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건국 후 고려의 종묘를 부수고,
고려의 왕족인 개성 왕씨를 탄압하는 등
고려왕실의 흔적까지 지우려했던 혁명 공신들.
고려 사직을 막내리게 한 쿠데타의 현장.,선죽교.
조선 개국을 거부한채 은거한.,두문동 72현 기념비,
거란이 친선 차 보낸 낙타 72마리를 굶겨 죽인.,탁타교.
고려왕조의 흥망성쇄가 살아 숨쉬는 고도.,개경.
서울에서 불과 50km거리에 위치한 개성의 고적(古蹟)들
936년 후삼국 통일후 선죽교에서 피를 흘리며 망할 때까지
개성은 고려 도읍지이자, 우리나라 중세역사의 중심무대였다.
개성은 찬란했던 불교의 무수한 유산을 간직한 곳이자
대각국사 의천 등 수많은 고승 대덕들이 거쳐갔던 장소.
고려 말, "송악산이 세 번 울면, 국운이 트인다."던.,개성.
1392년 7월 17일 고려(918-1393) 34왕 공양왕이 선위(禪位)
이성계가 개경(開京) 수창궁(壽昌宮)에서 조선 태조에 즉위.
태조 이성계가 백관의 추대를 받아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정종2년(1400년) 11월13일에 세자 이방원이 예궐하여
조복을 갖추고 명을 받고, 연을 타고 수창궁에 이르러 즉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즉위한.,수창궁.
그후, 정종이 즉위 후 태조 이성계가 상왕(上王)
태종 즉위 후, 태조가 태상왕, 정종은 상왕이 된 곳.
1392년 개성 수창궁(壽昌宮)에서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는 즉위한지 한달도 못 되어 한양천도 계획을 명령.
한양천도를 실행하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건축.
태조5년(1396) 음력 1월 9일부터 2월 28일까지 49일간,
이어, '8월 6일~ 9월 24일' 49일간, 충 98일 간 축성공사.
19만7천4백명을 동원해 평지는 토성, 산지는 석성으로 축성.
북 : 백악산~ 동 : 낙산 ~남 : 남산 ~ 서: 인왕산,
능선을 따라 축성한 공사 전체구간.,5만 9.500여척을
600척씩 97구간 각 구간을 천자문 순서에 따라 명명했다.
조선건국 한양천도 산실인.,개경 수창궁
....................개경 수창궁(壽昌宮).................
조선 개국의 역성혁명 역사가 태동한.,개경 수창궁.
1392년 한여름. 고려의 무장 이성계는 67세에 왕위에 즉위
원래, 이궁이었던 수창궁은 거란 침입 후, 현종이 거처한 곳.
고려의 도읍 개경 도성의 서소문 안에 있었다.
1011년(현종 2) 2월에 거란의 침입으로 피난 갔던
청주에서 개성으로 다시 돌아와 현종이 기거했던 궁궐.
1147년(의종 1) 북문을 봉쇄해 군소배 출입금지.
1187년(명종 17) 정월에는 추밀원에서 불이 번져
수창궁 행랑 기둥 20여 개가 소실되었던.,수창궁.
같은 해 7월 치사공부상서(致仕工部尙書) 조원정(曺元正)의 가신.
무리 70여 명이 수창궁에 들어와 추밀사(樞密使) 양익경(梁翼京)과
내시원낭중(內侍院郎中) 이규(李揆)ㆍ이찬(李粲) 등 많은 사람을 살해.
1196년 4월에는 수창궁 중서성문이 무너졌으며
8월에는 수창궁에서 연경궁(延慶宮)으로 옮겼다.
1213년(강종 2) 8월 왕이 수창궁 화평전(和平殿)에서 운명.
1220년(고종 7) 4월에는 수창궁 침전에 호랑이가 들어왔다.
1234년 11월 태조 왕건 신어(임금의 화상)를 수창궁에 봉안
1250년과 1251년에는
몽고 사신들을 맞이하여
이곳에서 향연을 베풀었다.
1297년(충렬왕 23) 윤12월에는 당시 세자였던 충선왕.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使事) 최충소(崔沖紹)에게 명해
수창궁터에 원공주(元公主)가 기거할 궁려(穹廬)를 건축.
궐 한가운데에 방단(方壇)을 쌓고 둘레에는 높은 담을 둘렀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 침입때 연경궁이 불타 이곳으로 이전
1370년 8월에는 다시 수창궁 옛터를 보고 궁궐의 건설을 명하였다.
1381년(우왕 7) 3월 다시 수창궁을 경영하여
1384년 윤10월에 수창궁 낙성을 보게 되었다.
1388년 창왕 때 수창궁을 일시 수령궁(壽寧宮)으로 개칭
대비 이씨(李氏)를 옮기었고 그 뒤 공양왕과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즉위했으며 정종, 태종도 이곳에서 임어(臨御).
조선 성종 연간에는 이미 허물어져 개성부의 창고로 사용되었다.
수창궁 명칭은 강화 천도시 사용되었다고 하나 위치는 알 수 없다.
........................................................................................
이성계가 조선왕조의 태조에 등극했던.,개경 수창궁.
원래, 수창궁은 '고려의 정궁' 만월대의 별궁 중 한 곳.
'고려의 정궁' 만월대는 조선의 경복궁과 같은 곳.
북한의 개성 송악동(舊 행정구역상 만월동 71-8번지).
송악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만월대는 왕건이 태어난 집터.

황성 옛터.,만월대.
1."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 내몸은 그 무엇을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2.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이 노래가 창작된 시대적인 배경은.,1928 년.
대중가요 ‘황성옛터’의 배경무대.,개성 만월대.
'고려의 정궁' 연경궁 터와 황성 옛터.,만월대 터.
고려의 정궁 연경궁 및 만월대를 복원한.,가상 조감도.
고려 태조 2년(919년)에 창건된 만월대는
대체적으로 "정궁" "본궐." 등으로 불리웠다.
조선의 법궁 경복궁처럼 이름이 있진 않았던듯..
"만월대(滿月臺)" 라는 이름도 조선시대부터 불리웠다.
'대보름달 전망대.' 망월대(望月臺)에서 유래된.,만월대.
일반적으로 "만월대"는 왕궁 전체 또는 궁성 부분을 지칭.
궁성 가운데서도 관료들이 조회하던 회경전을 중심으로한
중심부 주 건축군만을 가리키는 고려 왕궁의 대표적인 명칭.
만월대는 거란, 몽골 침공 때에도 폐허가 되었지만 재건
고려 공민왕 10년(1361년)에 '홍건적의 난' 때 다시 불탔다.
그당시, 만월대는 별궁인 연경궁과 함께 폐허가 되었지만
고려왕조는 재건하지 못하고 별궁 수창궁을 왕궁으로 사용.
고려가 무너지는 바람에 끝내 복구하지 못한채 옛터만 남았다.
만월대 왕궁은 황성부분과 궁성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왕궁 안 궁성의 동 서 북쪽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성벽은 석비례와 진흙을 엇바꿔 여러 겹으로 다져 쌓았다.
만월대 유적은 고려시대의 건축예술이 잘 반영되어 있다.
특히 궁전건물의 설계에서 일정한 비례관계가 적용된 것,
건물배치에서 지형조건을 잘 고려한 것 등은 고려의 건축술.
조선시대 왕궁과 달리 높이 쌓은 축대가 인상적이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산을 훼손하지 않고 궁궐들을 배치
언덕을 그대로 두고 경사를 이용해 궁궐을 건축했기 때문.
이는 강화도 고려 왕궁터,
삼별초의 항쟁 거점이었던
진도 용장산성 임시 궁궐터
등지에서도 드러난 건축방식.
개성공단. 개성 시내관광 등이 활발하게 추진되던 시절
남북한 학자들이 공동으로 발굴조사를 진행하기도 했으나
천안함 사건, 연평도 포격 등 관계가 냉각된 후에는 소강상태.
하지만, 수해로 큰피해를 입은 만월대 복구공사가 진행되자
남측의 복구인원도 개성공단에 체재하면서 복구공사에 참여.
동서 445m, 남북 150m 대지의 규모인 만월대터.
중앙의 회경전에서 동벽까지 135m, 서벽까지 230m,
승평문까지 250m, 궁궐의 건축물들은 계단식으로 배치
건축물들의 문과 문 사이를 연결하는 계단이 남아 있다.
용머리 돌조각, 기와조각, 도기, 철제장식, 철창, 철침 등
구릉지 특성 상, 높은 축대와 자연에 순응한 건축물의 배치.
..........정전 - 회경전(會慶殿).........
왕궁 가운데 '정사를 처리하는 회경전
동서로 단칠한 계단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정면 9칸, 측면 4칸, 전면에 4개 계단
좌우에는 동행각과 서행각이 있었다.
고려도경에 의하면, 별도의 전문이 있으며 규모가 매우 장대
여기서 상례는 감히 거행할 수 없으며, 오직 사신이 이르렀을 때
마당 아래에서 조서를 받거나 표문을 봉하고 나머지 예는 별전에서 행
그 위치는 궁성의 정남문인 승평문을 지나 안으로 더 들어가
신봉문과 창합문을 지나면 회경전에 도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종 4년(서기 1126년) 이자겸과 척준경의 난 때 소실되었다가 복구
인종 16년(서기 1138년) 5월 전각 및 궁문의 명칭을 '선경전'으로 개칭.
...............................................................................................
그밖에 장화전, 원덕전, 장경전이 나란히 서 있었고
회랑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마당엔 벽돌이 깔려 있었다.
회경전 북쪽에는 고려왕실 보물을 보관하는 장화전과
비상시에 대신들과 정사를 논의하던 원덕전이 있었고,
서북쪽에는 천자의 조서를 받들고 사신을 접대하던 건덕전
그외, 고려왕실의 비빈들이 거처하던 침전인 만령전이 있었다.
회경전과 건덕전 사이에 예물을 받던 장령전,
훗날, 집현전으로 개칭된 연영전이 있었으며,
영연전 북쪽에 연회장 전각인.,자화전(집희전).
회경전 바로 서쪽에는 왕의 침전,
동쪽에는 태자가 거처하던 좌춘궁.
그외 궁궐 내부에 흐르던 개천에 놓인 돌다리 만월교,
임천각(수만권 장서 보관소), 사찰 법운사와 내제석원
황성에는 13개의 성문과 15개의 궁문.
성문 중에는 동문 광화문이 유명하였고,
궁문으로는 정남문 승평문과 승평문 중심으로
그 좌우에 동락정, 신봉문, 창합문, 의봉문이 유명.
승평문은 이중루로 되어 있었고 정전인 회경전으로 연결.
그안에 들어서면 신봉문이 있고, 그 동쪽에 태자궁 춘덕문이 있고,
그 서쪽에 왕의 침전으로 들어가는 태초문, 그 서쪽 선의문에는 옹성.
신봉문 안에는 왕이 천자의 조서를 받들던 창합문,
창합문 그 안에 다시 회경전의 전문이 있었다 한다.
"건덕전 앞에 건덕전문, 흥례문, 의봉문,
의봉문 밖에는 구정이 있었다."고 전한다.
흥례문 역시 왕이 원 황제의 조서를 받던 곳.
고려 태조(재위 918 ~ 943년).,왕건(王建 877 ~ 943).
궁예의 부하로 활약하다가 부하들의 추대로 고려를 창건.
분열된 후삼국을 통일하였고 불교를 국교로 삼아 북진 정책.
서북면을 개척하고 여진족을 무찌르는 등
'동아시아 해상왕국' 고려의 터전을 굳혔다.
고려는 신라 말, 송악 지방의 호족인 왕건이 918년 개국하여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기까지 34대 475년간 계속된 왕조.
개성 송악산은 임산부가 머리를 풀어 헤치고 누워있는 모습의 산.
송악산은 고려왕조의 도읍인 개경을 품고있는 산세.
송악산 아래 개성 만월대는 공민왕 10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소실될 때까지 고려왕의 주된 거처였고 동서 445m, 남북 150m
궐터 가운데 고려 역대 왕들이 정사를 펼쳤던 정전 회경전이 위치.
201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된.,개성역사유적지구
그 일부분인 만월대는 919년(고려 태조 2년)에 창건되고 나서
1361년 '홍건적의 난' 때 불타 폐허가 된 이후로 옛 터만 남았다.
..........473년 간, 고려 황궁., 만월대(滿月臺)............
만월대(황궁)는 관료 조회를 하던 회경전 일대.,건축군.
황성과 궁성으로 이루어진 동, 서, 북쪽 성벽은 남아 있다.
성벽은 석비례와 진흙을 엇바꾸어 여러 겹으로 다져 쌓았다.
만월대 유적은 고려의 건축예술이 잘 반영되어 있다.
특히 궁전건물의 설계에서 일정한 비례관계가 적용된 것,
지형조건을 잘 고려한 건물 배치 등은 높은 수준의 건축 기술.
...................................................................................
개성에는 수창궁 터, 경덕궁 터 ,남대문, 선죽교 등 유적이 있다.
송악산 박연폭포는 금강산 구룡폭포, 설악산 대승폭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명폭의 하나이며 서화담, 황진이와 더불어.,송도삼절.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황진이 -
'황진이'의 송도삼절.,개성 박연폭포.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로 흐르거든, 옛 물이 있을소냐.
인걸(人傑)도 물과 같아야, 가고 아니오노매라.’ -황진이 -
서울 북한산에서 멀리 바라보이는.,'개성 송악산.'
경기도 북서부에 위치한 개성은 옛 고려시대 도읍지.
송악· 송도· 황도· 개경· 중경 등 이름의 변천이 많았다.
38˚선 바로 남쪽에 있고 지금은 휴전선 이북에 놓여있다.
1950년 6.25 전까지만 해도 개성은 남한 땅이었던 곳.
개성 송악산에 휴전선이 그어지면서 이북 땅이 되었다.
1949. 5.4, 북한군이 진지 구축을 위해 38선 남쪽으로 침공.
국군과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6.25 발발 1년 전에 있었던 곳.
'한강과 예성강 하류' 분지에 송악산을 등진 곳.
땅이 기름지고 기후 조건이 좋아 농사가 잘 되는 곳.
남대문· 경덕궁· 관덕정· 만월대· 선죽교 등 유적이 많다.
.................개경(개성. 송악)...................
개성은 고려의 도읍지였던 역사적인 도시이다.
지금은 북한에 속해 있지만 서울에서 가까운 거리.
판문점에서 12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북한의 도시.
북쪽으로 송악산 · 용호산 · 진봉산 등이 솟았고,
남쪽으로는 임진강, 서쪽으로는 예성강이 흐른다.
평양 남포에 이어 북한 제3의 도시이며 직할시이다.
물 자원이 풍부하고 기후가 따뜻하여 중요한 쌀 생산지
개성 봄무, 대추로 유명하며, 옥수수 인삼 특용작물 재배지
개성인삼은 토질과 수질, 기후, 독특한 재배법으로 품질이 우수.
6.25 전쟁 이후 경공업 도시와 농업 지역으로 발전한 개성
방직 식료품 가구 등 경공업과 건재 기계 제작 공업이 활발.
개성에는 또한 고려 시대의 유물과 유적 등이 많이 남아 있다.
고려의 궁궐터인 만월대는 평지보다 200m 높은 곳에 위치.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개성시 중앙에는 개성 남대문
서울의 남대문과 비슷한 형태로.,태종 재위 때 세웠다.
고려 말, 충신 정몽주가 살해당한 선죽교도 남아 있다.
'고려시대의 교육 기관' 성균관은 북한의 고려 박물관.
.........................................................................
광민왕과 노국공주가 나란히 잠든.,공민왕릉.
고려시대 유일의 쌍릉인데 무덤 내부에는
서로 통할 수 있도록 구멍이 뚫려 있다고 한다.
역사 속에 영원히 남을 사랑 이야기가 전해온다.
현재, 고려 31대 공민왕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원나라를 배척하고 이성계로 하여금 동녕부를 쳐
오로산성을 점령하는 등 기세 찬 개혁가였던 공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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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때, 원나라로부터 수복한 영토이다.
노국공주가 원나라 세력을 고려 땅에서 축출.
그 무렵, 이성계 장군의 활약으로.,동녕부 정벌.
공민왕의 개혁은 실패했고 공민왕도 실패한 군주
그의 개혁 시도는 신진 사대부들 중에서도 급진파였던
정도전 등과 신진 무인이었던 이성계에게 많은 힘을 부여
결국, 조선 건국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막장이던 고려의 국세도 많이 회복
공양왕 대에는 조선후기보다 국가 전답이 많았다.
'조선왕실의 사당' 종묘에도 한때 공민왕 사당을 건립
곳곳에 공민왕을 신으로 모시는 사당도 많이 세워졌다.
이성계가 공민왕 때 벼슬을 받아 조선을 건국했기 때문.
그무렵 공민왕 영정을 보면
노국공주와 함께 그려졌는데
거의 공인 커플로 인정받은 셈.
부인 노국공주가 죽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남색에 빠져
결국, 자신이 늘 총애하던 남자들에 의해 암살당하고 만다.
왕이자 화가인 공민왕 작 천산대렵도.(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공민왕 그림.,천산대엽도(天山大獵圖)
화가로서 최고 경지에 오른 공민왕의 신기(神技)를 보여준다.
원나라 황족의 딸이었던 노국공주는 그에게 인생의 전부였다.
노국공주는 원의 세력을 몰아내려는 공민왕의 개혁에 적극 동참
부군과 부군의 나라를 위해 자신을 바친.,노국공주
공민왕의 사랑은 깊었지만 둘 사이에 후사가 없었다.
노국공주가 어렵게 임신을 했지만 난산으로 운명했다.
공민왕은 세상을 잃은듯 낙담해 '노국대장공주진'을 그린 뒤,
벽에 걸어놓고 밤낮으로 바라보고 울며 노국공주를 그리워했다.
결국, 노국공주를 위한 불사에만 빠져 살다 고려의 멸망까지 재촉.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노국대장공주진>'.
조선시대 '연산군이 즐겨 바라봤다.'는 기록.
공민왕 10년에 '홍건적의 난' 때 불타 폐허가 된.,만월대.
만월대는 후삼국 시대 후고구려를 창건한.,궁예의 궁궐터.
궁예가 철원으로 천도한 이후에, 왕건이 다시 사용했던 궁궐.
후삼국시대의 한때에는 왕건의 주군이었던.,궁예.
그무렵 왕건이 궁예에게 건축해 받친 궁궐이.,만월대.
'개성상인을 거느린 호족들의 영주' 왕건이 훗날 고려 태조.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태조 6년(1397년)에
현재의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지역에 묘를 세우고,
정종 1년(1399년)에는 '고려의 태조와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 현종' 7왕을 제사 지내게 하던 곳.,'숭의전'
고려의 충신과 공신 열 다섯명을 제사지내게 하고
고려 왕족의 후손들로 하여금 이곳을 관리하게 하였다.
선조 이후로는 고려 왕족의 후예가 참봉을 맡아 제사지냈다.
수창궁은 고려시대 우왕, 창왕, 공양왕이 즉위하고.
조선 초, 태조, 정종, 태종이 즉위한 궁궐이기도 하다.
고려 전기, 임금의 자문에 대비하던 시종기구.,경덕전.
고려시대 많은 서적을 비치하고 경사를 논하였다 전한다.
문관 가운데 학문이 뛰어난 자들이 그 직책을 겸하였으며.
임금이 이곳에서 진사들을 시험 보이기도 하였던 곳이었다.
인종 14년(서기 1136년)에 연영전의 이름을 집현전으로 고쳤다.
이자겸의 난때 불타, 수창궁 옆
시중 소태보의 집을 서적소로 삼아
유신들에게 문서를 다시 수집하게 했다.
이후부터 보문각 문첩소로
기능을 옮겼다는 설이 있다.
조선왕조는 건국 후,
고려시대의 국가 운영 시스템을
대부분 수용해 사용한 흔적들이 엿보인다.
....................홍건적의 난......................
붉은 두건을 머리에 두른 무리들이 일으킨.,전란.
이들의 난에 가담한 주원장이 훗날 명나라를 건국.
1355년(공민왕 4) 송(宋)나라를 세운 홍건적.
허난성(河南省)·산시성(山西省)·산시성(陜西省)
등지로 세력을 확장한 그 일부가 만주 지역으로 북진.
요동 점령후, 원나라의 반격에 쫓겨
공민왕 10년에 개경을 침범한 홍건적.
고려에서는 이미 1354년에 원의 요청에 따라
군사 2,000명을 원나라에 파견한 적이 있었다.
1357년 고려는 김득배(金得培)를
서북면홍두군왜적방어도지휘사로 삼아
홍건적의 침입에 대비하였지만 1359년 12월
모거경(毛居敬)이 4만 무리를 이끌고 쳐들어와
의주(義州)·정주(靜州)·인주(麟州)가 함락되었다.
또한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이암(李嵒)을 서북면도원수로,
경천흥(慶千興)을 부원수로, 김득배를 도지휘사로 삼아 방어.
그러나, 철주(鐵州)와 서경(西京 : 平壤)이 계속해서 함락되었다.
이에 이암 대신 이승경(李承慶)을 도원수로 삼고,
다음 해 1월에 2만 명의 군사를 보내 서경을 탈환.
2월에 정주, 함종, 안주, 철주 등지에서 이들을 섬멸.
홍건적을 모두 압록강 이북으로 몰아내었다.
이 후 홍건적은 해로를 이용해 풍주(豊州)·봉주(鳳州)·
안악(安岳)·황주(黃州)·안주 등 해안에서 노략질을 일삼았다.
1361년 10월 반성(潘誠)·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
주원수(朱元帥) 등이 10만의 무리를 이끌고 고려를 재침.
삭주(朔州)·이성(泥城)·무주(撫州 : 寧邊)·안주가 함락되고,
흥의역(興義驛 : 牛峰)에 이르러 개경(開京)을 위협하였다.
이에 공민왕은 광주(廣州)를 거쳐 복주(경북 안동)로 파천.
개경은 함락되었고 그 해 12월에 고려는 복주에서 군사를 정비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삼아 방어했다.
또한 각 도에서 20만 명의 군사를 소집하고
참지정사(參知政事) 안우(安祐)를 상원수로,
정당문학(政堂文學) 김득배를 도병마사로,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정휘(鄭暉)를
동북면도지휘사로 삼아 개경의 탈환을 시도.
다음 해 1월에 고려군은 개경에 진격해 적을 대파하고
관선생·사유 등을 잡아죽이자 적은 압록강 건너 모두 퇴각
이후에도 좌정승 유탁을 <서북면홍적방어제군도통사>로 임명,
밀직사 이순(李珣)을 도병마사,
김한귀(金漢貴) 등 12명을 제도병마사
재침에 대비했으나, 대대적인 침범은 없었다.
............................................................
이 전란을 계기로 고려에서는
홍건적의 침략 압박을 완화하고자
원과의 제휴를 적극적으로 모색했다.
전란 중 개경을 수복할 때 참가한., 이성계(李成桂).
그 존재가 부각되었고 전란으로 혼란과 변화도 컸다.
경기지방 호적이 없어지는 등 국가의 지배력이 약화.
권세가들에 의한 토지와 인구의 탈점이 널리 행해졌다.
그 결과 신분제도의 혼란과 농장의 발달 등이 촉진되었다.
한편, '홍건적의 난' 이후
명나라를 건국한 태조 주원장.
중국 역사에서 매우 자주 회자되는 황제 중 한명.
원나라 말기에 굶주림으로 부모와 형제를 잃은 주원장은
황각사 중이 된후 탁발로 연명하다가 홍건적 부대에 편입된다.
그곳에서 두목(곽자흥)의 양녀를 아내로 맞이.
'두목의 아들' 방해를 이겨 부대를 장악한 이후
다른 홍건적 부대들을 통합해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
원나라의 기황후가 주원장에게 대도를 정복 당하고
북쪽의 초원지대로 물러나고 주원장은 명나라를 개국.
하남성 낙양 수창궁은 개경 수창궁(壽昌宮)과 같은 이름.
'대륙 고려'설(說)에 의하면, 고려 수도는., 하남성 낙양.
하남성 낙양시 남쪽 12km에 위치한.,용문석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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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성 낙양 수창궁(壽昌宮)
(김병화 저서 - 대륙고려의 강역.)
후삼국을 통일한.,고려 태조 왕건.
'고구려 계승국' 의미의 국호.,고려.
"동아시아 해상왕국.,KOREY"..고려.
('대륙백제설, 대륙신라설'의 신빙성에 비하면)
('대륙고려설, 대륙조선설'의 가능성은 약 20 %.)
(역사 기록에는 없지만 야사 학계에서는 주장한다.)
'하남성 낙양' 수창궁과 이름이 같은.,개경 수창궁.
수창궁 용머리(壽昌宮龍頭).
수창궁 정문 앞에 있었던 용머리 조각은
현재, 고려박물관 앞뜰로 이전되어 있다.
용머리 부분만 드러내고
몸체 부분은 구름 또는 물속에
깊속히 묻혀 있는 용을 형상한 것.
보주를 입에 물고
앞으로 쑥 내민 용머리.
곧 땅속에서 뛰어나올 듯.,
.....................선죽교.......................
개성 선죽동 자남산 동쪽 기슭의 개울에 위치.
919년 고려 태조가 송도 시가지 도시계획을 할 때
하천정비의 일환으로 축조한 것으로 옛 이름 선지교
.
선죽교는 고려 말 정몽주가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 등에 의해
이곳에서 철퇴를 맞아 숨진 사건 이후에 유명해진 곳으로 유명.
1780년(정조 4) '정몽주 후손' 유수 정호인이 주위에 돌난간을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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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악산(松嶽山) 남쪽 기슭에 있는 만월대(滿月臺)는
고려 정궁(正宮)이었던 연경궁(延慶宮) 앞 정원의 이름.
고려가 태평성대였을 때 왕은 밤이면 궁녀들을 거느리고
정원을 거닐며 달구경을 즐겼다고 하여 정원 이름.,만월대.
만월대 주변에는 정궁인 연경궁을 비롯하여
會慶殿, 長和殿, 元德殿, 乾德殿, 萬齡殿, 八仙殿 등
많은 궁전들이 즐비했고 뜰에는 기화요초가 만발하던 곳.
나무 숲 사이로 宮服을 곱게 차려
입은 궁녀들의 내왕도 빈번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궁전을 떠받치던 주춧돌만 남았을뿐
우거진 잡초 사이로 무심한 낙엽만 흩날리고 있는 곳.
만월대를 둘러보는 비감함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인듯.
成宗 때 시인 安琛
(호 竹溪 1444~1515)
그 남긴 다음과 같은 시.
오백 년 옛 자취는 티끌이 되고
송악산 푸른빛은 몇 번이나 새로웠나.
이끼 덮인 궁터는 나무꾼의 길이 되니
넓은 뜰은 비에 젖어 풀만이 봄이로다.
五百年前迹已塵
松山蒼翠幾回新
苔封輩路樵成逕
雨灑毬庭草自春
뒷 대궐 풍류가락 지금 들을 길 없고
동쪽 연못 놀잇배도 잠긴 지 오래도.
아득한 지난 날을 누구에게 물어보리.
만월대 상공에는 조각달 만 떠 있구나.
後殿笙歌今寂寞
東池舟楫久沈淪
悠悠往事憑誰問
臺上唯餘月一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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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가슴 메어져 오는 비감함.
망국지한은 누구에게나 슬픈 일.
배달민족의 주 감성은 恨이라던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주춧돌을
하나씩 밟아 보며 허무감에 젖어
머리 들어보니 송악산은 단풍 절정.
아아, 국가 흥망이란
인간사에 불과한 것,
국가의 흥망이 아무리 반복되어도
자연 추이에는 추호도 변함 없는듯.
개성 만월대.,출토유물 전시
고려정궁 내부 배치의 복원연구, 우성훈, 이상해
첨성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