강지가 이 경을 번역할 때 필수(筆受)를 맡았다.

그러나 이듬해 가을 금강지가 죽어 이 사업은 중단되었으며,
금강지 유언에 따라 이 경 원문은 742년 다시 인도로 보내졌다.
773년경 금강지 제자 불공(不空)으로부터 이 경의 강의를 들었다.

불공은 6대 제자 가운데 2번째로 혜초를 꼽았다.
불공이 죽은 후 동료들과 함께 황제에게 글을 올려,
스승이 세웠던 사찰을 존속시켜달라고 황제에게 청원.

그뒤 수년 동안 중국 장안에 머물다가,
780년 불공이 활동했던 오대산으로 갔다.

그뒤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 머물면서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
한역과 한자음사(漢字音寫)를 시도하여 채록.

이후의 기록은 전하지 않으며
신라로 귀국하지도 않았던 듯.
.........................................  
 

 

중국 서안시 주지현에 세워진「신라국慧超기념비」.


 

힌두교의 聖地 갠지스江에서 목욕하는 인도인들.


 

慧超가 중국 황제의 命을 받아 祈雨祭를 올린 선유사.

현재 댐건설로 수몰되어 塼塔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었던 열반처.

인도 정부에서 열반지 위에 덧씌운 건물.

 

신라 호국불교의 요람.,지리산
삼국시대 융성했던 우리나라 불교.
통일신라에서 고려 시대까지 전성기.

당나라와 외교가 밀접했던 신라.
그당시 국제 정세에 민감했던 신라'
동아시아 불교 선진문명도 받아들인듯

멀리 인도제국까지 오간 신라 고승들.
신라의 지리산 불토정국 성역화에 큰 공헌.
아울러, 세계 각국 선진문명을 도입한 주역들.

동서양을 하나로 이어주었던 실크로드.
해상 및 육상 실크로드가 발달했던 신라.
7~8세기 경에 동서양 각국과 교류한 흔적.

'신라 항로는.. 놀랍게도 오늘날 수준.'

불교 종주국인 인도까지 여행했던 혜초.
당나라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며 83세 타계
신라 고승 혜초가 쓴 기행문 '왕오천축국전' 

통일신라 승려 혜초(704~787)가 지은 인도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은 '5천축국(인도) 여행기록이란 뜻'
인도 대륙을 동서남북과 중앙으로 구분해 부른 이름.

1908년 3월 프랑스 탐험가 펠리오
중국 둔황의 천불동 석굴에서 발견

내용은 중부 인도 갠지스강 유역 마가다국 기행에서 시작.
불교 유적이 많은 곳이나, 혜초 방문 당시는 힌두교가 성행.
그는 석가모니가 입멸한 쿠시나가라(Kusingara)까지 찾아갔다.

이곳에 있는 다비장(茶毘場)과 열반사(涅槃寺) 등을 기록.
1개월 동안 다시 남쪽을 여행해 바라나시(Varanasi)에 도착,
석가모니가 처음 설법한 녹야원(鹿野苑)을 방문하기도 했다.

혜초가 방문하기 약 1세기 전에

당나라 현장(玄)도 찾았던 녹야원.

다시 동쪽으로 가 라자그리하(Rjagrha)에서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참배하고,
'<법화경〉의 설법지' 영취산(靈鷲山)을 방문했다.

그리고 세존이 대각(大覺)을 이룬 부다가야를 거쳐,
서북쪽으로 향해 중천축국의 수도 카나우지로 갔다.
왕은 코끼리 900 마리, 대수령들은 200~300마리 보유

여기서 인도 전역의 기후와 풍속을 총괄적으로 서술
음식은 쌀로 빚은 떡, 미숫가루, 우유, 소금 등이 있고
장(醬)은 없고, 가축사육은 않지만 소는 기른다고 했다.

다음 여행지는 남천축국인데 현재 데칸 고원이다.
용수보살이 신력으로 세웠다는 당시 폐허인 산속 사원
이후 서북쪽으로 향해 서천축국을 거쳐 북천축국을 방문.

현재 파키스탄 남부와 간다라 문화 중심지를 차례로 방문.
이어 북쪽 현재 카슈미르(Kashmir) 지방을 거쳐 대발률(大勃律)
소발률(小勃律) 등을 방문 후, 간다라 지방을 거슬러 내려오면서
스와트,·길기트,·페샤와르, 오장국(烏長國),구위국(拘衛國)을 답사

이곳은 모두 투르크족이 지배하고 있지만,
불교가 상당히 널리 믿어지고 있다고 기록.
이후 실크로드를 따라 서부 투르키스탄 방문.

그의 오천축국 순력은 끝난다.
그곳에 상당 기간 머물렀던 기록
(아프가니스탄과 소련의 국경지대)

특히 이 지역은 동서 교통의 요지인 관계로
인근 페르시아나 사라센, 동로마 제국까지 언급.
이후 파미르 고원 넘어 당의 안서도호부 쿠차에 도달

727년 11월에 이 여행기는 끝난다.
8세기 인도와 중앙 아시아에 관한 한
세계에서 유일한 여행기., 왕오천축국전

1909년 중국 학자 뤄전위에 의해 처음 알려졌고
1915년 일본 다카쿠스가 혜초의 기록임을 밝혔다.
왕오천축국전은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
왕오천축국전 요점 정리
........................

연대 : 신라 성덕왕(727)때
갈래 : 기행 수필
작자 : 혜초
구성 : 병렬식
성격 : 성지 순례기
출전 : 왕오천축국전

의의 : 우리나라 최초로 외국 불교유적 순례기.


줄거리

혜초는 중국 남쪽 광주(廣州)에서
배를 타고 동인도로 들어간다.

먼저 나체의 나라를 구경하고
석가가 입멸(入滅)한 구시나국에 도착하여
그 곳의 풍물을 구경한다.

이어 파라나시국 등 인도의 각 지역과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옛 소련 국경 지대를 비롯 중앙아시아, 파미르 고원 등을 거쳐
중국으로 돌아오면서 각 지역에 대한 정세와 풍물 등을 기록했다.


내용 연구

이 녹야원(鹿野苑)과 구시나(拘尸那)와 사성(舍城)과
마하보리의 영탑(靈搭)이 모두 마가다국 경계 안에 있다.
이 파라나시국에는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가 같이 시행된다.

마하보리사 예방은 평소 숙원이었기에 무척 기쁘다.
이 기쁨을 감출 길 없어 이 뜻을 시로 읊어 보았다.

보리사가 멀다고

근심할 것 없었는데
녹야원이 먼들 어찌하리요.

다만 멀고 험한 길이 근심이 되나
불어닥치는 악업(惡業)의 바람은 두렵지 않네.

여러 차례의 탑을 보기 어려움은

여러 차례의 큰 불에 타버렸음이라.
어찌해서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 줄거나
오늘 아침부터 이 눈으로 똑똑히 보오리.

마하보리사 방문의 기쁨과 감격

이 파라나시국에서 반달을 걸어서
중천축의 국왕이 살고 있는 성에 도착하였다.
이 이름은 갈나급자(葛那及自)이다.

이 중천축국의 영토는

무척 넓고 백성이 많이 산다.

왕은 코끼리 백 마리를 가지고 있고,
그밖에 큰 수령이 다 각기 3백 또는
2 백마리의 코끼리를 가지고 있다.

그 왕은 언제나 스스로 병마를 거느리고 싸움을 잘 하는데,
항상 주변 네 천축국과 싸우면 이 중천축의 국왕이 이겼다.

싸움에 진 나라는 코끼리도 적고 병력도 적어 이기지 못해
곧 강화하길 청하여 해마다 공물을 바치기로 약속하고 휴전.


<중천축국 세력과 주변국 정세>

의복과 언어, 풍속, 그리고 법은 다섯 천축국이 비슷.
오직 남천축의 시골 백성들 언어가 다른 곳과 약간 차이
벼슬아치들의 언어와 생활은 중천축국과 다른데가 없다.

이 다섯 천축국의 법에는 죄수의 목에 칼을 씌우거나,
몽둥이로 때리거나 또는 가두는 감옥 같은 것은 없다.
죄의 경중에 따라 벌금을 물릴 뿐, 사형 제도도 없다.

위로 국왕에서부터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사냥 매를 날리거나 개를 사용하는 일은 없다.

길에 도적이 많기는 하나 물건만 빼앗고는
풀어 보내고 죽이거나 해를 끼치지 아니한다.
그러나 물건 주길 꺼리면 해를 끼치기도 한다.

<다섯 천축국의 사회상과 풍속>

.................해설......................
녹야원 : 사슴이 많은., 석가 최초 설법지.
왕사성(王舍城) : BC 5세기까지 마가다국 수도.
불교 사상 최초의 정사(精舍)가 세워진 곳이다.

마하보리 : 대각(大覺)의 뜻. 사찰(寺刹)이름.
대승(大乘) : 열반의 피안에 도달하게 하는 불교의 한 유파.
이와 달리 중생이 모두 부처가 되기는 어렵다고 보는., 소승.

갈나급자(葛那及自) : 현재의 카나우지.
당 현장법사 서역기(西域記)에 곡녀성(曲女城)

공물(貢物) : 종주국에 바치던 특산물.
천축(天竺) : 중국에서 부르던 인도의 옛이름.
.................................................

신라 승려 혜초의 불적 순례(巡禮) 견문 기행문.
이 여행기는 마가다국 녹야원에서부터 시작하여,
석가가 보리수 아래서 오도(悟道)했다는 부다가야

그곳 마하보리사·중천축국·남천축국(데칸 고원),
그리고 북천축국으로 북상하여 캐시미르·간다라·
토하라 각지를 둘러보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
당의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가 자리잡고 있는
구자(龜玆)에 도달하고, 기록도 여기서 끝난다.

이러한 긴 여행에서 불교에 관한 것을 중심으로
정세·지리·풍속·언어 및 여수(旅愁)까지 담고 있다.
또, 이 기록은 1200년 전 중국과 인도 여로를 알려준다.

그리고 이것이 외국 기행문으로서 첫 작품이고,
풍물과 여정을 노래한 오언 율시(五言律詩) 5수
인도, 중앙아시아 정세와 풍습을 기록한 귀한 자료


'파라나시국, 중천축국' 견문 기행록.

신라시대 승려 혜초(慧超)가 지은 인도 여행기. 1권.
필사본. 완질이 남아 있지 않고, 일부분 만이 현존.

1908년 3월 프랑스의 탐험가였던 펠리오(Pelliot,P.)
중국 돈황(敦煌)의 천불동(千佛洞)에서 발견하였다.
원래는 3권, 현존본은 약본, 앞뒤가 떨어져 나갔다.

현존본은 동부 인도 기행으로부터 비롯되는데,
그곳에 나체족(裸體族)이 살고 있다고 하였다.

이어 쿠시나가라(Kushin─ gara)에 대한 견문이며,
석가모니가 입멸한 다비장, 열반사(涅槃寺)를 기록.

한 달 동안 남쪽으로 여행하여 바라나시 도착.
석가가 오비구(五比丘)를 위해 최초 설법한 곳.

다시 동쪽으로 여행하여 라자그리하(王舍城) 도착.
불교 역사상 최초의 사원 죽림정사(竹林精舍) 참배
법화경(法華經) 설법지 영축산(靈鷲山)을 방문했다.

다시 남쪽으로 길을 잡아
세존이 대각(大覺)을 이룬
부다가야(Buddhagaya) 참배
대각사(大覺寺) 보리수 언급

이어 서북쪽 중천축국에 도착.
사대영탑(四大靈塔) 각각을 방문
석가 탄생지 룸비니(Lumbini) 방문

다음 여행지로서는 남천축국인데
아잔타·엘로라 방문 흔적이 없다.

다시 서북으로 방향을 돌려
서천축국 거쳐 북천축국 방문

지금 파키스탄 남부 및 간다라
그 서쪽 파키스탄 서북 일대 답사.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현재의 카슈미르 지방을 거쳐
대발률(大勃律)·소발률(小勃律) 방문

이번에는 거꾸로 간다라 지방을 거슬러 내려와
스와트·길기트·페샤와르 등지를 방문하였고,
그 북쪽 오장국(烏長國)·구위국(拘衛國)도 답사.
다시 실크로드 따라 아프가니스탄을 지나 바미안.

이곳에서 북쪽으로 현재 아프가니스탄과
소련의 국경지대인 투카라(吐火羅)로 간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페르시아(Persia)를 지난다.

안국(安國)·조국(曹國)·석과국(石景國)·
페르가나국(跋賀那國) 등은 방문하지 못한 채,
그 일대에서 수집한 그곳 이야기 만을 기록했다.

그들은 불교를 모르고 배화교(拜火敎)를 믿으며,
어머니와 자매도 아내로 맞는 진기한 풍속을 소개.

바미안이나 카피스 등에서는 형제가 몇이건
공동으로 한 아내를 맞이한다고 기록하였다.

그곳에서부터 중국으로의 귀로를 잡아 동쪽으로
지금의 파미르고원에 있던 호밀국(胡蜜國)을 지나
식야국(識匿國)을 거친 다음 총령(升嶺)을 지나
지금의 중국 영토인 갈반단국(渴飯檀國)에 도착.

동쪽으로 카시카르를 지나 구주국(龜註國)에 도착
727년(성덕왕 26) 11월 상순 그의 여행기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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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오천축국전≫은 약본이기 때문에
인도, 중앙아시아에 관한 서술이 간략.
육로와 해로가 같이 언급된 점이 특징.

8세기 인도 중앙아시아에 관한 유일한 기록.

인도왕들이 코끼리 병력을 얼마나 소유했는지,
아랍 제국이 얼마만큼 인도로 세력을 펼쳤는지
튀르크족 한족(漢族) 지배받던 나라가 어디이며,
그 생활수준은 어떠하였는가 등도 상세하게 언급.

대승이나 소승이 각각 어느 정도 행해지고 있는지,
음식 의상 습속 산물 기후 등도 각 지방마다 기록.

중부 인도에서 어머니나 누이를 아내로 삼는다거나,
여러 형제가 아내를 공유하는 풍습이 있다는 기록은
사실과 부합하므로 이 자료의 신빙성을 입증하고 있다.

인도에는 감옥 사형제도가 없고,
죄인은 벌금으로 다스린다는 기록,

카슈미르지방에는 여자 노예가 없고,
인신매매가 없다는 등의 기록이 그것.

혜초는 당시로 보아 국제적인 승려였음에 틀림없다.
신라에서 태어났고, 어렸을 때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또 인도를 다녀왔다는 그의 행적은 무척 흥미 있는 일.

혜초가 여행할 당시 불타 유적은 황폐해 가고
사원은 있으나 승려가 없는 곳이 있는가 하면
승려 3,천명 사원에 공양미가 매일 15석이 소요.
그러나, 공양미 조달이 안되어 유지하기 어려웠다.

북방에는 사원과 승려 및 신자가 많아
아내와 코끼리까지도 사시하는 독신자
나체 생활, 여러 형제에 아내 한 사람
살생하지 않는 것, 흙솥에 밥 짓기 등
여러가지 색다른 풍습이 기록되어 있다.

중국 시안(西安)에서 비행기로 2시간 30여분을
서북쪽으로 날아 도착한 간쑤성(甘肅省) 둔황(敦煌).
모래 울음소리 들린다는 명사산 동쪽 절벽 둔황 막고굴

1,000 부처상을 모신다는 신념
4세기부터 석굴을 판 불토의 땅.

신라 혜초(慧超ㆍ704~787) 스님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기록.
이곳에서 약 1,100년을 잠자고 있었다.

'항하(갠지스강) 북안에 3개의 큰 탑이 있다.
셋째 탑은 부처가 태어난 가비야라국에 있다.
마야 부인이 그 밑에서 부처를 낳았다는 보리수.

그러나 성은 이미 황폐해져
탑은 있으나 스님은 없었다.

막고굴은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석굴.
당 말기 5만권 불교 서적이 무더기로 발견.
지금은 중국 스님 소조상과 벽화만 남아있다.

왕오천축국전은 230줄에 한 줄은 30자 내외,
총 6,000여 글자에 불과한 짤막한 기행 기록.
혜초가 723년부터 5년 여 동안 여행한 기행문.

풍속은 고약하여 혼인을 서로 뒤섞어 하고,
어머니나 자매를 아내로 맞아 들인 페르시아
형제가 열 이거나 다섯 명이거나 아내는 하나.

람파카국에서 서쪽 산속으로 8일을 가면 카피스국
이 나라에서 낙타 노새 양 말 포도 보리 밀을 생산
삼보(三寶)를 공양하는데 큰 성안에 절 하나 뿐이다.

그 절에는 부처의 머리카락 뼈 사리 등이 보관.
왕 벼슬아치 백성이 매일 공양하는 소승 불교국.

당시 당 수도 장안(長安)은 실크로드의 출발점
대식국(아라비아) 사람의 성질은 무역을 좋아해
사자국(실론)까지 가서 여러가지 보물을 가져온다.

곤륜국까지도 가서 금을 무역해오고,
곧장 광저우(廣洲)까지 가서 능(엷은 비단)
견사(명주실) 솜을 무역하는데 살생을 좋아하고
하느님을 섬기되 불법을 모른다.' - 혜초의 기록 -

16세 때 광저우로 건너가 평생 경전 연구를 한 혜초
'왕오천축국전'을 쓰고 83세에 열반 때까지 타향살이.

혜초가 향수를 달래며 5년 여행을 마치고
신장 자치구 쿠차에 도착한 727년 11월 상순
'왕오천축국전' 말미에 혜초가 쓴 인상적인 글귀

"여기서 동쪽은
누구나 잘 아는
중국의 본토이니
더 기술하지 않겠다"

구도 여행을 마치고 서역에서
중국의 관문 양관에 도착했을 때
혜초의 심경이 잘 담겨있는 듯 하다.

그가 70세 때 당나라 명승 불공(705~774)의
6대 제자 가운데에서 두 번째 제자가 된 것도
이 기행에서 얻은 깨달음의 덕분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역시 몇 번이고 눈길이 가는 것은
혜초가 인도 남천축국에서 고향을 그리는 시.

'달 밝은 밤에 고향 길을 바라보니
뜬 구름은 너울너울 고향으로 돌아가네

편지를 봉하여 구름 편에 보내려 하나
바람은 빨라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네

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고
다른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

해가 뜨거운 남쪽에는 기러기가 없으니
누가 내 고향 계림(鷄林)으로 소식 전해줄까.'

 

 

막고굴

 

 

 

돈황석굴은 돈황 시내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절벽 벽면에 남북으로 1.8km에 걸쳐 만든 석굴사원

여러 층으로 뚫린 석굴은 현재 확인된 것만도 492개

 

 2천여 개 불상과, 총 면적이 4500㎡에 이르는.,벽화.

사막(莫)의 높은 곳(高) 석굴(窟)이라 하여 막고굴(莫高窟)

전성기에는 석굴 수가 천 개가 넘어 천불동(千佛洞)이란 별명


천년을 이어진 상인과 순례자의 불심

전진시대 낙준스님은 수행 장소를 구하기 위해 돈황에 들렀다가

절벽 앞의 장엄한 일출이 마치 천불을 보는 것 같아 굴을 뚫기 시작

이때부터 13세기 원대까지 천 년에 걸쳐 굴이 더 만들어져 동굴 사원

 

승려들이 승방으로 사용하면서 막고굴은

돈황주민과 대상들의 신앙의 성지로 변모.

▲ 막고굴은 그 절벽에 남북으로 1.8km에 걸쳐 만들어진 석굴

 

막고굴이 신앙의 성지로 빠르게 유명해진 것은

당시의 불안정한 시대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굴들이 조성되었을 당시는 5호16국 중 하나인

전량(前凉)이 돈황을 지배하고 있던 시기였다.


상인들과 순례자들은 이곳에서 힘든 여행길을 앞두고

부처님께 안전한 귀향을 빌며 돈과 불상을 시주했는데

이를 바탕으로 벽화가 그려진 새로운 석굴이 생겨났다.

석굴군은 남쪽지구 남굴과 북쪽지구 북굴로 나눠진다.

남굴은 벽화와 불상들로 내부 장식이 되어 있는 반면,

북굴군의 석굴들은 벽화가 내부에 장식되어 있지 않고

석굴 안에서 바깥으로 이어지는 굴뚝이 만들어져 있다.

 

승방과 수행도량의 선원으로 사용된.,막고굴

 

▲ 북굴군의 석굴들은 벽화가 내부에 장식되어 있지 않고 바깥으로 이어지는 굴뚝이 만들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스님들이 기거한 승방과 수행도량의 선원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막고굴 제96굴의 누각.

높이 34.5m의 북대불.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대불이 있는 <제96굴>

기록에 의하면 측천무후 원년(695년)

영은선사와 음거사가 만든 것이라 한다.

대불의 높이는 34.5m로 돈황석굴 중 최대 규모.


<제130굴>에는 두 번째로 큰 26m의 미륵불이 있다.

풍만한 얼굴에 온화한 표정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96굴 남쪽에 있어 북대불의 반대 의미인 남대불(南大佛)


 

▲ <제130굴> 섬세한 손이 아름다운 26m 높이의 남대불(南大佛)

<제259굴>은 북위시대 석굴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2개의 불상이 있는데 화관 등 힌두교 양식이 섞여 있다.

아잔타의 석불과 매우 유사하다. 이것들은 모두 목심불.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진흙을 붙여 만든 것이다.

가사를 몸에 두른 다보여래상은 깨달음의 순간

미소를 띠는 모습이 아름다워 '동방의 모나리자'.

▲ <제259굴> 깨달음의 순간의 미소를 표현한 동방의 모나리자

벽이 깨지자 드러난 보물들

돈황이 토번의 지배에서 벗어난 당 선종 때(848년),

당시 돈황의 유력가인 장의조가 그를 도와준 고승

홍변의 자문을 받아 <제16굴>을 만들었다.

 

16굴의 입구 오른쪽에 있는 작은 동굴이 <제17굴>이다.

이 굴은 홍변의 영굴(影窟), 즉 그를 위한 기념굴이다.

굴의 정면에는 단정하게 앉은 94㎝의 홍변상이 있다.

17굴이 5만 여권의 희귀한 서적들을 발견했던 장경동(藏經洞).

 

1908년 16굴 입구 모래와 먼지를 제거하자 벽이 갈라지며 뚫린 구멍

벽을 깨뜨리자 길이와 너비가 각각 3미터인 작은 굴 안에는 경서와 문서,

자수, 회화, 탁본 등 5만여 점의 보물이 가득 쌓여 있었다.

▲ 16굴 입구 모래와 먼지를 제거하자 벽이 갈라지면서 구멍이 뚫렸다. <17굴>에는 경서와 문서, 자수, 회화, 탁본 등 5만여 점의 보물이 가득 쌓여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 중 하나인 <금강경>을 비롯한

이곳에 있던 7천여 권의 고서적을 대영박물관으로 가져갔다.

 

이어 프랑스의 펠리오가 나머지를 약탈해갔는데

신라 혜초스님이 남긴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도

주인을 잊은 채 프랑스로 가게 된다.

▲ 여러 층으로 뚫린 석굴은 현재 확인된 것만 492개 이고,

2천여 개의 불상, 총 면적이 4,500㎡에 이르는 벽화가 있다.

 

 

 

덧 말.

 

 

혜초는 704~787년 경 출생 사망한 인물로 추정된다.

그는 장보고(? ~846) 보다 1세기 이상 앞선.,인물이다.

의상대사(625 ~702) 처럼 당나라로 유학 간., 밀교 승려.

 

의상은 당나라를 여행하고 중난산에서 공부 했고

그곳에서 화엄을 접하고, 신라로 돌아와 화엄종 창시.

신라는 661년(문무왕) ~719년(성덕왕).,경주 남산 성역화.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 군,

선도산 서악리 마애삼존불 등.

 

신라 역대 왕들은 전통적으로

호국불교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밀교 승려를 해외에 파견 유학보냈다.

 

'밀교 승려'들의 기행기를 통해

호국불교 불토정국을 조성한 신라.

사찰, 탑, 불상, 경전, 풍습, 정치.경제.

 

719년(성덕왕 18년) 불교문화 전성기였던.,통일신라. 

그해 16 나이 혜초는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듯 추정된다.

성덕왕(재위 702∼732) 때까지 극 배출한 화랑은 200 여명.

 

어린 청소년들을 화랑으로 양성

삼국통일 인재들을 배출했던.,신라.

혜초는 화랑 '밀교 승려'로 추정된다.

 
그당시 화랑은 무장(武將) 신분으로

사령자(司靈者) 성격도 겸했던.,시기.

왕명을 받들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듯..

 

혜초가 '화랑' 신분이 아니라면

소화해 낼 엄두조차 나지 않을 만큼

목숨을 걸어야 하는 험난한 여행 일정.

 

'왕오천축국전' 기행기(紀行記)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물로 충분하다.

인도 5국을 여행하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수필, 일기, 편지 등의 형식을 빌려 쓴 그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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