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나라 시대.,실크로드.
한 무제 시대의 정치가.,장자문(張子文), 장건( 張騫)
BC 139년 장안을 출발하여 두 차례 서역행을 추진하여
실크로드 개척후 한나라에 서역의 각종 문물이 전파되고,
동서양 문물 교류가 활성화된다. 장건은., BC 114년 사망.
................................실크로드..............................
중국의 장안(오늘날 시안)에서 로마까지의 동서양 교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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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비단을 교역하였다 하여 ‘비단길’이라는 뜻의 실크로드.
도자기, 향료, 차, 황금, 보석, 거울, 약재 등 셀 수 없이 많은
물품들이 낙타나 말의 등에 실려 이 기나긴 모랫길을 오갔다.
물품만 오간 것이 아니었다. 사람이 오가고, 문화가 오갔다.
불교, 기독교, 이슬람 교, 조로아스터 교도 이 길을 건너왔다.
천문학, 지리학, 수학, 나침반, 인쇄술, 화약이 유럽으로 건너갔다.
실크로드는 동서 간 문명 교류의 대동맥이었다.
1877년 독일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이 처음 사용한
이 길의 역사는 이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장구하다.
처음으로 실크로드를 개척한 이는 한 무제.,신하 장건(張騫).
한 전성기 무제의 큰 업적은 중원을 넘보던 흉노를 정벌한 것.
이 정복과정에서 기대 밖으로 서역과의 교역로를 확보하게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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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무제는 흉노원정 원군을 얻으려
중앙아시아로 사신 장건을 보냈던 것.
장건은 중간에 흉노 족에 붙들려 10년간 포로 생활.
우여곡절 끝에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에 해당하는
대월지국(박트리아)까지 다녀왔다. BC 138년경 일.
장건은 이후에도 대완국(우즈베키스탄) 가는 길을 개척.
4차례 서역탐사를 했고 그가 처음 연 교통로가 실크로드.
이 길이 본격 활용된 시기는 500년이 지나 당나라 태종 때.
당 태종은 북방과 서방 이민족 복속과정에서
중앙아시아 파미르 고원까지 영토를 넓혔고,
자연스럽게 서역 국가들과 교역을 하게 되었다.
당나라 수도 장안은 당시 세계최대 국제 도시.
색목인(色目人)이라고 불리는 서역인들이 붐볐고,
거리에서는 세계 여러 나라의 언어를 들을 수 있었다.
대부분 실크로드를 지나온 이들이었다.
손오공이 등장하는 고전 《서유기》는
당시 승려 현장(삼장법사라고도 한다)이
서역에서 불경을 얻어 온 일을 엮어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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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서안

신라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활약한 밀교 승려.
(704~787년) 경 인물인 것으로 추정되는 혜초
그가 쓴 인도 기행기.,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
1300년전 실크로드 육로 및 항로를 건넜던., 혜초
2013년 세계문명의 집합장 터키 이스탄불에서 부활.
세계적인 실크로드 연구가들이 동서교류 역사를 재조명
비록 혜초에 대한 논의가 빠져 있기는 하나
아라비아 고대문서에 '신라가 세계의 끝'으로
간주되어 실크로드 연구 새지평이 마련될 전망.
그당시 신라 경주는 세계 2 대 문명 길인
초원길과 비단길 출발점이자 종착점인 셈
따라서 '계림(신라)이 실크로드 하늘 끝 북쪽'
(왕오천축국전에 실린 혜초 시).,당시 신라인 세계관
1300년 만에 국제적으로 공인된 것으로 해석할 만 하다.
"아라비아어 고대문서에서 '신라를 세계의 끝'으로 간주
'유럽~중국~신라'로 이어지는 육로와 초원길., 해상 무역로
그당시 실크로드는 모두 신라의 경주로 이어졌다"고 밝혀졌다.
동서양 해상을 잇는.,신라의 항해술과 조선술.
'이탈리아 로마 고대문화와 동서양 문화교류 흔적.'
"5세기 초, 경주 신라 왕족무덤에서 발견된 부장품 중
시리아 등지에서 생산된 유리 그릇만 보아도 사실을 입증.
동서양 육로를 잇는.,신라의 외교술과 무역 상품.
실크로드를 통해 동서양과 교역한.,신라.
하여, 혜초의 여행기를 재조명해볼 만하다.
동서양 문명 교류 역사에 큰획을 그은.,혜초.
신라 고승 혜초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 세계인.
(704~787년) 16살 때 첫번째 중국 유학을 떠난다.
그리고 다시 19 나이에 신라에서 중국 광저우를 출발,
파라사국(인도네시아)~ 천축(인도) 석가모니 성지순례
그당시 천축으로 가는 길은 바닷길이나 육로 모두 험난했다.
당시 여러 문헌에는 중도 탈락자,
사망자가 속출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충렬왕 때 보각국사., 일연스님
'일연(一然)은 "천축의 머나먼 길 만첩산인데,
가련하구나. 힘써 올라가는 유사들이여. 몇 번이나
저 달은 외로운 배를 보냈는가. 한 사람도 구름 따라
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삼국유사 -
혜초를 전후로 수많은 신라 유학승들이 천축 행에 도전
그러나 혜초를 제외하고 귀환한 사람에 대한 기록은 없다.
혜초는 석가모니 성지 순례 4년간 천축국과 서역을 5회 여행
20살 혜초는 고국 귀환을 목적으로 4년간.,기나긴 여정
다섯 천축국을 비롯 이란, 이라크, 시리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러시아, 동로마제국 등 40 여 나라를 여행했다.
인도~러시아~중국 장안 귀환길은 총 1만5000㎞.
비단길, 초원길과도 연결되며 눈 덮힌 파미르고원,
타클라마칸과 고비사막, 천산 산맥 등을 통과했다.
추위와 굶주림, 호랑이나 늑대같은 맹수들,
끝없는 평원, 거친 산맥을 혼자 넘어야 했다.
그당시 혜초에게는 지도도 나침반도 없었고,
오로지 정신력 만으로 길을 찾는 여정이었다.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 구름만 너울너울 고향으로 돌아가네.
나는 편지를 봉하여 구름 편에 보내려 하나
바람은 빨라 내 말을 들으려 돌아보지도 않네
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고
다른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
해가 뜨거운 남쪽에는 기러기가 없으니
누가 내 고향 계림으로 나를 위해 소식 전하리." -혜초 -
그당시 신라인 혜초의 세계관이
신라 경주가 동서문명의 시작점이자
종착점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신라 무덤 속 유리그릇과 유럽인 형상의 석상.
경주에 서양인들이 살았던 동서양 교류의 흔적.
로마 및 아랍문명이 신라에 도달했고,
또한 신라문명이 서역으로 전해진 증거
혜초가 간 초원길, 비단길, 동방해상로 등
그가 인도를 비롯한 해외를 다녀온 것도
이미 신라인들이 세계 경로를 파악한 증거.
혜초는 홀로 수만리를 걸어 인류 문명과 조우,
세계 국경과 사상, 인간, 종교의 경계를 넘었다.
그리고 기행문을 객관적인 필체로 담담히 적었다.
'왕오천축국전'은
오늘날 '동방견문록',
'이븐바투타 여행기',
'동유기'등 기록과 함께
세계 4대 여행기로 불린다.
1908년 2월. 프랑스 동양학자 폴 펠리오(1862~1943년)
중국 둔황 석굴에서 책 제목도, 저자 이름도 알 수 없는
두루마리 형태의 필사본 한 권을 발견, 파리로 가져간다.
파리로 귀환한 폴은 신라 승려 혜초가 지은 여행기로 확신.
1938년 독일 동양학자 발터 폭스(1902~1979년)가 번역
비로소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은 세상에 드러아게 되었다.
'마르코 폴로' 보다 500년 앞서 비단길을 개척한 인물.,혜초.
혜초의 순례길은 전세계 역사상 그 유례가 없다.
여행기에는 출발점에서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시간,
방향, 머문 지역의 지배자와 언어, 관습, 풍토, 등을 기록.
왕이 소유한 코끼리, 각국의 종교 등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마르코 폴로는 동행할 지원부대, 낙타가 있었지만
혜초는 누구의 조력도 받지 않고 혼자 탐험과 고행.
19살 혜초가 여행했던 '중국~인도네시아~인도' 뱃길
훗날 중국 명나라 정화의 원정대가 이동한 동방 해상로
혜초는 동서양 문명 이동로이자 해상로.,'정화의 항로'와
'비단길', '초원길'을 동시에 건넌 역사 상 유일무이한 사람.
여행 중 혜초는 결코 서두르지 않고,
느린 걸음으로 일관되게 걸어 나갔다.
또한 말이 통하는 사람과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 모두
만나서 대화하며 기록해 나갔다.
혜초는 이미 외국어에 능통한 증거.
중국어, 인도, 등 여러 나라의 외국어.
그당시 신라의 해외 역관들도 있었던듯.
혜초가 먼길을 우회한데는
당시 살아서 돌아올 가능성이
가장 높은 길을 선택한듯 추정된다.
첫번째는 애초에 서역으로 갔던 해상길이다.
그러나 풍랑과 당시의 항해술로는 다시 살아서
귀환할 보장이 없고 계절풍이 있어야 갈 수 있는 길.
해상길 이동시 혜초가 일년간 인도네시아에 머문 이유
인도로 갈 수 있는 계절풍을 기다려야 했을 것이라는 분석
거꾸로 귀환할 때는 태풍을 만날 것으로 우려했을 수도 있다.
둘째, 방글라데시~ 태국
인도차이나반도를 지나는
남방을 돌아오는.,여행계획.
그당시 길이 열려 있지 않았다.
열대우림 통과 또한 불가능한 일
세번째, 고준 영봉이 즐비한 히말라야 산맥과
티베트, 타클라마칸 사막 한복판을 건너는 길.
도상 거리 상으로는 가깝지만
7000m 고봉 산맥을 넘는다 해도
그 다음은 만년설 지대 파미르 고원
그 다음은 타클라마칸 사막.
동서 1000㎞, 남북 400㎞.,사막.
사막 한복판은 섭씨 50도 넘는 폭염
맨 마지막 이동로는
인도 ~아프가니스탄
비단길~초원길 루트
한나라 때부터 중동, 로마제국까지 연결
문명 교류가 폐쇄 개방이 반복되었던 곳
초원길은 우리 민족이 유라시아를 건너
동방에 이른 길이므로 알 수 있는 여행길.
어느 길로 가더라도 서쪽으로 이동
북방으로 향하면 살 가능성이 있다.
비록 길게 우회하는 길이 문제였다.
물론 피해갈 수 없는 히말라야 산맥이나
파미르 고원,고비 사막, 타클라마칸 사막
사람이 사는 곳을 이어 길을 열어냈던.,혜초.
1300 년전 혜초 作.,왕오천축국전
1908년 3월 프랑스 탐험가 펠리오
둔황 천불동 석굴.,막고굴에서 발견.
............................혜초......................... 신라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활약한 밀교 승려. 서기 700년 전후 출생, 중국 광저우[廣州]에서 인도 승려 금강지(金剛智)에게서 밀교를 배웠다. 그후 인도의 불교 유적을 순례하고 카슈미르, 아프가니스탄, 중앙 아시아 일대까지 답사했다. 그가 다시 장안(長安)으로 돌아온 것은 30세 전후 733년 장안의 천복사(薦福寺)에서 금강지와 함께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연구. 740년 금강지가 이 경을 번역할 때 필수(筆受)를 맡았다. 그러나 이듬해 가을 금강지가 죽어 이 사업은 중단되었으며, 금강지 유언에 따라 이 경 원문은 742년 다시 인도로 보내졌다. 773년경 금강지 제자 불공(不空)으로부터 이 경의 강의를 들었다. 불공은 6대 제자 가운데 2번째로 혜초를 꼽았다. 불공이 죽은 후 동료들과 함께 황제에게 글을 올려, 스승이 세웠던 사찰을 존속시켜달라고 황제에게 청원. 그뒤 수년 동안 중국 장안에 머물다가, 780년 불공이 활동했던 오대산으로 갔다. 그뒤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 머물면서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 한역과 한자음사(漢字音寫)를 시도하여 채록. 이후의 기록은 전하지 않으며 신라로 귀국하지도 않았던 듯. .........................................
신라 호국불교의 요람.,지리산 당나라 현장(玄)도 찾았던 녹야원. 근심할 것 없었는데 다만 멀고 험한 길이 근심이 되나 여러 차례의 탑을 보기 어려움은 여러 차례의 큰 불에 타버렸음이라. 이 중천축국의 영토는 무척 넓고 백성이 많이 산다. |
막고굴
돈황석굴은 돈황 시내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절벽 벽면에 남북으로 1.8km에 걸쳐 만든 석굴사원
여러 층으로 뚫린 석굴은 현재 확인된 것만도 492개
2천여 개 불상과, 총 면적이 4500㎡에 이르는.,벽화.
사막(莫)의 높은 곳(高) 석굴(窟)이라 하여 막고굴(莫高窟)
전성기에는 석굴 수가 천 개가 넘어 천불동(千佛洞)이란 별명
천년을 이어진 상인과 순례자의 불심
전진시대 낙준스님은 수행 장소를 구하기 위해 돈황에 들렀다가
절벽 앞의 장엄한 일출이 마치 천불을 보는 것 같아 굴을 뚫기 시작
이때부터 13세기 원대까지 천 년에 걸쳐 굴이 더 만들어져 동굴 사원
승려들이 승방으로 사용하면서 막고굴은
돈황주민과 대상들의 신앙의 성지로 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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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고굴은 그 절벽에 남북으로 1.8km에 걸쳐 만들어진 석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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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고굴이 신앙의 성지로 빠르게 유명해진 것은
당시의 불안정한 시대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굴들이 조성되었을 당시는 5호16국 중 하나인
전량(前凉)이 돈황을 지배하고 있던 시기였다.
상인들과 순례자들은 이곳에서 힘든 여행길을 앞두고
부처님께 안전한 귀향을 빌며 돈과 불상을 시주했는데
이를 바탕으로 벽화가 그려진 새로운 석굴이 생겨났다.
석굴군은 남쪽지구 남굴과 북쪽지구 북굴로 나눠진다.
남굴은 벽화와 불상들로 내부 장식이 되어 있는 반면,
북굴군의 석굴들은 벽화가 내부에 장식되어 있지 않고
석굴 안에서 바깥으로 이어지는 굴뚝이 만들어져 있다.
승방과 수행도량의 선원으로 사용된.,막고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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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굴군의 석굴들은 벽화가 내부에 장식되어 있지 않고 바깥으로 이어지는 굴뚝이 만들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스님들이 기거한 승방과 수행도량의 선원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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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고굴 제96굴의 누각. 높이 34.5m의 북대불. |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대불이 있는 <제96굴>
기록에 의하면 측천무후 원년(695년)
영은선사와 음거사가 만든 것이라 한다.
대불의 높이는 34.5m로 돈황석굴 중 최대 규모.
<제130굴>에는 두 번째로 큰 26m의 미륵불이 있다.
풍만한 얼굴에 온화한 표정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96굴 남쪽에 있어 북대불의 반대 의미인 남대불(南大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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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30굴> 섬세한 손이 아름다운 26m 높이의 남대불(南大佛) |
<제259굴>은 북위시대 석굴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2개의 불상이 있는데 화관 등 힌두교 양식이 섞여 있다.
아잔타의 석불과 매우 유사하다. 이것들은 모두 목심불.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진흙을 붙여 만든 것이다.
가사를 몸에 두른 다보여래상은 깨달음의 순간
미소를 띠는 모습이 아름다워 '동방의 모나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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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9굴> 깨달음의 순간의 미소를 표현한 동방의 모나리자 |
벽이 깨지자 드러난 보물들
돈황이 토번의 지배에서 벗어난 당 선종 때(848년),
당시 돈황의 유력가인 장의조가 그를 도와준 고승
홍변의 자문을 받아 <제16굴>을 만들었다.
16굴의 입구 오른쪽에 있는 작은 동굴이 <제17굴>이다.
이 굴은 홍변의 영굴(影窟), 즉 그를 위한 기념굴이다.
굴의 정면에는 단정하게 앉은 94㎝의 홍변상이 있다.
17굴이 5만 여권의 희귀한 서적들을 발견했던 장경동(藏經洞).
1908년 16굴 입구 모래와 먼지를 제거하자 벽이 갈라지며 뚫린 구멍
벽을 깨뜨리자 길이와 너비가 각각 3미터인 작은 굴 안에는 경서와 문서,
자수, 회화, 탁본 등 5만여 점의 보물이 가득 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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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굴 입구 모래와 먼지를 제거하자 벽이 갈라지면서 구멍이 뚫렸다. <17굴>에는 경서와 문서, 자수, 회화, 탁본 등 5만여 점의 보물이 가득 쌓여 있었다.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 중 하나인 <금강경>을 비롯한
이곳에 있던 7천여 권의 고서적을 대영박물관으로 가져갔다.
이어 프랑스의 펠리오가 나머지를 약탈해갔는데
주인을 잊은 채 프랑스로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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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층으로 뚫린 석굴은 현재 확인된 것만 492개 이고, 2천여 개의 불상, 총 면적이 4,500㎡에 이르는 벽화가 있다.
덧 말.
혜초는 704~787년 경 출생 사망한 인물로 추정된다. 그는 장보고(? ~846) 보다 1세기 이상 앞선.,인물이다. 의상대사(625 ~702) 처럼 당나라로 유학 간., 밀교 승려.
의상은 당나라를 여행하고 중난산에서 공부 했고 그곳에서 화엄을 접하고, 신라로 돌아와 화엄종 창시. 신라는 661년(문무왕) ~719년(성덕왕).,경주 남산 성역화.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 군, 선도산 서악리 마애삼존불 등.
신라 역대 왕들은 전통적으로 호국불교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밀교 승려를 해외에 파견 유학보냈다.
'밀교 승려'들의 기행기를 통해 호국불교 불토정국을 조성한 신라. 사찰, 탑, 불상, 경전, 풍습, 정치.경제.
719년(성덕왕 18년) 불교문화 전성기였던.,통일신라. 그해 16 나이 혜초는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듯 추정된다. 성덕왕(재위 702∼732) 때까지 극 배출한 화랑은 200 여명.
어린 청소년들을 화랑으로 양성 삼국통일 인재들을 배출했던.,신라. 혜초는 화랑 '밀교 승려'로 추정된다. 사령자(司靈者) 성격도 겸했던.,시기. 왕명을 받들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듯..
혜초가 '화랑' 신분이 아니라면 소화해 낼 엄두조차 나지 않을 만큼 목숨을 걸어야 하는 험난한 여행 일정.
'왕오천축국전' 기행기(紀行記)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물로 충분하다. 인도 5국을 여행하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수필, 일기, 편지 등의 형식을 빌려 쓴 그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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