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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明成皇后)

작성자선경나라|작성시간17.07.20|조회수1,248 목록 댓글 0

 조선의 국모 명성왕후


1882년 임오군란 후, 청 세력에 의존했으나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일본에 패한 후에는

러시아를 외교로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 했다.

 

국내정치에서는 민씨척족을 기용해 세도정권을 행했으며,

점진적 개화시책을 통해 급진파 개화정책에 제동을 걸었다.

 

1895년(고종 32) 10월 8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는

일본의 조선병합에 가장 큰 장애가 되었던 명성황후와

그 척족 정치세력을 제거할 목적으로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명성황후는 일본인 20 낭인들에 의해 옥호루에서 살해된 뒤

경복궁 황궁 밖 송림에서 시신까지 불살라지는 최후를 맞았다.

일명 "민비"는 대한제국 황후가 되기 전, 조선 왕비의 약칭이다.

 

1894년 9월 10일 인쇄. 발행.

일본에서 그린 공식 초상화.

명성황후가 아니라 명성왕후다

르몽드 지에 소개된 명성왕후

독일 지에는 궁녀라고 나온다.


명성왕후 평민복 초상화 진위 여부 '논란'

명성왕후 평민복 초상화 진위 여부 '논란'

명성왕후의 실제 얼굴..실지 명성왕후 초상화

블란서에서 발견된 명성왕후 초상화

명성왕후 생가(2014년 12월 28일)

                           '명성왕후 생가'에 소개된.,초상화

명성왕후생가!!

명성왕후 생가

여주여행.. 명성왕후 생가터 & 감고당

여주여행.. 명성왕후 생가터 & 감고당

여주.,'명성왕후 생가' 감고당.

명성왕후생가!!

명성왕후와 잃어버린 얼굴

 

대원군이 실각한 후, 민씨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한 명성황후,

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약)을 맺고 일련의 개화정책을 시행

 

먼저 개화사상가인 박규수(朴珪壽)를 우의정에 등용하고,

대원군 집권 당시 쇄국정책을 담당했던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과

부산훈도 안동준(安東晙), 경상도관찰사 김세호(金世鎬)를 차례로 파면·유배

 

개화를 위해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삼군부(三軍府)를 폐지했으며,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일본과 청에 파견하여 신식무기·공업 등을 학습

 

<조선책략〉의 연미론(聯美論)이 유포되자

1881년 김윤식이 영선사로 청에 갈 때 밀명을 내려

민비는 청에 한미수교를 주선해 줄 것을 비밀리에 요청.

 

또한 개화승 이동인(李東仁)을 일본에 보내어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에게 대미수교 주선 요청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자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 집에 피신해

고종과 비밀리 연락하여 청군을 요청

 

임오군란 후 집권했던

대원군을 청으로 납치해

조선 정국을 다시 장악했다.

 

민씨척족은 이때부터 친청사대(親淸事大)로 기울었고,

개화파의 급진적인 움직임에 제약을 가하기 시작했다.

 

1884년(고종 21)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개화파가 갑신정변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자,

 다시 청의 도움으로 이들을 제거했던 민비와 척족들.

 

1885년 러시아 남하를 우려한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자,

묄렌도르프를 통해 영국과 교섭하는 한편 러시아와도 접촉

 

이에 청과 일본은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대원군 환국을 주선해 민씨척족과 정권다툼을 유도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그 여세를 몰아

조선 정계를 압박하자 민비는 친러정책으로 일본에 대항

일본의 대륙침략 기세가 꺾이자, 친러경향을 더욱 굳혔다.

 

1895년(고종 32) 10월 8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명성황후 척족세력을 제거할 목적으로 김홍집 내각의 일부 세력과

대원군 세력, 그리고 해산이 예정된 훈련대와 일본 정치낭인으로 하여금

황궁을 습격하고 명성황후를 학살하게 한 을미사변(일명 여우사냥)을 일으켰다.

 

명성황후 시해 장면을 묘사한.,에조 보고서.

 

...........................에조 보고서....................................

"낭인 20명이 궁에 쳐들어와서 고종을 강제로 무릎꿇게 만들고
이를 말리는 세자의 상투를 잡아 올려 벽에 던지고 발로 밟았다."

 

"명성황후 옆구리 두 쪽과 배에 칼을 꽂은 낭인들은

시녀들 가슴을 도려내고 명성황후 아랫도리를 벗겼다.

그리고, 낭인들은 돌아가며 강간 윤간 시간을 자행했다."

 

"살아있을 때도 하고 죽어있는데도 계속 했는데
그것을 뜯어 말리는 충신들은 사지를 다 잘렸다."

 

"낭인들은 너덜너덜해진 황후의 시체에

얼굴부터 발 끝까지 차례로  칼로 쑤셔댔다.
그리고, 
황후 시신에 기름을 붓고 불로 태웠다."

...............................................................

 

명성왕후 살해 관련자들

 

일본의 사학자가 이 문서를 발견하고 난후에도

수치스러워 공개를 하지 않았다는.,에조 보고서.

여기에 가담한 낭인 상당수가 지식인이고 유학파.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 옥호루에서 살해된 뒤

황궁 밖의 송림에서 시체가 불살라지는 최후를 맞았다.

 

그녀는 곧 친일정권에 의해 폐비되었으나 곧 복위되었고,

국체가 대한제국으로 바뀐 뒤 명성황후로 추책(追冊)되었다.

세간에 알려진 '민비'는 이름은 고종이 황제에 등극하기 전 호칭

 

민씨와 조선시대 왕의 부인인 왕비를 축약해 부르는 용어

시해후 고종이 황제가 되자 여기에 맞춰 황후로 격상되었다.

경기도 양주 숙릉(肅陵)에 묻혔고, 1897년 청량리 홍릉으로 이장

 

1919년 고종이 죽은 뒤 다시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 홍릉 이장.

1851년 음력 9.25 ~1895년 음력 8.20

.

..............................

..............................

 

'조선 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의 왕비이자  추존황후

'인현왕후 생부' 민유중 후손으로., 아버지 민치록, 어머니 한산 이씨.

경기도 여주시 출신이며, 현재 여주시 나들목 인근에 생가 공원이 있다.

 

고종의 정비로 1871년 첫 왕자를 5일 만에 잃고,

최익현 등과 손잡고 흥선대원군의 간섭을 물리치고

고종의 친정을 유도했고. 민씨 척족들을 기용해 세도정치.

 

처음에는 개항에 미온적이었으나, 점진적인 개화시책을 통해

급진개화파의 개화정책에 제동을 걸었으나 급진개화파에게 고용된

일본인 낭인들에게 암살당한 후, 대한제국이 성립되며 황후로 추봉된다.

 

19 세기 말, 조선은 서구 열강과 동침해야 했던 격변기.

'2015' 을미년은 명성황후가 시해된지.,120 주년이 된다.

일본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을 재조명해 볼 수 있는 시기.

 

을미사변(1895년).

광복(1945년) 70주년,

한일 수교(1965년) 50주년.

 

을미사변은 조선 역사 상 가장 치욕스런 사건 중 하나.

조선왕비를 일본 깡패들이 궁으로 쳐들어와 무참히 살해

멀리서 소식을 접한 외국인들에게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19세기 말 조선은 정치적으로 불안했고 혼란한 시기였다.

명성황후는 조선을 지키려 국모의 역할을 다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의 정치적 갈등이 몹시 심했다.

 

명성황후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엇갈린다.

조선의 국모, 시대의 여걸이라는 긍정적 평가.

일가친척을 국정에 끌어들이고 국고를 탕진한 왕비.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역사적 인식은 조선의 국모가 일본의 만행에 의해 시해

열강들 사이에서 벌인 명성황후 외교술은 타의추종을 불허

 

[펌] 명성황후의 장례식 모습 

조선시대 명성황후 장례식.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일본이 조선에 저지른 온갖 만행의 시작

이후 일본은 우리 한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상흔을 남겼다.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과거 잘못에 대해 전혀 사과도 하지 않고 있다.

 

하여, 을미사변 120주년 당시 사건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사과하지 않는 일본은 지금도 우리에게 위협이 되고 있다.

우경화와 양적 완화 정책으로 정치적·경제적으로 한국을 위협

 

19세기 들어 조선은 혼란의 늪에 빠져들었다.

1800년 정조가 갑자기 서거하면서 어린 순조가 즉위

'순조 장인' 김조순이 정권장악으로 안동김씨 세도정치 개막.

 

1863년 고종이 즉위할 때까지 그 위세를 떨쳤다.

안동 김씨의 등쌀에서 숨죽여 지냈던 흥선군 이하응

둘째 아들을 왕위에 앉히면서 왕족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

 
조선왕조는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추구한 나라이지만

안동 김씨 실정을 목도한 흥선대원군은 왕권 강화에 몰두.

왕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기도 했다 

 

 

 

세자비 간택에 있어 힘이 없는 집안이 우선.

대원군 부인 민씨가 추천한 민치록의 어린 딸.

외척 할 남자 형제가 없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대원군은 둘째 아들 고종에게 민씨의 딸을 점지했고

1866년, 민씨는 16세 어린 나이로 일국의 왕비가 됐다.

이때부터 흥성대원군과 며느리 명성황후의 인연이 시작.

 

고종의 왕비 명성황후는 1851년 세상에 태어났다.

아버지 민치록은 숙종의 정비 인현황후의 아버지인

민유증 5대 직계후손으로 명성황후는 6대 자손이 된다.

 

명성황후는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어려서부터 총명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 총명함은 집안의 친척들의 눈에도 띄었다.

 

대원군의 아내인 부대부인 민씨는

'명성황후 아버지' 민치록이 양자로 들인

민승호의 누나라 왕비 간택에 결정적인 역할.

 
1866년 16살 민비는 15살 고종 왕비로 간택되어 궁에 입성

첫아들은 낳고 5일만에 죽고  둘째아들 척이 대한제국 ‘순종’.

민비가 입궁할 즈음 대원군은 고종을 왕위에 앉히고 섭정을 했다.

 

고종이 20대 성인이 되자 아버지 대신 왕권을 확립

민비가 남편인 고종을 도와 왕권을 찾는데 함께 노력.

 
1873년 민비가 유림의 거두 최익현을 통해 올린 ‘대원군 하야 상소’

고종이 직접 정치를 하고 대원군이 섭정자리에서 물러나라는 내용.

고종이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해 대원군은 정계에서 강제적으로 은퇴.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1882년 임오군란을 이용해 재기에 성공했다.

민비는 군란을 피해 궁을 떠났다가 청군의 힘을 얻어 다시 환궁했다.

그후,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갑오개혁, 1894년 동학농민운동 등 내란.

 
밖으로는 일본, 러시아, 청, 프랑스, 영국, 미국 등 열강들이 눈독.

명성왕후는 절묘한 외교정책을 발휘하며 조선의 운명을 연장시켰다.

특히, 조선을 식민지 화하려는 일본을 서구 열강을 통해 저지했던 민비.

 
이런 상황은 당시 미국 언론에 의해서 확인됐다.

1895년 보도에서 “일본의 조선 합병 계획은 늘 좌절

그 의도가 번번이 막히자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할 계획

 

일본 정부는 '조선의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를 시켜 명성황후 시해

미우라는 일본 낭인(浪人)을 불러 을미년 1895, 음력 8월 20일 거사.

명성황후 시해 15년만에 조선 즉 대한제국은 일본 손아귀에 들어갔다.

 

이후 우리 민족은 나라를 잃고 36년간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1945년 8.15 해방후 대한민국은 1965년 일본과 국교를 맺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을미사변후 우리 민족의 역사는 수난 시대로 접어들었다.

 
현재 일본은 아베 정권이 재집권하며 우경화 움직임이 가속화

일본이 군사제국이 되면, 언젠가 우리나라를 위협할지 모를 상황

이런 상황에서 120년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이라도 밝혀라! 명성황후 시해 사건 

 

 

KBS 드라마 명성황후(2001) 녹화현장사진과 OST (조수미 나 가거든) 

'명성황후'를 일본처럼 '민비'로 부르는 대한민국 (1부) 

조수미/ 나 가거든( 명성황후 주제곡) 

명성황후 시해한 자의 딸이 대통령? 

명성왕후 (2005년 10월)

2005년 10월.,명성왕후

명성왕후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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