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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 하멜(Hendrik Hamel) 표류기

작성자선경나라|작성시간17.07.20|조회수1,198 목록 댓글 0

중세 조선의 비밀-하멜 표류기3 

역사저널 그날 E53.141129 "네덜란드 청년 하멜 조선에 표류하다" (하멜표류기/효종) + 신병주 교수 >조선과 만나는 법< 

맛있는 나노기술. 하멜표류기는 하멜의 표류기일까 조선의 표류기일까. 늑대와 춤을 출 준비가 돼있는가 


.................'하멜 표류기'의 원제......................

『야하트 선 데 스파르베르(Sparwer) 호의 생존 선원들이

코레 왕국의 지배하에 있던 켈파르트 섬에서 1653년 8월 16일

난파당한 후 1666년 9월 14일 그 중 8명이 일본의 나가사키(長崎)로

탈출할 때까지 겪었던 일 그리고 조선 백성의 관습과 국토상황에 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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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은 건축가의 아들이고,

그의 대부가 시장님이었으며,

 300굴덴짜리 집을 살 만큼 부유.


하멜표류기는 조선을 유럽에 알린 최초 기록물이고

서양인의 눈으로 본 적나라한 조선시대에 관한 공식문서. 

유럽인들에게는 조선이라는 미지의 나라에 관한 최초의 정보.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외국인의 안목으로

조선시대를 보여준 역시 최초의 정보였다.


하멜이 이 보고서를 작성한 목적은

그가 소속했던 동인도회사에 대해서

조선에 표류하여 억류되었던 기간동안

밀린 체불 임금을 청구하기 위해서였다. 


『하멜 표류기』는 지금까지 여러 권 출간되었는데

하멜이 쓴 원본 외 나머지 책들은 모두 하멜의 글을

자기 나름대로 다양하게 각색한 이본(異本)들이다.


보고서 제목 그대로 『하멜 표류기』는

'헨드릭 하멜'이란 선원이 1653년 7월30일

대만을 출항하여, 일본으로 향하던 도중에

폭풍우에 휩쓸려 그해 8월 16일 제주도 표류.

 

선원 64명 중 28명은 익사하고

하멜을 포함해 36명이 생존했다.


그때부터 1666년 9월 14일 7명에

선원과 함께 일본으로 탈주할 때까지

13년 20일 동안 제주와 한양을 비롯하여

조선에서 여러 군데를 옮겨 다니며 겪었던

경험담을 하멜이 쓴 기록문이며, 표류 보고서.


8월 16일 제주도에 표착한 하멜과 그 일행은

제주에 감금되었다가 10개월 뒤인 이듬해에

한양으로 이송되어 훈련도감에 배속되었다.


그러나 하멜 일행은 조선에 당도한

청 사신을 찾아가 구출해 줄 것을 호소.

그 시도가 발각되어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 


강진 유배 중에 조선에서 대 기근이 발생하자

하멜 일행은 강진, 여수 남원 등지로 분산 수용.

 

하멜은 비밀리에 배를 구입한 뒤

남원으로 이송됐던 항해사 얀 브리스

(Jan Pieter de Vries)를 여수로 몰래 불러

1666년 9월에 일본 나가사키로 마침내 탈주.


조선 탈주 항해에 꼭 필요했던 항해사 브리스.

일본 나가사키에 무사히 도착한 하멜 일행 8명은

긴 고난의 세월 끝에 1668년 7월 본국으로 귀국했다.


『하멜 표류기』는 8장의 삽화와 함께

하멜 자신의 경험담을 내용으로 한 「하멜일지」

(제1부 제주도 표착 일기)와 그가 조선에 대해 관찰.

하멜이 알았던 정보를 기록한 「조선국에 관한 기술」

(제2부 조선의 풍물) 두 부분으로 기록이 구성되어 있다. 


귀국한 하멜은 동인도 회사에 13년간 받지 못한 임금을 청구.

이에 대한 증거로 써서 낸게 바로 '하멜 표류기'와 '조선왕국기'.

 

하멜표류기는 조선에서 그의 체험을 적은 체류일지.

조선왕국기는 조선에 대한 지형, 날씨, 특산물, 환경

그리고 민족성 등등을 간략하게 기술한 보고서이다.


담담하고 꾸밈 없는 문체로 기록한 『하멜 표류기』는

그가 잘못 안 내용도 많지만, 그당시 조선시대 조상들의

진기하고 재미있는 일상의 삶과 함께 그가 몸소 겪은 당시

조선 사람들과 조선 사회에 대한 객관적인 기술이 담겨 있다. 


당시 조선사회의 실상과 생활, 풍속, 관습

등에 관한 유용한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1668년 네덜란드어 본판이 발간 되면서

곧 이어 영어본, 프랑스어본, 독일어본 발간.

.

'하멜 표류기' 발간으로 ‘미지의 나라 조선’,

 ‘신비의 왕국 조선’에 관한 17세기 이야기가

그당시 유럽 사회에서는 선풍적 관심을 모았다. 


이런 현상은 당시에

'하멜 표류기'의 많은 유사

이본(異本)들이 발간됐었다는

사실 만으로도 짐작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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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 일행에 대한

조선의 아쉬운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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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네덜란드에서 대만을 거쳐 일본(나가사키)까지
원거리 해상무역을 하고 있던 하멜 일행은 당시 조선에서
갖지 못한 과학기술과 항해술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그들로부터
정보를 얻어 내는데 아무런 성과도 걷우지 못해 이해할 수 없는 일.


하멜 표류기를 보면 그들은 우리 것 보다

훨씬 진화된 조총과 대포도 가지고 있었다.

하멜의 배는 총 30문 대포를 장착하고 있었다.


망원경과 함께 정밀한 천체관측술(天體觀測術)

즉, 그들은 배의 좌초지점을 북위 33도 32분으로

간단히 알아냈을 정도 측량기구도 가지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이미 오대양 육대주를 섭렵하는 해상강국.

원거리 항해를 감당할 선박 건조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좌초로 파손되었지만 그런 기술로 건조된 그들의 선박도

조선이 의사만 있었더라면 기술정보를 알아 낼 수 있었을 것.


그러나, 하멜 배의 잔해를 보는 족족

도끼로 조각을 내어 불태워 버렸던 것.


항해술만 보더라도 통일신라 후기 장보고(張保皐)가

한 때 동북아의 제해권을 장악했다고는 하지만 그 이후

고려나 조선조에서 우리 항해술은 내해에 국한 되어 있었다.

 

항해술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당시의 첨단과학기술이 망라되어

나타나는 것인데 조선 조정이나 지방관 누구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둘째, 조선 조정에서 의사만 있었더라면 하멜 일행을 통해

서구열강의 식민(植民)현황과 국제정세 등에 관한 상당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는데 그들을 주로 강제노역과

잡역에만 동원했던 우를 범했을 정도로 무심했다. 


유교와 성리학을 통치이데올로기로 하고 있던 조선은

 중화(中華)인 중국에 대해 자신을 소중화(小中華)라고

스스로를 종속적 위치에 얽어 매어 놓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 이외의 모든 외방(外邦)은 오랑캐이고

중국 이외의 문영은 하찮은 오랑캐 문명으로 얕봤다. 

심지어는 만주족 청나라까지도 오랑캐로 보았을 정도.


이런 대외 자세에서 유럽제국의 선진문명과

첨단 과학기술을 알아보고 배우려 했을리 만무.


셋째, 조선에는 해외정보를 수집하고

연구하는 전담기관이 없었다는 점이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하멜의 시대에도

이미 세계는 좁아져 있었고 각박하리만치

국익(國益)추구 우선의 냉정하고도 살벌한

제국주의적인 국제관계로 발전하고 있었다.


현실이 이런데도 대중국(對中國) 사대(事大)에

매몰되어 있던 조선은 구미 선진국들의 움직임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데 전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결국, 전세게 문명권에서 조선은 모든 것이 뒤쳐졌고

훗날, 조선이 일본에 합병되는 원인이 될 것이라는 점은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누구도 예견 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하멜 일행이 조선에

표도한.,용머리 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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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제주도 표류기 

하멜 표류기의 하멜이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벨테브레(박연)-하멜 

역사저널 그날 E53.141129 "네덜란드 청년 하멜 조선에 표류하다" (하멜표류기/효종) + 신병주 교수 >조선과 만나는 법< 


‘한냥짜리 굿을 하다가

백냥짜리 징을 깨뜨린다.’


 - 우리나라 속담 -.


효종, 현종 때 하멜 일행을 억류한 조선 위정자 행태.

조선은 북벌이라는 허망한 명분에 집착해 국고를 탕진.

예송논쟁으로 허송세월하느라고 백성들의 삶을 외면했다.


그당시 조선의 조정은

서구와 접촉할 기회를 놓치고

서구의 앞선 첨단 기기 및 과학 문명을

유입할 기회를 놓친 탓에 국제적으로 고립된다.


'우물 안 개구리' 격인.,쇄국정책.

'하룻밤 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른다.'

.

그무렵 조선은 연이은 흉년과 기근으로 국가 파산사태 직면.

조선은 하멜 일행의 억류사실을 대외적으로 은폐하는데 급급.

그 때문에 하멜 일행은 13년간 온갖 고초를 겪은 뒤 조선을 탈출.


하멜표류기로 알려진 보고서를 통해 조선의 실상을 알렸고.

하멜의 보고서를 통해 조선의 실체를 인식하게된 동인도회사.

장차, 중국시장 개척의 교두보로서 조선과의 직교역을 원했지만

조선 위정자들의 외면과 일본 막부의 지능적 방해공작 때문에 무산.


그후 일본은 양학과 난학을 발전시켜 장차 메이지유신으로 이어지는

개혁 개방의 토대를 쌓아간 반면에 조선은 유교 근본주의에 매몰되어

서학이나 북학조차 포용 못하고 소중화 논리에 목을 맨 우물 안 개구리.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

1630년 네덜란드 '호르큄' 출생.


당시 네덜란드는 1602년에 설립된 동인도회사를 앞세워

중국, 일본, 오세아니아, 아메리카 등지에서 해상무역 활동.

'동인도회사'는 현지에서 동양의 향신료와 중국과 일본에서

생산된 청화백자를 사서 유럽에 가져가 막대한 부를 챙겼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어떤 역사를? 


..........네델란드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

17세기 전반에 걸쳐 동인도제도에서 강력한 네덜란드

상업제국의 수단으로서 번창하다가 1799년 해체되었다.


네덜란드 정부는 이 회사에 희망봉과 마젤란 해협 사이의

해상무역을 독점하고 원주민 토후들과 계약 맺을 권한을 부여.

또한 요새를 짓고 군대를 지닐 수 있는 권한과 네덜란드 정부에

충성을 맹세한 관리들을 통해 행정기능을 수행할 권리를 주었다.


얀 피터스존 쿤(1618~23)과 안톤 반 디멘(1636~45) 등

강력한 총독의 통치 아래 이 회사는 영국 함대를 물리쳤으며,

포르투갈을 제치고 동인도제도를 장악했다(→ 네덜란드 공화국).

.

1619년 이 회사는 자카트라 이름을 바타비아(자카르타)로 바꾸고

그곳을 자바와 그 주변 섬들을 정복하기 위한 거점으로 이용했다.

17세기 말부터 주요교역과 해상세력으로서 영향력이 쇠퇴하기 시작.


대신 자바 일에 더욱 몰두했고

강제 인도(引渡), 공출제도를 도입해

원주민 토후들을 더욱 엄격히 감독했다.


18세기 상업에 집중해 있던 해운기업의 형태에서

농산물 생산에 주력하는 느슨한 지역기구로 변했다.


18세기말경 부패와 막대한 부채에 휩싸이자

네덜란드 정부는 마침내 1799년 회사의 특허장을

취소하고 그 부채와 재산을 넘겨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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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 유형] 주식의 탄생,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 


1651년 동인도회사 선박의 포수(砲手)로 입사한 하멜.

2년뒤 본사가 있는 자바섬 바타비아(자카르타)에 갔다.

하멜은 보직이 서기(書記)로 바뀌면서 무역선에서 일했다.


17세기 서양 무역선에는 반드시 서기가 동참.

그 시기에 무역선은 교역선이자 탐험선이었다.


서기는 새로운 항로 개척과 함께 항해 종류, 해로의 흐름 등

중요한 정보를 기록하고 보고함으로써 유럽 각국의 해양개척과

무역정책에 도움을 주었던 존재였기에 이러한 그의 직무로 인해

훗날 조선에서의 억류 내용을 상세하게 적시한 《하멜표류기》작성.


제주 하멜 기념관, 하멜표류기 (남제주군 안덕면) 


1653년 1월 10일 포겔 스트루이스(Vogel Struuijs)호를 타고

네덜란드를 출발한 하멜 일행은 6월 1일 바타비아에 다다랐다.

그런데 며칠뒤 타이완 신임총독 레세르(Lesser, C.)를 임지에

데려다주라는 회사 명령에 따라 6월 14일 타이완 안핑(安平) 행.

 

임무를 마친 선원들은 또 다시 데지마 상관이 있는

일본의 '나가사키'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7월 30일에

스패로 호크 호에 올라 타이완을 떠났다가 풍랑을 만나

악전고투를 벌였지만 8월 16일 제주도 근해에서 배가 좌초.


그 결과 28명의 선원이 익사했고

38명만 살아남아 모슬포 근해 상륙.


이튿날인 8월 17일, 제주 목사 이원진이

이들을 발견하고 병사들을 보내 체포했다.


이원진은 실학의 태두였던 이익의 종숙으로

3년 동안의 임기를 마치고 귀경을 준비하던 중

유럽의 불청객 하멜 일행과 대화를 시도했지만

말이 안통하자 대정으로 이송 후 조정에 보고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

.......................


“제주목사 이원진이 치계하여 말하길,

배 한 척이 본도 남방 해안에 난파했다.


대정현감 권극중과 판관 노정에게 병사를 딸려 보내

조사를 하게 하였는데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다.

배의 생존자는 38명,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달랐다.


일본어를 아는 자도 있는데

‘그대는 서양의 기리시단인가?’

묻자 모두가 ‘예수! 예수!’라 대답.


우리나라를 묻자 ‘고려’라고 말하고,

이 섬을 물으면 ‘오질도’라고 말했다.


중국을 물으면 ‘대명(大明)’

또는 ‘대방(大邦)’이라 말하고

서북쪽을 가리켜 물으니 ‘달단(韃靼)’


동쪽을 가리켜 물으면 ‘일본’

‘낭가삭기(郞可朔其)’라고 대답.

가고 싶은 곳을 묻자., ‘낭가삭기’.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서울로 호송하라.' 명령.

   

하멜 일행은 9개월 동안 제주도에 머물며

거처와 식량을 제공받는 등 대접을 받았고,

제주 주민들에게 조선어까지 배울 수 있었다.


.......................

.......................


그해 10월 29일, 하멜 일행은

통역으로 파견한 박연을 만났다.


본래 네덜란드인 선원 '벨테브레'였던 그는

1627년(인조 5년) 제주도에 표착했다가 조선에 귀화하여

박연이란 이름을 얻고 조선 여인과 혼인하여 가정까지 꾸린 인물.

 

박연은 1648년(인조 26년) 무과에 합격한 다음 훈련도감에 소속.

일본이나 중국 조난자 교육을 담당 대포 제작에 관여하기도 했다.

당시 58세 박연은 수십년만에 동포들을 만나 눈물흘리며 반가워했다.

그렇지만 하멜 일행이 일본으로 가려는 것을 알고 간곡하게 만류했다.


일본이 기독교인을 박해하기 때문에 처형될 것이라 염려했던 것

선원들은 그를 통해 본국 송환을 간청했지만, 조선 조정은 불허.

그러자, 낙담한 6명의 선원이 1654년 작은 배를 구해 탈출 시도.


돛대가 부러지는 바람에 탈출 실패후 태형을 받았다.

1654년(효종 5년) 7월, 하멜 일행은 서울로 이송되었다.

그 사이 이원진은 임기가 끝나 새 인물이 제주 목사로 부임.


순풍이 불어 제주 출발 하루 만에 해남에 다다랐는데,

북상하던 도중 선원 한 사람이 급사해 영암에 매장했다.

7월 26일 서울에 도착한 하멜 일행은 국왕 효종을 배알했다.

 

일찍이 심양에서 인질 생활을 한적 있던

효종은 서양인들이 그리 낯설지가 않았다.


그들의 신상을 파악해 보니 대포 전문가 10명,

천문을 이해하는 사람이 1명, 창틀 전문가 2명,

조총 전문가 1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무렵 삼번의 난으로 청나라 내정이 어수선한 틈을 타

북벌을 추진하던 효종은 이들의 무기제조기술 활용 계획.

 

효종은 이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주고

식량으로 매달 70말의 쌀을 지급하고

군사훈련에 참가시켰고 자신의 행차를

호위하게 했으며 또 박연과 마찬가지로

몇몇 선원들에게 '남북산', '남이안' 등의

조선식 이름을 지어주는 등 환대하였던 것.


그해 겨울 청나라 사신이 조선에 들어오자

조정에서는 하멜 일행을 남한산성으로 이송.

조선에서 서양인들을 억류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신에게 들키면 어떤 오해를 살지 알수 없기 때문.


그런데 이듬해 봄 '제인스'와

보스 두 선원이 문제를 일으켰다.

.

당시 서울에 돌아와 있던 두 사람은

4월 21일 중국에서 사신이 온다는 말을 듣고

산에 땔감을 구하러 간다는 핑계로 숙소를 빠져나와

홍제교 근처에 숨었다가 대로에서 사신 행렬이 지나가자

재빨리 사신에게 다가가 말고삐를 잡고 자신들을 살려달라고 호소.

 

난데없는 서양인의 출현에 깜짝 놀란 사신은 말이 통하지 않자

두 사람을 숙소로 데려가 조정에 통역자로 박연을 불러달라 요구.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박연을 빼돌려 만나지 못하게 한 다음

사신에게 뇌물을 주고 두 사람을 내보내게 했다.


그후 제인스와 보스는 

한동안 종적이 묘연하더니

몇 달 뒤 시체로 발견되었다.


조선 측 기록에 따르면 탈출했던 한 사람은 곧 체포되었고,

다른 한 명은 창의문 부근에 숨어 있다가 역시 체포되었다.

이 사건이 무마되자 조정에서는 하멜 일행에게 곤장 50대씩.


그리고나서 전라도 지방으로 유배형에 처했다.

하멜 일행이 끌려간 전라 병영은 영암과 강진 중간.

민가에 수용되어 36명의 병사들에게 감시를 받았다.


그때부터 억류자들은 탈출을 단념하고 허송세월을 보냈다.

외과의사였던 아이복켄(Mathew Eiokken)의 증언에 따르면

그 기간 동안 조선 여인과 혼인하여 아이를 낳은 사람도 있다.


하지만 《하멜표류기》에서는 그런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멜이 동인도회사로부터 보상금을 많이 받기 위해 은폐한걸까?

그들이 유배당한 7년 동안 전라감영 병사가 다섯 차례나 바뀌었다.


최초 전라 병사는 이들에게 가벼운 제초작업과 청소를 시켰다.

두 번째 부임한 전라 병사는 나무를 하게해 옷과 구두가 헤어졌다.

세 번째 부임한 전라 병사는 더 심하게 나무를 시켜 옷가지가 누더기.


네 번째 부임한 전라 병사는 1658년~1660년까지

2년 동안 재임했는데, 하멜 일행에게 호의적이어서

보름에서 스무날에 이르는 장거리 여행까지 허용했다.

그 덕에 하멜은 조선인들의 생활을 두루 살펴볼 수 있었다.


1659년(현종 즉위년)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 즉위후

조선에서는 3년 동안 혹심한 천재지변이 발생했다.

도처에서 가뭄과 홍수가 일어나 백성들이 기아상태.


유랑민이 전국에 속출했으며 떼강도가 극성을 부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역병까지 돌아 많은 백성이 떼죽음.


하멜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국왕은 길에서 죽은 사람들을 묻게 하고

매일 발생하는 살인과 강도를 막기 위해

길목마다 감시를 강화하는 명을 내렸다.


백성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토리를 줍고

소나무 껍질을 벗겨야했고 잡풀까지 뜯어 먹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헐벗고 굶주린

억류자들 역시 하나 둘씩 쓰러졌다.

1663년(현종 4년) 생존자는 22명 뿐.


억류자들의 상황이 악화되자 조정에서는 이들을

3개 집단으로 나누어 순천과 남원, 좌수영에 수용.

 

당시 내례포(여수)에 있는 좌수영으로 거처를 옮긴 하멜은

전라좌수사 이도빈 배려로 3일간 지방을 둘러볼 수 있었다.

하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이도빈은 대화를 나누던 도중

하멜 일행에게 "왜 탈출하지 않느냐?"고 묻기까지 했다고 한다.

 

좌수영에는 하멜을 비롯하여 12명이 수용되었는데,

이도빈이 재임한 3년간 4명이 죽고 8명만 살아남았다.


이도빈의 뒤를 이어 부임한 전라좌수사 이민발은

전함에 불이 나서 세 명의 병사가 죽었는데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다가 발각되어 태형을 받고 쫓겨났다.


뒤이어 부임한 정영은 억류자들에게 매일

새끼를 꼬게 하는 등 고된 노역을 강요했다.


그 때문에 쇠약해진 동료가 죽자

하멜 일행은 마침내 탈출을 결심.

 

“여수에 내려온 이후 어떤 수령은 할 일도 없는데

우리를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마당에 세워 놓았다.

또 어떤 수령은 자기가 쏜 화살을 하루 종일 줍게 했다.

우리가 항의하자 그는 더 힘든 일을 시키겠다고 협박했다.


말 그대로 고역이었다.

결국 그 고생을 참지 못하고

동료 부르트가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비록 모험으로 끝날지언정

우리의 운명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결론.”

하멜 일행은 그때부터 세심하게 탈출 계획을 세웠다.


장사를 하여 돈은 마련했고,

선원들을 통해 일본으로

가는 항로를 알아냈다.


이윽고 준비가 완료되자 하멜은 멀리 있는 섬에 가서

면화를 구입해 오겠다는 구실로 조선인 친구에게

두 배나 비싼 값을 치르고 큰 배를 한 척 구입했다.


출항 전에 순천에 억류되어 있던 일행 중

2명이 좌수영에 와서 탈출에 합류했다.


1666년(현종 7년) 9월 4일, 밤이 이슥해질 무렵

하멜을 비롯한 8명의 억류자들이 은밀히 배에 올랐다.

목적지는 일본의 나가사키였다. 출발시간이 늦은 것은

주변 사람들을 방심시키기 위해 한데 어울려 술을 마신 때문.

 

이윽고 하멜 일행은 좌수영 수군의 삼엄한 경비를 피해

여수 해안을 벗어나는데 성공했다. 다행히 순풍이 불어

추격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나흘 동안 쉼 없이 동남쪽으로

항해하던 그들은 9월 8일 마침내 일본의 고토 섬에 다다랐다.


그들은 고토 도주의 배려로 9월 13일 밤

나가사키 데지마 섬 상관 입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5척의 네덜란드 선박을 발견한 하멜일행.


조선에 억류된 지 무려 13년 만에 보는 고국의 배.

그 동안 36명의 표착자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는 16명,

탈출에 성공한 사람은 8명이었다. 9월 14일 아침, 하멜 일행은

데지마상관에 들어가 동인도회사 동료들의 환영을 받았다.


10월 25일 그들은 나가사키 당국에 출두하여

억류 기간 동안에 있었던 일을 심문 받았다.

나가사키 부교의 심문은 구체적이고 치밀했다.


심문내용은 스패로 호크호의 규모, 항해 목적,

난파 경위 질문 11개항, 조선생활에 관한 7개항.

조선 군사·경제·풍습·종교에 관한 7개항,

조선의 대외관계에 관한 6개항,

탈출 경위와 조선의 입장에 대한 내용 13개항

등 무려 54개항에 달한다.


하멜 일행은 조선 사정을 매우 구체적으로 증언했다.

제주도는 섬 둘레가 15마일이며, 육지까지 10~12마일

제주에서 서울까지는 90마일 정도인데 14일 소요거리.

 

더불어 스패로 호크호의 선원은

전원 네덜란드인으로 동인도회사 소속이고

기독교인은 실종된 제인스 뿐인 사실도  밝혔다.

.

지리한 심문이 끝난 다음에 하멜 일행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란 꿈에 부풀었다.

에도 막부에서는 이들을 1년간 데지마 억류 결정.


그로 인해 하멜은 한 달 뒤인 1666년 10월 1일

동인도회사의 선박 7척이 바타비아로 출발하는

장면을 망연자실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1년 동안 하멜은 데지마상관에 머물며 13년 동안

조선에서 겪었던 일을 정리하여 보고서를 만들었다.

 

에도 막부는 왜 하멜 일행을 즉시 풀어주지 않았을까?


현재까지 남아있는 막부의 외교문서집 《통항일람》에는

막부에서 조선 조정에 탈출자들이 기독교도인지 아닌지를

정중히 묻는 문서만 남아있는데 조선왕조실록 현종 7년과

8년 기록에는 당시 막부에서 '하멜 일행의 억류사실에 대해

조선 조정에 강력하게 항의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그들의 억류와 탈출 과정이

조일 양국의 외교 분쟁으로

비화했던 것이 억류의 요인.


당시 쓰시마 번에서 파견한 사신 도치바나는

조선 측 즉의관 김석주에게 아란타(네덜란드)가

자국에 오랫동안 곡물을 바쳐온 속국인데 그 나라의

백성을 일본으로 보내지 않는 까닭을 질타했다.


아울러 양국이 을미년에 약조를 맺고

표류한 배는 서로 통보하기로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않고 13년 동안

억류한 처사를 따져 물었다.


김석주는 억류자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

아란타 백성인지 알지 못했다고 변명했다.


그러자 도치바나는 박연으로 개명한

벨테브레의 존재까지 들먹이며 조선을 압박

그들은 조선의 내정을 손바닥 보듯 읽고 있었다.

.

일본은 당시 하멜 사건을 기화로 당시 21척으로 제한되어 있던

무역선의 수량을 늘이고 동래 왜관의 이전을 성사시키고자 했다.

한데 왜인들의 속셈을 꿰뚫어보고 있던 김석주는 과거 제주도에

표착한 벨테브레를 왜관에 인계하려 했을 때 인수를 거부했던

전례를 내세우며 일방적으로 회담의 종결을 선포해 버렸다.


그와 같은 정치적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에도 막부는 1간 하멜일행의 귀국을 허용 안한 것.


조선과의 외교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은

1667년 10월 23일자로 하멜 일행 출국을 허락.


1년 만에 자유의 몸이 된 선원들은 조선 억류기간 동안

밀린 임금을 지급받기 위해서 하멜이 작성한 보고서를

마차이케르 인도네시아 총독을 통해서 회사에 제출했다.


하멜의 보고서는 시중에 유출되어

1668년 《하멜표류기》란 이름으로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에서 출간되었고,

이듬해 또 다른 판본이 암스테르담에서 출간.


이 책은 1670년 프랑스 파리에서 미뉘톨리 신부에 의해

불역판이 간행되었고, 이듬해인 1671년에는 독일어로 번역.

1704년 영국 런던에서는 존 처칠에 의해 영역판도 출간되었다.


그때까지 동방에 있는 은둔의 왕국 코레아는

유럽인들에게 겨우 이름만 알려져 있었을 뿐이었다.

그들은 하멜표류기를 통해 조선의 정보를 얻었던 것이다.

.

당시 하멜의 보고서를 받아든 동인도회사에서는

그 안에 담겨 있는 정보를 신중히 검토한 끝에

조선과의 직교역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1년 후인 1669년에는 새로 완성한 1천 톤 급

대형 상선의 이름을 코레아호로 명명하기까지 했다.

조선과의 교역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동인도회사는 조선과의 교역 추진에 앞서 현지에 억류된

선원 8명을 송환하기로 결정하고 에도 막부에 중재를 요청.


이에 따라 막부에서 조선에 억류 선원을 돌려보내 달라고 요청하자

예송논쟁으로 골치를 썩이던 조선은 문제를 제기 않고 제안을 수락.


그 결과 1670년 2월 조선 잔류를 선택한 요리사 얀 클라슨을 제외한

7명 선원이 석방되어 바타비아에서 대기하던 하멜 일행과 함께 귀국.

그후 하멜은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1692년 고향 호르큄에서 사망했다.


1669년, 동인도회사는

조선과의 직교역 추진을 위해

코레아호를 바타비아로 출항시켰다.


동인도회사 출항일지에는 네덜란드를 출발한 코레아호가

1670년 4월 2일 바타비아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와 동시에 바타비아 상관장에게 조선과 직교역 추진 명령.


그러자 에도 막부에서 반발했다.

그들이 조선과 직접 교역하겠다면

데지마상관을 폐쇄할 것이라고 협박.

 

현실적으로 일본과의 교역이 수입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동인도회사는

막부의 대응에 굴복하여 조선과 접촉 포기.


그리하여 동인도 회사가 조선과의 교역 목적으로

건조된 코레아호는 코레아를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

그 결과 중국 중심 동북아시아 질서가 와해되던

17세기 무렵에 유럽과 조선의 만남은 좌절되었고

일본은 데지마 상관을 통해 유럽 문명과 교류 독점.


이는 18, 19세기로 이어지던

서구 열강의 세계체제 속에서

난학과 양학을 섭렵했던 일본이

조선, 중국에 앞서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 만난 조선인에 대한 기록 - 하멜표류기

처음 만난 조선인에 대한 기록 - 하멜표류기

하멜 표류기 1653.8.15~ 

               서양인 최초의 조선 귀화인.,박연(벨테브레)


..............박연(벨테브레)...........

조선 인조 때 네덜란드에서 귀화한

박연(Jan J. Weltevree, 벨테브레이).

귀화자 그를 시조로 하는., 원산 박씨.


말년에 70세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는 벨테브레,

조선 최초의 서양인 귀화자(정묘효란 당시 41세).


박연 일행3명은  일본으로 가던 중 조난당해 제주에 상륙.
조선은 이들을 왜관으로 보냈으나 자기네 사람이 아니라며 거부.
1636(인조14)년 정묘호란으로 어수선해지자 조서에 억류된 표류자들.


조정은 이들을 훈련도감에 배치. 무기제작을 맡긴다.
병자호란 전란 중에 일행 둘마저 죽고 홀로 남은 박연.
1653년 하멜 일행이 표류하오자 통역관으로 파견된 그.


박연은 하멜 일행과 고향 얘기를 나누며 펑펑 울었다.
하멜이 같이 탈출하자고 권유하지만 현 상황이 안좋아

박연은 표류된 하멜 일행에게 조선에 남아 있기를 권유.


하멜이 몇차례 고향에 함께 돌아가길 청했지만

박연 -"날아가지 못할거 같으면 꿈도 꾸지마라!"

결국, 박연은 조선에 홀로 남아서 여생을 마쳤다.


박연은 조선에 1남1녀를 두고 네덜란드에도 자식이 있었는데

1991년 그의 후손이 한국을 찾아와 후손을 찾으려 했으나 실패.


한 역사학자가  노인을 찾아가 박연의 후손이냐 묻자 화를 내며

쫒아냈다고 하는데 후손이어서 그런건지 사람들이 자꾸 찾아와서

 귀찮아서 그런건지 알 수 없지만 박연의 후손은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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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나는도다 - 버진!!! 배꼽 빠질 뻔 했습니다. ㅎㅎㅎㅎ 


탐나는도다.

MBC 토,일 오후 7:55~

(16부작2009.09.27 종영)


드라마 실제 모델.,박연.


17세기 영국인 처연 윌리엄이

탐라도(제주도)에 표류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유쾌하게 그린 드라마.


[역사 속 다문화 35] 조선 최초 서양인 ‘박연’ 

‘탐나는도다’ 서우-황찬빈 멜로 예고..수중키스-만찬까지  

조선시대 - 제주.,'송악산 ~ 용머리해안'. 

하멜 표류기::서양인 최초의 귀화인으로 알려져 있는 네델란드인 얀 얀스 벨테브레 (Jan Janse Weltevree), 박연 

조선시대 글로벌 로망스 &gt;탐나는도다&lt; 촬영 장면 살짝 공개! 

드라마 탐나는 도다 

겨울제주, 하멜표류지 하멜상선전시관 

[ 역사 ] 조선시대 , 최초의 귀화인 &quot; 박연 &quot; 

강진여행/하멜표류기가 한눈에 볼 수 있는 곳 하멜기념관 

[ 역사 ] 조선시대 , 최초의 귀화인 " 박연 " 

[ 역사 ] 조선시대 , 최초의 귀화인 &quot; 박연 &quot; 

[ 역사 ] 조선시대 , 최초의 귀화인 " 박연 " 

하멜 표류기, 하멜 전시관 -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하멜은 왜 머나먼 조선에 왔을까? 

역사저널 그날 E53.141129 &quot;네덜란드 청년 하멜 조선에 표류하다&quot; (하멜표류기/효종) + 신병주 교수 &gt;조선과 만나는 법&lt; 

[한문화외교사절단]하멜표류기 그 비하인드스토리 

[JEJU MICE][제주를 보다] 8. 350년 전 네덜란드와 코레아의 운명적인 만남, 하멜 기념비 (하멜 표류기) 

(사진) 하멜표류기의 고장 강진 병영 

강진 병영

(사진) 하멜표류기의 고장 강진 병영 

하멜기념관(전남 강진)-'하멜표류기'를 통하여 서양에 우리나라를 최초로 알린 인물 

강진 하멜기념관

[강진여행]전라병영성지 인근의 하멜기념관에서 조선을 서양에 최초로 알린 하멜표류기의 저자 핸드릭하멜을 만나다. 


제주도 가볼만한곳 제주 산방산  

산방산 용머리해안

제주도올레 제10구간*하멜표류지용머리-마라도 잠수함-송악산(松岳山180m)*2,011.1.16.일* 

산방산-용머리해안과 하멜표류기 

『하멜 기념관』  

제주도.,하멜 상선 기념관

[제주도]제주 해안도로 드라이브 코스(5)(사계해안도로;산방산(보문사,산방굴사)--<이중섭거리--<서귀포항--<하멜기념관, 용머리해안 지질(2015.3.4 

[2006년12월] 제주도 가족여행 둘째날 - 용머리해안 


하멜상선전시관 서귀포 스페르베르호 - 제주도 여행지 추천 

[제주도여행] 기암절벽 용머리 해안/ 하멜상선전시관/ 산방산랜드 - 바이킹 

내부전시실

제주도 하멜 상선기념관 

제주도 하멜 상선기념관 

제주도 하멜 상선기념관 

하멜기념관 

하멜기념관 

강진가볼만한곳, 전라병영성, 하멜표류기의 주인공, 하멜 기념관 

제주 나들이~ 여덟쨋 날~ ( 1 ) : &apos; 제주 올레길 10코스&apos; 중...&apos; 화순항 &apos; =&lt; &apos; 사구 언덕 &apos; =&lt; &apos; 용머리 해안 &apos; / 하멜 상선 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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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제주군 안덕면 사계리.,하멜 기념비

하멜 기념비 뒷면

 

...................하멜......................
하멜 표류기를 쓴 네델란드 선원(?~1692.)
이조에 관한 서양인 최초 저술 '하멜 표류기.'

1653년(효종 4) 1월 배를 타고 네덜란드를 출발
바다비아를 거쳐 타이완에 도착한 다음 그해 7월

64명의 선원과 함께 무역선 스페르웨르호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향해 가던 도중 폭풍을 만나
8월 제주도 부근에서 배가 난파되어 일행 36명이 표류.

제주도 산방산 앞바다에서 제주목사 이원진의 심문을 받고
이듬해 5월 한양 호송후 훈련도감에 편입되어 잡역에 종사.

그뒤 1657년 강진의 전라병영,
1663년(현종 4) 여수 전라좌수영
그곳에 배치되어 잡역에 종사했다.

1666년 9월 7명의 동료와 함께 탈출,
일본 나가사키 거쳐 1668년 본국 귀환.
귀국 후 13년간 억류 경험을 바탕으로 쓴
'하멜 표류기'는 유럽인의 주목을 끌었던 책.

이것은 우리나라를 서양에 소개한 최초의 책
1980년 한국과 네덜란드 공동출연으로 세운 비.
남제주군 안덕면 사계리 산방산 해안에 하멜 기념비.
.......................................................................

 

해변에 위치한 하멜호 (남제주군 안덕면 사계리)

하멜 기념비 아래 해변가

하멜 기념전시관(하멜 호)

 

헨드릭 하멜의 제주 표착 350주년 기념일인 8월16일 당시

하멜 일행이 타고 왔던 상선이 ‘바타비아호’를 모델로 재현

 

길이 36m, 폭 8m, 높이 11m(돛대높이 32m)

하멜 상선은 5층 구조이며, 2층에는 전시실

 

하멜호(하멜 기념관)

1653년 7월30일, 하멜일행 제주도 표착

 

효종4년(1653년)하멜일행이 탄 네덜란드 무역선 스페르웨르호

풍랑으로 난파 64명 중 36명이 중상을 입은채 대정 해안에 표류.

 

네델란드 무역선이 하멜 일행 64명을 태우고

타이완에서 나가사키로 향하던 '스페르웨르'호

1653년 8월 16일 풍랑을 만나 난파, 제주도에 표류.

 

이때 일행 64명중 28명이 사망하고 36명만 살아남는다.

이들은 이때부터 조선 땅에서 13년 세월을 보내게 된다

 

 

1653년 8월21일, 난파선 도둑에 대한 처벌

 

1653년 8월 21일 제주 관헌들은 하멜일행이 보는 앞에서

난파된 스페르웨르호 물건을 훔친 조선인에게 형벌을 집행

 

관헌들은 하멜 일행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이들을 보호하였다.

다음날 제주 목관으로 이동, 제주 목사 이원진을 대면하게 되며

그는 광해군이 유배되었던 집에 하멜 일행의 거처를 마련해준다.

 

 

1654년 5월 , 탈출에 실패한 하멜과 하멜 동료들.

1654년 5월 하멜 일행 중 6명이 어선을 훔쳐 탈출시도

조선 관헌들에 붙들려 실패하고 이때부터 감시가 심해진다.

 

탈출을 시도했던 6명은 형벌로 곤장 25대씩,

그중 한명은 후유증으로 인해 사망하게 된다.

 

 

1654년6월, 한양으로 압송된 하멜과 하멜의 동료들.

1654년 6월 하멜 일행은 현종을 알현하기 위해 한양으로 이송.

하멜 일행은 4척의 배에 태워졌고 두다리와 한쪽 팔은 배에 묶여 갔다

 

이는 하멜 일행이 배를 탈취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는데,

훗날 하멜은 보고서에서 묶이지 않았다면 탈출했을 것이라고 서술

 

 

1654년 6월26일 하멜일행은 조선의 국왕 효종을 알현한다,

이들은 일본으로 보내줄 것을 간청했지만 효종은 북벌계획

 

"외국인은 국외로 보내는 것은 이 나라의 관습이 아니므로

여기서 살아야 하며 대신 조선이 너희들을 부양해 주겠다"

 

하멜이 표류해왔을 때 통역자는 박연(朴淵.1595-?)이었다.

그는 하멜보다 앞서 1628년에 일본으로 가던 중 제주에 표착

귀화해 조선 여자와 결혼, 남매를 두고 완전히 이 땅에 정착.

 

박연의 네덜란드 이름.,벨테브레.

 

박연이 조선 땅에서 수행한 공로는 매우 크다.

훈련도감에서 근무한 박연은 병자호란 때 출전

명나라 홍이포의 제작법과 조작법을 가르쳤다.

 

당시 효종은 북벌정책을 추진하며

장수 이완에게 실무책임을 맡겼고,

박연으로 하여금 그를 돕게 하였다

 

1656년 전라도 병영 제초작업

조선시대.,하멜 표류기. 

 

1663년9월3일, 여수 순천 남원에 분산 수용

1666년 9월 하멜은 밤에 읍성(邑城)을 탈출해

해변에 있는 배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한다.

 

1668년 7월, 하멜은 꿈에 그리던 고국 네덜란드로 귀국

 

1666년 9월8일, 일본 연안에서 나가사끼로

1666년 일본으로 탈출후의 하멜의 흔적 설명서

하멜과 동료

하멜이 타고왔던 스페르웨르호(sperwer)와 범선의 구조

하멜 육필 보고서, 제주 하멜기념관

하멜 표류기, 1718년 하멜 저, 숭실대 박물관

 

하멜표류기는 네덜란드인 H.하멜이 썼다.

《난선제주도난파기(蘭船濟州島難破記)》

 

한국의 사정을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으로서

1668년 네델란드어 ·영역본 ·불역본 ·독역본이 발간

일본 나가사키로 도망하여 1668년 7월에 귀국하였다.


1653년 8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선 스페르웨르호.
나가사키 항구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남제주에 표류
산방산 용머리 해안가에 닿은 64명 중 생존자는 36명

제주목사 이원진은 객사로 데려와 탕 한사발씩을 대접.
하멜 일행은 독약인줄 알고 대성통곡을 하며 마셨단다.
이들은 광해군이 유폐되었던 바로 그 초가에서 지냈다.

"양반이나 평민이나 교육열이 대단.

아이들은 밤낮없이 앉아서 글을 읽는다.

 

그렇게 어린 소년들이 현인(賢人)들의

책을 읽고 이해한다는 게 놀랍다.”

파란 눈 남만인(南蠻人)에게 17세기 조선은 신기했다.
조선 조정에서 통역관이 내려오자 하멜은 깜짝 놀랐다.
그는 같은 네덜란드 사람인 얀 벨테브레(한국명 박연).

 

하멜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으나

'박연'의 이야기를 듣고 낙담했다.

"너희들이 하늘을 나르는 새라면 몰라도

외국인은 나라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다.

지내다 보면 정 붙이고 살만한 나라이다.”

조선 여자와 결혼해 남매를 둔 박연은 이미 반 조선인.
서울로 압송된 하멜 일행은 효종의 심문을 직접 받았고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북벌정책에 중요하게 쓰여질 계획.

그러나, 실제로는 잡역에 동원되거나 구경거리에 불과.
그러던 중, 하멜 일행이 청나라 사신에게 구명을 요청
이 외교적 사건 이후 이들에겐 고난의 유배생활이 시작.

하멜 일행은 전라좌수영에서 하루 170m의 새끼를 꼬았다.
이들이 견디지 못하고 13년간 억류생활 끝에 일본으로 탈출
이때 밀린 임금을 받기 위해서 쓴 하멜의 보고서가 '하멜표류기’

서양인에 의해 최초로 씌어진 '조선견문록’
이 책은 '지리상 대발견' 시기라 비상한 관심.
1년 뒤에 프랑스판, 독어판, 영어판 속속 출간.

1692년 62세로 세상을 떠난 하멜은 독신.
조선에 두고 온 아내를 잊지 못해서였다.


.......연도별 기록...........
1653년 8월 16일 제주 표착
1653년 8월 21일 대정현 관아로 이송
1653년 8월 22일 제주목 관아로 이송

1653년 10월29일박연(벨테브레)와 면담
1654년 6월초 선박이용 제주항 출발
1654년 6월26일 한양도착

1656년 3월초 전라병영(강진)으로 이송
1663년 2월 생존자 22명을 여수.남원,순천으로 분산
1666년 9월3일 탈출.9월13일 일본 나카사키 도착

1667년 12월18일 나카사키 출발
1668년 7월 20일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도착
.................................................

 

유럽인들에게 모험과 황금의 시대였던 17세기 중엽
그들에게 아시아는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무역거점
늘 새로운 항해의 대상이고 개척의 대상이었던 아시아.

당시 네델란드 동인도회사는 아시아 몇몇 국가들과 교역
일본도 그중 하나라 36명의 네델란드인들을 일본에 파견.
우선, 동인도 회사 지사가 있는 일본으로 보내기로 결정

1633년 네델란드 탤슨항을 출발한 이들중 22세인 하멜.
이들은 일본의 나가사끼로 향하던 중 폭풍우를 만나 표류
이들을 발견한 제주목사 이원진은 이들과의 대화에서 실패

이 사실을 한양 조정에 알리고 조정에서는 통역관을 파견.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오기 22년전 왔던 네델란드인 박연
그 역시 네델란드를 출발 일본 동인도 지사로 가던중 표류.

결국 조국 네델란드로 돌아가지 못하고 조선에 귀화.
박연(벨테브레)은 조선 훈련도감에서 군사훈련을 담당
하멜일행은 박연을 통해 조선 임금에게 본국 송환을 요구

박연은 조선에서 벗어나기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박연은 왕(효종)에게 이 같은 사실을 자세히 보고
효종은 이들을 한양의 조정으로 불러 들여 만난다.

하멜 일행은 한양으로의 긴 여행길에 오르게 되는데
하멜은 한양으로 가면서 여수,순천 등을 들르게 된다.
표류기에 조선 지명을 네델란드식 발음으로 적고 있다.

드디어 한양에 도착한 이들은 효종 앞에 무릎 꿇고
박연의 통역을 통해 하멜 일행을 상대로 심문을 한다.

효종은 이들이 조선보다 작은 나라에서 왔고
수많은 상선이 있다는 말을 듣자 귀화를 종용.
병자호란 이후 추진해온 북벌정책에 쓰려한다.

북벌정책을 은밀히 추진해 온 효종.
이들이 지닌 신무기 제조기술을 활용
청나라 정벌의 꿈을 키워나가려고 한다.

효종은 이들에게 식량과 벼슬을 주고 군사 훈련에 참가시켰다.
또한 이들에게 이름도 지어 하사했는데 남북산, 남이안 등이다.

그러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잊지못한 남북산과 남이안
청나라 사신의 행렬로 뛰어드는 바람에 난처한 입장이 돤다.
조선에 외국인을 억류한 사실을 안 청 사신에게는 뇌물로 무마.

효종은 그 사건 후 이들을 전라도로 유배한다.
이들이 유배지에서 결혼하고 신혼생활을 했다.
그러나, 하멜 표류기에는 그 사생활 기록이 없다.

이는 본국으로 돌아가 자신이 쓴 일지를 토대로
보상금을 더 많이 받아 내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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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 표류기는 조선에 어떤 파장을 끼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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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3년 3월 여수 순천 남원으로 유배된 하멜 일행 탈출로.
섬진강이 끝나는 광양 남해 섬들은 하멜 일행이 떠돌던 곳.
유배된 후에도 효종의 배려로 매달 쌀 50근씩 배급 받았다.


그러나,그것만으로 모자라 좌수사의 허락을 받아 구걸로 연명.
닷새 장터를 떠돌며 서툰 말로 모험담 들려준 댓가로 옷감과 식량.

그렇게 모은 돈으로 어민으로부터 낡은 배 한척을 구입
여수 앞바다 섬들을 떠돌며 본격적으로 구걸하러 다녔다.
그들은 낡은 배를 수리해 장거리 항해에 알맞게 고쳐갔다.

그리고, 조류, 바람, 해안순시선, 항로, 등등 해양조건을 관찰
하멜 일행을 아무도 수상하게 여기지 않을 무렵 일본으로 탈출.
노를 젓는 돗단 배로 하루 반나절 만에 나가사키 항에 도착했다.

1653년8월 16일 동인도 회사 무역선 스패로우 호오크호 표류기.
1666년 9월에 전라좌수영 소속의 하멜 이하 8인이 읍성을 탈출
나가사키 경유 1688년 7월 네덜란드에 귀국 13년간 이조 체험기

조선에 억류생활 중에18 명이 죽고 살아남은 16명중 8명이 탈출.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화란에 무사귀국한 하멜 일행은 불과 6 명.
19세기 초반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 입국 전에 읽던 참고서이다.

하멜의 일행들이 제주도에 도착한지 얼마 안되어 발생된 사건.
표류선에서 떠내려온 물건을 가져간 주민들이 관아에 붙잡혔다.
현감은 도둑도 아닌 주민을 도둑으로 몰아 곤장 30~40대를 명령

하멜이 주민들에게 포도주를 주자 신기해 하고 좋아했다는 기록.
그당시 200 년 앞선 서양문명을 처음 접한 주민들은 신기했던 듯.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본의 아니게 상륙해 억류생활을 하기 시작.

신임 목사는 표류인들을 각종 방법으로 구박하기 시작.


목사가 활쏘면 화살을 주워오게 하기, 밤새 할일없이 보초세우기.
곤장 맞다가 발가락이 빠진 광경을 직접 목격한 바 있는 화란인들.
표류인들은 마음대로 외출도 할 수 없었고 밤낮으로 감시를 받았다.

'압박과 멸시 속에 사느니,

죽음 무릎쓰고 탈출을 시도.'

그러나, 표류인 6명은 주민의 배를 훔쳐 타고 도주하다 붙잡혔다.
그들은 관아로 압송되어 옥살이 하다가 각각 곤장 25 대를 맞았다.
여기서 화란인 6명은 마지막 생존자이며 여러 번 탈출 시도 끝 성공.

그 표류기에 강빈 옥사사건에 곧은 선비 김홍욱이 맞아 죽은 일.
남편을 살해한 여자나 주인을 살해한 노비가 고문 끝에 죽은 일.
조선시대에 옥살이하며 목격한 아전들의 비리까지 상세히 기록.

 

'당시 곤장은 무릎 아래까지 옷 벗기고 매를 치는 형벌.'

여인들도 옷 벗긴 채 형벌 받는 일이 비일비재한 듯.
조선에서는 재를 버리면 곤장 30대, 똥을 버리면 50 대.
하여, 집안 쓰레기를 버린 죄로 여자들이 곤욕을 치룬 듯.

"엉덩이와 허벅지를 교대로 내리쳐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록 매질.
고통을 못견뎌 형틀에 묶여 몸부림 끝에 엄지 발가락이 빠질 지경."

'하멜보다 26년 먼저 이조에 들어와 귀화한 화란인 <박연>.'

그가 통역했고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직후
한창 국력이 곤궁할 때라 하멜 일행은 한반도에서 고생했을 듯.
하멜이 동인도 회사 상판이 있는 일본으로 보내달라 간청했다.

일단 일본으로 가면, 고국인 화란으로 돌아갈 길이 있기 때문.
효종은 하멜을 임진왜란 원수의 나라 일본에 보내줄 리 만무.

또 병자호란 이후 암암리에 북벌을 계획했기에 하멜 일행 억류.
하멜 일행으로부터 서양의 선진문명을 전수받으려 했던 것 같다.
그것도 모르고 청나라 사신을 만나 일본에 보내달라던 하멜 일행.

그 죄를 물어 청나라 사신을 접할 수 없는 곳으로 하멜일행을 유배.
효종이 전남 장진에 유배시킨 하멜 일행은 그로부터 7 년후에 탈출.

박연과 하멜은 암스테르담에서 바타이유를 거쳐서
나가사키로 향하다 표류하였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하멜 일행은 조선 체류 중 끊임없이 일본 행을 꿈꾼다.
결국 배를 구해 규슈의 히라도(平戶)를 거쳐 나카사키
일본은 하멜일행이 화란인 임을 알고 친절하게 대한다.


13년 간 억류한 조선과 단적으로 비교가 되는 조치.

이들이 나가사키에 당도했을 무렵 그곳엔 화란배 다섯척이 정박.
이들은 화란 상관(商館)에 도착해 지휘관 빌렘 볼거에게 안내된다.
그리하여 꼭 13년 28일 만에 네델란드 암스테르담에 귀향하게 된다.

당시 나가사키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서방을 향해 열려진 창구
1543년 포르투갈 상인이 일본에 도착, 일본은 서양 문명에 눈뜬다.
1549년에는 선교사 프란시스코 사비엘이 가고시마(鹿兒島)에 첫발.

17세기 중엽 도쿠가와 바쿠후(德川 幕府)에 의하여 기독교 탄압정책.
주목할 것은 쇄국정책을 쓰면서도 서방과 해상무역을 통한 대화정치.
오직 장사만 하며 포교활동을 하지 않은 화란인들에게 일본 거주 허용

서양 의술, 천문, 지리, 생물, 지리학 다양한 근대 학문을 보급받는다.
이 무렵부터 쇄국정책만 일삼던 이조 국력은 쇄퇴하고 일본은 부흥한다.
일본은 아시아의 해상왕국으로 도약하고 이조는 국제사회에서 고립된다.

하멜 표류기는 그당시 조선의 역사 풍습 문화 사상을 알수 있는 기록.
한반도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서양에 처음 알린 기록.

하여, 훗날 한반도는 이 한 권의 책으로 인해 국제사회에서 고립된다.
조선 말기부터 구한말 천주교 박해로 하멜 표류기는 선교사의 지침서.
조선은 천주교 신도까지 목에 칼을 씌우고 곤장을 쳐서 박해를 했던 탓.

조선은 하멜 일행 억류를 통해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잘못을 범했다.
하멜 일행의 표류 사건은 조선이 서양 문명을 받아들일 절호의 기회.


당시 200년 앞선 서구와 교류했으면,

현재의 우리나라는 어떻게 변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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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 일행이 조선에 표류한 동안

그당시 조선시대 기록 속에 남아있는

그들의 생활상은 하멜표류기와 다르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1653년 8월 16일 스페르웨르호가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좌초 된 곳은 대정읍 신도2리 대야수포(속칭 멜케 모래밭)

이익태 목사(1694~1696년재임)가 지은 ‘지영록’에 의하면

하멜 표착 당시에 재임했던 이원진 목사는 다음에 부임한

이괴 목사에게 이 내용을 전했고 이괴 목사는 다음 목사인

이익태 목사에게 전하자 관아 문서를 토대로 ‘지영록’에 첨부.
.

‘時 牧使 李元鎭 判官 盧錠 大靜縣監 權克中 癸巳 七月二十四日 西洋國蠻人 췬듥얌신 等六十四名同乘一船致敗 于大靜縣地方遮歸鎭下大也水沿邊 ?死者二十六名 病死者二名 生存者三十六名 所着衣黑白赤三色相雜聚首相向 或踞或立以書問…’.

‘지영록’ 130페이지 기록 속 '서양국 표인기'를 해석하면,

‘당시 목사는 이원진, 판관은 노정, 대정현감은 권극중이다.

계사년 7월 24일 서양국 만인 핸드리크얌센 등 64명이 탄 배가

 

 

대정현 차귀진 밑 대야수 연변에서 부서졌다.

익사자 26명 병사자 2명 생존자가 36명이었다.

옷은 검정, 흰색, 빨강 세가지 색이 서로 섞였다.

 

 

머리를 맞대고 마주하기도 하고

걸터앉기도 하고 서기도 하여

글로서 물었더니.,'

 

 

하멜일행의 효종 알현

 

 

 

 

 

 

 

한양에 도착후 우선 사역원에서 거처했으나,

도착 직후인 6월27일 비변사에서 다음과 같이

하멜 일행에 대해 조선은 새로운 조치가 취했다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효종 5년 (음력) 5월 13일.

 

아뢰어 말하기를,

 

“신 등이 빈청에 와서 만나 박연을 불러 물었더니,

즉 이 사람들은 한 곳에 함께 있도록 해서는 안 되니,

각기 보증인에게 주어 서로 여염집에 흩어져 있게 하고,

때로는 왕래하면서 서로 보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전에 결정한 바에 따라 훈국(訓局, 훈련도감)에 이름을 예속시켜

박연으로 하여금 장관(將官)을 정해 거느리게 하여 기예를 교습시키고,

료포(料布. 일종의 급료)는 훈국에서 포수(砲手)의 예에 의해 지급하며,

 

보증인에게 주기 전에는 그대로 사역원에 머물게 하여

박연으로 하여금 줄만 한 사람을 찾아보도록 한 연후에

찾는 대로 보내야 마땅합니다.

 

여러 사람의 의논이 이와 같으니

이로써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이 기록에서 중요한 점은

그들을 보증인에게 넘겨주고

민가에 흩어져 거쳐하게 한 점

 

이는 제주도 탈출 사건과 같은

재발을 방지하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보증인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까지 사역원에 머물게 한다는 방침도 정해졌다.

.

하멜보고서에는 서울에 도착해 2~3일은 동료들과 함께 머물고,

그후 한집에 두세 명, 혹은 네 명씩 나뉘어져 중국에서 도망쳐와

한양에 사는 중국인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중국인은 중국어 통역사들.

 

 

 

'하멜표착기'.,지영록(地瀛錄),

서양국표인기(西洋國漂人記)

 

하멜 일행이 박연에게 일본으로의 송환을 요청했을 때,

 “한양 도감(훈련도감)의 포수로 입속하는 것만 못하다.”

라고 박연이 회유한 것이 그대로 실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1627년 박연이 조선에 표착후,

조정에서 신뢰했음을 뜻하는 것

이미 박연은 조선인으로 동화된 것.

  

 조선시대 호패

 

하멜 일행은 이때부터 조선인으로서의 삶이 시작된 것

“남북산(南北山)” “남이안(南二安)”이라는 조선식 이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효종 6년 3월15일조에 의하면,

서울 체재 중에 하멜일행 중 2인이 탈출 사건을 일으키는데,

그들의 이름이 바로 “남북산(南北山)”과 “남이안(南二安)”이다.

 

조선시대 서양인을 남만인(南蠻人)이라 불렀기에

조선에 귀화한 서양인에게는 남씨 성을 부여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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